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기록이 참 많은 스포츠입니다.
그 선수가 무언가를 해낼 확률
또는 그 선수가 해낸 것의 합을 참 많이 구하죠
그러다보니 온갖 기록이 있고
야구를 오래 본 팬들조차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기록도 많습니다.
저도 기록을 비교적 많이 보는 편인데
wRC+가 무엇인지, RC/27은 뭔지, WPA가 뭔지 설명하라고 하면, 구체적인 공식까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기록을 흔히 스탯이라고 하죠.
저는 그 숫자를 아주 깊이 파거나 맹신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록은 의미 없어'라고 생각하는 스타일도 아닙니다.
<기록으로 표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많이 있다>는 말을 신뢰하지도 않고
"어쩌다 한두번, 기록과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표본이 많아지면 결국 기록과 비슷해진다"고 믿는 편이거든요.
물론 기록이 가진 분명한 한계도 있습니다.
과거의 성과들을 잘 정리해서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명확하게 내려주지는 않거든요
앞으로 어떤 추세를 보일 것 같다는 정도의 판단은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다만, 저는 그것을 한계라고 믿기보다는, <느낌보다는 그래도 더 정확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적표가 그 사람의 학업능력을 모두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고사 성적표와 기말고사 성적표가 대부분 비슷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돌이켜보면, 처음 야구 볼 때는 기록 대신 <이름>을 봤습니다.
사실 기록은 복잡하고, 예전에는 그런걸 찾아볼 곳도 별로 없었죠.
게다가, TV에서 우연히 야구 보고 흥미를 느낀 초딩에게 무슨 기록 같은게 있었겠어요.
그냥 <장종훈> <송진우> <선동열> 하면 거기서 오는 기대치나 느낌, 또는 두려움 같은 게 있었고
그건 <정회열> <조양근> <이국성> 같은 이름에서 나오는 기대치나 느낌과는 분명히 달랐으니까요.
그러다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기록은 (뭐 다들 비슷하겠지만)
타율과 홈런, 그리고 방어율(요즘은 평균자책이라고 부르죠)과 다승이었습니다.
요즘도 가장 직관적인 기록이고
선수들의 인기나 MVP 또는 신인왕 투표에서 보이지 않는 가중치를 받는 숫자기도 하죠.
그런 기록들은 아주 간편했습니다.
.253
.287
.316
이러면 대충 감이 왔거든요.
253은 허접 / 287은 그럭저럭 / 316은 "좋았어, 한 방 날리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됐으니까요.
투수 기록도 2.15 15승 / 3.87 04승
이래도 대충 감이 왔고요.
(3.87도 요즘은 아주 잘해보이는데, 쌍팔년도 야구에서 3.87이면 어디가서 이름 못 내밀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다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출루율이었습니다.
야구를 계속 보면서 생각해 봤거든요.
이 게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건 뭐하는 게임인가. 야구의 룰은 결국 뭔가.
처음에는 야구가 <던지고 치고 달리는 공놀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다른 구조가 보이더라고요.
<어느 팀 주자가 더 여러 바퀴를 도는지 겨루는 놀이>
<그래서, 많은 바퀴를 돌려면 자꾸 나가야 되는 시합>
그때부터 참 어렵더군요.
타율은 3할이면 예술이고 2할 8푼이면 그럭저럭. 뭐 이런 기준이 머릿속에 있는데
출루율은 잘 모르겠어서요
4할 이상이면 괴물이라고는 하는데, 어느 정도 숫자가 잘하는건지 감이 딱딱 안 오더라고요.
게다가 출루율을 확인하는 방법도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귀찮았고요
아무튼 그렇게 출루율이라는 기록에 관심을 갔다가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상대를 내보내지 말아야 되는게 중요하구나>
<아, 그래서 야구를 투수놀음이라고 했구나>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WHIP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시작했죠
이것도 출루율과 똑같은 불편함이 있었는데
자꾸 보기 시작하니까 그럭저럭 괜찮았고
다른 선수와 비교해보니까 조금씩 감이 왔습니다.
그때부터 여러가지 기록들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들을 숫자로 기록해내려고 애쓴 야구 덕후 선배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옛날 선수들과 요즘 선수들, 그리고 다른구단 선수들을 각각 비교해보는 재미도 알게 됐고요.
한때 유행하던 TA라는 스탯을 보면서 <타자 중에 역대 최고는 94이종범이구나>라는 결론을 내렸고
1번부터 9번까지 전부 이정훈인 타선하고
1번부터 9번까지 전부 이영우인 타선이 싸우면 누가 더 점수를 많이 낼까? 그런 뻘상상을 해보다가
바로 그걸 예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RC/27 같은 신기한 기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ㅇㅇㅇ 없었으면 등수가 3등은 떨어졌을거다>라는 글을 보면서
한 선수가 쏙 빠졌을때의 승수를 예상해볼 수 있는 WAR이라는 기록도 알게 된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많은 기록들이 아직 직관적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타율과 평균자책을 보는게 가장 익숙하거든요. (초딩때부터 봤으니까)
.324타자와 .275타자의 차이는 눈에 딱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3.67투수와 5.49투수의 차이도 그냥 한 눈에 보이(것 같은 기분이 생기)는데
WAR 4.65와 6.05는 어느 정도 격차인지 오히려 느낌이 잘 안 오(는 것 처럼 생각되)죠
WHIP 1.15와 1.33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복잡한(?) 기록들을 이럴때만 주로 활용합니다
그 선수를 다른 선수와 비교해봐야 할 때
뛰던 시절 리그에서 그의 기록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가늠해야 할 때
허구연과 故하일성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타자가 3할이라면, 그 3할의 확률이 어느 시점에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야구가 재밌다고 말입니다.
10번에 3번 치는 타자면, 앞으로도 10번에 3번을 칠 확률이 높은 것은 사실인데
그 3번이 여기인지, 다음 타석인지 모르니까 재밌다는 의미겠지요.
저는 그래서 기록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머릿 속 이미지로 남아있는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비교해보거나
(지금 이 시점의 결과는 예측불가지만) 앞으로의 방향성을 예측해보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서 말입니다.
슬램덩크에서 서태웅이 그런 말을 하죠
"바스켓은 산수가 아니다"라고
그런데 야구는 (그리고 바스켓도) 숫자로 굉장히 많은 부분을 표현할 수 있어서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번 타석에 얘가 안타를 칠지
오늘 누가 이길지를
그 숫자로 다 맞추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첫댓글 야구의 최대매력은 기록의 스포츠라는 것이죠. 이런저런 확률을 따져보고, 누가누가 잘하나 비교적 객관적인 수치로 비교해볼 수 있는게 다른 스포츠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꾸준한 선수들을 좋아해서 통산기록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점에서 투수쪽에서 류현진이 송진우 기록을 깰 수 있을지가 큰 관심사였는데 물건너갔고, 이제 타자쪽에서 김태균이 많은 부분에서 이승엽, 양준혁의 기록을 얼마나 넘어설지 희망과 기대로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