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보고
독립기념관까지 김형석 친일자를 세웠다.
이자는 일제때 미곡 수탈은 수탈이 아니라 정당한 가격을 받고 수출 한것이라고 강변한자다.
일제의 산미 증산계획
1920년부터 1944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일본 제국이 식민지 조선을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한 농업 정책을 '산미 증산 계획'이라는 한다.
알제의 조선인 땅뺏기
윤치호 선생의 당시 상황에 대한 글을 읽어 보자.
<총독부의 가장 교활하고 잔인한 시책은 수리사업을 통해 조선인의 논을 빼앗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저수지를 만들 때 가장 좋은 논 중에서 수백만 평을 골라 공시지가로 징발한다.
그러고 나서 조선인 지주에게 터무니없이 과도한 수리 조 합비를 부과한다.
결국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에게 논을 팔거나 무상으로 주 는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은 모두 가난한 조선인을 구제하려고 농업을 진흥한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진다.
사악하면 득 될 것이 없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일본의 이런 비정함이야말로 영악함과 권력만 있으면 불의도 화려하게 치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충남 예산에 사는 성 씨의 비옥한 논은 저주받을 수리조합 영역 안쪽에 있었다.
성 씨는 예전 같으면 평당 60전을 준다 해도 논을 팔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논을 평당 15전에 내놓았 다.
그런데 평당 15전이라고 해도 조선인은 감히 이 논을 매입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일본인도 이 논을 매입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수리조합비와 가혹한 세금을 견디다 못한 성 씨가 조만간 자신들에게
이 비옥한 논을 공짜로 인수 해달 라고 애걸복걸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윤치호 일기, 1931년 1월 10일)
아렇게 하여 조선땅은 대부분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쌀은 대부분 일본에 수출되어 일본인 지주들은 돈을 벌었다.
결과
결과적으로는 양곡 유출이 되었고 한반도에선 쌀 생산량 은 늘었으나
오히려 조선땅에는 쌀 품귀 현상이 일어나 일반인들의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쌀값은 몇배씩 오르는데 임금은 그대로라, 먹고 살기도 힘들어 졌다.
결국 1925년 조선 총독부 자료에 의면 유량민(거지)이 15만 5112명나 되었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없이 생겨 았다.
그리하여 먹고 살기 위하여 간도 연해주로 떠나는 사람들 이 줄을 이었다.
소수 알본 지주들만 잘 살게 만든 산미증산 계획에 의한 쌀 착취가 정당한 값받고 수출한 것이라고 한자를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임명한 윤석열을 타도한다.
아래 사진>이 자가 김형석
느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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