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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서인지, 취향이 변했어. 전에는 레드 제플린(Led Zepplin)같은 음악을 들었었거든. 당시에는 비지스(Beegees) 음악은 별로 마음에 안들었었는데. 요즘에는 비지스가 좋아지더라고. 거의 30년만에 비지스랑 화해한 셈이지.”
- 손석희, 월간지 <BAZZAR> 2006년 12월호 -
레드제플린은 영국의 하드록 그룹이다. 비지스는 디스코 음악도 소화했을 만큼 말랑말랑한 음악을 했던 팝 그룹이다. 1970~80년대 골수 락 마니아들에게 레드제플린대신 비지스를 듣는다는 건 ‘변절’이었고, 그 락 마니아가 중년이 돼 비지스를 듣는다면 ‘화해’라고 할만큼 대단한 일이다. 물론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이하 손석희)가 골수 락 마니아는 아니다. 그는 고교 재학 시절 차비를 아껴 산 첫 오디오와 함께 현대 음악가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의 앨범을 가장 먼저 샀다. 그러나, 손석희는 올해 만 51살의 대학교수이자,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이하 <시선집중>)과 MBC <100분 토론>을 진행하는 언론인이다. 한국 50대 주류 언론인이 조용필과 이미자가 아닌 레드 제플린과 비지스를 말하고, ‘화해’라는 말을 쓸만큼 두 그룹의 정서적 차이를 민감하게 표현한다. 이건 상징적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 중의 주류의 자리에 손석희처럼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언론인으로서의 성향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과거의 경력과 현재의 행보가 한결 같기도 어렵다. 그러나, 손석희가 지금의 ‘손석희’가 된 것은 주류에 대한 순응이나 비주류에 대한 변절 때문이 아니다. 손석희는 아직도 인터뷰에서 “학력 콤플렉스가 있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을 만큼 한국사회에서 희귀한 비 명문대 출신 유명 언론인이고, MBC 아나운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중의 <뉴스데스크> 앵커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집중>은 주류 바깥에 있는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최고의 시사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다. <시선집중>은 과거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기자들이 편집권 수호를 위해 벌인 파업을 주류언론에서 처음으로 공론화했고, 한 여고생의 남녀 평등 입대에 관한 주장도 웃어넘기는 대신 사회의 목소리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인터뷰를 했으며, 한 노점상의 자살을 통해 노점상 철거를 하는 ‘용역 깡패’와 관계기관의 문제를 파헤쳤다. 공중파 방송에도, ‘조중동’에는 나오지 않지만 인터넷 언론 <오마이 뉴스>의 시민 기자들이, 네티즌이 인터넷을 통해 쏟아내는 여론들이 <시선집중>을 통해 주류 언론매체에서 일정한 ‘지분’을 갖게 된 것이다.
시선집중이 바꾼 세상
<시선집중>처럼 비주류적인 소재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있었다. 그러나, <시선집중>은 한 명의 인터뷰이에게 20여분 이상의 인터뷰가 가능한 생방송 인터뷰 프로그램이다. TV의 시사 고발 프로그램은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인터뷰하기도 어렵고, 인터뷰 한다 해도 분량과 실명처리의 문제, 또는 편집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살리느냐 등 국민에게 사건 당사자의 목소리를 온전하게 전달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그러나 <시선집중>은 인터뷰이가 인터뷰를 시작하면 생방송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모자이크 처리나 편집도 없다. 게다가 프로그램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정관계의 권력자들도 상당수 출연한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궁금한 일들에 대해 가장 생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된 것이다.
<시선집중>의 형식은 지금까지 주류 언론인과는 ‘다른’ 언론인 손석희의 퍼스낼리티와 결합 돼 독특한 영역을 창조한다. 손석희는 자신의 언론인 생활 중 가장 의미있는 시절 중 하나로 MBC <1분뉴스>를 진행하던 때를 꼽는다. 당시 편성표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던 <1분뉴스>를 통해 탄광에 갇힌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며 울고 웃었던 광부의 아들의 사연이 자신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도 “골프를 못 배워서 사람 사귀는 게 불가능한 사회라면 이미 썩은 사회”라며 골프를 치길 거부할 만큼 자신이 평범한 서민이라는 인식에 투철하고, 젊은 시절에는 인기 앵커로 이름을 날릴 때 MBC 방송 노조 파업에 참여, 15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등 사회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가 파업 당시 뉴스 프로그램에 파업을 지지하는 리본을 달고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의 여부가 방송사 내에서 큰 관심을 얻고, 그가 정말로 뉴스 시간에 리본을 달고 나와 파업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유명한 일화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시선집중>은 최고의 주류 언론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지도층’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손석희 개인의 특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당시 탄핵사태가 노무현 대통령의 의도라는 한나라당 의원의 주장에 대해 “알면서 왜 하셨습니까”라고 응수한 것은 대표적인 일화다. 떵떵거리는 국회의원도 <시선집중>에서는 손석희와 웃으면서 한담이나 나누고 갈 수 없다. 심지어 박근혜 국회의원도 얼굴을 붉혀야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점심시간에 아이들의 도시락을 조금씩 ‘빼앗아’ 먹던 담임 교사가 언젠가부터 먹을만한 도시락을 싸온 학생들만 따로 불러 식사를 해서 반이 ‘늘 담임에게 불려가는 아이 / 가끔 불려가는 아이 / 단 한 번도 불려가지 않은 아이’로 나뉘어지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꼈던 손석희의 시선이 <시선집중>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시선집중>의 청취자들은 손석희가 자신들과 같은 서민의 입장에서 세상사를 바라보고 있다고 믿고, 손석희의 인터뷰를 들으며 그와 동질감을 느낀다. 대중은 손석희가 관료의 무능과 부패를 꼬집는 질문을 할 때 함께 분노하고, 독도 영유권에 대해 망언을 늘어놓는 일본인을 꼬집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교도소에서 TV로 시청했던 수감자와 전화 인터뷰를 할 때 감동한다. <시선집중>은 최근 인터넷에 올라온 질문들을 인터뷰이에게 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이제 대중은 한 번 만나보기도 힘들었던 ‘높으신 양반’들에게 따져 묻고 싶었던 것을 ‘손석희’를 통해 전할 수 있다.
방송 내용의 다름은 다른 지지층을 만들고, 그것은 시사프로그램의 새로운 형식을 수반한다.
대중은 <시선집중> 방송 7주년 기념 행사를 ‘청취자와의 만남’으로 꾸릴 수 있을 정도로 손석희를 폭 넓고 열성적인 지지층이 있는 인기 언론인으로 만들었고, 손석희는 그 대중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욱 날카롭게 인터뷰이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손석희는 “어떤 때는 우리 제작진 쪽에서 그렇게 몰아붙이면 다음부터 그 사람을 섭외하기 힘들다면서 중화(中和)를 요청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입장이다. 청취자들한테 ‘인터뷰 대상자가 다음부터 안 나올지 모르니까, 오늘은 이 정도까지만 하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할 순 없다.”고 자신의 공격적인 인터뷰 태도의 이유를 말한 바 있다. 청취자의 지지가 절대적인 프로그램의 진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터뷰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그가 말하는 ‘내용’이다. 인터뷰이로부터 대중이 원하는 것을 끌어낼 수 있다면, 혹은 끌어내기 위해 손석희는 공격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
손석희의 공격적인 인터뷰는 시사 프로그램, 더 나아가서는 오락 프로그램까지 포함한 한국의 모든 대담 프로그램의 성격이 바뀌는 시작점이 됐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가 “그의 멘트는 목표물을 향해 공중에서 일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매를 연상시킨다.”고 할 정도로 날카로운 손석희의 화법은 단지 공격적인 단어 사용이 아닌 철저한 팩트의 조사를 바탕에 둔 끊임없는 질문들로부터 나온다. <시선집중>에서 그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일본 시마네현의 조다이 요시로 의원과 인터뷰를 할 때 온갖 역사적 근거를 들어 대중의 환호를 이끌어냈고, 산업폐기물로 만든 시멘트의 유해성 여부를 부인하는 환경부 관계자에게는 실험 결과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몰아붙인다. 팩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인터뷰이의 모든 말에 대한 검토를 가능케 하고, 거기서 생긴 의문이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인터뷰이가 더 이상 팩트를 통해 반박할 것이 사라질 때, 청취자들은 사건의 진실이, 그리고 예의를 차리던 인터뷰이의 감추고 싶던 모습이 드러나는 ‘어색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MBC <황금어장>의 ‘무릎 팍 도사’에서 곤란한 질문을 받은 연예인이 당황하고, 그 때 시청자가 환호하는 것과 비슷하다. 서민보다 잘살고, 유명하고, 힘있는 사람들이 팩트에 의해 진실을 추궁당하고, 결국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낼 때, 대중은 자신이 원하던 진실이 밝혀지고, 꾸며진 품위로 거짓을 치장한 사람들의 허위가 폭로되는 것에 화노한다. 손석희는 주류에 있던 사람들이 꾸며진 화법 대신 지금 대중이 가장 관심이 있는 의제들과 질문들을 ‘철저한 ‘팩트’와 차가운 화법에 담아 공공성과 엔터테인먼트적인 재미를 동시에 달성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사람과 친해질 수 없다
그러나, 손석희의 업적은 손석희, 혹은 손석희로 대표되는 ‘다른 성향’의 언론인들이 가지는 딜레마를 동시에 안겨준다. 손석희는 사회의 미시적인 의제 선택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시사 프로그램에 가져왔더는 점에서 뚜렷한 지향성을 가졌지만, 그것은 경제적/계급적 지향성이지 정치적인 지향성이 아니다. 한나라당을 지지하건 민주 노동당을 지지하건, 대중은 손석희가 힘있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공박할 때 그를 지지한다. 그러나, 대중은 그럴수록 손석희가 ‘완벽하게 공정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가 특정 사안에 대해 대중의 기대를 배반하거나, 자신의 독단적인 의견을 냈을 때, 손석희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으로서의 신뢰를 잃는다. 손석희는 완벽한 국민적인 의견 일치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대중은 손석희가 객관적인 진행자가 아닌 공격적인 토론자의 모습을 갖추길 바랬고, 실제로 손석희는 <시선집중>과 <100분토론>에서 다른 때보다는 좀 더 공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반대로 국론이 분열됐던 황우석 사건이나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는 손석희가 아무리 객관적인 모습을 보이려 해도 ‘어느 쪽을 편들어도 욕먹는’ 상황이 된다.
물론 손석희가 이런 사안에 대해서도 특정 정파의 사람들에게 ‘시원한 소리’를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손석희는 사실 여부를 떠나 서민이 아닌 특정 ‘지지층’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의혹에 시달린다. 이미 <시선집중>은 특정 정당에 의해 상대 정당에 대해 편향적이라는 의문이 제기됐었고, 반대로 <100분토론>은 최근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토론 당시 패널 선정에 있어 이명박 후보 편향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대중의 여론의 동향을 가감 없이 전달하면서 더 큰 지지를 얻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손석희는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모든 대중’의 여론을 반영해야 하고,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언은 자제하게 된다. 손석희는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언론인이지만, 그 자신은 결코 대중과 진해질 수 없다. 누구 한명과 더 친해지기라도 하면, 그는 객관성을 의심받는다.
그래서 자연인으로서의 손석희와 달리 방송인 손석희는 모든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초인’이 돼야 한다. 손석희는 스스로 사생활에서는 욕도 곧잘 한다고 말하고, <오마이뉴스>의 신미희 기자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민주언론 운동협의회에서 개최하는 언론학교에서 강의를 했을 당시 “언론 자유를 가로막고 시청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나 인사를 지칭할 때 ‘놈’이라는 표현도 서슴없이 튀어나왔다.”고 할 만큼 직설적인 면도 있다. 그러나, 손석희는 언론 매체에서는 늘 청렴하고 고고한 선비처럼, 정제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가 손석희를 “자신의 색깔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스타일”이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대중의 지지를 절대적인 기반으로 삼고 있는 손석희는 그 대중의 모든 여론을 수렴하는 완벽한 공정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색깔이 없다. 하지만 손석희는 색깔이 없는 대신 지금 우리 사회의 현안들을 가장 구체적으로 파고들면서 자신만의 ‘아우라’를 쌓았다. <시사저널> 파업 당시 <시사저널>의 독자들이 ‘시사모(<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만들어 후원행사를 벌였을 때, 손석희는 격려 영상 메시지를 통해 “사실 지금 이 시대에 편집권을 가지고 파업을 벌일 수 있는가, 놀라운 일이고요. 더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일로 기자들이 파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중략)... 하루빨리 기자들이 돌아가셔서 짝퉁 <시사저널>이 아닌, 진짜 <시사저널>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시사저널>의 기자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시선집중>에서 <시사저널> 노조 관계자와 인터뷰할 때, 그가 던진 첫 질문은 “굳이 파업까지 갔어야 했나 의문이 남는다.”였다.
한국적인 영웅의 딜레마
이것은 ‘한국적인 영웅’의 딜레마다. 손석희가 지난해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강단 생활을 병행하자 <조선일보>는 ‘몸세탁’이라는 표현을 쓰며 손석희의 정치 입문 가능성을 제기했다. 대중적인 지지도가 있는 언론인이 정치권에 입문을 하는데 왜 ‘몸세탁’이라는 표현이 동원돼야 하는가. 그것은 손석희가 정치권에 입문하고, 특정 정당에 들어가는 순간 그의 핵심적인 이미지 중 하나인 완벽한 공정성, 혹은 객관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구정물에서 놀던 정치인들은 ‘차악’을 뽑는다는 논리로 정치적 능력만 있으면 어지간한 허물은 넘어가지만, 완벽한 객관성과 ‘성역없는 질문’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손석희는 정치를 하는 순간 “너도 어쩔 수 없구나”라는 시선을 받게 된다. 이해 관계가 얽힌 정치권으로부터 거리를 둔 청렴한 선비, 혹은 털어서 먼지 한 톨 안나오는 완벽한 초인. 만약 한국이 지금의 미국처럼 수많은 정치적 견해가 주류 매체에서 자연스럽게 부딪쳤다면 손석희는 지금보다 덜 유명하지만,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의 손석희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내 입장은 '중립'이어야 한다. 진행자가 기계는 아니므로 쉬운 일은 아니다. 논쟁이 되는 사안에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은 내가 어느 쪽인가를 가늠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며 중립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를 통해 정보를 흡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공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손석희뿐만 아니라 ‘손석희 세대’의 딜레마다. 운동권 세대인 이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고, 투쟁 끝에 사회를 바꾸었으며, 이제 사회의 주류에 편입했다. 그러나, 제도적인 민주화는 이뤄졌어도 미시적인 차원의, 생활의 민주화는 아직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그들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도, 어린 사람들도, 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도 모두 생각이 다르다. 광주에서는 아직도 5.18 희생자의 가족들이 가슴에 한을 품고 살지만, 합천에서는 일해공원이 세워졌다. 이 시대에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섰던 그 첫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손석희가 <문화일보>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간과하고 고민의 흔적이 없이 너무 일찍 예스라고 말해버렸다”라고 말한 것은 중요하다. 그가 이라크 파병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다면 그것은 그의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이 된다. 하지만 손석희는 어떤 사안이건 국민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 서로의 생각이 극단적으로 다를 때, 손석희는 누구의 의견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 이전에 서로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꺼내 놓고, 거기서 가장 수긍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그것은 손석희가 <시선집중>과 <100분토론>에서 누가 됐건 가감없이 상대방의 의견을 듣는 것과 같은 원리다. 통합신당이건 한나라당이건, 손석희의 프로그램에서는 똑같은 시스템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반대편에서는 왜 저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반영하느냐, 왜 더 몰아붙이지 못하느냐고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손석희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프로그램에 반영하면, 사회의 수많은 현안과 갈등을 드러내고 부딪치게 해서 국민에게 그들의 입장을 스스로 정하도록 만드는 합의의 시스템은 사라지게 된다.
정의와 합의의 차이
그래서 손석희의 대척점은 기존의 주류 언론인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이다. 비 명문대 - 주류 권력에 저항했던 젊은시절로 수정 - 기존의 정치적 조직대신 대중의 지지로 해당 분야의 권력을 얻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손석희와 노무현 대통령은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와 언론에서 권력을 가지게 된 뒤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 방식은 정 반대에 가깝다. 손석희는 언론인 홍세화와의 대담에서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는 조직 대중 외에도 많았고, 이들에 의해 정권을 잡은 것인데, 갈수록 조직 대중만 남고 그 외에는 다 떨어져 나가고 있는 거다. 그러고서도 또 찾아가는 곳이 조직적 대중이니 …. 조직 밖의 사람들은 갈등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이 자신의 뜻을 왜곡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언론에서 자신의 뜻을 왜곡하는 것에 억울함을 표시하기 보다는 그럴수록 직접 나와서 토론을 통해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색깔’을 대중이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국민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반대로 손석희는 언론인으로서 아무리 자신의 소신이 확고하더라도 대중에 대한 ‘설득’과 ‘합의’를 요구한다. 그것은 그가 수감됐던 시절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며 알게 된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수용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각은 확고하지만, 세상에는 자신이 모르는 세상이 얼마든지 많다는 수용. 마치 레드 제플린뿐만 아니라 비지스도 들을만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화해. 손석희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색깔’을 품고 있기를 바라지만, 손석희는 자신의 색깔 대신 모든 색깔들이 마음대로 부딪쳐서 어떤 합의점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상대방의 말을 계속 들으며 거기서 질문을 꺼내는 ‘듣는 저널리즘’을 통해 나와 너의 생각이 합의를 이루는 과정인 것이다.
그 합의의 과정을 만들기 위해 손석희는 인간임에도 완벽한 중립을 요구받고, 스스로도 방송에서 자신의 코멘터리를 하지 않는다는 방송 철학을 가질만큼 ‘아우라는 있어도 색깔은 없는’ 언론인이 됐다. 하지만, 그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목소리를 담을 수 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진행 스타일을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질문 저널리즘’이라 한 것에 대해 질문 저널리즘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계속 들으며 거기서 질문을 꺼내는 ‘듣는 저널리즘’이라고 한 바 있다. 내 주장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 그리고 질문을 통해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면서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과거보다 폭을 좁히는 것. 손석희가 “지금이 바뀌어갈 시기는 맞지만 (보수가 기득권을) 다 내놓을 수는 없다. 갈등이 점점 심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시기다. 국민의 정부, 문민 정부 때가 이러한 것들을 준비하는 시기였다면, 참여 정부는 이것이 극대화되는 시기다.”라고 말한 것처럼, 손석희는 한국에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중재자의 탄생은 이루어질 것인가
그래서 <시선집중> 7주년을 맞아 손석희가 “재벌 총수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다루고 싶은 사회 현안으로 ‘바구니 경제’를 꼽은 것은 주목할만 하다. 그의 표현대로 “정치 권력대신 자본이 방송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치적 민주화는 이뤄진 대신 사회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는 지금, 그는 정치적인 선언 대신 지금 대중들을 가장 고통받게 하는 문제들을 다시 한 번 미시적인 차원에서 짚어내며 그것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또다시 자신의 ‘색깔’대신 중립적인 언어로 문제제기를 할 것이고, 그는 모든 대중에게 사랑받지만 어떤 자기 입장도 표명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섬이지만,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가야 하는 섬. 혹은 모든 문제에 대해 가장 중립적이고 공정할 수 있는 중재자. 그것이 이 새로운 유형의 언론인에게 기대하는 무거운 짐은 아닐까.
“인터뷰이에게 내가 밀리는 순간 프로그램 신뢰에 문제가 생기니까 절대로 기싸움에 져서는 안된다. 그러다 보면 외로울 때도 많다. 스튜디오에 혼자 남겨지는 순간, 참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종의 직업병도 생겼는데 방송때 무진장 집중하고 나면 일상에서는 도대체 집중이 안된다. 치매에 걸린 것처럼 깜빡 잊어버리는 일이 많고,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무심하다고 무척 서운해 한다. 또 자꾸 친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면 안되다보니, 어쩐지 고립되는 느낌도 들고.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게 방송인의 숙명인 걸.”
- 손석희, 문화일보 2003년 11월 6일자 -
출처 : 트리플크라운(http://home.freechal.com/triplecrown)의 강명석님
첫댓글 하...
왠지 앞과 뒤과 다르지 않을것 같은사람입니다. 잘생긴게 흠이지만요.ㅋㅋㅋ 손석희씨가 힘들긴 힘들거예요. 거성님 잘들어가셨는지 전화도 못했네요. 오겡끼데스까?
정말 멋진 분이신것 같아요. 매우 신뢰가 가는 언론인... 존경스러운 분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