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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七彩 운남의 길 위에서 – 6편▐
여섯째 날 – 호도협에서 다시 여강으로
(2014. 7. 4 : 차마객잔-중도객잔-티나객잔-호도석-여강고성)
침대의 수평이 맞지 않은 것 같더니 자고나니 허리가 뻐근하다.
온 동네 개들이 간밤에 늦도록 합창을 하여 잠을 방해했다. 아침 산책길에 개를 만나니 겁이 난다.
서울의 송월산 님은 산야초에 조예가 깊어 어제부터 여러 번 식물과 꽃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개가 담 밑의 대마초를 뜯어먹었는지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조심해야겠다고 농을 던진다.
객잔 마당가의 부겐베리아가 이슬을 머금고 유난히 붉고 화사하다. 여행 내내 가장 자주 만나는 꽃이다.
매우 화려하고 꽃송이가 크지만, 그러나 실제 꽃은 가운데 조그마한 노란색일 뿐
나머지는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헛꽃이란다.
색종이를 닮은 꽃, 꽃보다 꽃받침이 더 아름다운 철딱서니 없는 꽃, 볼수록 신기한 꽃이다.
오늘 일정은 트레킹을 끝내고 여강으로 돌아가 지난번 묵었던 호텔에서 체크인한 후
고성을 자율관광 하는 것이다.
여유 있게 아침식사를 끝내고 9시 30분에 차마객잔을 출발했다.
날은 오늘도 흐렸다 개었다 비가 오다가 할 것이다.
옥룡설산은 여전히 구름 속에 머리를 묻고 있고,
돌아보니 합파설산에 아침안개가 한가롭게 피어올라 뒷짐 지고 어슬렁어슬렁 산위로 올라가고 있다.
어느 집 앞에서는,
어린 아들과 청모자가 잘 어울리는 어머니가 염소와 말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길을 나서고 있다.
멀리 구름을 배경으로 숲속에 농가 두 채가 붉은 지붕을 이고 그림같이 서있다.
앞서서 걸어가는 일행들이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모습까지
모두가 상쾌한 아침풍경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한 모롱이를 돌아가자, 농가의 집 앞에는 큼지막하게 솔가리가 쌓여있다.
경상도에서는 ‘깔비’라고 부르는, 소나무나 낙엽송 같은 침엽수 잎이 말라서 땅에 떨어진 낙엽인데,
주로 겨울철 땔감이지만 여기서는 돼지우리 같은 축사에도 깔아주고 있었다.
저 수북이 쌓인 솔잎더미는 농가의 돌집 앞을 지키는 무슨 부적이나 탑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이곳의 집들은 한결같이 잿빛 기와를 이고 있는 2, 3층 높이의 돌집이며,
길에서 내려다보면 대개 ㅁ자나 ㄷ자 구조로 궁벽한 산골마을 같지 않은 넉넉함이 느껴진다.
길가에 나시족 무덤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대부분 돌만 사용해 벽을 쌓고 위를 덮은 원시적인 돌무덤인데,
입구만은 공을 들여 큰 돌로 빈틈없이 정교하게 막아놓았다.
어떤 것은 무덤 전체에 시멘트를 발라 밀봉시켜 놓은 것도 있다.
중도객잔이 있는 마을 입구에서는 상당히 규모 있는 새 무덤 한 기를 만났는데, 정면이 상당히 호화롭다.
옆은 역시 돌을 쌓아 만들었지만 정면은 석물공장에서 깎은 대리석이다.
네 귀퉁이는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고, 묘비명을 둘러싼 양쪽기둥에는 조상을 기리는 문장이 길게 새겨져있다.
또 연꽃을 든 동자가 기둥문을 지키는 모습과 위쪽의 아치형 문 위에는
‘백대유방(百代流芳)’이란 네 글자가 뚜렷하다.
묘비명을 자세히 훑어보면, 가운데 ‘顯妣慈母戴00老孺人之墓’라고 쓴 붉은 비문이
우리가 제사 때 쓰는 지방(紙榜) 형식이라 낯익고 반갑다.
나시족의 문화는 이런 면에서도 우리와 많이 닮았다.
어머니 대(戴)씨 부인의 묘인데, 묘비명 양쪽에는 오른쪽부터 빽빽하게 자손들의 명단이 적혀있다.
중국은 산아제한과 더불어 국법으로 매장도 금지하지만, 소수민족의 전통장례는 존중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참으로 이채롭다.
아들이 羅씨 3명에 徐씨 1명, 딸은 나씨와 서씨 각 1명으로 자식이 6남매에다 그 배우자까지,
그리고 그 아래 손자는 5명인데 모두 나씨였고 손부는 3명, 손녀는 나씨가 7명에다 이씨(?)와 서씨가 각 1명,
손녀사위는 5명, 마지막에는 증손녀 3명이니까, 이 비문에는 도합 38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끝에는 2012년 청명절에 세웠다고 적고 있으니, 불과 2년 전이다.
한 시골 아낙네가 이루어놓은 대단한 업적이다.
인류는 이렇게 지구상에 뿌리를 내리고 가문을 이어 역사를 백대에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너무 오래 지체했다. 일행과 한참 떨어져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이 되진 않는다.
길가 바위의 화살표만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가 없고, 늦어도 객잔에는 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구름 위의 산책은 계속된다.
작은 마을을 통과할 땐 은근히 한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일부러 숨어버린 듯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강아지와 닭들만 길 한복판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다가 인기척에 게슴츠레 실눈을 한번 떠보곤
도로 감아버린다. 걸어도 땀이 나지 않는 날씨고, 저 놈들은 포근한 흙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으니, 잠 또한 얼마나 감미로울까.
나도 저 놈들 곁에 누워 한숨 자고가고 싶다.
혼자 웃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마을을 벗어나자 넓은 옥수수밭과 하얀 감자꽃이 한창인 감자밭을 지난다.
윤기 흐르는 잎사귀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이 싱그럽다. 저 아래 밭갈이하는 농부 내외가 조그맣게 보인다. 경사가 심하지만 의외로 검붉은 토양이 기름져 보인다.
몇 굽이를 돌자 나처럼 놀며가는 일행의 후미가 보인다.
그리고 이내 염소와 양들을 만나고 고개를 들어보니 가파른 절벽에도 흰 점처럼 양들이 흩어져있다.
방목되는 소는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있다.
가파른 산악지대라서 너무 운동량이 많아 살찔 형편이 안 되는 모양이다.
다음 모롱이로 꺾어 돌며 또 가축 떼를 찾고 있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멀리 산위에서 목동이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나 멋져, 얼어붙은 듯 한참을 꼼짝도 못하고 그냥 서있었다.
청남색 모자와 좀 더 짙은 남색 윗도리가 배경이 되는 푸른 산빛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같은 계통의 색이 저렇게 잘 어울리는 건 드물다. 등에 지고 있는 마른 풀빛 담요까지도 바위 색과 잘 어울려,
구름 몇 덩이를 배경에 두고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처럼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하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고마움을 담아 손을 흔들어주었다.
목동은 화답으로 지팡이를 살짝 들어주었다.
일행을 따라잡아 전망 좋은 모롱이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놀다가 다시 출발했는데,
이내 등짐을 진 나시족 처녀를 만났다.
여강에서부터 여인들은 모두, 심지어 양장을 한 상태에서도 등에는 사각통을 매고 다녔다.
장바구니를 손에 들거나 수레를 끄는 것보다 훨씬 실용적일 것 같다.
앞서 가던 한 분이 바구니 속에 뭐가 들었느냐고 물어보고,
아가씨가 바구니를 열어 노랗게 잘 익은 살구가 가득한 장면을 펼쳐보였다.
하나 맛볼 수 있느냐고 하니 몇 알 집어준다.
그러자 옆에 있는 일행 모두가 손을 내밀어 난처한 분위기가 형성되는가 싶었는데,
아가씨는 밝게 웃으며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짝꿍이 하나를 얻어주어 입에 넣었는데 너무 시어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며 뱉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아가씨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밝고 예뻤다.
다시 보니 아가씨는 귀고리에 진주목거리까지 한 상당한 멋쟁이였다.
그리고 운남의 길 위에서 만난 소수민족 여인들은 카메라 앞에서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고
너무도 당당했다.
아마 남자들이 마방으로 집을 비운 사이 생활을 전적으로 도맡아 해 온데서 생긴 굳세고 의연한 기질 탓 같다.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었지만 말이 안 되니 그냥 넘어간다.
만약 혼자 하는 여행이었다면 어떻게든 궁금증을 해결했을 것이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나는 비교적 일찍 터득해왔다.
30대 후반부터 불쑥 한 번씩 혼자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첫날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이정표와 지도만으로 다니다가 다음날이면 일부러 차를 세우고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여 사흘쯤 되면 시골장터를 만나면
아예 한나절 놀고 간다.
어느 겨울 강원도 어느 장터 난전에서 어깨의 눈을 털어가며 막걸리 한 잔 곁들여 먹던 닭개장 맛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여름날 한더위를 피해 낯선 마을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서 잠시 눈을 붙이다가 노인들 장기 두는 소리에 일어나 옆에 있는 슈퍼에서 막걸리를 사서 대접하며 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닷새쯤 되면 거의 거지가 된다.
소주 한 병을 시켜 반병을 남기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에게 소주 한 잔을 얻어 마시며 한 끼를 해결한다. 간단한 물건을 살 때도 얼마냐고 한 마디만 하는 게 아니라 영양가 없는 곁말을 줄줄 풀어놓는다.
그러다가 일상으로 복귀해 넥타이를 매면 다시 할 말만 하는 재미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일쑤다.
몇 모롱이 돌아나가다, 오늘 본 이정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정표를 만났다.
한참을 멈춰 서서 더듬거리며 한자공부를 독학한다. 절벽길 곳곳의 바위마다, 길목의 모퉁이마다
화살표와 거리가 표시되어 있던 수많은 이정표는 앞으로 몇 시간, 아니면 몇 km 가면 우리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 이정표는 다르지 않는가.
“五指山客棧欢迎您! 哈吧・玉龍兩相兆, 滿天星斗真可观.” 더듬거리며 뜯어읽으니, “오지산객잔은
당신을 환영합니다! 합파설산과 옥룡설산의 조망, 그리고 온 하늘에 총총한 별은 참으로 볼만합니다.”이다.
이쯤 되면 1시간 더 걸어서라도, 오지산객잔에 가 하룻밤 묵지 않을 수 없겠다.
13개의 봉우리가 한 마리 은빛 용이 되어 구름 속에만 꼭꼭 숨어있더라도,
별빛 달빛 하나 새어나올 수 없는 칠흑의 밤하늘이 된들 어떠랴. 그렇다. 말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계속 이정표와 말의 힘을 생각하며 다음 모롱이를 돌아가니 특이하게도 길이 계곡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여러 명이 동시에 비를 그을 수 있는 커다란 처마바위 밑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쉬고 있는 일행들을 앞질렀다.
꼴지 그룹의 선두가 된 셈이다.
계곡을 돌아 나오는데 비에 젖어 막 떨어진 노란 꽃잎이 내 발에 밟혀 짓뭉개질 뻔했다.
얼른 발을 옮겨 딛곤 위를 쳐다본다. 절벽에 샛노란 꽃을 수북이 달고 있는 꽃나무 한 그루가 있고,
더 멀리에는 흐드러지게 핀 흰 꽃무더기도 눈에 들어온다.
꽃송이 하나가 뱅그르르 돌며 어깨에 내려앉고, 물방울 하나가 얼굴에 톡 떨어졌다.
내 눈은 파노라마 렌즈를 단 듯 주위를 완전히 한 바퀴 스캔해나간다.
아, 그야말로 세외도원(世外桃園)이 아닌가.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쳐버릴 뻔한 숨 막히는 절경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뒤돌아보니 가까운 바위가 계곡을 지키는 사천왕상을 닮았다.
인간의 눈이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실감난다.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몇 걸음 옮기다 앞을 보니 안개비 휘감긴 맞은편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세 선녀가
재잘재잘 나폴나폴 가고 있다.
큰 소리로 불러 세워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내 뒤에서 다시 카메라를 들이댄 분이 있었다.
당랑규선(螳螂窺蟬)이 아닌가.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유쾌한 사진찍기 놀이다.
좋은 사진도 이렇듯 우연에 기대는 수가 많다.
얼마 후 어느 길모퉁이를 꺾자 촌로 한 분이 전망 좋은 곳에 쪼그려 앉아 파이프담배를 피우고 있다.
역시 푸른 산빛을 배경으로 잡으니 그림이 된다.
가까워 얼굴 표정을 잡기 좋아, “니 하오?” 인사를 건네고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는 제스처를 취하니
웃으며 허락한다. 그런데 카메라를 들이대자 여자들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표정이 좀 굳어진다.
역시 남자답다고 해야 할까. 웃음이 나온다.
몇 걸음 옮기니, 저만큼 옥수수밭 너머 ‘HALF WAY G.H’란 글자가 반갑게 눈에 들어온다.
시계를 보니 11시 40분이다. 1시간 거리를 2시간도 넘겨 도착한 것이다.
이층 옥상으로 올라가니 몇 발 앞선 분이 이미 맥주 두 병을 사놓았다. 한 잔 받아 마시니 꿀맛이다.
옆을 보니 나무난간에 “북위 27˚ 14′ 43″ • 동경 100˚ 8′ 07″ • 해발 2,345m” 라고 씌어있다.
한 잔을 더 마셔도 여전히 꿀맛인 걸 보니 갈증이 심했던 모양이다.
객잔을 한 바퀴 돌아본다. 1층 식당에 들어가 보니 종이를 바른 창문에서부터 온 벽과 천정에까지
한글 낙서와 한글 플래카드 그리고 산악회와 동문회 페넌트가 마치 샹그릴라에서 본 티베트인들의 타르초처럼
빽빽하게 걸려있다.
한글 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인의 극성스러움이 이 정도일 줄이야.
이 중도객잔의 화장실도 나시객잔 못지않은 명소다.
화장실 문 옆에 “천하제일측(廁) 세계공인”이라는 현판이 젊잖게 걸려있다. 과연 전망이 대단하다.
일행들이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게 내다보인다.
얼른 마당으로 나와 배낭을 빵차에 실어 보내고 맨몸이 되니 날아갈 듯하다.
몇 사람은 빵차를 타고 내려가고 우리는 다시 종착지인 티나객잔까지 트레킹을 계속한다.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석회수를 받아 가라앉히는 마치 염전 같은 시설을 만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산 위쪽에 텅스텐 광산이 있다고 한다. 광산에서 제련과정을 거친 방류수를 흘려보내고, 그 탁한 석회물을 모아 침전시켜 부산물을 얻으려는 민간인들의 수공업 장치라고 한다.
환경오염이 걱정될 정도로 계곡은 온통 석회수로 뿌옇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석회암 지대라서 식수가 문제인 것 같다.
자주 만나는 거대한 파이프는 산정의 물을 마을로 받아 내리는 상수도관인 셈이다.
어떨 때는 그 흰 파이프에 써놓은 낙서를 읽기 위해 선채로 좀 쉬기도 했다.
또 어떤 벼랑길은 쇠파이프관이 오래동안 우리를 따라오기도 한다.
다시 넓은 옥수수밭과 감자밭들을 지나니, 울타리를 친 경사 심한 드넓은 비탈에 고사리밭이 펼쳐진다.
그랜드 캐년의 협곡에서는 거대하지만 버려진 땅의 무심함을 느꼈지만, 이 길에서는 거대한 자연에 삶의 터전을 다져넣은 사람들의 숨결 때문에 더 가슴 깊은 살아있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울타리 밖으로 나온 고사리 하나를 꺾어 냄새를 맡아본다.
우리 시장에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산 고사리의 고향냄새다.
얼마나 싱싱하고 건강한가. 이번 여행 중에 평소에 먹지 않던 빵과 면을 일부러 찾아 즐겨먹었다.
운남의 밀가루가 품질이 아주 좋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고사리 또한 마찬가지다.
문제는 수입과정에서 생기는 것이지 현지에서는 이렇듯 건강하지 않은가.
무심결에 구비 튼 모퉁이에서 드디어 관음폭포를 만났다.
트레킹코스 전체에서도 가장 아찔한 벼랑길을 돌아 저 멀리 보이는 관음폭포는
상식적으로는 폭포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계곡을 한참 비껴나 그냥 낭떠러지 절벽 위에서 누가 물동이를 내리붓는 것 같은 위치다.
그리고 그 폭포 한가운데를 우리가 지나가야 한다.
사람이 낸 길을 만나 방향과 힘을 잃은 물줄기가 우왕좌왕하다 싱겁게 아래로 다시 흘러내린다.
한겨울의 얼음길이나 수량이 많은 우기에는 상당히 위험할 것 같다.
왜 이름이 관음폭포일까 하다가, 이틀간의 트레킹에서 만나는 유일한 폭포란 생각이 드니,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아예 양말까지 벗고 족욕을 하는 이도 있고, 만세를 부르는 포즈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물 만난 어린애처럼 모두들 좋아한다.
이게 바로 폭포의 불심(佛心)이요 중생의 불심일 것이다.
폭포에서 한참을 놀다가 모롱이를 돌아가니, 하도협(下跳峽) 쪽으로 협곡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바위를 뚫어 길을 낸 가파른 곳을 지나다가 석회암바위의 속살을 본다.
겉은 거친 석회암이지만 상당히 다양한 암석층이 겹겹이 쌓여있고, 그중 아랫부분에 깨끗한 옥이 한 층 보인다. 수허고성의 ‘옥출운남(玉出云南)’이 불쑥 떠오른다.
맞은편 옥룡설산도 어느새 모습이 좀 달라졌다.
평소 우리나라에서도 겨울이면 ‘산의 근육’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 때가 있으니,
초겨울이나 늦겨울 자취눈이 살짝 내렸을 때다.
흙이나 나무가 많은 육산(肉山)이라도 오솔길을 살짝 덮을 정도의 눈이 내리면 산의 골격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때가 바로 일년 중 내가 가장 등산을 자주 가는 나의 등산 시즌인 것이다.
풍수들도 이때 산을 찾으면 지세를 가장 잘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상태지만, 지금 건너다보이는 옥룡설산도 근육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마치 보디빌더의 팔뚝을 보는 것 같다.
석회암이 빗물에 녹아 골이 깊이 파이고 낮은 지역이라 이끼와 키 작은 나무들이 푸르게 덮여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눈이 시원하다.
중도객잔 직전에는, 빵차들이 마을로 오르는 시멘트길이 실타래처럼 얽혀있어 사진에 담았는데,
지금 저 아래의 길은 아스팔트 포장의 관광도로인데도 역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굽이굽이 얽혀있다.
그리고 그 끝에 트레킹의 종착지 티나객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길도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합파설산이 뒤로 물러서며 우리의 시야를 시원하게 틔워주고 있다.
넓은 만큼 울타리까지 있는 목장도 보인다.
비스듬하게 내려가는 길에는 많은 야생화가 피어있어 또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내리막길 중간쯤에서 돌멩이 하나가 발길에 차여 경사면으로 굴러 내린다.
예감이 수상하다. 내려가 주워보니 수허고성에서 만났던 나시족 할머니가 아닌가.
배낭이 없지만 모시고 올 수밖에 없다.
티나객잔에 도착하니 꼴지에서 두 번째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꼴찌에게 박수를!” 보낸다.
점심을 먹으면서 들으니, 시간이 있고 체력이 뒷받침 된다면,
이곳에서 중도협을 즐기기 위해 협곡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단다. 중도협 가는 길은 근처에서 객잔을 운영하는
장 선생이란 분이 1년 걸려 혼자 닦았다고 별도의 입장료를 받는단다.
아슬아슬 가파른 길을 1시간 남짓 내려가면 계곡의 급류를 만나, 거센 물소리로 세상의 온갖 시름을
잠시나마 잠재울 수 있다고 한다.
좋은 정보지만 계획에 없는 코스이니 이렇게 귀에라도 담아두고 싶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2시가 훌쩍 넘었다. 중도객잔에서 다시 2시간이 걸린 셈이니,
오늘 트레킹은 도합 4시간이 소요되었다.
1시간은 길에서 논 즐거운 소풍이었다. 이제 상호도협의 호도석(虎跳石)을 보러간다.
빵차를 모는 여기사는 목을 빼 오른편 산을 자주 살피느라 차의 속도가 일정치 않은데,
과연 얼마 가지 않아서 집채만 한 바위가 떨어져 도로를 반이나 점령하고 있는 장면을 만났다.
늘 낙석을 살피며 운전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구간이다.
20여 분만에 터널 하나를 빠져나오자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어제 28밴드 정상에서 내려다본 상호도협이다.
차에서 내려 밑으로 내려가니 호도석 관경대(观景台) 입구에 가마꾼들이 줄지어 앉아있다.
엄청난 고도차가 있고 계단중간에도 관경대가 설치되어 있어 끝까지 내려가지 않는 사람도 많다.
또 올라올 때 지레 겁을 먹고 가마를 이용하는 관광객도 많이 눈에 띤다.
그러나 당연히 끝까지 내려가는 사람이 더 많다.
마지막 관경대에 내려서니 도도한 물살이 소용돌이치며 물보라를 일으키다 덮쳐온다.
한참 바라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간혹 얼굴에까지 물이 튄다.
사냥꾼에 쫓긴 호랑이가 딛고 건너뛰었다는 호도석이 성난 물살에 잠겼다 간혹 드러나고 있다.
건너편에도 관광객이 드문드문 보인다. 강가를 따라 낮게 트래킹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 듯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번에는 저 길을 따라 합파설산을 바라보며 트레킹을 해보고 싶다.
소용돌이가 심한 부분을 찾아다니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나니, 하류 쪽에 호랑이동상이 눈에 띈다.
그쪽에도 사람이 많아 가보니, 하류 쪽은 어느새 날뛰던 물살이 얌전해져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동상 쪽에서 올라오니 거리가 좀 짧은 것 같다.
올라오면서 상류 쪽을 보니 역시 물살이 조용하다.
결국 전망대 부근만 격류를 이루며 일대장관을 연출하고는, 아래위 쪽 모두 시미치 뚝 떼고 점잖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전편에서 언급 했듯이, 합바설산과 옥룡설산의 두 협곡이 만나 이루어진 호도협 16Km 중에서,
이곳은 호도협의 입구이니 해발1,800m 지대일 것이고, 하류 쪽은 1,630m로 물의 낙차는 170m라니,
앞으로도 이런 천방지축으로 퉁탕거리는 구간이 수없이 많겠다.
그리고 양 기슭의 너비는 가장 좁은 데가 30m라니, 바로 여기겠구나 싶다.
차로 돌아와 보니 아예 내려가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었던 것 같다.
호도석에서 1시간 머물고, 이틀 만에 반갑게 다시 만난 우리 관광버스는 4시에 출발하여
호도협을 빠져나와 금사강변을 달린다.
이틀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던 금사강이 사라지자,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옥룡설산의 구름과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던 금사강 황토빛 물빛,
그리고 방금 본 상호도의 길길이 날뛰던 물소리가 모두 오래전의 일인 것처럼 가물거린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6시를 넘겨 여강의 관방대주점에 도착했다.
그 다음부터는 이틀 전과 똑 같은 시간대에 똑 같은 코스를 반복했다.
그러나 저녁을 먹고 고성산책에 나서자말자 술기도 오르고 피곤이 엄습한다.
무엇보다도 대리고성과 샹그릴라고성 특히 가장 마음에 들었던 수허고진을 둘러본 이후라 다시 들린
여강고성의 밤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환락의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식당 부근의 생강캔디를 만드는 조그마한 ‘장씨조전수공강당(張氏祖传手工姜糖)’ 가게 앞에서
밀가루를 뽑는 청년의 현란한 솜씨를 구경하곤,
소화도 시킬 겸 일부러 한적한 골목을 조금 산책하다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뒷골목에서 처음 만난 장면은 모델촬영인데 화려하게 꾸민 여성모델보다 촬영하는
남성 카메라맨이 더 멋부림이 심했다.
조용한 객잔골목을 돌아나오다 동파문자를 서각해 놓은 가게에 들렀다.
주인도 손님도 없는 가게에서 작품들을 사진에 담으며 5분쯤 구경을 했지만 끝내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큰맘 먹고 이번 여행 기념품으로 낙점했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점점 인파로 넘쳐나기 시작하고, 심심한 나는 그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서양인들이 간혹 보이고, 호도협의 중도객잔 식당에서 느낀 것처럼 한국인들도 상당하겠지만,
대부분은 중국인이다.
특히 젊은 중국여성들의 옷차림은 상당히 세련되고,
가족여행팀도 물색이 넉넉해 보이는 걸 보면 중국의 경제력이 가속도가 붙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중국제품이 속아서 산 물건이라는 말도 이제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고성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 정대장이 말한 영애누나가 경영하는, ‘벚꽃마을-櫻花屋金(SAKURA KIM)’이 떠올랐지만, 되돌아가보고 싶지는 않았다. 중국인과 결혼하여 아한(아시아한국인)이란 아들을 두고 있다는 사업수완이 대단한, 그러나 지금은 집을 세주고 다른 곳에 산다는, 사쿠라김이지 않은가.
다음 운남여행에서는 여강고성은 빼고 싶다. 여강고성은 이제 환락의 불야성으로 변해가고 있고, 특히 퇴폐마사지가 많고, 숙소 옆 칠성가(七星街)의 밤도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발길이 천근만근 무겁다.
트레킹 4시간에 호도석 1시간 등산, 그리고 고도차를 너무 들락거려서인지 그저 주저앉고 싶을 뿐이다. (♣)
첫댓글 워낙 여행기가 명문이라 다들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우선 공사중 현판이라도 떼어 놓으세요.
오늘도 공사중이라 나갈까 생각하다 들어 오기를 잘 했구나 생각이 드네요. 일행을 잘 만나 더 관심을 갖게 되고
흐뭇한 마음으로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장소를 동시간대에 둘러봤건만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이렇게도 큰 차이가 날까요
눈에 띈 모든것을 세심하게 살펴보시고 훌륭한 글 솜씨로 명 후기를 올려주신
이선생님의 대단한 능력에 대하여 또 다시 찬사와 존경을 표하게 됩니다
와 멋지네요..
후기도 멋지십니다..잘 보았습니다.
랑쯔푸성님, 역시 첫 손님 자리를 놓치지 않으시는군요. 시간 나면 더러 수정을 하고 싶은데 황선생님 때문에 그대로 둬야겠습니다. ㅎㅎ.
인생나그네님, 가을이 깊어져 갑니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겠지요?
늘사랑고향님, 눈 아프시지요? 그래도 대충 읽지는 말아주세요. ㅎㅎ, 고맙습니다.
망태기메고 지나가던 나시족아가씨, 참으로 밝은 표정이 인상적이었죠
몽석님보다 먼저 만나서 함께 기념촬영까지는 했는데... 아쉽게도 담겨있던 과일은 보질 못했답니다
아니, 언제 기념촬영까지 하셨을까. 제가 아까운 장면 놓쳤네요. 그 사진 하나 보내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