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화 崔善嬅(1911 ~ 2003】
"흥사단 한국혁명여성동맹 한국애국부인회 등에 가입해 독립운동 "
1911년 6월 20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소정(崔素貞)이다. 남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차장으로 활동한 양우조(楊宇朝)이다.
평양 정의여자보통학교를 거쳐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영문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6년 중국에 입국하기 위해 상하이(上海) 간호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6개월 만에 자퇴하였다. 중국으로 건너간 후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였다. 1937년 상하이에서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에 입당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해 5월 광저우(廣州)에서 개최된 흥사단 24회 창립기념식에 참석하였다.
1940년 5월 민족주의 진영의 재건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을 합당해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가입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였다. 1940년 6월 한국독립당의 지도와 원조 하에 충칭(重慶)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창립하였다.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최형록(崔亨祿)·이순승(李順承) 등과 감찰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500만 한인 여성들의 민족정신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전선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여 민족혁명당을 아우르면서 통합임시정부로 확대·개편되자, 1943년 2월 23일 충칭의 각 계파 부인들은 김순애(金淳愛)를 중심으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였다. 재건 한국애국부인회 창립 직후 서무부 간부로 선출되어 주석 김순애, 부주석 방순희, 조직부 연미당(延薇堂), 훈련부 정정화, 선전부 김윤택(金潤澤), 사교부 권기옥(權基玉), 재무부 강영파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지원, 국내외 여성들에게 민족해방을 위해 각지 여성 조직의 분발과 긴밀한 연락 호소, 광복군에게 위문품 지원,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한인 위안부 10여 명 인계·치유 및 재교육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해 5월 5일 한국애국부인회가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무정부주의연맹·한국청년회와 함께 재중국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자, 이에 참여하여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해 7월에는 한국 여성을 향해 자신이 한국의 여성이며 조국광복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과 한국의 모든 여성은 단합해 국가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용전(勇戰)할 것을 주장하는 편지와 재건선언서를 미주지역의 동포에게 전달해 해외의 일반동포와 여성사회의 협조를 구하는 적극적인 홍보 활동에 앞장섰다.
1944년 3월 말부터 임시정부 선전부가 중국국민당 중앙선전부 대적(對敵)선전위원회와 합작하여 일주일에 3번 정기방송을 내보내자, 한국애국부인회 간부들도 매주 1회씩 충칭방송국을 통해 고국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의 활동 상황, 세계정세, 애국부인회 재건에 관한 소식 및 임시정부 후원 요청 등을 방송하였다. 1944년 3월 8일부터 한국애국부인회 총무부장의 자격으로 충칭방송국에서 방송하였다.
광복 후 1946년 5월 남편 양우조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76년까지 이화여대 영문과에 출강하였다. 중국에서 큰딸 제시를 낳고 남편 양우조와 8년 간(1938. 7. 4~1946. 5. 4) 함께 쓴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를 남겼다. 이 일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일전쟁 기간 일본의 공습을 피해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으로 이동해 간 여정의 기록을 남겨 1차 사료로 평가받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