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랑대
김 윤 선
시애틀의 여름 햇빛은 참 유별납니다. 겨울내내 눅눅했던 기운들이 한꺼번에 몸을 말리는지 곳곳에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립니다. 날이면 날마다 내리던 비가 딱 그치고 연일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입니다. 어쩜 이리도 다른지 절묘한 자연의 이중성에 배반감마저 느낄 정도 입니다.
마당에 빨랫줄을 쳤습니다. 반질반질한 초록색 비닐끈을 묶어 놓으니 한 이십 년 쯤의 세월을 되돌려 놓은 듯 촌스럽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묵은 촌스러움이 왜 이리 정겹게 보이는지요.
세탁기에서 건져낸 빨래들을 소쿠리에 담아와서 하나씩 툭툭 털었습니다. 작은 세탁기가 저들의 심사를 구겼는지 옷 모양새가 엉망입니다. 고층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비좁게 털어내던 것과는 달리 넓직한 마당에서 한적하게 털고 있으려니 마음마저 한가합니다. 툭툭 햇빛을 가르는 소리가 마당을 한 바퀴 휘돌아 감더니 담장을 넘어 멀리 신작로까지 날아갑니다. 그 뒤를 따라가는 맑은 햇빛에서 까실까실한 촉감이 저먼저 느껴지는 성싶습니다.
큰 빨래는 앞에 널고 여자의 속옷은 뒤에 숨기듯 널어야 한다고 이르는 어머니의 말씀이 등뒤에서 들리는 듯합니다. 어머니께서 널어놓은 빨래를 보며 예술이라고 호들갑을 떨던 딸아이의 말소리도 들리는 듯해서 어머니의 빨랫줄을 닮아 보려니 실실 헛웃음이 났습니다. 흰 빨래가 이대로 훨훨 날아가면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을 만들 듯도 싶습니다. 햇빛 한 줌을 건진 넉넉함에 가슴이 다 뿌듯합니다.
빨래를 널기가 바쁘게 햇빛이 그림자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드라이기의 뜨거운 열기에 익숙한 빨래가 갑작스런 햇빛에 어색한지 서먹서먹한 표정입니다. 그래도 그새 햇빛에 속을 드러내 준 걸 보면 아마도 또래들인가 봅니다. 탈수를 했다고는 하나 남은 물 무게 때문에 빨랫줄이 밑으로 축 처집니다. 그 중에 남편의 크고 두꺼운 옷이 제일 힘겹게 보이는 건 아무래도 가장의 책임감 하나가 덧씌워져 있는 때문이겠지요. 공연히 빨래에서조차 짠한 느낌이 듭니다.
마침 마당 한 구석에 쓸모없이 세워 놓은 긴 막대기가 눈에 띄길래 흙을 씻어내고 빨랫줄 한복판을 공구었습니다. 그랬더니 영락없는 바지랑대 입니다. 그러자 저만큼 올라간 빨래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차 보이는 게 웬 일로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느냐고 허허 웃는 남편의 모습같아 보입니다. 때마침 잠자리 한 마리가 빨래 위를 노닐다가 바지랑대 위에 살풋 내려 앉습니다. 마당은 벌써 고향 마당을 옮겨놓은 듯합니다.
고향의 여름 마당은 빨래 몫이었습니다. 뚝뚝 떨어지는 물 때문에 빨랫줄은 아래로 축 쳐지기 일쑤였지요. 자잘한 일상들이 버거운 작은어머니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빨랫줄에서 뚝뚝 떨어지는 낙수 마냥 갓 시집 온 작은어머니의 설움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작은아버지가 슬그머니 다가가 바지랑대로 빨랫줄 한가운데를 바짝 당겨서 올립니다. 그 바람에 물 먹은 이불 호청과 풀 먹인 삼베 호청이 저만큼 위로 올라갔는데 좀더 해 가까이 다가가서인지 하얀 빨래들이 더욱 희어지곤 했지요. 그때 작은아버지는 작은어머니의 바지랑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작은어머닌 빨래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뒤집기도 하고 발로 밟기도 하면서 서너 번씩 번갈아 가며 햇빛에 내다 널었지요. 그러면 호청은 다림질하듯 결이 펴졌는데 작은어머니의 시집 설움도 그렇게 잦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당에서 한들거리는 빨래를 보고 있으니 공연히 서러움이 번집니다. 햇빛 품은 빨래 속에 고국의 햇빛 한 조각 들어간 듯해서 말입니다. 별 의미도 다 갖는다 하겠지만 삶이란 따지고 보면 이런 사소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지요.
한들한들 땀내를 씻어낸 빈자리에서 바다 내음이 납니다. 짭조름한 해음, 어쩐지 고향 내음이 묻어나는 듯도 싶습니다. 작은어머니가 그러셨듯 나도 빨래의 속을 뒤집습니다. 그리고 잘 마른 빨래를 걷어와서 곱게 접어 손바닥으로 톡톡 쳤더니 다소곳해집니다. 올 마다 품었던 햇살을 이제야 슬그머니 내놓는가 봅니다.
낯선 언어, 다른 피부 색깔, 어색한 문화는 나를 늘 이방인의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쯤 벗어났다 싶으면 어느 새 끼어드는 설움, 드라이기에서 말린 빨래가 늘 질척거리는 것도 이 때문인 듯싶습니다. 쏟아지는 이민의 설움을 드라이기에서 말리는 건 되레 설움을 지피는 일이 아닌지요. 어쩜 이민은 속으로 설움을 쟁이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의 바람 속에 쟁여 있는 고국의 내음을 맡는 일이 이방인의 설움을 푸는 자연치료법임을 그들은 정녕 모르는 것일까요.
이참에 집들이를 했습니다. 이민 와서 처음 마련한 작은 집인데 모두들 어찌나 반겨주시는지. 낯선 이민의 땅에서 우리 세 식구 뿐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많은 분들의 손길이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날 거풍했던 이웃들이 정녕 내 삶의 바지랑대가 아닌지요.
빨랫줄을 인 마당이 한결 살갑습니다. -
* 시애틀의 "한국문협 워싱톤 지부" 김윤선 전 회장님의 글입니다.
저희 "캐나다 한국문협" 창립때, 그 후 밴쿠버에서 열린 "한국문협 해외 심포지움" 때도 다녀 가셨고 ...
요즘도 왕성하게 문학활동을 하십니다.
첫댓글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여기서 뻗어간 잔 뿌리들이 얽히고 섫힌 사람 살이의 경이로움은 언제나 긴 설움도 긴 기쁨도 아닌 것 같아요. 하루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 에서 기쁘고 즐거운 것들을 찾아 즐기는 것이 우리에게 지녀지는 시간의 지혜 인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