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신사임당아카데미 제 8차 정기답사 안내
답사일시 : 2008년 2월 22일(금) 오전 9시 대구시청 앞 출발 오후 6시 도착예정
답사장소 : 순천 송광사(한국의 3보 사찰 가운데 하나로 승보사찰임)
답사준비 : 간편한 복장으로 우천시에도 출발(카페 게시판에 사전예약 바람, 당일 접수 불가)
답사경비 : 1인당 2만원(교통비, 관람료, 식대 등)
*2008년 첫 답사입니다. 보고픈 얼굴, 한국을 대표하는 고찰에서 추억을 만들어 보세요.
수료한 선배 회원님들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광사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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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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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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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대사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새로운 규모로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지눌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지눌은 9년동안의(명종 27년, 1197~희종 원년, 2004) 중창 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 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드디어 송광사가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거조사로부터 길상사로 정혜결사를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정혜사라는 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산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바꾸었다. 뒤에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불리게 되어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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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이 타계한 다음 그의 법을 이는 진각 혜심(眞覺 慧諶) 스님은 수선사의 전통을 이어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다시 절이 비좁게 되었다. 강종(康宗)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리어 절을 크게 증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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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심 스님이후 180년이 지난 조선조 초 16국사의 마지막 분인 고봉화상께서 원을 세워(1395년) 유서 깊은 도량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고봉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中印)선사께서 중창 불사를 완성하여 90여 칸의 증축을 하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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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으로 침입한 왜군이 불을 질러 역사적 도량은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에 응선(應禪)화상께서 복구의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지리산에 계시던 부휴 대사를 모시어 불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때 600여 명의 제자들이 송광사에서 부휴 대사의 지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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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8년(1842)에 큰불이 나 대웅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정유재란 이후 두번째 겪는 수난이었다. 불이 난 이듬해부터 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시작되어 철종 7년(1856)까지 무려 14년의 시간이 걸려 2,150여 칸이 다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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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중창으로부터 70, 80년 뒤인 1922년에 주지 설월(雪月)스님과 율암(栗庵)스님에 의하여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들을 고치고 개와를 바꾸는 등 전반적인 중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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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과 6.25사변의 발발은 조계산 송광사 일대를 공비의 노략과 살육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산중에 은신한 이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국군 토벌대는 작전상 절 주변의 숲을 벌채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공비들이 1951년 2월 절을 지키던 노인들을 학살하고 5월에는 절에 불을 질러 대웅전등 중심부를 불태워 버렸다. 1955년부터 주지 금당(錦堂)스님과 화주 취봉(翠峰)스님의 원력으로 5년 동안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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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九山)스님께서는 승보 종찰다운 도량을 가꾸어야 된다는 원력에, 사부대중이 뜻을 함께하여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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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도 계속하여 관음전, 문수전, 정혜사(定慧社) 등의 해체 중창과 산내암자 복원불사 및 국보 국사전과 국가보물인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 등의 보수를 하였고, 특히 2000년부터 임경당, 해청당, 사자루, 응진전, 불조전, 월조헌, 취정루 등의 중요 건물을 대대적으로 해체 보수하고 종무소, 선호당(善護堂), 다송원(茶松苑), 효봉영각, 수석정, 죽림정사, 목우농원 등을 신축 또는 중창하여 현재 80여 동(棟)의 장엄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지금도 계속하여 산문 진입로의 옛길 복원 및 건물 보수불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송광사에서는 전국 사찰 가운데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보 제42호인 목조삼존불감, 국보 제43호인 고려고종제서, 보물 제572호인 수선사형지기, 보물 제1366호인 화엄탱화, 보물 제1376호인 티베트문법지 등 기타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와 고문서(古文書) 전적류(典籍類)의 과학적인 보수(補修) 및 보존처리와 체계적인 자료정리를 계속하면서, 성보박물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각종 특별전시회를 기획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조계총림의 선원, 율원, 강원에서는 150여명의 스님네가 모여 보조국사의 정혜결사정신을 이어 여법히 정진하면서 내실(內實)있는 수행불사(修行佛事)를 진행 중이다. 또한 해마다 유명한 여름수련회와 각종 세미나를 열고 사보(寺報) 발간 및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포교하면서 제4의 사이버 종찰(宗刹)이 되도록 정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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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진리에 눈뜬 사람으로 26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깨친다음 우리를 위해 설하셨던 내용으로 오늘날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끝으로 승가는 스님들과 신도들로 구성된 신앙공동체를 가리킨다. 실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승가를 통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승되어 오고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은 진리의 길을 먼저 걸어 깨치셨던분으로 그 길을 우리들에게 친절히 가리켜 주시는 길잡이(導師)요, 가르침은 그 길을 표시하고 있는 지도나 이정표와 같고, 승가는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길동무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보배인 삼보는 거기에서 그치지않고 더욱 내면화되어 바로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잇는 참마음을 가리킨다. 원효스님께서도 "돌아가는 바 그 하나인 마음(一心)이 바로 삼보인 것이다"라고 확언하고 계신다. 곧 우리들 본래의 마음이 다름아닌 부처요 진리며 승가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승가를 가장 귀한 보배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세계, 진리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으며 우리들 존재의 원천인 본래의 나, 참 나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값이 없는 보배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다. 불교의 신앙은 바로 그 보배를 향해 가는 것이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하는 이른바 삼귀의(三歸依)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 보다도 보배롭고 소중한 세가지 보배를 향해 내 모든 것을 다하겠습니다 하는 의지의 표현이 삼귀의인 것이다. 따라서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하는 말은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를 고백하는 서원이요 다짐이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 승가야말로 불교를 받치는 세 기둥이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가지 요소이다. 그래서 한국 불교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 보배를 가리키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고 한다. 곧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전남 순천의 송광사이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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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두 가지 사실에 연유한다. 첫제는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전 고려 때 보조 국사(普照國師 知訥)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그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바로 송광사였다.
다른 하나는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열다섯명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모두 열여섯명의 국사(十六國師)가 나와 한국 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야말로 한국 불교 전통의 산실이요 또 그 전통을 잇고 있는 중요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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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승보종찰 송광사에는 16국사를 상징해서인지 16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보조국사께서 창건하신 보조암(普照庵 ; 일명 本庵)을 중심으로 한 은적암(隱寂庵 ; 東庵)·광원암(廣遠庵 ; 西庵)·묘적암(妙寂庵 ; 南庵)·북암(北庵)과 천자암(天子庵)·청진암(淸眞庵)·자정암(慈靜庵)·감로암(甘露庵)·부도암(浮屠庵)·조계암(曹溪庵)·판와암(板瓦庵)·실상암(實相庵)·상선암(上禪庵)·상염불암(上念佛庵)·하염불암(下念佛庵)을 말한다.
그 가운데 현존하는 암자는 광원암· 천자암· 감로암· 부도암· 자정암(현재 佛日庵)· 판와암(현재 印月庵)뿐이며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과 탑전(塔殿 ; 寂光殿)이 있다. 보조암·은적암·묘적암·청진암·조계암·실상암(1994년 확인)·상선암(1994년 발견)은 터가 남아 있으나 북암·상염불암·하염불암은 이름만 전할 뿐이다
이 외에 수석정 부근에 1940년에 효봉(曉峰)스님께서 세우고 정진하시던 목우암(牧牛庵), 1975년에 구산(九山)스님께서 조계산과 연산봉 사이에 초암을 지어 정진하시던 인월정사(印月精舍), 절 입구 외송(外松)마을 뒷산에 있었다는 빈대절(?)은 터만 남아 있으며, 이름 모를 암자터가 6개소 이상 알려져 있다.
산내에 현존하는 국사 부도는 1세 보조국사·2세 진각국사·3세 청진국사·6세 원감국사·7세 자정국사·8세 자각국사·16세 고봉국사 등 7기이며, 말사인 대원사(大原寺)에 5세 원오국사·영광 불갑사에 13세 각진국사의 부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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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익한 답사가 될것입니다 많은참여 있으시길 기원합니다...송광사에서 가까운 작고아름다운절불일암(법정스님)에도 들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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