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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리보살문보리경론(文殊師利菩薩問菩提經論) 해제
『문수사리보살문보리심경론(文殊師利菩薩問菩提心經論)』 또는 『가야정경론(伽耶頂經論)』ㆍ『가야산정경론(伽倻山頂經論)』이라고도 한다.
본 논은 『문수사리보살문보리론(文殊師利菩薩問菩提經)』을 주석한 것이다. 이 경은 일명 『가야산정경(伽耶山頂經)』이라고도 하며, 본 논의 역자 보리류지(菩提流支, Bodhiruci)는 『가야산정경』 1권도 한역하였다. 『가야산정경』의 이역(異譯)은 보리류지로부터 100년이나 이전에 이미 나집(羅什) 삼장에 의해 『문수사리문보리경』 1권으로 한역(402~412)되었으며, 나중에는 『불설상두정사경(佛說象頭精舍經)』 1권으로 수(隋)의 비니다류지(毘尼
多流支, Vin taruci)에 의해(582), 또 당(唐)의 보리류지(菩提流志, Bodhiruci, 혹은 Dharmaruci)에 의해 693년에 『대승가야산정경(大乘伽倻山頂經)』 1권으로 한역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 종류의 한역본이 있고, 경명도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본 논에도 『가야산정경론』 등의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이다. 이미 세친보살에 의해 주석되었고, 중국에서 여러 번 한역되었던 것이므로 이 경은 극히 중시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경에는 보리(菩提)에 관한 이론적인 설명이 제공되어 있다. 본 논은 먼저 논의 첫머리에 서문으로서 두 개의 게송이 있고, 다음에 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서분(序分)ㆍ소응문제자성취분(所應聞弟子成就分)ㆍ삼매분(三昧分)ㆍ능관청정분(能觀淸淨分)ㆍ소관법분(所觀法分)ㆍ기분(起分)ㆍ설분(說分)ㆍ보리공덕세력분(菩提功德勢力分)ㆍ보살행차별분(菩薩行差別分)의 아홉으로 나누어 그 의미를 설한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한 단락의 경문을 들어서 ‘논왈(論日)’이라고 하여 이를 논석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경 자체가 이론적으로 완성되어 있지만, 논석에 있어서는 다시 이 경의 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조직해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2 소응문제자성취분(所應聞弟子成就分)에서는 무학자(無學者)의 여덟 가지 덕(德)을 경의 설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즉 첫째 소작필경(所作畢竟)-응작이작(應作已作), 둘째 필경과어응작이작(畢竟過於應作已作)-소작이변(所作已辯), 셋째 원리삼매장(遠離三昧障)-기사중담(棄捨重擔), 넷째 사리소수중담(捨離所受重擔)-체득이리(逮得已利), 다섯째 증열반(證涅槃)-진제유결(盡諸有結), 여섯째 과삼계(過三界)-정지심득해탈(正智心得解 脫), 일곱째 의부전도수교수행(依不顚倒受敎修行)-일체심득자재이도피안(一切心得自在已到彼岸), 여덟째 여실수행사여의족(如實修行四如意足)-개시아라한(皆是阿羅漢) 등이다.
이와 같이 경전의 문구를 하나하나 조직해서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제4 「능관청정분(能觀淸淨分)」에서는 득일체지혜자(得一切智慧者)를 17종류로 열거하고, 제5 「소관법분(所觀法分)」에서는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사람, 증득하는 지혜, 증득된 바의 보리라는 세 가지 법(法)을 언급함에 있어서, 먼저 증득하는 사람으로서 그 신체(身體)는 증득하는 능력이 없다는 여덟 가지 설과, 식심(識心)도 증득되지 않는다는 여섯 가지 이유를 종합하고 있다. 증득된 바의 보리에 대해서도 그것은 오직 이름일 뿐이라고 하여, 세속에서 보리(菩提)를 설하는 이유 23종류를 경문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그 주석은 어디까지나 경문에 의거하고 있으며, 경설을 떠나서 다른 방면으로 널리 해석하는 것은 없다. 본 논 중에 인용된 경문은 동일한 보리류지 역의 『가야산정경』의 경문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삼보기(三寶紀)』 제9권ㆍ『내전록(內典緣)』 제4권ㆍ『역경도기(譯經圖紀)』 제4권ㆍ『개원록(開元錄)』 제6권ㆍ『정원록(貞元錄)』 제9권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문수사리보살문보리경론(文殊師利菩薩問菩提經論) 문수사리보살문보리경론 상권[가야산정경론(伽倻山頂經論)이라고도 한다]
천친(天親) 지음
보리류지(菩提流支) 한역
이미령 번역
모든 중생이 번뇌에 묶여 있음을 보시고
깨달음의 서원[菩提願]을 일으켜 구제하시고자 하신,
이와 같이 올바르게 깨달으시고 자비하신 세존[慈悲尊]께
머리 조아려 논을 짓고 경을 풀이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논은 능히 번뇌의 원수를 다하여
모든 유정을 구호하고 악도를 끊으리니
이와 같이 가장 훌륭한 두 가지 이익이 있으므로
어떤 외도의 논 중에도 있지 않다네.
이 수다라는 9분(分)으로 거두어진다. 첫째는 서분(序分), 둘째는 소응문제자성취분(所應聞弟子成就分), 셋째 삼매분(三昧分), 넷째 능관청정분(能觀淸淨分), 다섯째 소관법분(所觀法分), 여섯째 기분(起分), 일곱째 설분(說分), 여덟째 보살공덕세력분(菩薩功德勢力分), 아홉째 보살행차별분(菩薩行差別分)이다.
[經]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바가바(婆伽婆)께서 가야산 정상의 탑에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고서 머물러 계셨다. 큰 비구들 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그들은 이전에 모두 머리를 땋은 범지(梵志)로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하였고 이루어야 할 일은 이미 마친 이들이었다. 무거운 짐을 버렸으며, 자신의 이익을 빨리 얻었고, 모든 유결(有結:탐냄,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을 다 하였고, 마음에 바른 지혜를 얻었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하였으며, 마음이 자재함을 얻어서 이미 저 언덕에 이르렀으니, 이들 모두는 곧 아라한 들이었다.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보살마하살이 시방세계로부터 와서 모였는데 그들은 모두 큰 위덕이 있었으며, 모두가 모든 인(忍)과 다라니와 깊은 삼매를 얻었고 모든 신통을 갖추었다. 문수사리보살ㆍ관세음보살ㆍ득대세보살ㆍ향상(香象)보살ㆍ용시(勇施)보살ㆍ용수행지(勇修行智)보살 등의 이름을 가진 이들이 우두머리[上首]가 되었다.
이와 같은 모든 보살마하살은 그 수가 한량없었으며, 모든 천(天)ㆍ용(龍)ㆍ야차(夜叉)ㆍ건달바(乾闥婆)ㆍ아수라(阿修羅)ㆍ가루라(迦樓羅)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睺羅伽)와 인비인(人非人) 등의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論]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등”은 법을 결집한 사람이 말한 것이다.
“가야성에 머무시다”는 머무는 곳의 성취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가야산 정상’이란 부처님께서 그 모습을 대중들이 수행하며 머무는 곳에 나타내 보이신 것이며, ‘탑’이란 저 능히 공양하는 자를 위함이니, 그가 공양을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바로 그가 깨달음을 이룬 때이다. ‘큰 비구들’이라는 것은 그 위대함 때문이며, 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천 명과 계셨는데…… 머리를 땋은 범지”라는 것은 학(學)과 무학(無學)의 비구를 밝힌 것으로 청중이 성취되었음을 칭한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다음에서 설하게 될 모든 보살행의 차별이니, 그 보살행은 두 가지로 거둔 법에 포섭되어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섭(因攝)이고 둘째는 과섭(果攝)이다.
또 ‘가야산 정상의 탑’이란 근본서분(根本序分)으로서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니, 그곳에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모이셨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이 법문은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거두어 보호하는 바이기 때문에 응당 이 수다라를 듣는 자는 거두어 취함을 성취하니, 학과 무학의 비구들은 모두 이미 머리를 땋은 범지들이다.
또 무학(無學)에는 여덟 가지 덕이 있으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해야 할 것을 마친 것으로서 경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하였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필경에 지어야 할 것을 넘어서서 이미 지었으니, 경에서 “할 일은 이미 마치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삼매의 장애를 멀리 여의었으니, 경에서 “무거운 짐을 버렸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무거운 짐을 버리고 여의었으니, 경에서 “자신의 이익을 빨리 얻었다
”고 한 것과 같다. 그 무거운 짐이란 것은 이른바 5음(陰)이다. 다섯째는 열반을 증득함이니, 경에서 “모든 유결(有結)을 다하였다”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삼계를 넘어섰으니, 경에서 “바른 지혜로써 마음이 해탈을 얻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뒤바뀌지 않은 것에 의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함이니, 경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이 자재함을 얻었고 이미 저 언덕에 이르렀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4여의족(如意足)을 여실하게 수행함이니, 경에서 “모두는 곧 아라한들이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또 아라한이란 능히 믿음을 받는 자이니 사람들로부터 물건을 보시 받기 때문에 응공(應供)이라고 이름한다.
또 학(學)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끝까지 계율을 잘 지키고 도(道)를 잘 배우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에 바라는 바대로 필경 만족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삼매분(三昧分)을 설하겠다.
[經] 이때 세존께서 홀로 사람들이 없는 곳에 고요히 머무시며 모든 부처님의 깊고 깊은 삼매에 드시어 법계(法界)를 관찰하셨다.
[論] “삼매에 드시어 관찰한다”는 것은 생각으로 헤아리는 경계가 아님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또 “삼매에 든다”고 하는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과 같지 않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계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삼매분을 모두 설하였으니 다음에는 능관청정분(能觀淸淨分)을 설하겠다.
[經]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셨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고 모든 지혜를 얻었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쳐서 무거운 짐을 벗었고 온갖 험한 길을 건넜다. 무명을 멸하여 참다운 명(明)을 얻었으며, 온갖 화살을 뽑았으며 갈애(渴愛)를 끊었다. 법의 배를 완성하였고, 법의 북을 쳤으며, 법의 고둥을 불었고, 법의 깃발을 세웠다. 생사의 종자가 전환하여 열반의 성품임을 보였고, 잘못된 길을 폐쇄하여 바른 길을 열었으며, 온갖 죄의 밭을 떠나서 복의 밭을 보였다.’
[論] 능관청정(能觀淸淨)이란 이미 보리를 얻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경에서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셨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고”라고 한 것과 같다.
보리를 얻었다는 것은 저 성문이나 벽지불이 증득한 지혜보다 뛰어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경에서 “모든 지혜를 얻었다”고 한 것과 같다. 그가 얻은 모든 지혜라는 것에는 열일곱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열일곱 가지인가? 첫째는 본래의 서원을 이룬 것[本願滿足]이니 경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지니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고 여읜 것이니, 경에서 “무거운 짐을 벗었다”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번뇌장을 잘 끊은 것이니, 경에서 “온갖 험한 길을 건넜다”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소지장을 잘 끊은 것이니, 경에서 “무명을 멸하여”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여실하고 미묘한 법을 증득한 것이니 경에서 “참다운 명(明)을 얻었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온갖 사악한 화살을 떠났으니, 경에서 “온갖 화살을 뽑았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온갖 뒤바뀐 생각을 떠났으니, 경에서 “갈애를 끊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출세간의 지혜를 성취한 것이니, 경에서 “법의 배를 완성하였고”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미묘한 법의 바퀴를 굴리는 것이니, 경에서 “법의 북을 쳤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열째는 무아(無我)의 미묘한 소리를 내어서 일체의 악마로부터 능히 항복받으니, 경에서 ‘법의 고둥을 불었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한째는 모든 외도로부터 능히 항복받으니, 경에서 “법의 깃발을 세웠다”
라고 한 것과 같다. 열두째는 모든 결박의 인연을 잘 끊었으니, 경에서 “생사의 종자를 전환하여”라고 한 것과 같다. 열셋째는 세간과 출세간의 미묘한 법을 설하는 것이니, 경에서 “열반의 성품임을 보였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넷째는 뒤바뀌고 집착하는 상을 능히 멀리 여읜 것이니, 경에서 “잘못된 길을 폐쇄하여”라고 한 것과 같다. 열다섯째는 8정도를 굴리는 것이니, 경에서 “바른 길을 열었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열여섯째는 외도의 복전을 능
히 멀리 여의었으니, 경에서 “온갖 죄의 밭을 여의고서”라고 한 것과 같다. 열일곱째는 3보의 복전을 나타내 보이니, 경에서 “복의 밭을 보였다”라고 한 것과 같다.이미 능관청정분을 모두 설하였다. 다음에는 소관법분(所觀法分)을 설하겠다.
[經] 내가 지금 저 법을 관찰하건대 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며, 어떤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바로 증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인가?
[論] 어떠한 사람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가? 또 어떤 지혜로써 능히 보리를 증득하는가? 증득한 보리란 어떤 것인가? 그 세 가지 법을 관찰하면 3세에서 허망하게 분별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經] 몸으로 얻는 것인가? 마음으로 얻는 것인가? 만약 몸으로 얻는다면 몸은 곧 앎이 없고 깨달음이 없다. 풀ㆍ나무ㆍ흙덩이ㆍ그림자와 같이 4대(大)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알거나 인식하는 것이 없고, 부모로부터 생겨나서 그 성품이 덧없으며, 의복ㆍ음식ㆍ이부자리 또는 욕조로써 임시로 존립할 수 있지만, 이 법은 반드시 마멸되고 부서져 사라진다.
[論] 경에서 말하기를 “몸으로 얻는 것인가, 마음으로 얻는 것인가?”라고 한 것은 몸과 마음이 보리를 증득하지 못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뜻을 밝힌 것인가? 몸과 마음을 여의고서 다시 실다움이 없는 것이니, 어리석은 사람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능히 보리를 증득하는가? 그 법이 3세에 허망하게 분별하는 것만 있고 실체가 없다는 것은 몸으로 보리를 증득할 수 없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여덟 가지 법이 있어서 그의 몸으로 보리를 증득할 수 없음을 나타내 보였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짓는 자가 없음이니, 경에서 “만약 몸으로 얻는다면 몸은 곧 앎이 없고 깨달음이 없어서”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허망하게 모습을 취한 것의 성취이니, 경에서 “풀ㆍ나무ㆍ흙덩이ㆍ그림자와 같이”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생각[想]을 멀리 떠남이니, 경에서 “알거나 인식하는 것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인 연이 화합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니, 경에서 “4대(大)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몸은 본래 부정한 것이니, 경에서 “부모로부터 생겨나서”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정신 집중함에 머물지 않음이니, 경에서 “그 성품이 덧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낡은 물건은 항상 지닐 수 없음이니, 경에서 “의복ㆍ음식ㆍ이부자리나 또는 욕조로써 임시로 존립할 수 있으니”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본체가 바로 실답지 않음이니, 경 에서 “이 법은 반드시 마멸되고 부서져 사라진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미 몸으로 보리를 증득할 수 없음을 나타내 보였다.
어떤 사람이 보리를 얻는 것인가? 그 법은 3세에서 허망하게 분별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어떤 지혜로써 능히 보리를 증득하는가를 설하니, 그 법은 3세에서 허망하게 분별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보리를 얻지 못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經] 만약 마음으로 얻는 것이라면 마음은 곧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며, 뭇 연(緣)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처소도 없고, 모습도 없고, 물질도 없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論] 여섯 종류의 법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보리를 얻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어떤 것이 여섯 종류인가? 첫째는 법에 대해 뒤바뀐 견해로 허망한 것에 미혹된 어리석은 범부이니, 경에서 “마음은 곧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여러 인연에 의지하여 생함이니, 경에서 “뭇 연으로부터 생겨났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음이니, 경에서 “처소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넷 째는 허망하게 분별하여 상(相)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얻을 수 없음이니, 경에서
“모습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자성이 공함이니, 경에서 “물질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멀리 감이니 경에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마음으로 보리를 얻을 수 없음을 이미 설하였다. 어떠한 지혜로 보리를 얻는가? 저 법은 3세에서 허망하게 분별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다음에는 무엇이 증득한 보리로서 그 법이 3세에 허망하게 분별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인가를 설하겠다.
[經] 보리란 다만 명자(名字)만이 있을 뿐 세속에서 임시로 설하는 것이니, 소리도 없고 색도 없으며, 이루어지지도 않고 행하는 것도 아니며, 들어감도 아니고, 볼 수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으며, 오고 가는 길이 끊어졌고, 모든 언설(言說)을 넘어선 것이다. 삼계에서 벗어났으니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고 집착할 수도 없다. 관찰할 수도 없으며 희론(戲論)을 떠났고, 말다툼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다. 관찰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메아리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언어를 여읜 것이다.[論] 경에서 말하기를 “보리란 다만 명자만이 있을 뿐이요, 세속에서 임시로 설하는 것이니”라고 말한 것은 증득할 수 있는 법은 오직 이름만이 있을 뿐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허망하게 분별함으로써 있는 것이고, 그 본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만 명자만이 있을 뿐이고 세속에서 임시로 설하기 때문”이라고 설하는 데는 스물세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스물세 가지인가?
첫째는 일이 없음[無事]이니, 경에서 “소리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지각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선 것이니, 경에서 “색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법의 본체는 공함이니, 경에서 “이루어지지도 않고”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모양을 여의었으니, 경에서 “행하는 것도 아니며”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일체 세간의 범부 경계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들어감도 아니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인식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섰으니, 경에서 “볼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 “의지할 수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나고 죽음이 없으니, 경에서 “오고 가는 길이 끊어졌고”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일체세간의 명자(名字)를 넘어섰으니, 경에서 “모든 언설을 넘어선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째는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행의 모든 법은 가히 얻을 수 없으니, 경에서 “삼계에서 벗어났으니”라고 한 것과 같다.
열한째는 보는 것을 여의어 있으니, 경에서 “볼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두째는 이식(耳識)의 경계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들을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셋째는 의식(意識)의 경계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깨달을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넷째는 일정하게 머물지 않으니, 경에서 “집착할 수도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다섯째는 허공과 같으니, 경에서 “관찰할 수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열여섯째는 함이 없으니[無爲], 경에서 “희론을 떠났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일곱째는 온갖 근심과 모든 번뇌[漏]를 여의었으니, 경에서 “말다툼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여덟째는 작은 지혜의 경계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나타낼 수도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아홉째는 한량없으니, 경에서 “관찰할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스무째는 다른 사람이 능히 볼 수 없음이니 경에서 “볼 수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스물한째는 안의 마음에 앎이 없으니, 경에서 “메아리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스물두째는 볼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니, 경에서 “글자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스물셋째는 가히 말할 수 없으니, 경에서 “언어를 여읜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經] 이와 같이 능히 보리를 증득하는 자는 어떤 지혜로써 보리를 증득하겠는가? 증득한바 깨달은 법이란 이와 같이 모든 법은 다만 명자만이 있을 뿐이요, 다만 거짓으로 이름하여 말하고, 다만 화합한 것을 이름하여 말하는 것이고, 세속에 의해 이름하여 말하는 것이다. 분별하거나 분별하여 설함이 없고, 임시로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짐이 없으며, 물질이나 물질을 떠나 있고,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집착함이 없다. 그곳은 사람이 증득함도 없고 소용(所用)의 증득도 없으며, 또한 증득할 만한 법도 없다. 이와 같이 통달하면 이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이니,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것도 없고 보리상(菩提相)도 없다.
[論] 다음에는 무엇이 보리를 증득함인가를 설하나니, 이것 역시 다만 거짓 이름과 명자만이 있을 뿐이며, 세속의 설을 의지해서 허망하게 분별하여 실체가 없다. 그 세속의 이름에 의지한 것에 여섯 종류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여섯 종류인가? 첫째는 실제로 분별함이 없음이니, 경에서 “분별하거나 분별하여 설함이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본체의 공함이니, 경에서 “임시로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짐이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나’라는 것을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경에서 “물질이 없고 물질을 떠나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세간의 지혜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취할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언어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말할 수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멀리 떠났으니, 경에서 “집착함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그곳은 사람이 증득함도 없고 소용(所用)의 증득도 없으며, 또한 증득할 만한 법도 없다. 이와 같이 통달하면 바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이니”라고 한 것은 어떤 뜻을 밝히고자 함인가? 능히 증득한 사람을 밝히고, 소용(所用)의 증지(證智)를 밝히고 증득한 경계를 밝힌 것이니, 이와 같은 법은 어떤 법으로써 미묘하고 올바른 지혜를 쓰는가? 여실지로 본 바와 안 바와 증득한 바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또 경에서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것도 없고 보리상(菩提相)도 없다”라고 한 것은 어떤 뜻을 밝히고자 함인가?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것도 없다”는 두 구절은 그 증득한 법이 청정하고 적정함을 밝힌 것이다. “보리상도 없다”는 뜻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이미 소관사분(所觀事分)을 설하였으니, 다음에 말할 기분(起分)에는 다시 어떤 뜻이 있는가? 삼매의 일을 설하기 때문이며, 설할 때에 이르렀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당연히 일어나는 것[起]이다.
또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삼매 중에 관찰되어지는 뜻으로써 문수사리로 하여금 설하게 하고자 함이요, 둘째는 문수사리가 여래에게 답을 묻는 것이다.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오직 문수사리에게만 말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으셨는가? 문수사리와 마주해서 이 법을 설하셨기 때문이다. 또 어찌하여 문수사리만을 마주하여 이 법문을 설하셨는가? 이는 여래께서 설하신 법문이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지혜가 깊은 보살에게 말하신 것이다. 또 어찌하여 오직 문수사리만이 여래께 물었는가? 여래께서 다만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수사리는 뜻을 순서에 따라 물었으며, 그가 한 질문은 마음이 청정하여 문답도 청정하였다. 다음에는 현설분(顯說分)이다.
[經] 이때 문수사리 법왕자가 모임 가운데 있었는데, 부처님의 오른쪽을 향해 서서 커다란 보배 덮개를 잡고 부처님의 위를 덮어드리고 있었다. 이때 문수사리는 세존께서 이와 같이 생각하시는 것을 가만히 알고 나서 이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리가 이와 같은 모양이라면, 선남자ㆍ선여인은 어떻게 보리에서 발심하여 머뭅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이르셨다.
“선남자ㆍ선여인은 마땅히 이와 같은 보리상을 알아서 발심하여 머물러야 한다.”
문수사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리상이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이르셨다.
“보리상이란 삼계를 벗어나 있으며, 일체 세속의 명자와 언어를 뛰어넘었고, 일체 메아리를 뛰어넘었으며, 발심이라고 마음 낸 것이 없으며, 발심한 모든 것을 멸한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發菩提心住)이다. 그러므로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일체를 뛰어넘어 있는 것이 바로 발심주를 발하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발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어떤 것도 마음을 내어서 머묾이 없는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장애가 없는 것에 머무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여법성(如法性)에 머무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여실제(如實際)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옮아가지 않고 더하지 않으며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바로 거울 속의 모습과 같고, 뜨거운 날의 아지랑이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허공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 이와 같은 발보리심주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論] 이 발청정(發淸淨)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어떤 것이 아홉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 희론을 버림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발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온갖 법에 취착함을 버리는 것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어떤 것도 마음을 내어서 머묾이 없는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허공과 같으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장애가 없는 것에 머무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적정함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여법성(如法性)에 머무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항상하거나 덧없는 모양에 취착함을 버림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도(道)를 무너뜨리지 않고 도를 버리지 않음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여실제(如實際)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비방함을 떠나고 집착함을 떠나는 것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옮아가지 않고 더하지 않으며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일체법의 한 모양에 들어가는 것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바로 거울 속의 모습과 같고, 뜨거운 날의 아지랑이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허공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 이와 같은 발보리심주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반야바라밀을 여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나머지 네 구절 “삼계를 넘어서 있다” 등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현설분을 이미 설하셨으니 이어서 보살공덕세력분(菩薩功德勢力分)을 설하겠다.
[經] 이때 모임 가운데 이름을 월정광덕(月淨光德)이라고 하는 어떤 천자가 있었는데,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물러서지 않음을 얻었다. 월정광덕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처음에 어떤 법을 관하는 까닭에 보살행을 행합니까? 어떤 법에 의지하는 까닭에 보살행을 행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은 대비(大悲)를 근본으로 삼으니, 이는 모든 중생을 위함입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대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대비는 곧은 마음[直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곧은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곧은 마음은 일체 중생에게 있어 평등한 마음[平等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체 중생에 대한 평등한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체 중생에 대한 평등한 마음은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은 깊고 깨끗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깊고 깨끗한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삽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깊고 깨끗한 마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육바라밀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육바라밀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6바라밀은 방편지혜[方便智]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지혜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지혜는 불방일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불방일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불방일은 세 가지 선한 행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세 가지 선한 행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세 가지 선한 행은 10선업도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10선업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10선업도는 지계(持戒)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지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지계는 올바른 정신집중[憶念]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올바른 정신집중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올바른 정신집중은 바른 관찰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관찰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관찰은 견고한 염(念)으로 잊지 않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論] 모든 보살마하살의 공덕 세력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마음먹은 바대로 일체를 만족하는 것이고, 둘째는 뜻한 바대로 설하며 뛰어난 말솜씨로 법을 설함에 있어 장애가 없는 것이다.
마음먹은 바대로 일체를 만족한다는 것은 상상승승(上上乘勝)법을 일으키는 것이니, 저 상상승승법을 일으킨다는 것에는 열네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열네 가지인가?
첫째는 가르침을 받아서 잊지 않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관찰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관찰은 견고한 정신집중과 잊지 않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바른 가르침을 잘 지녀서 유위법을 관찰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기억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기억은 바른 관찰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그것을 넘어선 다른 곳이 없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지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지계는 바른 기억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허물을 따르지 않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십선업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십선업도는 지계(持戒)를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10선업도를 잘 닦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세 가지 선한 행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세 가지 선한 행은 10선업도를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몸과 입과 뜻의 업인 세 가지 법이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불방일(不放逸)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불방일은 세 가지 선한 행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계의 청정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지혜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지혜는 불방일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따르는 것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6바라밀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6바라밀은 방편지혜[方便慧]를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보리를 돕는 모든 법을 만족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6바라밀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째는 피로하거나 싫증내지 않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깊고 깨끗한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깊고 깨끗한 마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한째는 업과(業果)의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은 깊고 깨끗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두째는 수행의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체 중생에 대한 평등한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체 중생에 대한 평등한 마음은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셋째는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함에 있어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곧은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곧은 마음은 일체 중생에게 있어 평등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넷째는 마음의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대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대비는 곧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이때 모임 가운데 어떤 천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월정광덕(月淨光德)이라고 한다.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물러서지 않음을 얻었다. 월정광덕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처음에 어떤 법을 관하는 까닭에 보살행을 행합니까? 어떤 법에 의지하는 까닭에 보살행을 행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은 대비(大悲)를 근본으로 삼으니, 이는 모든 중생을 위함입니다’”라고 한 이와 같은 수다라(修多羅)는 뒤에서부터 앞으로 향하여 해석한 것이니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이미 마음먹은 바대로 일체를 만족하는 것을 설하였다. 이어서 뜻한 바대로 설하며 뛰어난 말솜씨로 법을 설함에 있어 장애가 없음에 대해 설하겠다.[經]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몇 종류의 마음이 있어서 능히 인(因)을 성취하고 과(果)를 성취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네 가지의 마음이 있어서 인을 성취하고 능히 과를 성취합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초발심(初發心)이요, 둘째는 행발심(行發心)이요, 셋째는 불퇴발심(不退發心)이요, 넷째는 일생보처발심(一生補處發心)입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싹이 나서 자라는 것과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줄기ㆍ잎ㆍ꽃ㆍ과일이 처음으로 성취되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일 등이 쓰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재료를 모으는 지혜와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재목을 갈고 다듬어서 깨끗하게 만드는 지혜와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재목을 잘 맞추어 놓는 지혜와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수레로 운반하고 나르게 되는 지혜와 같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달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과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달이 차서 5일이 된 것과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달이 차서 10일이 된 것과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달이 차서 14일인 것과 같습니다. 여래의 지혜는 보름달의 달과 같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능히 성문지를 넘어섭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벽지불지를 넘어섭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부정지(不定地)를 넘어섭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안주정지(安住定地)입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첫 장[初章]을 배우는 지혜와 같습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여러 장을 차별하는 지혜와 같습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숫자를 헤아리는 지혜와 같습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여러 논서에 통달한 지혜와 같습니다.
또한 친자여, 초발심은 인(因)으로부터 생겨납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智)로부터 생겨납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斷)으로부터 생겨납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果)로부터 생겨납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을 포섭합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를 포섭합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을 포섭합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를 포섭합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을 낳습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를 낳습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을 낳습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를 낳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차별분(因差別分)입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차별분(智差別分)입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차별분(斷差別分)입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차별분(果差別分)입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약초를 가져오는 방편과 같습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약초를 분별하는 방편과 같습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병이 들어 약을 복용하는 방편과 같습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병에 차도가 생겨나게 하는 방편과 같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법왕(法王)의 가문에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법왕의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능히 법왕의 법을 배워서 구족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법왕의 법을 배워서 자재함을 능히 얻는 것입니다.”
[論] 걸림 없이 즐겨 설하는 말솜씨로 법을 설하는데 네 종류의 발보리심이 있으니, 10지(地)를 거두고 취하는데 갖가지 차별을 설하기 때문이다. 그 갖가지 차별에 열두 구절이 있다.
경에서 말하기를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몇 종류의 마음이 있어서 능히 인(因)을 성취하고 과(果)를 성취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네 가지의 마음이 있어서 능히 인을 성취하고 과를 성취합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초발심(初發心)이요, 둘째는 행발심(行發心)이요, 셋째는 불퇴발심(不退發心)이요, 넷째는 일생보처발심(一生補處發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초발심은 능히 두 번째 행발심의 인(因)이 되어주고, 두 번째 행발심은 세 번째 불퇴발심의 인이 되어주며, 세 번째 불퇴발심은 능히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의 인이 되어주니, 이 구절은 상상인(上上因)의 뛰어나고 뛰어나서 잃지 않음을 밝혀주기 때문이다.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친자여, 초발심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싹이 나서 자라는 것과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줄기ㆍ잎ㆍ꽃과 과일이 처음으로 성취되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일 등이 쓰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청정한 인으로부터 청정한 과보가 성취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친자여, 초발심은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재료를 모으는 지혜와 같고”라고 한 것은 온갖 소원에 의지하여 능히 일체 부처님의 법을 거두고 취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 행발심은 재목을 갈고 다듬어서 깨끗하게 만드는 지혜와 같고”라고 한 것은 청정한 계를 성취하기 때문이며, “세 번째 불퇴발심은 재목을 잘 맞추어 놓는 지혜와 같고”라고 한 것은 지혜방편에 의지하여 일체 행을 닦아 모두 상응하기 때문이며,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수레로 운반하고 나르게 되는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앞의 것들을 버리지 않고 무거운 짐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달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과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달이 차서 5일이 된 것과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달이 차서 10일이 된 것과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달이 차서 14일인 것과 같습니다. 여래의 지혜는 15일의 달(보름달)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상상대력(上上大力)이 청정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능히 성문지를 넘어섭니다.”라고 한 것은 초지(初地) 전의 보살의 근기가 예리하여 일체 보리분법(菩提分法)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벽지불지를 넘어섭니다.”라고 한 것은 초지 전의 보살이 반야승지(般若勝智)에 의지하여 능히 모든 보살의 한량없는 행을 모으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부정지(不定地)를 넘어섭니다.”라는 것은 이미 초지에 들어 지혜의 증득을 얻었기 때문이며, 또 성문이나 벽지불지를 넘어섰다는 것은 일체 공용행(功用行)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안주정지(安注定地)입니다.”라고 한 것은 왕자의 지위에 잘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첫 장[初章]을 배우는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하지법(下地法)을 관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여러 장을 차별하는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지혜가 늘어나 차별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숫자를 헤아리는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방편지(方便智)가 능히 일체법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여러 논서에 통달한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증지(證智)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因)으로부터 생겨납니다.”라고 한 것은 자성이 청정하여 본래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智)로부터 생겨납니다.”라고 한 것은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방편[慧方便]을 거두고 취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斷)으로부터 생겨납니다.”라고 한 것은 일체 세간의 희론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果)로부터 생겨납니다.”라고 한 것은 자연히 일체행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을 포섭합니다.”라고 한 것은 신행조도(信行助道)가 성숙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초지(初地)의 경계를 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를 포섭합니다.”라고 한 것은 경계의 성숙에 의지하여 공용행을 관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을 포섭합니다.”라고 한 것은 수행 경계에 의하여 아직 불법을 관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를 포섭합니다.”라고 한 것은 과보가 성숙하여 모든 불국토를 따름으로써 응당 부처님의 처소를 이루고 곧 부처를 이루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을 낳습니다.”라고 한 것은 수행선근성(修行善根性)이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를 낳습니다.”라고 한 것은 법의 궁극적 성품[法究竟性]이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을 낳습니다.”라고 한 것은 수행성(修行性)이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를 낳습니다.”라고 한 것은 마음이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차별분(因差別分)입니다.”라고 한 것은 무량한 선근을 거두고 취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차별분(智差別分)입니다.”라고 한 것은 무량하고 끝없는 법문을 마침내 완성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차별분(斷差別分)입니다.”라고 한 것은 한량없는 삼매문에 들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차별분(果差別分)입니다.”라고 한 것은 한량없는 신통분신(神通奮迅)을 뜻대로 자재하게 쓰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약초를 가져오는 방편과 같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번뇌의 병을 다스리는 법을 거두고 취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약초를 분별하는 방편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번뇌의 병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약을 알아서 다스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병이 들어 약을 복용하는 방편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모든 방편을 앎으로써 그에 상응하여 수용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병에 차도가 생겨나게 하는 방편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번뇌의 병이 멸하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법왕(法王)의 가문에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로부터 항복 받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법왕의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일체를 배워서 승처(勝處)를 얻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능히 법왕의 법을 배워서 구족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수도하여 뛰어난 과보를 얻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법왕의 법을 배워서 자재함을 능히 얻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일체법에서 능히 자재하고 걸림 없음을 얻기 때문이다.
문수사리보살문보리경론 하권[가야산정경론이라고도 한다]
천친 지음
보리류지 한역
이미령 번역
[論] 이미 보살공덕세력분을 모두 설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행차별분을 설하고자 한다.
[經] 이때 대중 가운데 정광명주(定光明主)라고 이름하는 어떤 천자가 있었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음을 얻었다. 그때에 정광명주천자가 문수사리법왕자에게 물었다.
“이 모든 보살마하살의 필경(畢竟)의 약도(略道)는 무엇이기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 약도로써 재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약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 두 길로써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방편도이고 둘째는 지혜도입니다.
방편이란 선법(善法)의 지혜를 포섭하여 아는 것이고, 지혜란 모든 법의 지혜를 여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또 방편이란 모든 중생지(衆生智)를 관하는 것이고, 지혜란 모든 법의 지혜를 여의는 것입니다. 또 방편이란 모든 법에 상응하는 지혜[法相應智]를 아는 것이고, 지혜란 모든 법에 상응하지 않는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또 방편이란 인도지(因道智)를 아는 것이고, 지혜란 인도지를 멸하는 것입니다.
[論] 법회의 주인이신 세존께서 친히 대중 가운데 계시는데, 어찌하여 문수사리에게 질문을 하는가? 이것은 모든 보살마하살의 공덕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이것은 어떤 뜻인가? 모든 중생이 보살에게 소홀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므로 그들로 하여금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함이다.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차별에는 두 종류의 도(道)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인청정도(因淸淨道)이고 둘째는 공덕청정도(功德淸淨道)이다.
인청정도란 뛰어난 인의 청정함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그 뛰어난 인의 청정함에는 네 종류의 발심(發心)을 설하는 것이 있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인가? 첫째는 조청정도(助淸淨道)를 설함이고, 둘째는 공덕지도(功德智道)를 설함이고, 셋째는 실제증도(實際證道)를 설함이고, 넷째는 여실수행도(如寶修行道)를 설함이다.
공덕청정도에는 여덟 종류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지혜를 취하여 일체 중생을 교화함이니, 경에서 “또 방편이란 선법지(善法智)를 포섭하는 것을 아는 것이고”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능히 일체중생의 모든 착하지 못한 행을 참는 것이니, 경에서 “지혜란 모든 법의 지혜[法智]를 여실하게 아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백정법(白淨法)을 모으는 것이니, 경에서 “또 방편이란 모든 중생지(衆生智)를 관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일체 보리분법을 관하는 것이니, 경 에서 “지혜란 모든 법의 지혜를 여의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모든 법의 화합하는 모양을 아는 것이니, 경에서 “또 방편이란 모든 법에 상응하는 지혜[法相應智]를 아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모든 법의 동일하지 않은 모양을 아는 것이니, 경에서 “지혜란 모든 법에 상응하지 않는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지혜란 모든 법에 상응하지 않는 지혜를 아는 것이다”라는 것은 갖가지의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중생을 교화할 수 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니, 경에서 “ 또 방편이란 인도지(因道智)를 관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갖가지 조도(助道)를 모으는 것이니, 경에서 “지혜란 인도지를 멸하는 것입니다” 라고 한 것과 같다.
이미 공덕청정도를 모두 설하였으니 다음에는 인청정도를 설하겠다.
[經] 또 방편이란 모든 법의 차별지(差別智)를 아는 것이고, 지혜란 모든 법의 무차별지를 아는 것입니다. 또 방편이란 불국토를 장엄하는 지혜[莊嚴佛土智]이고, 지혜란 불국토를 장엄하되 평등한 무차별지입니다. 또 방편이란 중생의 모든 근행지(根行智)에 들어가는 것이고, 지혜란 중생지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또 방편이란 도량지(道場智)에 이르는 것이고, 지혜란 능히 일체 불보리의 법의 지혜[法智]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論] 인청정도에도 여덟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법을 관하는 것이니, 경에서 “또 방편이란 모든 법의 차별지를 아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모든 법의 근본인 온갖 인연을 여의는 것이니, 경에서 “지혜란 모든 법의 무차별지를 아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장애를 떠나는 것이니, 경에서 “또 방편이란 불국토를 장엄하는 지혜”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화합을 끊는 것이니, 경에서 ”지혜란 불국토를 장엄하되 평등한 무차별지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여실지이니, 경에서 “또 방편이란 중생의 모든 근행지(根行智)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하나의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니, 경에서 “지혜란 중생지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일체범부의 허망한 분별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니, 경에서 “또 방편이란 도량지(道場智)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적정계(寂靜界)를 증득함이니, 경에서 “지혜란 능히 일체 불보리의 법의 지혜[法智]를 증득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經] 또한 천자여, 이른바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가지의 약도(略道)가 있으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 두 가지 길로써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조도(助道)이고, 둘째는 단도(斷道)입니다. 조도란 다섯 바라밀이고, 단도는 반야바라밀입니다.
또 두 종류의 약도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장애가 있는 길이고, 둘째는 장애가 없는 길입니다. 장애가 있는 길은 다섯 바라밀이고, 장애가 없는 길은 반야바라밀입니다.
또 두 종류의 약도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유루도이고, 둘째는 무루도입니다. 유루도는 다섯 바라밀이고, 무루도는 반야바라밀입니다.
또 두 종류의 약도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헤아릴 수 있는 길이고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길입니다. 헤아릴 수 있는 길은 모습을 취해서 분별하는 것이고, 헤아릴 수 없는 길은 모습을 취해서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두 종류의 약도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도(智道)이고, 둘째는 단도입니다. 지도는 초지(初地)에서 7지(地)까지이고, 단도는 8지에서 10지까지 입니다.”
[論] 또다시 두 종류의 약도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공덕도(功德道)이고 둘째는 지도(智道)이다. 공덕도란 갖가지 선근을 모으는 것이니, 경에서 “조도란 다섯 바라밀”이라고 한 것과 같다. 지도는 일체법에 통달하는 것이니, 경에서 “단도는 반야바라밀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 두 종류의 약도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첫째는 장애가 있는 길이고 둘째는 장애가 없는 길입니다. 장애가 있는 길을 다섯 바라밀이라고 한 것은 삼계에서 행하기 때문이니, 초지(初地) 이전이다. “장애가 없는 길은 반야바라밀입니다”라고 한 것은 삼계를 넘어서서 초지에 들어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 두 종류의 약도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첫째는 유루도이고 둘째는 무루도입니다. 유루도는 다섯 바라밀”이라고 한 것은 세간의 과보를 성취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초지 이전이다. “무루도는 반야바라밀입니다”라고 한 것은 출세간의 과보를 성취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이미 출세간의 지혜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 두 종류의 약도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헤아릴 수 있는 길이고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길입니다. 헤아릴 수 있는 길은 모습을 취하여 분별한 것”이라고 한 것은 인식의 경계를 두루 취하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는 길은 모습을 취하여 분별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것은 인식의 경계를 넘어서서 두루 취함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 두 종류의 약도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도(智道)이고 둘째는 단도(斷道)입니다. 지도는 초지에서 7지까지”라고 한 것은 유위의 세계를 여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단도는 8지에서 10지까지입니다”라고 한 것은 무위의 세계를 여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經] 이때 모임 중에 보살마하살이 있었는데, 이름을 용수행지(勇修行智)라고 하였다. 그가 문수사리법왕자에게 물었다.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뜻이고,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지혜입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선남자여, 뜻은 상응하지 않음이라고 이름하고, 지혜는 상응함이라고 이름한다.”
용수행지보살이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엇으로 뜻을 상응하지 않음이라고 이름하며, 무엇으로 지혜를 상응함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선남자여, 뜻은 무위라고 이름하나니, 그 뜻은 단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는 것이 없으며,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왜냐 하면 변함이 없고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뜻은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는 것이 없고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본래 불성취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는 것이 없으며,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는 뜻이란 것은 옮기지도 않고 더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지 않고,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論] 경에서 말하기를 “선남자여, 뜻은 상응하지 않음이라고 이름하고, 지혜는 상응함이라고 이름한다”라는 것은 실제로 네 종류가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뜻은 무위라고 이름하니 그 뜻은 단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는 것이 없으며,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변함이 없고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모든 덧없는 허물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뜻은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는 것이 없고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자체의 성품에 머물기 때문에 경에서 “본래 불성취의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는 것이 없으며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항상 진여법계의 실체로 머무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뜻이란 옮아가지 않고 더하지 않으며, 하나의 법이라도 함께 상응하지 않고 하나의 법이라도 합께 상응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하나의 법이라도 옮기지 않고 더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법계는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기 때문이다.
[經] 선남자여, 지혜(智慧)를 이름하여 도(道)라고 한다. 도는 마음과 함께 상응하는 것이지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여, 이런 뜻으로 지혜는 상응이라고 이름하니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선남자여, 지혜를 이름하여 단상응(斷相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남자여, 지혜를 이름하여 상응법이라고 하니 상응법이 아닌 것이 아니다.
또한 선남자여, 지혜를 이름하여 5음ㆍ12입ㆍ18계ㆍ12인연과 옳은 곳과 그른 곳을 잘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남자여, 이런 뜻이기 때문에 지혜를 이름하여 상응이라고 하며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論] 경에서 말하기를 “선남자여, 지혜를 이름하여 도라고 한다. 도는 마음과 함께 상응하는 것이지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이 이하부터 다음에는 증법계(證法界)를 설하기 위함이다. 세 종류의 구절에 여섯 종류의 열 가지 법이 있으니, 이것은 어떤 뜻을 밝히고자 함인가? 어떤 지혜로써 어떻게 증득하며, 어떤 뜻과 어떤 곳에 머물러서 능히 법계를 증득함인가? 어떤 지혜라는 것은 세 종류의 구절에 여섯 종류의 열 가지 법으로 나타내 보인다.
어떻게 세 종류의 구절로 어떤 지혜를 나타내 보인다는 것인가? 지혜를 도라고 이름하니, 도라는 것은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요 상응하지 않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선남자여, 이런 뜻으로 지혜(智慧)를 상응이라고 이름하니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 지혜는 권속과 함께 능히 법계를 증득하니 왜 그런가? 마음이 청정하므로 도가 청정하고 도가 청정하므로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선남자여, 지혜를 이름하여 단상응(斷相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남자여, 지혜를 이름하여 상응법이라고 하니 상응법이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공통의 의지(依止)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선남자여, 지혜를 이름하여 5음ㆍ12입ㆍ18계ㆍ12인연, 옳은 곳과 그른 곳을 잘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남자여, 이런 뜻이기 때문에 지혜를 이름하여 상응이라고 하며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가히 알 수 있는 경계를 여실히 알기 때문이다.
이미 세 종류 구절을 모두 설하였으니, 다음에는 여섯 종류의 열 가지 법을 설하겠다. 처음에는 열 가지 지혜를 설한다.
[經]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지혜가 있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인지(因智)이고, 둘째는 과지(果智)이고, 셋째는 의지(義智)이고, 넷째는 방편지(方便智)이고, 다섯째는 혜지(慧智)이고, 여섯째는 섭지(攝智)이고, 일곱째는 바라밀지(波羅蜜智)이고, 여덟째는 대비지(大悲智)이고, 아홉째는 교화중생지(敎化衆生智)이고, 열째는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는지[不著一切法智]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지혜라고 한다.[論] 경에서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지혜가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인지”라고 한 것은 무시이래 세상의 해탈종자(解脫種子)를 잘 알기 때문이다.
“둘째 과지”라는 것은 무시이래의 세상의 갖가지 업보를 여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셋째 의지”라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잘 알기 때문이다. “넷째 방편지”라는 것은 아주 작은 선근을 능히 늘려서 한량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섯째 혜지”라는 것은 능히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법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섭지”라는 것은 법시(法施)와 자생시(資生施:중생을 자량하는 보시)를 거두고 취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바라밀지”라는 것은 갖가지 선근을 잘 알아서 성취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대비지”라는 것은 선근에 의지하여 능히 선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홉째 교화중생지”라는 것은 때와 때 아닌 때를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 “열째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는 지이다”라는 것은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지혜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미 처음의 열 가지 지혜를 모두 설하였으니, 이어서 두 번째 열 가지 발(發)함을 설하고자 한다.
[經]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발함이 있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몸의 발함[身發]이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몸의 업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입의 발함[口發]이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입의 업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뜻의 발함[意發]이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뜻의 업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안의 발함[內發]이니, 일체 모든 중생을 허망하게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밖의 발함[外發]이니, 일체중생에 대해 평등하게 행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지혜의 발함[智發]이니, 부처님 지혜의 청정함을 갖추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청정국토의 발함[淸淨國土發]이니, 일체 모든 불국토의 공덕장엄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중생을 교화하는 발함[敎化衆生發]이니, 일체 번뇌의 병에 듣는 약을 알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실발(實發)이니, 정취(定趣)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열째는 무위지만족심발(無爲智滿足心發)이니, 일체 삼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발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論]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발함이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몸의 발함이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몸의 업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입의 발함이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입의 업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뜻의 발함이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뜻의 업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몸과 입과 뜻의 모든 악행을 멀리 여의게 하여 큰 정진을 발하게 하기 위함이다.
“넷째는 안의 발함이니”라는 것은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그곳을 배우게 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중생을 허망하게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밖의 발함이니 일체 중생에 대해 평등하게 행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미움이나 사랑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지혜의 발함이니, 부처님 지혜의 청정함을 갖추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교화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청정국토의 발함이니, 일체 모든 불국토의 공덕장엄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지혜를 들어서 뒤바뀜 없이 법을 구하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중생을 교화하는 발함이니, 일체 번뇌의 병에 듣는 약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일체법에서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실발이니, 정취(定趣)를 성취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여실하게 알아 마음이 상응함에 따라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열째는 무위지만족심발이니”라는 것은 실다운 법을 발하기 때문이며, “일체 삼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마음이 허망한 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실다우면서도 실답지 않은 마음으로 허망하게 취한 상을 여의기 때문이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발함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이미 두 번째의 열 가지 발함을 설하였다. 이어서 세 번째 열 가지 행함을 설하고자 한다.
[經]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행이 있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바라밀행이고, 둘째는 섭사행(攝事行)이고, 셋째는 혜행(慧行)이고, 넷째는 방편행이고, 다섯째는 대비행이고, 여섯째는 구조혜법행(求助慧法行)이고, 일곱째는 구조지법행(救肋智法行)이고, 여덟째는 마음의 청정행이고, 아홉째는 모든 진리를 관하는 행[觀諸諦行]이고, 열째는 일체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모든 일에 탐착하지 않는 행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행이라고 하는 것이다.[論] 경에서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행이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바라밀행”이라는 것은 보리법을 도와서 만족하기 때문이다. “둘째 섭사행”이라는 것은 능히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셋째 혜행”이라는 것은 생멸법을 여실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넷째 방편행”이라는 것은 일체법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다섯째 대비행”이라는 것은 마음이 열반을 구하거나 증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 구조혜법행”이라는 것은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얻기 때문이다. “일곱째 구조지법행”이라는 것은 일체법을 자연히 얻기 때문이다. “여덟째 마음의 청정행”이라는 것은 일체법에서 의혹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 모든 진리를 관하는 행”이라는 것은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열째, 일체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모든 일에 탐착하지 않는 행”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미워하거나 좋아함을 멀리 여읜 것이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행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미 어떤 지혜인가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어떻게 증득하는 것인가를 설하겠다. 네 번째의 열한 가지 무진관(無盡觀)을 나타내 보인다.
[經]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한 가지 무진관이 있다. 어떤 것이 열한 가지인가? 첫째는 몸의 무진관이며, 둘째는 일[事]의 무진관이고, 셋째는 번뇌의 무진관이고, 넷째는 법의 무진관이고, 다섯째는 애(愛)의 무진관이고, 여섯째는 견(見)의 무진관이고, 일곱째는 조도(助道)의 무진관이고, 여덟째는 취(取)의 무진관이고, 아홉째는 불착(不著)의 무진관이고, 열째는 상응의 무진관이며, 열한째는 도량지성(道場智性)의 무진관이다. 선남 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한 가지 무진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論] 경에서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한 가지 무진관이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열한 가지인가? “첫째는 몸의 무진관이다”라고 한 것은 성스럽거나 성스럽지 않은 유위ㆍ무위의 몸을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둘째, 일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참답거나 참답지 않은 것을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셋째, 번뇌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깨끗하거나 더러운 법을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넷째, 법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상, 중, 하의 모든 법을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애(愛)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법을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견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뒤바뀌거나 뒤바뀌지 않은 견해를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조도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갖가지 법문으로 선근을 닦고 모아서 대보리에 회향하는 것을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취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끝없는 중생세계를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아홉째 불착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한 것에 집착하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열째 상응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바른 뜻이거나 바르지 못한 뜻을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열한째 도량지성의 무진관”이라는 것은 중생의 믿음에 따라서 도량에 앉은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한 가지 무진관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미 어떻게 증득하는가를 설하였다. 이어서 어떤 뜻인가를 설하겠다. 다섯 번째의 열 가지 대치법을 나타내 보인다.
[經]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대치법(對治法)이 있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아끼고 탐내는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비 내리듯 보시하는 것이다. 둘째는 파계심을 대치하는 것이니, 몸과 입과 뜻의 업인 세 가지 법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성내는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청정한 대자비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게으른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법을 구할 때에 피로하거나 싫증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선하지 않은 각관심(覺觀心)을 대치하는 것이니, 선정을 얻어서 해탈하여 신통력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어리석은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결정된 지혜를 도와서 방편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모든 번뇌의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조도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뒤바뀐 길을 대치하는 것이니 참다운 진리의 조도(助道)를 모아서 뒤바뀐 길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자재하지 못한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법의 때이거나 때 아닌 때에 자재함을 얻는 것이다. 열째는 ‘나’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니, 모든 법이 무아임을 관하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대치법이라고 한다.[論]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대치법이 있다”라고 한 것은 10바라밀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단[檀]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아끼고 탐내는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비 내리듯 보시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시(尸)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파계심을 대치하는 것이니 몸과 입과 뜻의 업인 세 가지 법이 청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찬제(羼提)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성내는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청정한 대자비를 수행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비리야(毘離耶)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게으른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법을 구할 때에 피로하거나 싫증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선(禪)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선(善)하지 않은 각관심(覺觀心)을 대치하는 것이니 선정을 얻어서 해탈하여 신통력이 자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반야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어리석은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결정된 지혜를 도와서 방편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방편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모든 번뇌의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조도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원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뒤바뀐 길을 대치하는 것이니 참다운 진리의 조도(助道)를 모아서 뒤바뀐 길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역(力)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자재하지 못한 마음을 대치하는 것이니, 법의 때이거나 때 아닌 때에 자재함을 얻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째는 지(智)바라밀의 청정이니, 경에서 “나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니 모든 법이 무아임을 관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대치법이라고 한다”고 한 것과 같다.
이미 어떤 뜻인가를 설하였다. 다음에는 어디에 머무는가를 설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의 열 가지 적정지(寂靜地)를 나타내 보인다.
[經]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의 적정지가 있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몸의 적정이니 세 가지 몸의 착하지 않은 업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입[口]의 적정이니 네 가지 입의 업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음의 적정이니 세 가지 뜻의 악행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넷째는 안[內]의 적정이니 제 몸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외경계의 적정이니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지공덕(智功德)의 적정이니 도(道)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승적정(勝寂靜)이니 성지(聖地)를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미래제의 적정이니 피안의 지혜로 행함을 돕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행한 바 세속의 일의 적정이니 일체 중생을 속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째는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적정이니 대자비심으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적정지라고 하는 것이다.
[論] 경에서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적정지가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몸의 적정이니 세 가지 몸의 착하지 않은 업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입의 적정이니 네 가지 입의 업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음의 적정이니 세 가지 뜻의 악행을 여의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세 가지 계가 잘 청정해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안의 적정이니 제 몸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삿된 아견(我見)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외경계의 적정이니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항상하거나 무상한 법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지공덕의 적정이니 도(道)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물질이 있거나 물질이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일곱째는 승적정이니 성지(聖地)를 여실하게 관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지를 보지 않고 모든 불보살의 성스러운 지위를 여실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미래제(未來際)의 적정이니 피안의 지혜로 행함을 돕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모든 모습에 허망하게 취착하는 것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아홉째는 행한 바 세속의 일의 적정이니 일체 중생을 속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세속의 진리와 제일의제를 여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열째는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적정이니 대자비심으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중생을 교화함으로써 온갖 처소에 태어나도 피로하거나 싫증내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적정지라고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미 법계를 증득하는 것을 설하였다. 이 다음부터는 이어서 모든 보살마하살이 수순하여 여실하게 수행하는 뜻을 설하고자 한다.
[經]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여실하게 수행하여 보리를 얻지 여실하지 않게 수행하여 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여, 어떤 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선남자여, 여실하게 수행한다는 것은 설한 바대로 능히 행하는 것이다. 여실하지 않게 수행한다는 것은 단지 말만 있을 뿐 능히 여실하게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또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지(智)를 여실하게 수행하는 도이고, 둘째는 단(斷)을 여실하게 수행하는 도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자신을 조복하는 여실한 수행이고, 둘째는 중생을 교화하는 여실한 수행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공용지(功用智)를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공용지(無功用智)를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모든 지(地)를 잘 알아서 분별하여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지의 차별 없는 방편을 잘 알아서 분별하여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모든 지(地)의 허물을 여의고서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지와 지를 굴리는 방편을 잘 알아서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성문ㆍ벽지불지(地)를 능히 설하여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불보리의 물러섬 없는 방편을 잘 알아서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論]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여실하게 수행하여 보리를 얻지 여실하지 않게 수행하여 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여, 어떤 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여실하게 수행한다는 것은 설한 바대로 능히 행하는 것이다. 여실하지 않게 수행한다는 것은 단지 말만 있을 뿐 능히 여실하게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은 말한 바대로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니 앞서의 말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또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지(智)를 여실하게 수행하는 도이고, 둘째는 단(斷)을 여실하게 수행하는 도이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를 여실하게 알고 증득하였지만 그곳을 구경으로 삼아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자신을 조복하는 여실한 수행”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미묘한 도를 취하여 여실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중생을 교화하는 여실한 수행”이라는 것은 다른 중생을 교화하여 바른 도에 들어가도록 여실하게 법을 말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다.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공용지(功用智)를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은 마음을 내어 보살행을 하는 공용지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공용지(無功用智)를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보살이 수도(修道) 중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않고 보살행을 하는 무공용행지(無功用行智)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모든 지(地)를 잘 알아서 분별하여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은 지혜와 방편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든 지의 차별 없는 방편을 잘 알아서 분별하여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습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모든 지(地)의 허물을 여의고서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은 두 극단을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와 지를 굴리는 방편을 잘 알아서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선한 법을 수행함에 있어서 쉬지 않고 정진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성문과 벽지불지를 능히 설하여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은 일체법을 잘 배우기 때문이다. “둘째는 불보리의 물러섬 없는 방편을 잘 알아서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은 진여법을 증득하여 여실하게 알고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다. 경에서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두 종류의 여실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經]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고 가없는 여실한 수행이 있으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여실한 수행을 배워야한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여실하게 수행한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되 곤란함이 없을 것이다.
[論] 네 가지의 뛰어난 인(因)을 수행하고, 네 가지 뛰어난 과보와 나머지를 성취하여 여실한 수행을 하기 때문이니, 그 뛰어난 과보란 것은 모든 여래의 지혜로 일념(一念) 속에 3세의 일을 알아서 모두 상응하기 때문이다.
[經] 이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법왕자를 칭찬하시며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구나, 문수사리여, 그대는 지금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본업도(本業道)를 능히 잘 설명하였으니,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論] ‘장하다’라는 것은 뒤바뀌지 않게 법을 설하였기 때문이니,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을 잘 따랐기 때문이다.
[經] 이 법을 설할 때에 십천(十千)의 보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문수사리법왕자 등과 일체 세간ㆍ하늘ㆍ인간ㆍ아수라 등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두가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論] 세 가지의 뜻이 있어서 환희한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설법하는 자가 청정한 것이니, 모든 법에 있어서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설해진 법이 청정한 것이니, 청정한 법의 본체를 여실하게 증득하여 알기 때문이다. 셋째는 설해진 법으로 얻게 되는 과보가 청정함이니, 깨끗하고 미묘한 경계를 얻기 때문이다. 경에서 “모두가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라고 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