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불교 전성기에 무루선사라는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 무루선사는 일찍 출가하여 당나라에 유학을 갔습니다.
멀리 서천역국이라는 중앙 아시아를 지나 머나 먼 길을 걸어 인도의 부처님 유적을 순례하려고 하여 사막을 거쳐 우진국(인도 가기 전 중앙 아시아의 나라)을 지나 독용지라는 연못에 이르러 쉬게 되었습니다. 길이 험준할 뿐더러 계속 되는 고행에서 지친 무루선사는 노곤한 몸을 기대 앉아 비몽사몽간에 잠들게 되었습니다.
꿈에 한 괴물이 나타나서 더운 기운을 내 뿜으면서 백천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나중에는 큰 구렁이로 변하여 스님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 놓고 은근한 태도를 보이기에 불쌍히 여겨 탈바꿈 하도록 지성으로 삼귀의와 불법을 설하였더니 스스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다시금 천둥이 치고 조금 있다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까 스님의 설법을 들은 구렁이 입니다. 스님의 제도하심을 입어 기어 다니는 파충류의 고통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직접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나 여기서 남쪽으로 한마장 가량 가면 큰 바위 밑에 관세음보살이 계시는데 기도하여 보시면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무루스님께서는 하도 소상한 꿈이었으므로 지시대로 가보니 거룩한 관세음보살 상이 있기에 49일 동안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별로 자지도 못하고 세수도 못하고 일심정진 기도 하였는데 다 채우지 못하고 뜻밖의 종기가 나서 고통을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을 기대거나 아픔에 굴복하지 않고 그대로 49일간 기도를 끝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끝나는 날에는 난데없는 일진광풍이 일면서 누런 고름이 흘러 아픔도 가시게 되었습니다.
기이하게도 당나라 숙종 임금은 그곳 가까운 별궁을 다녀가다가 이 소식을 듣고 무루선사를 찾아뵙고 스님의 원대로 그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큰 절을 짓게 하였습니다. 스님은 절을 짓는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방방곡곡으로부터 모인 많은 대중들을 많이 교화하여 부처님의 빛을 들어냈다고 합니다. 일단 공사를 끝내고는 아무런 상도 없이 홀연히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불교신문에서-
<감상>
당나라 현장법사는 20명이 출발하여 12년 동안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20명 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2~3명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풍토병으로 인해서 사망하고 돌아오지 못하여 얼굴을 고향쪽을 향해 죽었답니다.
그리 험하고 먼 고행의 여행입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에도 혜초스님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스님들이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대다수 순례자들은 순례 중 기도원력으로 큰 힘이 되어 잘 회향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정의를 하면 광덕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믿고 본래 완전한 진리의 공덕이 자신과 환경에 나타나게 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가피의 문제는 공덕과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이제부터는 그간 알고 있었던 기도 공덕에 대한 생각을 뒤집어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먼저 세상에 대해 자비스러운 마음을 내고 공덕을 쌓아야 한다. 무형의 것이든 유형의 것이든 남에게 항상 베풀어주는 보시를 통해 선업을 쌓아가면서 간절한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의지를 키워가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기도의 인연은 언젠가는 때에 맞춰 꽃을 피울 것이며, 그것이 기도임을 알 때 부처님의 가피라는 큰 힘도 느낄 수 있다.
인도 아잔타 석굴 내부
달라이라마께서 여름에 머무르는 사찰
부처님 다비식 행한곳 쿠시나가르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감사합니다_()_()_()_
불상 중에 옷을 입지 않은 불상은 자이나교 교주 마하비라좌상이지요....똑 같은 형상인데 옷을 입고 있으면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옷을 입고 있지 않으면 자이나교 교주 마하비라가 됩니다....아잔타 석굴에 부처님은 마라비라 좌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