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일제치하! 개포면 금동리(양지마)에 '계동학원'을 설립하여 가난으로 헐벗고 굶주린 무산아동을 모아 무상으로 보통학교 과정과 항일 민족 교육을 실시하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계동학원 설립자 박창호 선생의 유지를 기리는 유허비 제막식이 4일 오전 11시 금동에서 개최됐다.
이날 제막식에는 안희영 도의원, 김은수.김후남 군의원, 반형식 전 국회의원, 유강하 전 도산서원 원장, 김대진 재경회장, 박대일 전 재경예천군민회장, 안상대 광복회 예천지회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및 주민, 박창호 선생의 후손 등 200여명이 참석하여 유허비 제막을 축하했다.
정희융 위원장은 "무지와 가난 속에서 고통 받던 이 땅의 농민과 노동자의 어려움을 보도하고 이분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고, 나아가 신간회 예천지회 간부로 활동하다 일제로부터 온갖 탄압을 받았던 동아일보 김상기 기자의 후손에게 '송공패'를 전달했다.
유허비문을 쓴 김봉균 박사(전 대구보건대학교 교수:철학박사)는 "일제치하에서 이 나라 독립지사들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곳곳에 학교를 세웠으며, 예천에서도 계동학원이 설립되어 80여명의 학생들이 선생님들이 스스로 부담하는 경비로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박인호 건립소위원장은 "일제강점기 우리 동네에 함양박씨 주손 박창호 선생이 설립한 계동학원이 있었다가 폐교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으나 구체적인 사실은 잘 모르고 지냈는데 정희융 위원장님과 위원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유허비를 건립하게 되어 감사드린다"는 경과보고를 했다.
정희융 위원장은 기념사에서 "계동학원은 인근의 헐벗고 굶주린 무산아동을 모아 무상으로 보통학교 과정을 가르쳤으며, 학교운영에는 설립자 박창호 학감을 비롯한 4분의 선생님이 힘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여 2년 만에 80여명의 학생들이 이 곳에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또 "설립자 박창호 선생은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에 뛰어들었고 독립운동단체의 총 연합체인 신간회 예천지회 간부로 활동하며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다 일제의 치안유비법위반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를때 일본인판사는 선생을 민족의식이 치열한 자로 판결문에 썼다"고 회고했다.
정 위원장은 앞으로 "이런 역사적인 계동학원 선생님들의 항일민족교육의 정신이 서린 이곳에 유허비를 세우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하며 앞으로 유허비 건립위원회는 유허비보전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유허비를 영원히 보존, 계동의 항일 민족교육을 선양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희영 도의원은 축사에서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에 계동학원 개교 90주년을 기념하는 항일민족학교 사립 계동학원 유허비 건립기념식을 축하드리고 이곳이 우리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역사적인 장소로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지길 기원드린다"고 말했다.
반형식 전 국회의원은 "박창호 선생이 일제치하에서 학교를 세우고 헐벗고 굶주리던 조선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오늘 계동학원유허비를 세운 이자리를 방문하게 됐다"며 "남달리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계동학원 박창호 선생을 추모한다"고 말했다.
김은수 군의원은 "향토문화를 항상 걱정하시면서 오늘 행사를 준비하여 준 정희융 위원장님과 후손이신 박인호 부위원장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유허비 건립을 계기로 박창호 선생님을 추모하는 발길이 이곳 금동 유허비 현장에 계속되길 기원한다"는 축사를 했다.
한편, 유족들은 "오늘 멀리 이곳까지 찾아 주신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 체 무심하게 지내오던 저희들에게 선대가 해 주신 계동학원의 항일민족 교육을 세상에 드러내고 빛내주신 정희융 위원장님과 위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또한 "오늘 해 주신 소중한 유허비는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가슴 깊이 간직할 것"을 다짐하고 "선대가 운영했던 계동학원이 일제 강점기 예천의 항일 민족교육과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한 몫을 담당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더욱 열심히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문중이 되겠다"고 말했다.
유허비건립 고유문에는 "2014년 경오 10월 4일 계동학원 설립자 박창호 학감님 질녀 제현은 큰아버님과 박노헌, 박중식, 박윤상 선생님 영전에 엎드려 감히 고하려니 눈물이 흘러서 앞을 가리나이다, 돌이켜보면 암울했던 일제치하 1923년 4월 이곳에 터를 잡아 교문을 열고,
가난한 학생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니 인근 마을에서 구름같이 모였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은 계동의 선생님들은 지성으로 학생을 가르치니 전국에 이름난 민족학교였습니다. 4년이 지난 1926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당한 학생들은 배움터를 잃고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해방된 조선 땅에서도 계동이라는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없는듯 살아왔습니다.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큰 아버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의 교육애도 무심한 세월 속에 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각계의 인사들이 계동학원 세운 뜻을 기리고 본받고자 오늘 여기에 유허비를 세웠나이다. 이 비는 앞으로 선생님과 학생들을 추모하는 제향시설이요, 항일지사를 받드는 현충시설이며, 후생들을 위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만세토록 우뚝하게 빛날 것입니다.
큰아버님! 계동학원 개학 후 90여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모시지 못한 불경을 꾸짖고 가르쳐 주시기를 우러러 청하나이다. 네 분 선생님의 후손과 함께 삼가 영전에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제물을 차리고 공손히 엎드려 올리오니 부디 흠향 하옵소서...2014년 10월 저 멀리계신 백부님의 아들 제홍오빠를 대신하여 질녀 박제형 읍혈재배"라고 기록됐다.
예천인터넷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