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xXDT2Brc
가난 / 문병란
논 닷 마지기 짓는 농부가
자식 넷을 키우고 학교 보내는 일이
얼마나 고달픈가 우리는 안다
집 한 칸 없는 소시민이
자기 집을 마련하는 데
평생을 건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네 명의 새끼를 키우고
남 보내는 학교 보내고
또 짝을 찾아 맞추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뼈를 깎는 아픔인가를
새끼를 키워 본 사람이면 다 안다
딸 하나 여우는데 기둥뿌리가 날라가고.
새끼 하나 대학 보내는 데 개똥논이 날라간다
하루 여덟 시간 하고도 모자라
안팎으로 뛰고 저축하고
온갖 궁리 다 하여도 모자란 생활비
새끼들의 주둥이가 얼마나 무서운가 다 안다
그래도 가난은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가?
쑥구렁에 옥돌처럼 호젓이 묻혀 있을 일인가?
그대 짐짓 팔짱 끼고 한눈파는 능청으로
맹물을 마시며 괜찮다 괜찮다
오늘의 굶주림을 달랠 수 있는가?
청산이 그 발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키울 수 없다
저절로 피고 저절로 지고 저절로 오가는 4계절
새끼는 저절로 크지 않고 저절로 먹지 못 한다
지애비는 지에미를 먹여 살려야 하고
지어미는 지애비를 부추겨 줘야 하고
사람은 일 속에 나서 일 속에 살다 일 속에서 죽는다 타고난 마음씨가 아무리 청산 같다고 해도
썩은 젓갈이 들어가야 입맛이 나는 창자
창자는 주리면 배가 고프고
또 먹으면 똥을 싼다
이슬이나 바람이나 마시며
절로절로 사는 무슨 신선이 있는가?
보리밥에 된장찌개라도 먹어야 하는
사람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
사람은 밥 앞에 절을 한다
그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전 우주가 동원된다고 노래하는 동안
이 땅의 어느 그늘진 구석에
한 술 밥을 구하는 주린 입술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결코 가난은 한갓 남루가 아니다
입었다 벗어 버리는 그런 헌 옷이 아니다
목숨이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
물끄러미 청산이나 바라보는 풍류가 아니다
가난은 적, 우리가 삼켜 버리고
우리의 천성까지 먹어 버리는 독충
옷이 아니라 살갖까지 썩어 버리는 독소
우리 인간의 적이다 물리쳐야 할 악마다
쪼르륵 소리가 나는 뱃속에다
덧없이 회충을 기르는 청빈낙도
도연명의 술잔을 흉내내며
괜찮다 괜찮다 그대 능청 떨지 말라
가난을 한 편의 시와 바꾸어
한그릇 밥과 된장국물을 마시려는
저 주린 입을 모독하지 말라
오 위선의 시인이여, 민중을 잠재우는
자장가의 시인이여
-------------------
위의 시는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국화 옆에서」, 「내리는 눈발 속에서」 등의 여러 구절들을 발췌ㆍ조립하였다. 문병란의 이 「가난」은 한 끼 밥이 절실한 가난한 민중의 삶과 유리된 서정주의 시세계와 그의 ‘구부러짐’의 태도를 준엄하게 꾸짖는 비판시다. 따라서 문병란 시인의 어조는 여간 신랄하지 않다.
* 여우다: 딸을 시집보내다. 멀리 떠나보내다.
무등을 보며 /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현대공론, 1954년)
*미당 스스로가 가장 사랑하는 ‘시’
https://naver.me/F5DjnCLO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서정주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 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끼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얘기 작은 이얘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그리며 안끼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끼어 드는 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