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아름다운 만남
어릴 때는 늘 보면서 자랐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린 자랐고 서로 하는 일이나 살아가야 하는 곳도 달라서 하나둘씩 떠나갔고 이젠 모교회인 대구서현교회에 그대로 남아있는 선후배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한 학년이 백 명도 더 되었으니 지금 몇 명이 남아있는 것은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자라지 않은 사람이나 결혼해서 서현교회로 온 사람들이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있다. 서현교회 출신의 동문들 만큼 서로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보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만큼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함께 자라온 우리의 사랑과 우정은 대단히 강하고 친밀한 것이어서 보통 사람들 보기에는 특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면 우린 자주 만나고 자주 지난 아름다운 날들을 얘기하며 그리워한다.
오늘도 또 한 번의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만남을 마치고 돌아와서 이내 노트북을 펼치고 글을 쓴다.
‘우리의 사랑 이야기’ 말이다.
대구 남쪽 수성못 자락에 있는 괜찮은 식당에서 즐겁게 식사를 한 후 후배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로 옮겨 티타임을 가진 것이 오늘(2024년 7월 27일, 토요일)의 일정이다. 그리고 밥값은 늘 맏형님인 의정형이 냈다(참고로 나는 의정형에게 지난 50년 세월 동안 무수히 밥을 얻어 먹고있는 중이다).
우리가 모이면 모두 국외파일 때가 많다.
오늘 모인 우리만 해도 리비아에서 일했거나 벨기에와 유럽에서, 독일과 미국,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업가로 지내고 있거나 긴 세월을 보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맏형인 박의정 장로님은 대우건설 직원으로 리비아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대우건설 직원이기보다는 선교사로 더 충성된 나날을 보냈고 귀국하여 대학교수로 지내다 얼마 전 퇴임한 후 지금은 개인사무실을 운영 중이다. 의정형의 장남은 사회사업전문가로 일하고 있고 같은 일을 하는 아내와 함께 아들 ‘이헌’을 잘 양육하고 있다. 둘째는 계명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현재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있다.
나이 순서대로 나는 1988년~1989년 두 해 동안 대구성명여중 교목실에서 일 한 후 1989년 여름, 벨기에로 가서 그곳 선교사로 일하며 현지교회를 섬기고 또 벨기에와 영국에서 공부도 하고 선교사로 사역도 하고 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필리핀을 찾아가 그곳에서 여러 사역들을 진행하기도 한다(특별히 감사한 것은 우리 서현교회 출신인 귀한 후배 서성헌 목사님이 시무하고 있는 대구일광교회에서 우리 필리핀 사역지에 교회를 개척한 것이고 그 교회가 성장하여 자력으로 다른 교회를 다시 개척한 일이다. 이는 선교의 좋은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1998년 12월, 부산 고신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아내를 만나 결혼 후 늦게 아들을 낳아 길렀고 그 아이가 이제 만 12세가 된 지난 6월 3일(2024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음대 피아노과에 응시하여 교수 6인 만장일치로 12세 최연소 수석합격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다음은 기진이다.
모교회 남아있는 동생이며 함께 자란 교회 후배인 피아노 전공자 경희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슬하에 지민, 에스더 두 딸을 두었다.
기진의 아내 경희는 우리가 젊은 시절에 남성 중창팀(Grace)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각종 중창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다) 전속 반주자로 늘 수고해주었고 그 중창팀의 막내였던 기진과 결혼하였다. 큰딸 지민은 경북대 피아노과를 마친 후 현재 유망한 전문 피아니스트로 활약 중이고 막내 에스더는 계명대 성악과를 마친 후 모교인 신명고에서 음악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송병기 목사는 내가 많이 좋아하는 동생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백 명에 가까운 젊은 청년들과 함께 대구 동성로 한복판의 대구백화점 앞에서 노방 찬양 선교를 이끌었고 그 이전에 일본선교사로 섬겼으며 현재 대구 그이름교회의 담임목사로 헌신 중이다. 동시에 틈이 나는 대로 몽골과 필리핀의 선교현장을 방문하여 섬기고 있기도 하다. 아들 요한은 서울의 특수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교사인 아내와 함께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방준석 집사(최경숙 집사)는 서현교회 중등부 회장 출신이며 또한 나의 중등부 제자이기도 하다. 그가 나와 함께 중등부를 섬길 때 출석 인원이 300명도 더 되었다. 지금은 겨우 20명 안팎이라니 황망할 따름이다.
테너 방준석은 현재 독일 드레스덴에 20년 넘게 거주하며 드레스덴 오페라극장의 합창단원으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아내 경숙과 함께 영남대 성악과를 마쳤고 함께 대구시립합창단원으로도 활약했다. 준석, 경숙의 외동아들 지훈은 6살 때 부모와 함께 독일로 가서 드레스덴 어린이합창단원으로 활약하다가 지금은 라이프찌히 법대를 마치고 곧 변호사로 일할 준비 중이다. 우리가 드레스덴에 가거나 준석 가족이 한국을 찾을 때 서너 번 만났는데 그사이 아이가 쑥 자라서 멋진 청년이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철민은 내가 많이 궁금해하고 또 그리워했던 제자이다. 준석이와 동기인 철민은 미국으로 유학 가서 그곳에서 여태껏 살아오고 있고 그의 아내 은령 역시 우리 서현교회 출신인 미녀이며 나의 중등부 제자이다.
이번에 아빠 따라 모국을 방문한 철민의 딸 지원은 미국에서 태어났으니 미국 시민권자이고 고등학교를 마친 후 곧 대학에 진학해 경제학을 전공하려고 한다. 대단히 어여쁘고 참 반듯하게 잘 자란 듯하여 기쁘기 그지없다.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서 함께 하지 못한 우인 형은 이미 미국 생활을 40년 넘게 한 미국 시민권자이다. 청년 때 미국으로 유학 가서 공부하였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금식기도까지 드리며 귀한 아내를 만나 결혼한 후 2녀 1남의 아빠가 되었다. 큰딸 한나는 제주도에서 외삼촌이 섬기는 고아를 위한 학교와 교회에서 동역할 준비를 하고 있고, 둘째 딸 크리스틴은 훌륭한 약학자가 되어 사회생활을 잘 시작하고 있으며, 아들 다니엘 역시 안경학을 공부하여 하나님의 미래의 일꾼으로 성장하고 있다. 우인 형은 장인어른이 시무하시던 교회의(달라스 성광교회) 장로로서 충성스러이 하나님을 섬겼으며 재작년에 65세가 지나서 한국 국적도 회복하여 이중국적자로서 현재 한국에서 큰 형님의 사업체를 돕고 있는 중이다. 나하고는 많이도 붙어 다닌 형이고 아버지들도 형님 동생하면서 무척이나 가까우셨다.
이 외에도 우리들은 서로를 아끼고 늘 사랑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아니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 세상의 나그네 순례길을 함께 걸어가도록 믿음의 동무요 지체로 만나게 해주신 것을.
만날 날들이 얼마 남았을지는 모르지만 그 날들 동안 열심히 사랑하여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행하여도 부족할 것이겠으나 그래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동행하시며 늘 지키시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