♣복음말씀의 향기♣ No3493
5월17일[부활 제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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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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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VBJK1UnH30 (이승화 시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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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진리입니다!>
가끔씩 우리는 거짓 보도, 허위 사실, 헛소문을 접합니다 때로 유명인사들의 거취에 대한 허위사실들이 sns를 타고 순식간에 유포되어 입장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저도 언젠가 한 신자로부터 어떤 신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럴 리가 없는 데’하며, 즉시 전화를 걸어 직접 확인까지 해본 적이 있습니다.
껄껄 웃으시며 '이미 부활해서 삼시새끼 밥 잘 드시고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또 다른 헛소문에 깜짝 놀란 적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존경하는 한 신부님께서 신천지로 넘어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밤잠을 못 이루다가 그 다음 날 아침 교구청으로 전화까지 해서 확인해보니 헛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큰 혼란으로 몰고가는 거짓, 허위, 헛소문들들이 날개를 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때로 이런 그릇된 정보가 부당한 공권력을 등에 업고, 진실인양 공공연하게 유포되기도 합니다. 분명 거짓인데 그럴싸하게 포장되고 편집되어 일반화된 것을, 비판력을 상실한 관용 매체를 타고 진실인양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세상만사, 다양한 사건 사고 들 앞에서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식별력과 정보력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보면 분명 거짓이요 악인데, 사탄의 우두머리인데,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포장해서 진리처럼, 예언자처럼 행세합니다. 아직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니며 선량한 사람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그릇된 지도자들과 사이비 교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근원적, 태생적으로 나약한 우리 인간들입니다. 거짓과 헛소문 앞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존재가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13절)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진리,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애 전체이며,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그분 입에서 나온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진리입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던 일거수일투족이 다 진리입니다.
‘진리’와 관련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불멸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일입니다. 매사에 그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묵상하는 일입니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그릇된 오류에 빠지지 않길 기도합니다. 그들이 불변의 진리이자 영원한 진리인 정통 가톨릭 신앙에 맛을 들여, 사이비들이 미끼처럼 건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도록 신앙의 깊이를 더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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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누구나 자기가 지닌 경험, 혹은 지식수준에 따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생각이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 생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문제를 냈습니다. ‘술에 취해 거리에서 크게 소리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 ‘가’로 끝나는 사자성어는? 답: (고)(성)(방)가
아이들 재미있는 오답들.
고음불가, 이럴수가, 미친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짜 압권인 오답, 아빠인가
아이들은 답을 알지 못하여 자기 수준에서 대답한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그릇이 있습니다. 자기의 한계가 있고 자기의 수준이 있습니다. 가끔은 위의 예와 같이 재미있게 끝나기도 하지만, 가끔은 자기의 ‘수준’을 알지 못하면 커다란 위험에 처하는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엄마 젖을 먹는 아기가 딱딱한 견과류나 떡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자칫 목에 걸리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른도 떡이 목에 걸리거나, 낙지가 목에 걸려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그래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 않으면 어떤 행동을 취하기보다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전에 들은 가슴 아픈 사연이 떠오릅니다. 한 형제님이 친구들과 있다가 갑자기 간질 발작 증세를 보였습니다.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그 형제님을 돕겠다고 응급처치로 흉부압박을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그 형제님은 목숨을 잃었는데, 그 원인이 응급조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질은 발작을 하면 압박을 가해선 안 되고 그냥 발작이 끝날 때까지 놓아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것을 하다가 보면 이렇게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안 좋은 일이 벌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말씀이 아직도 많이 있지만 아직은 제자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제자들도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준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충만한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성경 하나를 놓고 수많은 해석들이 오고갑니다. 그래서 많은 종파로 그리스도교가 갈라졌습니다.
모두가 성경해석의 차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각 종파도 각자의 한계 안에서 진리를 해석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만약 성령님이 도와주셨다면 해석은 하나만 정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도 한 분이시고 진리도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말씀에 서로 다른 해석을 일러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톨릭교회의 성경해석이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가장 권위가 있는 해석이라는 것을 증명해낼 수 있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을 정해서 지금 이대로 묶어놓은 권위가 바로 가톨릭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신약성경을 27권으로 정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여기저기에서 서로 다른 정경목록을 구성하였고, 또 사실은 그 이후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세력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복음들(예: 야고보 원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막달레나 복음서, 유다 복음서 등)과 더 많았던 서간들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었음을 명확히 짚어낼 수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한 진리를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문제를 풀 때 많은 예문 가운데서 어떤 것이 정답인지 오류 없이 하나하나 짚어낼 수 있는 완전한 진리를 알고 있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당신의 성령을 주신 교회의 권위에 따라서만 성경을 해석하지 자유해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그릇이 될 수 없음을 겸손되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충만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전한 해석과 가르침을 줄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정한 성경 목록은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정해준 교회의 권위는 무시하고 자신들 뜻대로 각자 해석하겠다는 것은 교회가 성경을 정할 당시의 성령님이 이제는 자기 자신들에게 옮겨오셨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라진 그리스도교에서 더 이상 분열이 없었어야 했는데 그 이후로도 너무 많은 분파들이 생겨난 이후가 바로 갈라져나간 교회들에 충만한 진리의 영이 함께하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로 일치시키는 분이시지 분열을 일으키는 분은 아니신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면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각을 각자가 오류 없이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성령이 충만하고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을 쓰지 않으시고 교회를 세워 그 교회에 당신 진리를 보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교회의 권위에서 나온 하나의 믿을 교리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믿으면서 그 성경을 믿을 교리로 선포한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순입니다. 3년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교만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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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몇 번 왔습니까?” 제가 여행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 가이드가 아니기 때문에 자주 오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감사하게도 제게 기회가 몇 번 더 주어졌습니다. 저는 복음화학교의 지도신부를 10년 이상 함께 했습니다. 복음화학교에서는 매년 졸업생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지도신부로 함께 했기에 다른 분들보다는 성지순례의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습니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맛 집이 단골이 되듯이 성지순례를 가신 분들은 기회가 되면 또 가기 마련입니다. 복음화학교에서도 기회가 주어지면 성지순례에 함께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다른 곳은 몰라도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기회가 주어지면 함께 하였습니다. 성지순례에서 겉모습만 보는 사람은 매번 같은 성지순례라고 하겠지만 성지순례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얻는 사람에게는 매번 새로운 성지순례가 될 것입니다.
성지순례의 목표는 ‘멈춤, 만남, 변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먼저 일상의 삶에서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순례하면서 세상의 것들과 계속 접속하려고 하면 진정한 성지순례가 되기 어렵습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멈추어야 합니다. 성지에서는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성지만 본다면 그것은 여행과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지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만나기 위해서는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만나기 위해서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없으면 표징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의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했듯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했듯이 성지순례를 통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다면 변화된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이스라엘 순례 중에 ‘깔멜’산을 다녀왔습니다. 깔멜산은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였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오신 하느님입니다. 싸움에 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바알 신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이면서 제단에 제물을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었지만 제단의 제물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예언자는 제단에 물을 부었음에도 하느님께서 제물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는 아합왕에게 말하였습니다. “외교에는 양다리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에는 양다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도 일에는 양다리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일이 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일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양다리가 아니라, 다섯 다리라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단 하나라도 하면 안 됩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기를 청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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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사일런스(Silence)'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1784년에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100여 년간 박해를 받았습니다. 1549년에 시작된 일본 천주교회는 300년간 박해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박해도 길고 심했지만 일본의 박해는 더 길었고, 혹독했습니다. 300년 박해를 받는 가운데 사제도 없어졌고, 교회도 없어졌고, 조직도 없어졌습니다. 일본의 박해 중에 ’후미에’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년 한 번 예수님의 그림이나 그 형상을 내놓고 그것을 밟으면 살려주고, 그것을 밟지 않으면 기독교인이라고 인정해서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제도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 처형방법이 기독교가 해금이 될 때까지 약 300년간이나 지속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이런 박해 중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신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교리도 모르고, 신앙생활도 모르지만 뜻도 모르는 라틴어 기도문을 외우는 신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4월 11일자 기사에 ‘팬데믹과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영세자 수는 전년 대비 62.6% 감소했습니다. 견진성사 61.4%, 병사성사 43.5%, 첫 영성체 53.9%, 고해성사 54.8%가 감소했습니다. 주일미사 참여율은 9.8%였습니다. 100명 중에 90명은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였습니다. 영성체 횟수도 57% 감소했습니다.
다만 가톨릭평화방송을 통한 주일미사 시청률은 전년도 대비 623%가 증가했고, 유튜브를 통한 미사참례도 555% 증가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 미사 참례가 늘어났습니다.
통계에서 우려되는 부분은 한국교회도 한국사회와 마찬가지로 급속하게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65세 이상의 신자비율은 모두 늘었지만 25세 미만의 신자비율은 계속 줄어서 10% 미만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건강을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울러 이웃의 건강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후미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이런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아름답게 꽃 필 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가난 때문에, 국가의 역량 때문에 코로나 백신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많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국가를 위한 백신 나눔을 호소하였고, 많은 지역교회에서 교황님의 뜻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검사와 백신 접종을 위해서 기꺼이 성당의 문을 여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어찌 보면 귀찮고, 위험할 수 있지만 매달 코로나 검사를 위해서 성당을 개방하였습니다. 최근에는 백신 접종을 위해서 신청을 받았습니다. 아침부터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까지 신청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뉴욕 대교구는(교구장 티모시 돌란 추기경)는 가난한 사람과 노숙자들을 위한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하였습니다.
지자체, 전문가, 후원자들이 협력하여 버려진 땅, 쓸모없는 땅을 이용하여 아파트를 건설하였습니다. 교구는 향후 활용도가 떨어지는 교구 소유 부지도 저소득 가정을 위한 아파트 부지로 활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뉴욕대교구는 협력단체, 신자, 비신자들과 합심해 아파트 마련으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존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바위틈에도 꽃이 피는 걸 봅니다. 팬데믹 상황이지만 길을 찾으면 신앙은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몇몇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만나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와 환한 미소는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기다리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 함께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가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에게 차선을 양보하면 그 사람은 지금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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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12-15: 진리의 성령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절) 성령 안에 살 때,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참된 삶이 무엇인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성령 안에서, 즉, 사랑 안에서 더 충만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서 모든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13절)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신다. 성령께서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뜻이다. 아들도 성령께서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신다.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3절) 성령께서는 아들이 가르친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그 말씀들은 아들의 말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 미리 앞당겨 살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기쁨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하느님 안에 살 때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14절)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와 가르침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이것들을 아들에게서 받지만,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아들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는 우리를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신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 즉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영원한 파스카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지만 이미 천국으로 건너간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드리고 따를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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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2-15)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가르친 적 없는 새로운 가르침이 더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보충 설명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이해하기에도 어렵고 받아들이기에도 어려울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관한 말씀들, 또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에 관한 말씀들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들이었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모두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되고, 그 진리에 따라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그 도움으로 진리를 깨닫고 되고 확신하게 됩니다 바로 그 확신이 삶으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성령을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세례를 받을 때 모두 다 성령을 받는데, 그러면 ‘성령의 은사’도 모두 다 똑같이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실제 상황을 보면, 사람마다 다른 은사를 받고 있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에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렇게 되는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보편적인 은사’와, 어떤 직분과 직책에 따르는 ‘특별한 은사’를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은사’는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은사이고, 그 은사는 각자 스스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표시가 안 나더라도, 우리는 모두 그 은사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신앙인들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특별한 은사’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 받는 은사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1코린 12,7-8)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 12,11)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2,29)
사도들이 일곱 봉사자를 뽑은 일이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3)
열두 사도는 기도와 말씀 봉사와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 필요한 은사는 받았지만, 식탁 봉사에 필요한 은사는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곱 봉사자를 뽑은 것인데, 그들은 교회의 청원에 따라 식탁 봉사에 필요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마다 다른 은사를 받는 것은, 교회 전체의 공동선을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 더 좋거나 덜 좋거나 더 높고 더 낮은 차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어떻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진리를 깨닫게 된다.”라는 말은, 성령께서 깨달음의 은총을 직접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일, 또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일은 우리가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진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요한 3,8) 신앙은 이론이 아니고, 학문도 아닙니다. ‘삶’입니다. 깨달음, 믿음, 확신, 삶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의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께서는 노력하는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분께서는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라는 말씀과 “나에게서 받아 알려 주신다.”라는 말씀은, ‘성령의 인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시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잘 깨닫고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계시 진리는 예수님께서 모두 가르치셨고,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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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대담을 나눕니다. 그들은 바오로를 아레오파고스(고대 아테네에서 최고 의회가 열리던 곳)로 데리고 가서 말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겠소?”(17,19)
이로써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교의 철학 사상이 만나고, 바오로의 그 유명한 ‘아레오파고스 연설’이 이루어집니다(제1독서 참조). 이 연설은 바오로가 이교인들에게 한 설교들 가운데 가장 전형적이고 뛰어난 것으로,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미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죽은 뒤에도 영혼이 불멸하다고 여기면서도, 육신의 부활은 이해하지 못하고 바오로의 설교를 비웃거나 외면하였습니다. 결국 바오로는 아테네에서만큼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지 못합니다.
높은 수준의 학식과 문화를 지녔고 새로운 지식에도 열려 있던 그리스인들이었지만, 선뜻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복음을 믿는 일은 이성과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시면서, 삼위의 완전한 일치 안에 계신 “진리의 영”만이 구원의 진리를 알아듣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호자 성령께서는 우리를 의심과 불확실성 속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읽기 전 먼저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듯이, 모든 일에 앞서 성령께 지혜와 보호를 청합시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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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언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신부님]
비행 중에 ‘삼각편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맨 먼저 비행기 한 대가 나서고, 그 뒤를 다른 비행기 두 대가 따르면서 전방과 좌우를 공격하고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모로 효과가 뛰어난 전술입니다.
그런데 어느 비행기 한 대가 유독 앞질러 간다든지 뒤처지게 되면 균형을 이룰 수 없고, 세 대의 비행기가 하나의 편대를 이루지 못하면 적을 공략하는 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삼발이’라는 취사도구가 있는데, 둥근 쇠테에 발이 3개 달려 있다고 해서 명명(命名)된 이 기구도 삼각편대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다리만 유독 길거나 짧아서는 균형을 잡을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적인 결합’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밖에도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가 이루는 화목한 ‘성가정’의 모습이라든지, 스승과 제자와 학교가 이루는 ‘교육의 장’, 그리고 세 장의 잎이 하나로 모여서 생명의 신비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세 잎 클로버’와 같은 식물 등 수없이 많은 요소가 우리 모두에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루셨던 ‘성삼위일체’의 모습은 가장 존귀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위격으로는 세 위로 구분이 되어 각자 하시는 일에는 차이가 있지만, 본성으로는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시면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그 신비로운 조화와 결합 안에서 우리 모든 신앙인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근간을 이루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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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는 분이시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요한복음 8장 28절)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곧 성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성자의 것이며,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성자에게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성부에게서 성자로, 성자에게서 성령으로 이어지는 이 심오한 일치의 신비는 세 위격이지만 하나이신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도 당신 안에 사랑으로 일치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 1서 4장 16절)라는 말씀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 삼위께서 사랑 안에 온전히 일치하여 하나가 되시듯,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는 사랑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나가 되리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며 일치하려고 애쓴다면 이는 바로 충만한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밝아질까요?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자녀들이 많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롭고 사랑 가득할까요?
숨을 쉬어 보십시오. 들숨과 날숨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을 날마다 의식하며 산다면 이 세상은 그런 나 때문에 더 밝게 빛나고, 아름다우며, 평화롭고 사랑 가득한 기쁨의 땅으로 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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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 방식의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어떤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의견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만장일치로 모든 사람의 의견이 통합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렇게 진행되기가 어려운 것이 또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수가 선택한 의견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소수의 의견이 현실적인 정확한 답과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막시밀리안 콜베신부님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신부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하 아사감방(餓死監房)에서 1941년 8월 14일 운명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수용소 소장에게 지목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 전 폴란드군 부사관이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의 “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제겐 아내가 있고 불쌍한 자식들도 있습니다. 제발...”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대신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할 수 있도록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십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를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4-1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영께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부르십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합니다.
“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 있습니다.
한때‘다빈치 코드’소설이 영화 되어 상영되고,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허구는 허구요, 픽션은 픽션일 뿐입니다. 근래에는‘신천지’라는 이단이 많은 이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와 굴곡 된 성경해석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무리 흔들고 뜯어고치려 해도 진리입니다. 거짓 논리를 통해 진실처럼 보이게 할지라도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지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데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어 구원을 얻길 바라십니다.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1,17)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17,17)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미사성제 안에서 당신을 내어 주시며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은 자유를 줍니다. 말씀, 예수님, 사랑 안에 자유를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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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생 때,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영화가 생각납니다. 바로 홍콩 영화입니다. 코믹 쿵푸 영화도 있지만, 지금까지도 많이 인상 남는 영화는 현대식 무협이라고 할 수 있는 느와르 장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정을 위해 총격전을 하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 남기는 말은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영화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도박이었습니다. 도박의 승부를 퉁홰 나쁜 악당을 응징하던 모습은 통쾌함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패를 가졌다면서 회심의 미소를 띠는 악당, 그런데 최후의 승자는 주인공이 더 높은 패를 꺼내면서 승리합니다. 때로는 악당의 속임수를 더 큰 속임수로 이기기도 합니다.
그때 보았던 영화 장면을 떠올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패를 펼쳤는데, 상대의 패와 똑같다면 어떻게 될까요? 카드가 잘못되었다며 무효 처리가 될 것입니다. 카드는 모두 달라야 게임이 공평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이유도 이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모두 달라야 우리 각자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과 같은 패를 받고 싶은 것 같습니다. 저 사람처럼 능력이 있었으면 싶고, 저 사람처럼 돈이 많았으면 싶고, 저 사람처럼 몸이 건강했으면 좋고…. ‘저 사람처럼….’이라는 말로 같은 패를 같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삶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이 다름으로 인해 부러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을 내 삶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면 나만의 삶을 멋지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비교하지 말 것, 쓸데없는 판단을 하지 말 것, 나를 특히 나의 삶을 사랑할 것. 이런 사람만이 자기 삶 안에서 주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약속해주십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고,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성령의 역할은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만 집중합니다. 성령을 받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변화될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이 세상을 남처럼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모두 성령의 진정한 역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 참 진리의 삶인 주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저 남처럼 풍요하고 화려하게 살기만을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마음으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의 삶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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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위에서>
요한 16,12-15 (성령께서 하시는 일)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길 위에서>
수많은 발걸음
이미 내딛어
낯익은 듯
아직은 끝 모를
뿌옇게 열린
낯선
길 위에서
너무 먼 곳을
바라보며
꿈을 꾸거나
너무 앞선
두려움에
움츠러들지 않으며
다만
지금여기에서
한걸음 딛는 거야
길은
늘 그렇듯이
걷는 이에게
걷는 그만큼만
열리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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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만을 찾는 신망애(信望愛)의 삶>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답은 ‘진리의 영’, 성령뿐이다-
"생명과 죽음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명부에 내려보내고 올라오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도다."(1사무 2,6)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시편 97,11)
하느님 안에서 참 다양한 삶입니다. 하느님안 한가족같습니다. 진리의 영의 인도따라 각자의 제자리, 꽃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며 참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혼자의 외딴 섬이 아니듯 공동체도 고립단절의 외딴섬이 아닙니다. 세상과 떨어져 있는 듯 해도 세상 한복판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여기 요셉수도공동체입니다.
어제 저녁 식탁을 보니 모두 18명이었습니다. 수도형제11명, 외부손님형제들7명! 참으로 세상에 활짝 열린 환대의 집 수도원임을 입증합니다. 전체의 1/3이 손님입니다. 하느님의 대가족을 상징하는 정주의 요셉수도원입니다. 아, 그런데 한 형제는 배밭일에 더위를 먹었는지 배탈이 나서 쉬고 있는 듯 했습니다. 얼마나 넓고 깊은 하느님의 품인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 하느님입니다. 수도원의 정주영성은 그대로 환대영성으로 직결됨을 봅니다.
“소백산 등산후 부석사로 부처님을 찾아서 탐방하고 남한강을 만나러 여주로 왔어요. 오월인데 어딘들 예쁘지 않은 곳이 없어요.”
서울교대 동창으로 은퇴후 6명의 정다운 도반들과 자주 여행길에 오르는 스테파노 형제의 공동 카톡방에 6개의 아름다운 사진과 올린 글이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움을 찾는 구도자의 모습들입니다. 신록과 꽃의 계절, 요즘의 한국은 어디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어디나 하느님 계신 지상천국입니다.
“오늘도 영적승리의 삶을 살려고 나름 애쓴 하루였습니다. 그 와중에 야간진료 끝나고 본 신부님의 축복 메시지가 저에게 감동을 넘어 눈물을 쏟게 했네요. 예수님의 축복으로 느껴져서 더욱 뭉클했나 봅니다.”
잠깨니 야간진료중인 치과의사 형제로부터의 메시지였습니다. 얼마전 “설레다”란 말과 더불어 “뭉클하다”는 우리 말마디가 참 반가웠습니다. 진리의 영 따라 살 때 자주 겪을 설렘의 삶에 뭉클함의 체험일 것입니다. 즉시 드린 답글입니다.
“아, 힘든 그러나 최선을 다한 하루였네요. 하루하루 온몸과 온맘으로 사시는 무죄한 삶, 정직한 삶, 감동적인 삶, 예수님께서도 감동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엊그제 멀리 평택에서 4가지 기적 체험을 나누러왔던 부부도 생각납니다. 듣고 보니 신비로운 사랑의 기적에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한달 미사중에 일어난 기적들이니 더욱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드리는 부부였습니다. 한밤중 일어나 강론을 쓰는 이 시간에도 투병으로 온힘을 다쏟는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어제도 예전에는 건강했던 분인데 지금은 3년째 암투병중인 형제의 방문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바라는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엾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런 고통스런 삶중에도 참으로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이 참 거룩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한번 여행했던 곳에는 가고 싶지 않듯이 이 삶도 다시 살라하면 못살 것 같습니다. 다시 살라해도 이렇게뿐 못살것이니 살고 싶지도 않고 다만 남은 동안 인생휴가 끝내고 하느님의 집에 귀가할 때까지 정말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살고 싶습니다.
지금 열독熱讀중인 책은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조선 후기, “백성을 사랑했던 지성” 정약용 요한에 관한 “다산 평전”입니다.요즘 제가 즐겨 읽는 책은 위인들의 평전이나 자서전, 고백록입니다. 또 한권은 하느님의 수도승, 토마스 머튼을 참으로 치열하게 공부하며 쓴 안셀모 신부의 박사학위 논문,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입니다.
성인들은 물론이고 참으로 치열하게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만을 찾는 제 주변의 형제자매 도반들입니다. 저를 포함해 이분들의 삶빼기 하느님하면 남는 것은 무지와 허무의 어둠뿐일 것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은 믿는 이들의 존재이유이자 모두가 되는 분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정말 불행중의 불행, 재앙중의 재앙이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입니다. 아무리 세상 학문에, 철학에 정통해도 하느님을 모르면 헛되고 공허한 삶입니다. 평생 진짜 해야할 평생 공부는 단 하나 하느님을 알고 참나를 아는 공부뿐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아테네에서의 바오로 사도의 선교가 실패로 끝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명이 찬란하게 꽃폈던 학문과 예술, 철학의 중심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의 그 멋지고 감동적인 설교에도 아테네 시민들은 마이동풍입니다. 참으로 무지로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회개를 통한 겸손과 지혜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회개의 은총이 절실합니다. 아테네에서의 선교를 끝내고 고린토로 향하는 바오로 일행입니다. 아마 이때의 체험을 반영한 다음 고백일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1,22-25)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고백인지요! 하느님의 힘이자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찾고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대우(大愚)의 사람들인 듯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지(大智)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참 지혜로운 아테네 사람들인 듯 하지만 어리석은 무지의 헛똑똑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평생공부보다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께로 이끄는 진리의 영, 성령뿐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그러니 진리의 영, 성령과의 일치의 삶이 제일입니다. 곧 성자 그리스와의 일치, 성부 아버지와의 일치도 저절로 뒤따를 것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주님께 성령의 은총의 선물을 청하도록 합시다. 성령의 인도따라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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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16,13)
<성령님, 빨리 오세요!>
오늘 복음(요한16,12-15)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는 것'입니다.(어제 복음) 그리고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는 것'입니다.(오늘 복음)
그러니 지금 나의 생각 그것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성령님의 생각이 완전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독서(사도17,15.22-18,1)는 그 유명한 '사도 바오로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 때,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에게 선포된 설교입니다.
'아레오파고스 연설'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1)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2)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3)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4)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5)지금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이 지금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머물러 있어야 제대로, 곧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성령께서 옳게 생각하고, 옳게 말하고, 옳게 행동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 성령께서 나를 살리십니다.
성령님, 빨리 오세요!
오시는 성령님을 맞이하려면, '침묵'해야 합니다. 침묵은 묵상입니다. 더 깊은 침묵은 관상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말씀 안에 머물고, 미사에 참례하고, 삶의 자리를 피해 떠나는 피정이 바로 침묵입니다. 나의 온 존재가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십자가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바로 침묵입니다.
오늘도 침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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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n8pN53Uk-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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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 15)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생명과 진리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생명과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 공동체에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공동체를
되살리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삶의 공동체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람답게
살아가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생명의 기쁨은
억압과 파괴가
아닌 성장과
자유를 향합니다.
자아라는
협소한
울타리를
넘어서
신앙의 유대와
배려로 새로워지는
공동체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은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이렇듯
삶의 방식을
바꾸게 합니다.
미움과 거짓의
벽이 허물어지는
건강한 공동체로
우리를 이끕니다.
공동체적
삶의 길을
제시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공동체의 실현은
복음의 실현이며
성령의 기쁨입니다.
하루 빨리
아픈 이들은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함께 기뻐하는
마음과
함께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공동체의
힘입니다.
성령의 사명은
공동체를
다시 살리는
생명과 진리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공동체의 사랑이며
공동체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공동체를
맡겨드립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계획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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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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