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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사정은 'ㄷ'형 안채와 'ㅡ'자형 행랑채가 나란히 놓여 위치하고 있어, 전체적인 집 모양을 보면 'ㅁ'자 구조로 이뤄져 있다. 조선시대 후기 경기도 민가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
폐가처럼 방치돼 있던 300년 된 고택이 최근 제 모습을 되찾았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위치한 영사정은 2010년 3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7호로 지정된 후, 정밀 해체 및 실측 작업을 거쳐 2013년 10월부터 안채 및 행랑채 복원 공사에 돌입했다. 올해 9월 복원식을 가진 영사정은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의 뜻에 따라 고양시에 기부됐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영사정은 조선시대 후기의 민가 구조를 잘 보존하고 있어, 옛 선조들이 지녔던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명소로 손색이 없다.
취재 박천국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한 순간의 무관심으로 폐물로 취급받았던 영사정,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300년 역사를 간직한 최고의 보물로 다시 우뚝 서다”
고양시의 도움을 받아 아직 시민에게 공개되지 않은 영사정 안채와 행랑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택을 복원하기 위해 사용된 재료들이 새 것이어서 마치 새 한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영사정 곳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대들보나 상량문 등을 통해 오래 된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본 복원 전 영사정의 모습과 비교하면,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불과 몇 년 사이 고택에 생명의 기운이 맴돌고 있는 듯했다. 제 모습을 되찾은 영사정은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영사정을 둘러보고 나오다 우연히 만난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회 김덕경 회장의 동생이자 영사정 복원의 내막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김순경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조선조 숙종 35년에 건립된 제사 건축
영사정은 조선조 숙조 53년(1709년)에 지은 한옥으로 숙종의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의 부친 경은부원군 경주김씨 김주신이 아버지 김일진을 위해 지은 제사 건축물이다. 당호인 영사정(永思亭)은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던 김주신이 지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김순경 씨는 “이곳은 김주신이 조선시대 숙종의 장인인 아버지 김일진 선생의 제사를 지냈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영사정은 조선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아버지 김주신이 살던 집입니다. 김주신이 아버지 김일진의 제사와 살림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1709년에 건립된 곳입니다. 따라서 유래가 명확한 제사 건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사정의 가장 큰 특징은 안채와 행랑채가 나란히 놓여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집 마당에 서면 사방에 위치한 건축물에 둘러싸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영사정은 300여 년 전 민가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집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림들이 고택과 더불어 빼어난 절경을 이룬다.
“규모가 대단히 큰 고택에 속하지는 않습니다만,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입지 조건이나 ‘ㄷ’자형 안채와 ‘ㅡ’자형 행랑채의 구조 등은 영사정의 가치를 높이는 요인들입니다. 이 집이 제사로 사용됐지만, 실제로 살림집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살림집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자료도 됩니다.”
특히 영사정 안채 마루는 300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복원 전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복원 전 사진을 보면, 대청마루에서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2짝 판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 판문 사이에 기둥이 서 있다. 방 한가운데 거슬리는 기둥이 있었던 셈인데, 후손들은 불편함을 이유로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한옥에 손을 대지 않았다. 옛것을 지키려는 명문가 사람들의 정신은 영사정 곳곳에 배어 있는 듯했다.
“이곳은 최근 10여 년 전까지 문중 후손들이 생활을 했던 집입니다. 일부 종갓집을 보면 생활하는데 불편해 개조를 하는데, 영사정은 300년 전 원형 그대로를 간직한 한옥이었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한 집을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 제 빛을 내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원형을 지키려고 했던 문중의 노력은 반드시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울어가는 영사정을 지켜내다
▲ 행랑채의 모습. 현재 영사정은 전면 개방되어 있지 않지만, 체험 프로그램이 본격 시작되면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영사정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날이 머지않았다. |
▲ 영사정 안채 내부의 모습 |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영사정은 단순히 오래 된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전문가들이 영사정의 가치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고택을 복구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김순경 씨는 선조들의 힘으로 세워지고 보존된 영사정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했다. 큰돈을 들여 고택을 복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문화재 지정이 반려되자, 고택 소유 및 관리 주체인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회 사람들은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조의 흔적이 밴 집이라 오랜 세월을 거쳐 낡고 허름해졌지만 한옥을 무너뜨리고 새 건물을 짓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집을 보존하기 위해 고양시와 협의도 해보고 대학 교수가 와서 고택의 사진을 찍어간 적도 있지만, 백방으로 알아본 노력들이 전부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시간들이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방치 아닌 방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허물어져 가는 고택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조상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문중회의를 거쳐 한옥을 해체하고 우리의 힘으로 복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종중에서 마련한 돈으로 고택 복구에 필요한 나무를 사들여 쌓아두기 시작했고, 목공들은 본격적으로 나무 손질에 돌입했다. 영사정 복구공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 고택을 눈여겨보고 있던 한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로 영사정 복원의 숨은 일등공신인 한겨레건축사무소 최우성 소장이었다. 이때 최 소장은 종중을 대표해 공사장 현장에 나서게 된 김순경 씨에게 ‘문화재 지정’ 후 복원 공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실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엇보다 복원 공사에 필요한 비용이 첫 난관이었죠. 종중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팔아서 가까스로 공사비를 마련해, 목재를 구입해서 쌓아두고 본격적인 해체 작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저에게 와서 신축 결정을 미뤄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 역시 ‘문화재 지정을 위해 많이 뛰어봤지만 매번 허사로 돌아가자 여러 차례 문중 회의를 거쳐 나온 결정’이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워낙 ‘해보겠다’는 입장이 강경했고, 문중에서도 문화재 지정 후 제대로 된 복원 공사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건물을 헐지 않기로 한 것이죠.”
한 무명 건축사의 포기를 몰랐던 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영사정을 지키려는 문중의 노력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점차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양시에 가장 오래된 300년 된 고택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처지가 되었다는 소식에 ‘문화재 지정’에 대한 긍정 여론이 형성되면서, 고양시에서도 영사정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제가 알기로는 최 소장이 많은 고생을 했을 겁니다. 종중 차원에서도 지난 10여년 간 영사정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지정 탄원을 수차례 냈으니까요. 고양시 관계자와 경기도 문화재위원들, 관련 학자들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죠. 그러던 중 경기도 문화재위원회의 최종 단계 심의에서 영사정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간의 기다림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 예산 8억원이 투입돼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다
▲ 영사정 현판의 모습. 영사정은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 가문의 남다른 효심을 보여준다. |
▲ 대청마루 위 천장을 보면 한 눈에 봐도 오랜 세월을 간직한 상량문이 있다. ‘歲己丑 四月初’라는 문구를 통해 한옥의 건립 연도가 1709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영사정의 복원 공사는 원형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졌다. 경기도 고양시는 2011년 12월 영사정을 복원하기 위한 정밀 해체 및 실측 조사를 실시했다. 이는 복원 설계를 위한 근간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으로, 영사정 원형 복원의 핵심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김순경 씨는 “한옥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해체하는 작업을 통해 원형을 찾아나가야 한다”며 “만약 우리 문중만의 힘으로 했다면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 3월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고양시는 문화재 원형 복원을 위해 경기도 문화재 현상 변경 심의와 문화재 전문가가 참여한 자문회의를 6번 정도 열었어요. 특히 해체 부재 중 사용할 수 있는 옛날 부재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최대한 재사용하는 방향으로 결정해, 원형에 가까운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렇게 몇 가지 작업을 거쳐 작년 10월 총 사업비 약 8억원이 투입된 지상 1층, 연면적 127.4㎡ 규모의 영사정 안채 및 행랑채 복원 공사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영사정을 지키고 싶어했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지난 9월 2일 복원공사 준공식을 가졌다. 시민과 고양 600년 범시민추진위원회 위원, 향토 사학자들과 각 기관 단체장 등 총 100여명이 제 모습을 되찾은 영사정 앞에 섰다.
준공식에 참석한 최성 고양시장은 “문화재 복원을 통해 고양 600년 역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현대인들의 전통 역사 문화 체험과 문화유적 답사의 기회를 넓힐 수 있어 100만 고양 시민들이 600년 문화행복도시로 한걸음 더 나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이날 행사는 복원된 영사정을 관계자 및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자리였지만, 문중 소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이후 첫 번째 공식 행사여서 그 의미를 더했다. 도 지정 문화재로 등재된 만큼 더 이상 문중만의 소유가 아닌, 국민의 유산으로 남기를 바란 것이다.
“저희 종중은 문화재 복원의 원활한 추진과 복원 후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토지 및 해체 부재를 고양시에 기증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가문의 명예를 위해 영사정 복원 공사를 시작했지만, 영사정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합심해 땀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의 유산으로 내놓는 것이 더욱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영사정이 앞으로 고양시와 경기도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명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준공식을 마친 영사정은 본격적으로 시민을 맞을 준비에 한창이다. 고양시의 지원을 받아 전통역사와 문화를 교육하는 체험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복원된 영사정 앞에 서서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김순경 씨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영사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전통의 우수성과 조상들의 지혜를 알리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새로 지은 한옥처럼 보이지만, 곳곳에 우리 조상들의 멋과 지혜가 숨어 있는 영사정 앞에 서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기분을 앞으로 많은 국민들이 느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양시에서 본격적으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면, 아이들에서부터 어른들까지 누구나 찾는 관광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영사정이 복원되기까지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영사정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으로 확신합니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아무로 모르게 본 모습을 잃을 뻔했던 영사정. 하지만 전통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영사정은 결국 원형을 간직한 경기도 고양시 ‘최고(最古)’의 한옥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영사정 복원은 건물의 원형을 되찾았다는 점뿐만 아니라, 개발의 논리에 밀려 그동안 쉽게 간과해왔던 전통의 가치를 재조명하도록 이끌었다는 점에서 오래도록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경기도 고양시 최고(最古)의 민가를 복원하다]
▲ 영사정은 'ㄷ'형 안채와 'ㅡ'자형 행랑채가 나란히 놓여 위치하고 있어, 전체적인 집 모양을 보면 'ㅁ'자 구조로 이뤄져 있다. 조선시대 후기 경기도 민가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폐가처럼 방치돼 있던 300년 된 고택이 최근 제 모습을 되찾았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위치한 영사정은 2010년 3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7호로 지정된 후, 정밀 해체 및 실측 작업을 거쳐 2013년 10월부터 안채 및 행랑채 복원 공사에 돌입했다. 올해 9월 복원식을 가진 영사정은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의 뜻에 따라 고양시에 기부됐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영사정은 조선시대 후기의 민가 구조를 잘 보존하고 있어, 옛 선조들이 지녔던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명소로 손색이 없다.
취재 박천국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한 순간의 무관심으로 폐물로 취급받았던 영사정,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300년 역사를 간직한 최고의 보물로 다시 우뚝 서다”
고양시의 도움을 받아 아직 시민에게 공개되지 않은 영사정 안채와 행랑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택을 복원하기 위해 사용된 재료들이 새 것이어서 마치 새 한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영사정 곳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대들보나 상량문 등을 통해 오래 된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본 복원 전 영사정의 모습과 비교하면,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불과 몇 년 사이 고택에 생명의 기운이 맴돌고 있는 듯했다. 제 모습을 되찾은 영사정은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영사정을 둘러보고 나오다 우연히 만난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회 김덕경 회장의 동생이자 영사정 복원의 내막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김순경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조선조 숙종 35년에 건립된 제사 건축
영사정은 조선조 숙조 53년(1709년)에 지은 한옥으로 숙종의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의 부친 경은부원군 경주김씨 김주신이 아버지 김일진을 위해 지은 제사 건축물이다. 당호인 영사정(永思亭)은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던 김주신이 지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김순경 씨는 “이곳은 김주신이 조선시대 숙종의 장인인 아버지 김일진 선생의 제사를 지냈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영사정은 조선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아버지 김주신이 살던 집입니다. 김주신이 아버지 김일진의 제사와 살림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1709년에 건립된 곳입니다. 따라서 유래가 명확한 제사 건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사정의 가장 큰 특징은 안채와 행랑채가 나란히 놓여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집 마당에 서면 사방에 위치한 건축물에 둘러싸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영사정은 300여 년 전 민가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집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림들이 고택과 더불어 빼어난 절경을 이룬다.
“규모가 대단히 큰 고택에 속하지는 않습니다만,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입지 조건이나 ‘ㄷ’자형 안채와 ‘ㅡ’자형 행랑채의 구조 등은 영사정의 가치를 높이는 요인들입니다. 이 집이 제사로 사용됐지만, 실제로 살림집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살림집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자료도 됩니다.”
특히 영사정 안채 마루는 300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복원 전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복원 전 사진을 보면, 대청마루에서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2짝 판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 판문 사이에 기둥이 서 있다. 방 한가운데 거슬리는 기둥이 있었던 셈인데, 후손들은 불편함을 이유로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한옥에 손을 대지 않았다. 옛것을 지키려는 명문가 사람들의 정신은 영사정 곳곳에 배어 있는 듯했다.
“이곳은 최근 10여 년 전까지 문중 후손들이 생활을 했던 집입니다. 일부 종갓집을 보면 생활하는데 불편해 개조를 하는데, 영사정은 300년 전 원형 그대로를 간직한 한옥이었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한 집을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 제 빛을 내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원형을 지키려고 했던 문중의 노력은 반드시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울어가는 영사정을 지켜내다
▲ 행랑채의 모습. 현재 영사정은 전면 개방되어 있지 않지만, 체험 프로그램이 본격 시작되면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영사정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날이 머지않았다.
▲ 영사정 안채 내부의 모습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영사정은 단순히 오래 된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전문가들이 영사정의 가치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고택을 복구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김순경 씨는 선조들의 힘으로 세워지고 보존된 영사정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했다. 큰돈을 들여 고택을 복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문화재 지정이 반려되자, 고택 소유 및 관리 주체인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회 사람들은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조의 흔적이 밴 집이라 오랜 세월을 거쳐 낡고 허름해졌지만 한옥을 무너뜨리고 새 건물을 짓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집을 보존하기 위해 고양시와 협의도 해보고 대학 교수가 와서 고택의 사진을 찍어간 적도 있지만, 백방으로 알아본 노력들이 전부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시간들이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방치 아닌 방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허물어져 가는 고택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조상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문중회의를 거쳐 한옥을 해체하고 우리의 힘으로 복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종중에서 마련한 돈으로 고택 복구에 필요한 나무를 사들여 쌓아두기 시작했고, 목공들은 본격적으로 나무 손질에 돌입했다. 영사정 복구공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 고택을 눈여겨보고 있던 한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로 영사정 복원의 숨은 일등공신인 한겨레건축사무소 최우성 소장이었다. 이때 최 소장은 종중을 대표해 공사장 현장에 나서게 된 김순경 씨에게 ‘문화재 지정’ 후 복원 공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실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엇보다 복원 공사에 필요한 비용이 첫 난관이었죠. 종중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팔아서 가까스로 공사비를 마련해, 목재를 구입해서 쌓아두고 본격적인 해체 작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저에게 와서 신축 결정을 미뤄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 역시 ‘문화재 지정을 위해 많이 뛰어봤지만 매번 허사로 돌아가자 여러 차례 문중 회의를 거쳐 나온 결정’이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워낙 ‘해보겠다’는 입장이 강경했고, 문중에서도 문화재 지정 후 제대로 된 복원 공사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건물을 헐지 않기로 한 것이죠.”
한 무명 건축사의 포기를 몰랐던 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영사정을 지키려는 문중의 노력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점차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양시에 가장 오래된 300년 된 고택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처지가 되었다는 소식에 ‘문화재 지정’에 대한 긍정 여론이 형성되면서, 고양시에서도 영사정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제가 알기로는 최 소장이 많은 고생을 했을 겁니다. 종중 차원에서도 지난 10여년 간 영사정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지정 탄원을 수차례 냈으니까요. 고양시 관계자와 경기도 문화재위원들, 관련 학자들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죠. 그러던 중 경기도 문화재위원회의 최종 단계 심의에서 영사정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간의 기다림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 예산 8억원이 투입돼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다
▲ 영사정 현판의 모습. 영사정은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 가문의 남다른 효심을 보여준다.
▲ 대청마루 위 천장을 보면 한 눈에 봐도 오랜 세월을 간직한 상량문이 있다. ‘歲己丑 四月初’라는 문구를 통해 한옥의 건립 연도가 1709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영사정의 복원 공사는 원형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졌다. 경기도 고양시는 2011년 12월 영사정을 복원하기 위한 정밀 해체 및 실측 조사를 실시했다. 이는 복원 설계를 위한 근간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으로, 영사정 원형 복원의 핵심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김순경 씨는 “한옥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해체하는 작업을 통해 원형을 찾아나가야 한다”며 “만약 우리 문중만의 힘으로 했다면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 3월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고양시는 문화재 원형 복원을 위해 경기도 문화재 현상 변경 심의와 문화재 전문가가 참여한 자문회의를 6번 정도 열었어요. 특히 해체 부재 중 사용할 수 있는 옛날 부재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최대한 재사용하는 방향으로 결정해, 원형에 가까운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렇게 몇 가지 작업을 거쳐 작년 10월 총 사업비 약 8억원이 투입된 지상 1층, 연면적 127.4㎡ 규모의 영사정 안채 및 행랑채 복원 공사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영사정을 지키고 싶어했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지난 9월 2일 복원공사 준공식을 가졌다. 시민과 고양 600년 범시민추진위원회 위원, 향토 사학자들과 각 기관 단체장 등 총 100여명이 제 모습을 되찾은 영사정 앞에 섰다.
준공식에 참석한 최성 고양시장은 “문화재 복원을 통해 고양 600년 역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현대인들의 전통 역사 문화 체험과 문화유적 답사의 기회를 넓힐 수 있어 100만 고양 시민들이 600년 문화행복도시로 한걸음 더 나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이날 행사는 복원된 영사정을 관계자 및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자리였지만, 문중 소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이후 첫 번째 공식 행사여서 그 의미를 더했다. 도 지정 문화재로 등재된 만큼 더 이상 문중만의 소유가 아닌, 국민의 유산으로 남기를 바란 것이다.
“저희 종중은 문화재 복원의 원활한 추진과 복원 후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토지 및 해체 부재를 고양시에 기증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가문의 명예를 위해 영사정 복원 공사를 시작했지만, 영사정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합심해 땀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의 유산으로 내놓는 것이 더욱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영사정이 앞으로 고양시와 경기도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명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준공식을 마친 영사정은 본격적으로 시민을 맞을 준비에 한창이다. 고양시의 지원을 받아 전통역사와 문화를 교육하는 체험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복원된 영사정 앞에 서서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김순경 씨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영사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전통의 우수성과 조상들의 지혜를 알리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새로 지은 한옥처럼 보이지만, 곳곳에 우리 조상들의 멋과 지혜가 숨어 있는 영사정 앞에 서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기분을 앞으로 많은 국민들이 느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양시에서 본격적으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면, 아이들에서부터 어른들까지 누구나 찾는 관광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영사정이 복원되기까지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영사정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으로 확신합니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아무로 모르게 본 모습을 잃을 뻔했던 영사정. 하지만 전통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영사정은 결국 원형을 간직한 경기도 고양시 ‘최고(最古)’의 한옥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영사정 복원은 건물의 원형을 되찾았다는 점뿐만 아니라, 개발의 논리에 밀려 그동안 쉽게 간과해왔던 전통의 가치를 재조명하도록 이끌었다는 점에서 오래도록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사라질 뻔한 300년 고택 ‘영사정’을 구하다]- 최우성 한겨레건축사무소 소장
▲영사정 처음 발견 당시 전경 ▲번듯하게 준공된 영사정 전경 |
최우성 한겨레건축사무소 소장
“문화재 지키는 소임을 했을 뿐
300년 전 원형 살리려 했지만...”
고양시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인 영사정이 복원 된지 4주일이 지났다. 9월 2일 준공식을 가진 영사정(永思亭)은 덕양구 대자동 958번지에 위치한 고택으로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라는 뜻을 지녔다.
영사정은 조선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아버지 김주신이 살던 집이다. 김주신이 아버지 김일진의 재사(齋舍)겸 살림집으로 1709년에 이 집을 지었다. 이 집은 조선 후기 살림집의 중요한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고택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그러나 이러한 영사정이 문화재로 지정되고 복원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고양시는 영사정의 문화재적 가치를 등한시하고 ‘문화재 지정 신청’을 몇 번이나 반려했던 것.
영사정은 한때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가는 집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문중의 판단에 새집으로 짓기로 결정되었었다. 당시 문화재 지정이 반려되었던 영사정이 하루아침에 헐려버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사정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 것은 한 건축사의 피나는 노력에서 비롯됐다. 한겨레건축사사무소 최우성 소장이 그 주인공으로 그는 영사정을 처음 발견한 2009년 1월부터 영사정이 문화재로 지정된 2010년 3월까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양시와 영사정 문화재 지정을 놓고 싸웠다.
하지만 영사정 복원 준공식날 영사정 복원의 으뜸 공로자인 최 소장은 준공식 한쪽에서 시 관계자들의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다. 문화재적 가치를 처음 확인하고 문화재 지정이 될 수 있도록 고군분투한 최 소장에 대한 정당한 예우 없이 준공식 현장에서 이름 한 번 불리지 않은 것이다.
영사정 복원의 일등공신인 최우성 소장을 만나 그간의 복원 과정에 대해 들어봤다.
영사정 복원에 앞장선 최우성 한겨례건축사무소 소장. |
▶영사정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2009년 1월 비석을 연구하는 친구와 김주신 신도비를 찾았다가 그 옆에 폐가가 다 되었던 영사정을 만나게 됐다. 당시 문화재적 건축물로서의 품격은 찾기 힘들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내부공간을 살피기에도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국내 여러 민가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옛날의 기법이 변형이 안 된 채 간직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고택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던 영사정의 모습이 궁금한데
영사정의 안채 마루는 300년의 오랜 세월을 이겨내고 본래 지어진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대청마루에서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2짝 판문(나무문)이었는데, 그 판문 사이에 기둥이 서있는 것이었다. 최근 10여 년 전까지 문중 후손들이 이 집에서 생활했기에 그 기둥이 거추장스러워 기둥을 없애고 개조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300년 전 원형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후손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2009년 당시 문중에서 영사정을 새집으로 짓기 위해 목재를 쌓아두고 있었다고 들었다.
맞다. 다 쓸어져가는 영사정 옆에 목재가 쌓여있었다. 복원이 아닌 새집으로 짓기 위해 문중에서 사들인 목재였다. 문중에서도 영사정의 문화재 지정에 오래 전부터 힘써오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문화재 신청이 반려되던 상황에서 문중에서도 어쩔 수 없이 사비를 들여 신축을 결정한 것이었다. 나는 문중 어르신들을 만나 신축 결정을 미뤄달라고 했고, 그때부터 1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영사정이 문화재로 지정돼 복원되는 것만을 위해 뛰었다.
최우성 소장이 영사정 내부를 살피고 있다. |
▶영사정의 건축적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
건축연도(1709년)가 확실히 기록된 재사가옥이다. 부엌과 곳간 사이의 판벽(나무벽)의 경우 부엌쪽은 톱질 자국이, 곳간쪽은 겉껍질을 다듬어 판판하게 한 대자귀질이 잘 남아있다. 대청의 뒷문은 2짝 판문인데 가운데 문설주(기둥)가 설치된 특이한 구조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보기 드문 구조다. 기둥과 기둥사이에 설치한 문틀과 아방의 짜맞춤이 마치 가구를 짜맞춘 듯 정밀하게 연귀맞춤으로 되어있었다.
▶복원 뒤 아쉬운 점이 많을 것 같은데
전체적인 형태는 되살아났으나 옛 재료들을 더 많이 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기둥과 도리부재의 교체도 아쉽지만, 문짝들이 하나를 제외하곤 옛모습이 없이 다 교체됐다. 부엌이나 창고, 대청 뒤편에 있었던 판문을 한두 개만 살렸어도 옛것과 새것을 비교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다. 문고리 등 쇠로 된 재료들도 더 살릴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또한 서까래 등이 자연스럽게 굽어있던 옛 모습과는 달리 현대식 건물처럼 너무나 천편일률적으로 직선화되어 옛정취가 안보였다.
사진 오른쪽부터,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회 김덕경 회장, 최우성 소장, 김덕경 회장의 동생 김순경 씨. 경주김씨 두 형제는 영사정에서 태어나서 청년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
▶최우성 소장의 노력으로 영사정이 고양시의 가장 오래된 고택으로 다시 태어났다.
김주신의 후손인 경주김씨 의정공파 종중회와 이은만 전 고양향토문화보존회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사실 고양시에 100년 전 가옥은 찾아보면 꽤 될 것으로 보인다. 영사정 근처에도 100년 전 가옥이 남아있다. 고양시는 이런 고택들을 조사하고 발굴해 그 보존가치가 있다면 시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사정 복원을 우려한다
고양시는 경주 다음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고을이다. 이 중에서도 이번에 복원하고 있는 영사정은 300년이 넘은 조선 중반의 건축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숙종대왕의 계비 인원왕후의 아버지 경은부원군(김주신)의 집이다.
당시 경은부원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된 서오릉의 주인공으로 그 아버지 (김일진) 산소를 이곳 고양시 대자리에 모시고 제향을 하기 위하여 효심으로 설계한 조선시대 건축의 귀중한 패션이다.
한수이북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관대작의 주거행태를 통하여 당시의 주거문화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재로서의 그 가치는 크다 할 것이다.
300년이란 세월은 하루해가 10만 번을 뜨고 지는 장고의 세월이다. 이런 인고의 세월을 이겨 낸 영사정은 자연의 산물인 나무를 이용하여 사람이 특별한 목적 하에 이룩한 문화의 산물이며 우리조상의 얼이 서려있는 유산이다. 그 산물이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졌는가에 따라서도 그 존재의 의의는 다르다 할 것이다.
이 영사정은 조선시대 중기 경기북부지방의 대표적인 건축문화재로 이 문화재를 찾고, 지키기 위하여 필자를 비롯하여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안재성회장 및 지역 향토사학자인 이은만선생, 고 건축학자인 최우성박사, 최경순 등이 힘과 뜻을 모아 문화재청과 국회에 진정하고, 수많은 전문가에게 호소하여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받기에 이르렀고, 이제 3년이란 세월이 흘러 복원이 시작됐다.
따라서 필자는 경은부원군과 동본을 가진 일가이기 이전에 이 영사정에 대한 애정이 남 다르다. 사실 당시 영사정은 세월의 풍상을 맞아 붕괴일로에 있었으며, 세인의 무관심 속에 폐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영사정이 고양의 자랑거리로 300년의 역사가 오롯이 되살아 날 수 있게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3년 전 보았던 그 모습에서 처음에 지어졌던 초기의 당당한 모습으로 되살아날 것을 기대하였다.
문화재복원공사란 이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문화재를 이룩하였던 옛 어른의 손때와 정취가 묻어 스며들어야만 살아있는 문화재가 되는 것이지 문화재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12월 17일 이 영사정을 문화재 지정에 힘을 모았던 몇 몇 분들과 영사정 복원현장을 방문해본 결과 우리는 너무도 크게 실망하였다. 지금의 영사정 복원은 복원이 아니라 신축이나 개축내지는 대수선에 불과한 졸속 그 자체였다.
3년 전 보았던 영사정은 비록 벽이 헐고, 지붕이 새며, 기둥이 쓰러질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지만, 옛날 처음 지었을 당시의 모습에서 큰 변형이 없었다.
흙이 헐어진 벽을 통해 본 외역기 벽체의 섬세한 마무리며, 떨어져 나가 풍상을 이겨 낸 문짝은 그 소목장의 꼼꼼함으로 300년 전의 건축기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대부분 오래된 집의 경우 방에 새마을 보일러라도 깔아서 변형을 하여 살고 있지만 이 영사정은 후손들이 그마저도 감수하고 옛날식 부엌에 구들 등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당시 전문가들이 본 영사정은 비록 누추한 모습이었지만 해체하여 다시 사용가능한 목재를 고른다면 아무리 못쓴다 하더라도 주요 구조재의 30~40%는 재활용 될 것으로 진단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살펴보니 기둥 보와 도리의 주요 부재가 95%이상 신재로 교체되어 있었고, 인방재는 100% 신부재로 교체되었으며, 서까래의 경우에는 그 굵기도 커졌을 뿐 아니라 본래 자연스런 형태의 굽은 서까래는 단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그 뿐 아니라 안채의 대들보는 그 위치가 바뀌어 엉뚱한 곳에 걸리고, 그러다 보니 본래는 없던 홈을 파서 끼어 넣어 변형되어 있었다.
영사정은 현재 우리가 짓는 한옥과 다른 평사랑 지붕구조를 하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평사랑 위에 다시 서까래를 올려서 집의 구조자체가 5량 가옥처럼 보였다. 이것은 해체조사 당시의 구조를 다시 검토하여 원형대로 복원을 하여야 한다. 300년 전 지어진 구조를 이렇게 변형시켜버린다면 이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며, 이를 지켜보고 있는 고양시민과 전문가들에게 큰 실망만을 안겨줄 뿐이다.
현장의 창고에는 이미 폐기해버린 주요 구조부도 있었지만 아직 남은 부재도 많았고, 이들이 어디에 있었던 부재인지 조차 알 수 없도록 부재관리가 엉망이었다. 해체부재라면 당연히 뒤죽박죽되지 않도록 이름표를 달, 번호를 매겨 체계적으로 관리하야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한 채 부실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야적된 부재들을 살펴보니 기둥, 대들보, 도리 등 그대로 써도 아무 이상이 없는 부재들이 많이 있었으며, 조금 손상되어 약간의 손만 보면 다시 쓸 수 있는 부재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좀 힘들고 어렵더라도 옛날 부재를 가능한 최대한 활용해서 복원해야 그게 문화재복원이라 생각한다면 좀 번거롭고 귀찮더라도 본체에서 나온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되살리는 것이 복원이 아닐까 싶다.
요즈음 복원문제로 숭례문이 시끄럽다. 이런 전철을 고양시는 밟지 않아야 된다. 그 동안 고양시는 영사정의 가치를 몰라서 문중의 문화재등록신청도 몇 차례 외면한 적이 있다. 이는 문화재에 대한 관련 공직자들의 수준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단서로 서글픈 일이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복원되는 영사정마저도 이렇게 현장을 외면한다면 영사정은 그 이름이야 남기겠지만 건물의 변형은 조선시대 사대부가 살았던 건축 문화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라도 시공사와 경기도문화재자문위원 몇 사람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전문 도편수를 초빙하여 함께 현장을 감시하고, 점검하여 문화재다운 영사정을 복원하여야 할 것이다.
글쓴이 시민옴부즈맨공동체 대표 호미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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