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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Ⅰ. 왜 서양과 대화를 하려는가?
Ⅱ. 언어학, 해체철학과 선학(禪學)
1. 언어의 특성과 선학(禪學)
2. 텍스트의 해체와 인언견언(因言遣言)
Ⅲ. 퍼지식 논리와 불법(佛法)의 논리
1. 이원론 대(對) 퍼지식 사고(A or not -A 對 A and not-A)
2. 퍼지식 사고로 불경 읽기
Ⅳ. 욕망의 이론과 해탈의 방식
1. 라캉의 욕망의 이론
2. 욕망과 연기론
Ⅴ. 맺음말
Ⅰ. 왜 서양과 대화를 하려는가?
과연 동양은 동양, 서양은 서양인가? 동․서양의 철학을 접하면 어떻게 같은 별에 같은 시대에 사는 같은 인류가 이렇게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가 새삼 놀라게 된다. 서양이 실체론적 사고를 한다면 동양은 허공의 사고, 또는 관계의 사고를 한다. 서양이 이분법으로 세계를 이해한다면 동양은 총체적이고 전일적(全一的)으로 세계를 직면한다. 서양이 합리적 논증을 펴나간다면 동양은 직관의 통찰을 한다. 서양이 이데아를 상정하고 여기에 이르기 위하여 구성적 사유를 한다면 동양은 도(道)든 진여실체(眞如實體)든 이에 이를 수 없다며 해체적 사유를 요구한다. 서양이 동일성을 추구한다면 동양은 그것이 실은 차이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동양과 서양은 통하는 것이 있다. 동서양의 성현들의 사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양자가 서로 통함을 감지한다. 특히 이분법이나 동일성의 사유를 벗어나려는 탈현대의 철학이나 신서학(新西學)은 동양사상과 통한다. 또 다르다 하더라도 달의 어두운 부분이 있어 밝은 부분이 드러나듯 서양을 보아야 동양이 비로소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 연기적 사고에 충실한 것이 아닌가? 기(氣)의 존재를 추상적으로 증명하는 것보다 과학기기를 써서 입증할 때 더 많은 대중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처럼 불교의 세계화와 대중화를 이룩하려면 불교는 대중의 코드로 번역되어야 하고 서양의 합리적 논증과 설명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법장(法藏)이 화엄(華嚴)의 일중다다중일(一中多多中一)을 천장과 바닥과 사면이 거울로 이루어진 방 한가운데 불상을 놓아 무한대의 불상이 서로를 비추어주고 서로를 담고 있는 모습으로 이해를 시켰듯, 인문학은 최소한 이해와 설득의 방편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불교에 천착할수록 우리는 불교사상의 깊이와 넓이에 매료된다. 우리가 현재 맞고 있는 위기 가운데 많은 것들이 불교철학의 지평에서는 해결된다. 그러나 불교사상이 대안이다라는 주장에서 공허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과 현실을 배제한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지극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현재적) 의미는 없다. 그 논리가 공리공론을 넘어서려면, 그 논의는 지금 여기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세계적 보편성을 띠려면 서양철학과도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21세기 오늘 인류사회, 또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위기는 무엇, 무엇이어서 서양의 현대철학은 이러저러한 대안을 내세웠는데 불교철학은 이에 대해 어떤 면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논의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불교철학에서 대안을 찾자는 것은 이의 위대성이나 동일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difference)를 드러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동일성이 다른 것을 배척하는 것이라면 차이는 다른 것을 인정하여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차이의 관점에서 불교철학을 논할 때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찾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양자를 회통(會通)시킬 수 있다. 이런 취지로 필자는 서양 인문학계의 숙제인 마르크시즘 비평과 형식주의 비평을 종합하는 일에 도전하여 원효의 화쟁사상을 통하여 양자를 종합하여 화쟁기호학 이론을 창안하였고,1) 서양의 생태이론과 원효의 화쟁사상을 비교한 바 있으며,2) 조계종 포교지인 「법회와 설법」에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으로서 원효의 화쟁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원효의 화쟁사상과 서양사상을 비교하여 현재 인류가 맞고 있는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소외와 억압의 심화, 폭력의 일상화와 구조화, 공동체의 해체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글을 지난 5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다. 여기서는 언어학과 해체철학, 퍼지이론, 욕망이론을 통하여 불교철학의 이해를 쉽게 하고 깊이를 더하는 한 방편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언어학, 해체철학과 선학(禪學)
1. 언어의 특성과 선학(禪學): 언어로는 왜 진여실체(眞如 實體)에 이를 수 없는가?
『금강경(金剛經)』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을 보면 이런 뜻인 까닭으로 여래는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이 아닌 것조차 버리지 못하는가?라고 늘 말씀하셨다.3)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
이에 대해 규봉(圭峰) 종밀(宗密)은 뗏목의 비유는 말을 빌려서 뜻을 나타냄이니 응당히 말과 같이 뜻도 집착하지 말지니라.라고 풀이한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은 법(法)이란 반야바라밀법이요, 비법(非法)이란 하늘 따위에 태어나는 법이라. 반야바라밀법은 능히 일체 중생이 생사대해(生死大海)를 건너가게 하는 것이니, 이미 건너가서는 오히려 응당 머물지 말 것이거든 어찌 하늘 등에 나는 법에 즐거이 집착하겠는가.라고 풀이한다. 예장(豫章) 종경(宗鏡) 또한 사람도 공(空)하고 법(法)도 공(空)하니 진성(眞性)이 본래 평등하도다. 설사 명(名)과 상(相)이 쌍으로 없어지고 취하고 버림을 둘 다 잊는다 해도 오히려 뗏목으로 남아 있느니라. 손가락을 튕기는 사이에 이미 생사해(生死海)를 뛰어넘으니 어찌 모름지기 다시 사람 건너는 배를 찾으리오.라고 해석한다. 쌍림(雙林) 부대사(傅大士)는 아상(我相)에 대한 집착과 유무(有無)의 이변(二邊)을 떠난 깨달음을 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야부(冶父) 도천(道川)은 만약 문자에 집착하면 줄기만 보고 근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요, 문자를 버리면 근원만 보게 되어 줄기를 찾지 못하게 풔?근원과 줄기를 함께 잃지 말아야 바야흐로 법성해(法性海)에 들어가느니라.라고 해석한다.4)
그럼 이들의 해석은 모두 옳은가? 아니면 산스크리트 원문과 인도철학, 인도 문화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선가적(禪家的) 입장에서 주해(註解)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인가?5)
사리불이 사뢰었다. 일체의 만법은 모두 문자와 언어인데, 문자와 언어의 상(相)은 곧 뜻이 되지 않으므로 여실(如實)한 뜻은 문자와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이거늘, 지금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말씀하십니까? … 일체 만법이라는 것은 세간의 말로 세운 법이다. 진여의 법은 모두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문자와 언어로는 곧 뜻을 나타낼 수 없다. 모든 법의 진실한 뜻은 일체의 언설을 끊은 것이니, 이제 부처님의 설법이 만약 문자와 언어만이라면 곧 진실한 뜻이 없을 것이요, 만약 진실한 뜻이 있다면 마땅히 문자와 언어가 아닐 것이니, 이런 까닭에 어떻게 설법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6)
진여(眞如)의 평등함이 언설(言說)을 떠나 있다는 까닭은 모든 언설이 오직 가명일 뿐이어서 진실한 성품이 결여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그 언설이 단지 망념(妄念)을 따르므로 참된 지혜와 떨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 때문에 (세계의 본체는) 떠나고 끊어져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파악될 수 없다라고 한 것은 진여의 본체를 드러내는 글귀이다.7)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교(敎)가 부처의 말씀이라면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다. 부처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진여(眞如) 실체(實體)라 한다. 선은 불이(不二)의 중도(中道), 무분별(無分別)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체험이기에 분별심에서 빚어진 언어를 초월한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니,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자는 것이 선의 요체이다. 왜 말로 할 수 있다면 진여(眞如) 실체(實體)가 아니며 불법(佛法)은 말을 떠나 있는 것인가?
우선 언어는 세계를 분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기호의 삼각형을 생각해보자.
언어기호(빨강)
여기서 세계에 대해 인간은 어떻게 언어기호를 부여하는가? 인간은 세계를 그대로는 이해할 수 없기에 이를 범주화한다. 우주 삼라만상은 무한하다. 무한하기에 그대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은 언어공동체에 따라, 이들의 생활과 문화에 따라 이를 가르고 이에 대해 무엇,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래야 세계를 구분할 수 있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며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봄에 산에 오르면 산의 풀들은 나에게 혼돈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것은 취나물이고, 이것은 얼레지라고, 취 중에서도 요것은 개취요, 조것은 참취며 이것은 곰취고 저것은 미역취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다 비슷한 풀일 뿐이다. 나에게는 온통 혼돈이지만 어머니는 그 풀을 이파리 모양과 빛깔, 줄기의 생김 등에 따라 취, 얼레지, 질경이 등으로 가르고, 다시 이것은 날로 먹으며 저것은 못 먹는다고 구분한다. 이렇듯 원래 풀은 하나이지만 우리가 허상이나마 인간의 틀로 범주를 만들어 나누어 놓아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무지개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가지 색인가? 실제의 색은 무한하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 하면 색에 대해 알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이를 분별하여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러니 빨강과 주황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언어공동체는 그 사이의 색을 보지 못한다. 유럽 사람들도 근세 초까지 무지개를 네 가지나 다섯 가지로 보았다. 주황이라는 언어가 없으니 빨강과 주황을 같이 본 것이다. 멀쩡한 주황을 빨강이라 하면 이것은 허위이다. 그러나 주황을 주황이라 하는 것도 허위이다. 범주를 세분하여 빨강을 진한 빨강, 아주 진한 빨강, 극도로 진한 빨강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이처럼 세계는 무한대인데 사람이 편의에 따라 나누었을 뿐이다. 아무리 언어기호를 발전시켜 범주를 세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계 그 자체를 드러내주지 못한다. 그러니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요, 언어로는 실체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분별심으로는 진여실체를 깨달을 수 없다.
그 다음 빨강을 보고 붉은 색, 열정, 공산당으로 해석하는 면을 살펴보자. 소쉬르는 언어기호가 씨니피앙(signifiant)과 씨니피에(signifie)의 결합체임을 밝힌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언어기호가 있을 때 우리는 나무(namu)라는 소리를 귀를 통하여 들으면 이 소리는 귀를 지나 뇌로 와서는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기호가 있을 때 사람(saram)이라는 청각적 이미지는 인간의 머리 속에서 이성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이처럼 언어기호에서 청각 영상(acoustic image)의 면을 씨니피앙이라 하고 언어기호에서 개념(concept)의 면을 씨니피에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호가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를 발생시키며 작용하는 것, 또는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를 결합하여 의미를 산출하는 것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한다.
씨니피앙과 씨니피에의 의미는 소쉬르 이후 의미망이 확대된다. 씨니피앙은 의미의 전달, 또는 운반체〔sign vehicle〕를 뜻하고 씨니피에는 기호 속에 담겨 있는 추상적 개념, 의미의 운반체에 담겨있는 내용, 메시지를 뜻한다. 예를 들어 철수가 순희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전달하였을 때 순희가 이 꽃을 보고 철수가 나를 원수처럼 여기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수가 나를 좋아한다.라든가 철수가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장미꽃 한 다발이 씨니피앙이라면 그 꽃을 받고 철수가 나를 좋아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씨니피에이다. 불상(佛像)이 씨니피앙이라면 이를 보고 떠올리는 불법(佛法)은 씨니피에이다.
그럼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소쉬르는 이에 대하여 자의성과 필연성, 선조성으로 설명하며 데리다 등은 부재성과 산종성을 지적한다. 이 가운데 선학과 통하는 것은 자의성과 부재성과 산종성이다.
자의성(恣意性;arbitrariness)이란 씨니피앙과 씨니피에간에 필연성이 없음을 뜻한다. 소쉬르 이전의 서양 철학, 언어학은 언어기호와 사물이 서로 필연적인 것으로, 세계가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나무가 나무인 것은 광합성 작용을 한다든지, 탄소동화 작용을 한다든지, 목질의 줄기를 가졌다든지 하는 나무의 본질이나 현상이라 할 만한 것과 관계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차다라는 말은 우리가 손을 얼음물에 넣어 손이 시린 느낌과 관계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무는 나무 안에 없다. 이는 풀과의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차다라는 말은 뜨겁다라는 말과의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뜨겁다의 반대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사물 자체가 갖고 있는 실체와 사물의 기호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나무를 무엇이라 부르든 같은 사물을 지시하며 언어공동체의 약속에 의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나라마다 사물에 대한 기호가 각기 달라 나무를 tree, arbre, 목(木;mu) 등 여러 기호로 부르더라도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을 나타내는 것은 동일하다. 불, 뿔, 풀이 음운의 차이로 의미가 갈리고 다른 낱말이 되듯, 언어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8)
이러한 차이들은 이 자체가 실체가 아니라 구조 자체가 만들어내는 효과다.9)
이렇게 언어는 실체를 가지지 않고 다른 것과의 차이, 관계, 구조를 통하여 의미를 드러내니 언어 자체가 공(空)한 것이다.10)
부재성이란, 기호는 물(物) 자체(自體)를 지시하지만 동시에 물 자체를 대체하여 물 자체의 부재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기호는 사물을 대치하여 사물의 자리를 차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강아지를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매번 강아지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강아지라는 사물 대신 강아지라는 기호를 쓰면 강아지는 없다. 강아지라는 개념만 학생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기호는 사물을 대치하는 동시에 사물의 부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산종성(散種性)이란 언상과 언의는 소쉬르가 본 것처럼 1:1로 대응하지 않으며, 의미는 기호에서 직접적으로 현전(現前;presentation)하지 않음을 뜻한다. 빨강이 열정이나 공산당을 의미하듯, 나무의 의미는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고 규정되지 않는다. 이는 자유연상에 의하여 푸르른 이상, 하늘과 땅의 중개자, 자연, 부드러움 등으로 의미망을 넓히고 나무를 정의한 글 속의 목질, 줄기, 가지다, 다년생, 식물의 씨니피앙 또한 맥락에 따라 씨니피에의 사슬 속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를 연기(延期)한다. 나무가 풀과 대비시키면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쇠와 대비하면 자연, 목질의 부드러움 등의 의미를 갖는다. 내가 강아지라는 사물을 들고 강의실에 나타났다면 거기에는 오로지 한 마리의 강아지만 있게 된다. 그러나 내가 강아지라고 말로 하면 어떤 학생은 삽사리를, 어떤 학생은 푸들을, 어떤 학생은 진돗개를, 어떤 학생은 치와와를 연상하는 등 다양한 강아지를 연상한다. 너희들은 강아지야.라고 말하였다면 어떤 학생은 선생님이 우리가 강아지처럼 귀엽다고 말씀하시는구나., 어떤 학생은 선생님이 우리들이 강아지처럼 망나니라고 말씀하시는구나., 또 어떤 학생은 선생님이 우리들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어린아이로 생각하는구나. 식으로 다양하게 의미를 파악할 것이다.
나는 최진실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치자. 왜 하필 최진실일까? 이 문장에서 최진실의 가치는 고소영, 심은하, 김희선 등 이 문장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되살려 비교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이렇듯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기호의 구조는 영원히 부재(不在)한 타자(他者)의 흔적에 의해서 결정되며 의미는 현전(現前)과 부재(不在)와의 끊임없는 교차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의미는 어떤 하나의 기호에 의하여 완전히 현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전과 부재간의 일종의 끊임없는 교차라고 할 수 있다.
또 의미는 맥락(context)에 따라 달라진다. 달을 그렸다.라는 간단한 문장의 의미 또한 미술시간이라는 맥락에서는 지구의 위성을 그림으로 그렸다.이지만, 언덕 위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에게는 남편을 그리워하였다.의 뜻이다. 한 어린이가 산수 시험을 보고 와서 몇 점을 맞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그리 답하였다면 산수시험에서 0점을 맞았다.는 의미이며, 화투를 치는 사람이 그리 대답하였다면 8광 패를 들었다.이다. 이처럼 같은 낱말, 같은 문장, 같은 텍스트도 맥락에 따라 의미를 달리 한다.
의미는 수용자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세계관과 주어진 문화체계 안에서 읽는 주체는 약호를 해독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데 주체가 자신의 취향과 입장, 이데올로기, 의식, 태도, 발신자와의 관계 등을 종합하여 어디에 더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텍스트는 크게 나누어 지시적 가치, 문맥적 가치, 표현적 가치, 사회역사적 가치, 존재론적 가치를 갖는다.
수용자가 텍스트를 한번 읽어서 드러나는 대로 문법적이고 사전적인 지식만을 이용하여 사전적 의미만을 파악하여 축어적으로 읽을 경우 텍스트의 약호들은 지시적 의미대로 해독된다.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별이 반짝였다.라는 언술을 예로 들면, 기본의미는 사전적 의미대로 해독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앞 뒤 문맥을 살펴 절망에 잠긴 내 눈 앞 하늘에서 천체의 일종인 별〔星〕이 반짝였다., 절망에 잠긴 내 눈앞에 벼랑이 (달빛 등에) 드러났다., 절망에 잠긴 나의 눈〔雪〕 가장자리로 별이 빛났다., 절망에 잠긴 나의 눈 가장자리에 벼랑이 (달빛 등에) 드러났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수용자가 문법적 지식과 언어적 지식을 종합하여 앞 뒤 문맥을 살펴 좀더 노력이 깃들인 해독을 하려 할 경우 텍스트는 지시적 의미를 넘어서서 문맥적 의미를 드러낸다.
이와 달리 이 문장을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눈물이 반짝였다.,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더 큰 장애가 나타났다., 절망에 잠긴 나의 눈〔雪〕 가장자리로 희망의 별이 빛났다., 절망에 잠긴 나의 눈 가장자리에 더 큰 장애가 나타났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수용자가 은유와 환유, 상징 등 모든 약호를 해독하는 원리를 동원하여 텍스트를 정밀하게 읽기를 하여 텍스트에 제시된 약호들을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시적으로 해독하려 할 경우 텍스트는 표현적 의미를 드러낸다. 이 때 주체의 마음과 기억, 전의식(前意識) 속에 담고 있는 텍스트, 무의식(無意識) 속에 있는 원형과 상징체계가 활발하게 해독에 관여한다. 시적 의미를 발생시키고 낯설게 한 의미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은 이 단계이다.
반면에 이 문장을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장군이 보였다., 절망에 잠긴 내 앞에 별과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인기 연예인이 나타났다.라고 새길 수 있다. 이처럼 수용자가 자신이 놓인 공간에 대하여 과학적 인식을 하여 텍스트를 자신의 계급적 입장,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의미를 사회적으로 해독하려 할 경우 텍스트는 사회적 의미를 드러낸다. 대개 이 경우 자신이 놓인 현실, 또는 텍스트가 생성된 시대의 현실과 텍스트를 알레고리 관계에 놓고 텍스트가 어떤 현실을 반영하였는가에 대하여 자신이 처한 현실과 토대, 사회경제적 입장에 맞게 유추하여 해독한다. 수용자는 공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해서도 과학적 인식을 하고 과거의 정보를 모아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려고 한다. 때문에 사회적 의미는 곧 역사적 의미로 전화하고 거꾸로 수용자가 역사적 가치를 지향하기에 텍스트에서 사회적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사회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는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와 반대로 이 문장을 절망에 잠겼던 내가 희망을 품었다.,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신과 인간, 성스런 세계와 속된 세계의 중개자가 나타났다.라고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수용자가 역사를 거부하고 현실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여 존재론적으로, 또는 신화적으로 성찰하려 할 경우가 있다. 수용자는 역사나 사회, 또는 텍스트가 생성되거나 해독되는 현실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수용자가 자신, 또는 텍스트 안의 주체의 내면의 세계라고 성찰을 통해 깨달은 것을 언어기호로 표상하여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 때 텍스트는 존재론적 의미를 드러낸다. 이 경우 내면의 세계가 집단 무의식과 관련된 것일 때 수용자는 신화적 해독을 한다.11)
이렇듯 언어기호는 맥락이나 가치, 수용자에 따라 변화하며, 공간화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지연되어 무의미를 생성하기에, 세계는 차연(差延)이 드러난 것, 차연의 체계 속에 쓰여져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12) 세계가 차연이고 언어기호의 진정한 속성 또한 이럴진대 사람들은 언어기호에 고정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고정되고 동일하지 않은 세계를 고정되고 동일한 언어기호로 표현하려 하니 그것 자체가 왜곡이 될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도 처음엔 언어기호로 세계를 명료하게 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림이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곧 언어기호로써는 세계의 궁극적 실체를 드러낼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말한다.13) 궁극적 실체, 혹은 부처님의 마음에 이르려면 언어를 떠나야 한다. 그러니 선은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요구한다.
2. 텍스트의 해체와 인언견언(因言遣言)
이처럼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러면 불가사의한 참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답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하고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微笑)처럼 언어기호를 넘어서서 선정(禪定)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처럼, 내가 진정 깨달은 것을 말로 하면 왜곡이라는 생각에 강의실에 들어가서 서너 시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하늘만 쳐다보다 나온다면 학생들은 선생님! 오늘 깨달음이 많았습니다. 하고 인사할 것인가? 이언절려(離言絶慮)인 줄 알면서도 인간이 진리를 전달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언어기호를 이용하는 것이다.
혹자는 원효의 화쟁의 본질을 진여실상(眞如實相)이 언어 저 너머에 있는 것인 줄 알면서도 인언견언(因言遣言)하였다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이는 화쟁도, 불교도 정확히 모른 데서 기인한 소치다. 인언견언(因言遣言)은 불교철학에서는 공유된 상식이고 다른 철학에서도 종종 논의되는 바다. 비트겐슈타인도 지붕(세계의 실체)으로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언어)를 던져 버려야 한다.라고 했다.14) 장자(莊子)도 『장자(莊子)』 「외물(外物)」 편에서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15) 『금강경』 「정신희유분」에서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라라는 뜻으로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이 아닌 것조차 버리지 못하는가?라고 말한 것도 같은 뜻이다. 여러 성인과 현인들이 궁극적 진리가 언어 저 너머(지붕, 언덕 저 편, 물고기)에 있으면서도 인간이 이를 전달하는 것은 언어(사다리, 뗏목, 통발)밖에 없음을, 대신 언어로 궁극적 진리를 지시한 다음에는 언어를 버리고 세계의 실체를 대할 것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언어학을 통해서 보면 『금강경』 「정신희유분」의 관련 기록의 의미가 훤히 드러난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과 예장 종경(豫章 宗鏡)은 진여실체와 언어와의 관계를 다룬 이 대목을 생사대해를 건너는 것으로 파악하여 터무니없는 해석을 가하였다. 아상(我相)의 집착이나 유무(有無)의 이변(二變)을 떠나는 것이라는 쌍림(雙林) 부대사(傅大士)의 풀이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유추 해석이 가능한 것이어서 꼭 틀린다 할 수 없으나 핵심을 비켜가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한 것은 분명하다. 규봉(圭峰) 종밀(宗密), 그 중에서도 야부(冶父) 도천(道川)이 정확히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 언어학을 빌리니 어느 것이 현학적인 말장난이고 어느 것이 진여실체(眞如實體)에 대한 인언견언(因言遣言)의 표현인지가 명쾌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불법은 언어와 표상을 넘어선 것인데 왜 불상을 만들었을까? 얼마 전 경주 남산의 불상을 찾았다. 골짜기마다 바위마다 부처를 새긴 신라인의 불심을 읽어보았다. 용장사 마애여래좌상 앞에 섰다. 부처님께선 구름처럼 덩실 솟아오른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한 채 항마촉지인을 하고 서 계셨다.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곱게 흘러내린 승기지와 가사의 옷자락으로 하여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고 두툼한 두 뺨은 보름달과 같은 턱의 곡선을 타고 원융미(圓融美)를 드러낸다. 지긋이 감은 눈, 눈썹을 타고 맵시 있게 흘러내린 코, 아래로 꽉 다문 입, 그 입가로 흐르는 미소는 필자의 가슴 한 가운데서 파문이 되어 무언가를 계속 드러내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돌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돌 속의 부처를 드러낸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이 하나도 과장이 아니었다. 이처럼 인간이 내는 짓으로는 진여(眞如)의 실체(實體)에 다다를 수 없다. 하지만 불상을 보고서 불법의 진리를 떠올리듯, 이를 방편으로 삼아 불법의 한 자락을 드러낼 수는 있는 것이다.
원효 또한 네가 취한 것과 같은 것은 오직 명언(名言)뿐이므로 나는 언설에 기대어 절언지법(絶言之法)을 제시한다. 이것은 마치 손가락에 의해 손가락을 떠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라고 지적한다.16) 이처럼 진여(眞如;달)를 그 실상(實相)대로 언어기호(손가락)로 드러내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지시할 수는 있다. 존재를 실상으로 착각하는 중생들에게 그에 대한 깨달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언어기호는 한 방편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의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손가락을 통하여 달에 이르는가에 대한 것이다.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깊이 찬탄하는 말이다. 이 말 다음의 말들은 따로 이해하는 말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언어와 문구를 받아들이고 나중에 그 뜻과 이치를 헤아리는 것이다.17)
부처님의 말씀, 궁극적 진리는 너무도 깊어 우리의 이성이나 언어기호를 통하여 헤아릴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언어기호가 가진 지시적 의미를 받아들인 다음 이에서 머물지 않고 그 지시적 의미를 넘어서는 뜻을 헤아린다면 불가사의의 한 자락이라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원효는 선령언구(先領言句) 후령의리(後領義理)의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의어비문(義語非文)이라는 것은 말이 마땅히 진실한 뜻에 맞아 단지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어비의(文語非義)라는 것은 말이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이기에 진실한 뜻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뜻의 이치와 원리에 맞게 말하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은 곧 뜻의 말이며, 뜻이 없는 범부의 말과는 다른 것이다.18)
조사선(祖師禪)에서 스승이 체험으로 보여준다 하더라도 제자는 일단 그것을 언어로 풀어 언어의 테두리 속에서 고민을 한 다음에서야 언어의 상(相)을 넘어서서 견성체험을 한다. 간화선(看話禪)은 언어로 된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다. 그럼 언어기호가 진여(眞如) 실체(實體)에 대한 왜곡인데 언어를 통하여 이를 드러내고 전달해야 하는 역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방법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이다. 부처님과 가섭의 관계처럼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통한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인언견언(因言遣言)이요, 서양의 기호학자들이나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행한 것처럼 언어기호의 원리를 파악하여 텍스트를 해체하여 언어가 왜곡하고 있는 의미를 파헤치고 언어기호와 텍스트 너머의 숨은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굳이 무리를 범하여 비유하면, 일자가 남종선〔祖師禪〕, 이자가 북종선, 삼자가 이 논문에서 추구하고 있는 서양 인문학을 방편으로 한 선학과 통할 터이다.19)
모든 스님이 단 한 번의 체험으로 돈오(頓悟)할 수 있다면 굳이 화두(話頭)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그러지 못하기에 화두를 분별심을 타파하는 무기로 삼아 분별과 언어 저 너머의 깨달음에 이르려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대중이 선을 행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인문학을 통한 선학은 서야 할 까닭이 없다. 그것이 여의치 않기에 이와 같이 서양의 인문학을 응용하여 선적 깨달음에 이르려 하는 것이다.
서양의 인문학, 그 중에서도 언어학은 선학에 어떤 새로운 지평을 제시할까? 들에 홀로 핀 들국화를 외롭다고 노래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여인으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 당신이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금붕어 없는 어항이요, 팥 없는 찐빵이요 식으로 쓰여 있는데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감동하여 그 여인을 만나러 달려가겠는가? 정반대일 것이다. 이 편지가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시적 의미란, 일상언어의 속성에 집착해 낱말이나 문맥에 얽매이는 세속의 말, 상투적 의미로 언어기호를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우리는 미당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읽고 왜 감동하는가? 그것은 미당이 무서리가 내린 뒤에 다른 식물은 파김치가 되어버리는데 오로지 국화만이 함초롬히 아름답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고 그처럼 인간 또한 좌절과 절망을 이기고 일어설 때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여 이를 시로 형상화하였고, 우리는 이 시를 통해 국화의 숨은 세계-실존-를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당의 세계를 통하여 국화의 실상을 잠시나마 들여다 본 것이다. 이처럼 시적 의미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문맥을 넘어서서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 드러내는 말을 이른다. 즉 지시적 의미는 세계를 왜곡하지만, 우리는 시적 의미를 통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고, 또 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달의 실체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달을 지구의 위성이라고 하는 데서 떠나 관음보살이나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이라 할 때 인간은 좀더 달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과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언어기호의 공성(空性)을 부정만 할 것이 아니다. 언어기호가 세계의 실상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중생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도록, 더 정확히 말하여 중생이 존재를 세계 자체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깨우치도록 하는 방편은 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장대가 장애이지만 장대를 통하여 땅의 굴레를 넘어 잠시나마 비상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렇게 하여 세계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드러내는 만큼 감추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에서 논한 대로 아무리 새로운 의미를 밝힌다 하더라도 언어기호로 말하는 순간 이는 세계를 왜곡시키게 되어 있다. 시적 의미는 순간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실체를 밝힌 것이라 하더라도 곧 지시적 의미로 전락한다. 미당의 국화도 실존이라는 숨은 실체를 드러냈지만 이것도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곧 상투적 의미가 되어 국화의 다른 숨은 의미를 감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텍스트의 해체이다.
나는 내가 최진실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데리다는 위의 문장에 ×표를 친다. ×표를 친 것은 이 글이 숨기고 있는 의미, 없애버린 것들, 흔적을 다시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 문장에서 여기서 최진실 대신에 다른 누구라고 한다면 구설수에 휩싸일까 보아 탤런트의 이름을 대신 쓴 것일 수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두려움 등으로 대체한 것일 수 있다. 탤런트라 하더라도 수많은 탤런트 가운데 유독 최진실로 꼽은 가치는 여기에 부재한 고소영, 심은하, 이영애 등을 회복함으로써 드러난다. 또 좋아한다 대신에 사랑한다, 귀여워한다, 관계를 맺고 싶다 등이 올 것인데 그렇게 쓴 것일 수 있다.
그것뿐인가? 글 속에 숨어있는 이항대립주의 또한 해체한다. 나는 누구인가? 문장으로 볼 때 진주어인 나는에 걸리는 서술어는 생각한다이지만, 가주어 내가에 호응하는 서술어는 좋아한다이다. 최진실을 좋아하는 나 -욕망의 주체-와 그런 나를 생각하는 나-말하는 주체-가 대립한다. 두 주체 중 누가 진정한 나인가? 말하는 주체는 진정한 나라기보다 문화와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이다. 이렇게 보면 말하는 주체보다는 욕망하는 주체가 더 나에 가깝다. 그러나 욕망이란 타자를, 타인의 권력과 향락과 자본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욕망할수록 자아는 자신에게서 멀어져 타자를 향한다. 마주앉은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나인가, 남인가? 해체는 이렇게 글 속에 담긴 이항대립주의를 해체한다. 모든 경계와 구분을 무너트린다. 이처럼 글이란, 어린 아이들이 셀룰로오드에 풀칠을 하여 나무판에 붙인 것에 쓴 뒤에 그 셀룰로오드 종이를 들면 글자가 사라지고 그러면 다시 쓰고 또 셀룰로오드 종이를 들어 지우고 다시 쓰고 하는 행위를 반복하여 마지막으로 남은 것에 불과하다.
그럼 이런 것을 간화선(看話禪)에 응용할 수 있을까? 화두(話頭)는 일종의 시적 의미로 이루어진 텍스트이기에 수행자는 지시적 의미를 넘어서서 시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유명한 「조주끽다거(趙州 喫茶去)」에서 끽다(喫茶)를 차를 마시다라는 지시적 의미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다로 해석하는 것처럼, 시적 의미로 해석하는 순간 세계의 숨은 실체가 드러나며 이 순간 수행자는 깨달음의 희열에 몸을 떤다. 그러나 전 단계보다 조금 더 깊은 세계로 다가갔을 뿐이다. 그것 또한 구속이다. 아직 언어의 굴레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부단한 선정 속에서 언어의 굴레를 넘어 견성 체험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넘어선 경지에 이른 것이다. 전과는 다른 차원의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 또한 전보다 더 깊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간 것이지 아직 실체 자체에 이른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할 것은 화두의 해체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듯 화두에 남아있는 모든 언어의 굴레를, 삿된 집착을 부수어 버릴 때 우리는 진정한 견성체험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체로 끝나라는 것은 아니다. 해체 비평의 약점은 해체의 미궁 속으로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빠지고 만다는 점이다.20) 파사즉현정(破邪卽顯正)이든 현정즉파사(顯正卽破邪)든, 해체와 함께 현정(顯正)을 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Ⅲ. 퍼지식 논리와 불법(佛法)의 논리
1. 이원론 대(對) 퍼지식 사고(A or not-A 對 A and not-A)
원효가 펼치는 화쟁의 논리는 무이이불수일(無二而不守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 순이불순(順而不順)이다. 어디 그뿐이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상즉상입(相卽相入) 등 불법의 논리는 역설이며 대개 모순어법을 취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기존의 논리방식으로는 이해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면 하나이고 둘이면 둘이며 나면 나고 남이면 남이지, 어떻게 하나가 아닌 동시에 둘도 아니며 나인 동시에 남이란 말인가? 크레타 섬사람들의 패러독스라는 것이 있다. 크레타에서 온 거짓말쟁이가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한 후 자신이 거짓말쟁인지 아닌지 맞추어 보라 한다. 그가 거짓말쟁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므로 그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므로 그 역시 거짓말쟁이다. 답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느새 서양의 이원론적 논리에 물들었기에 역설과 퍼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교과서나 다른 책을 통하여 이원론을 알게 모르게 수용하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의 눈으로 보아도 밤과 낮, 밝음과 어둠, 남성과 여성, 주와 객, 하늘과 땅 등 세상 만물은 이원적인 것이다. 어느덧 이원론은 우리가 우리 앞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원론으로는 불법의 오묘한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이원론은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심이며, 진여실체가 하나인데 편의상 둘로 가른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불교 관련 서적을 보면 적지 않은 책들이 이원론으로 불교를 해설하고 있다. 무분별심의 세계를 분별심의 논리로 재단한 것이다. 불교(학)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까?
여기에 시사를 제시하는 것이 퍼지식 사고이다.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 A or not-A의 논리를 추구하였다. A가 아니면 나머지는 A가 아닌 것이어야 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사물과 동시에 동일한 점에 속하면서 또한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A이면서 A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모순율이다. 서구의 거의 모든 철학과 예술은 이분법적 모순율을 인정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A and not-A이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면 답은 정확히 Yes or No로 갈리지 않는다. 물론 상당수가 손을 들었고 그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을 들다가 만 사람, 손을 반쯤 들다 내린 사람이 꽤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사랑한다고 답한 이들도 100%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기에 사랑한다는 쪽에 손을 든 것이다. 싫어한다고 손을 든 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는 A가 아니면 not-A인 것이 아니다. 퍼지이다.
손에 사과를 쥐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사과는 100% 온전한 사과인가? 과수원에서 바로 딴 사과라 하더라도 나무에서 따 가지고 오는 사이에 점점 닳고 있다. 우리는 그 사과를 베어먹는다. 한 입에서부터 두 입, 세 입 베어먹기 시작하여 다 먹고 씨를 뱉었다. 사과는 완전히 사라졌는가? 우리는 과육을 먹었을 뿐이다. 씨와 껍질은 남아 있다. 우리는 사과를 손에 쥔 경우에 사과가 있다고 말하고 다 먹어버린 후에는 사과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과는 100%에서 0%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는 0과 1에 대하여 말하지만 진리는 그 사이에 있다. 바트 코스코의 말대로 세계는 회색이지만 과학은 흑과 백이다.21) 실제 세계가 회색이니 세탁기, 진공 청소기, 카메라, 캠코더, 헬리콥터 등에 퍼지의 원리를 응용하였더니 기계의 오류를 줄이고 기계의 지능지수를 높일 수 있었다. 바트 코스코는 퍼지 논리는 서양의 논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라며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와 퍼지식 사고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정리한다.22)
bivalencemultivalence아리스토텔레스
A or not A
정확한
전부, 또는 아니면 아무것도
0또는 1
디지털 컴퓨터
Fortran
bit부처
A and not -A
부분적인
어느정도
0과 1사이의 연속체
신경망(두뇌)
자연언어
fit
2. 퍼지식 사고로 불경 읽기
퍼지식 사고를 이해했으면 다음 글을 읽어보자.
만일 각기 다른 견해로 쟁론이 일어날 때란, 유(有)라는 견해에 동조하여 설법하면 공(空)이라는 견해와는 맞서며, 만일 공(空)이라는 집착에 동조하여 설법하면 이것은 유(有)라는 집착에 맞서는 것이니, 동조건 반대건 더욱 다툼만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또 저 두 견해에 다 동조하면 그 안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게 될 것이요, 만일 저 두 견해에 다 반대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동조도 말고 반대도 말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말대로 해석하자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을 따라 말한다면 허용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정(情)에 어긋나지 않고,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정에 대해서나 도리에 대해서나 서로 어긋나지 않는 까닭에 진여에 상응하는 설법을 한다는 것이다.23)
이원론적 사고는 이것은 진리요, 저것은 허위라고 구분한다. 그러나 절대 진리도, 절대 허위도 없다. 정도의 문제이지 흑백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그것을 100% 진리라 하면 그것에 담긴 허위를 보지 못한다. 반대로 1%도 안 되는 허위를 근거로 전체를 진리가 아니라 하면 99%의 진리를 버리게 된다. 모든 사람이 허위라 하는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고 모두가 진리라고 하는 것에도 한 자락의 허위를 담고 있다. 그런데 각기 다른 견해로 맞설 때, 한 의견이 진리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동조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게 된다. 또 한 의견이 허위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반대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 두 견해를 모두 옳다고 하면 두 견해가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며 두 견해에 있는 허위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두 견해가 모두 그르다고 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됨은 물론 두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올바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동조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허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진리를 잃지도 않는다.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긴 근본 취지와 목적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의 허위를 솎아내고 그에 담긴 도리를 제대로 받아들여 견해의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순이불순(順而不順)의 논법은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24)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사람을 무조건 선하다고 하면 그의 악을 보지 못하며 무조건 악하다고 하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선을 보지 못한다. 모든 이들이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고 모든 이들을 부처님과 같이 존귀한 존재로 다룰 때 자비행은 피어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남아있는 무명과 악을 보지 못한다면 이를 소멸시키고 그들 속에 잠재한 불성(佛性)을 드러낼 수 없다.
Ⅳ. 욕망의 이론과 해탈의 방식
1. 라캉의 욕망의 이론
인간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 바로 불타는 욕망, 갈애(渴愛)에 있다고 한 것은 인간 삶의 본질을 통찰한 붓다의 말씀이다. 그러니 모든 고통을 없애려면 욕망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러나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욕망은 또 고통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삶과 창조의 동력이기도 하다. 때문에 욕망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욕망을 남기자니 고통이 따르고 완전히 없애자니 삶의 에너지를 잃고 만다. 이것이 인간 삶의 아이러니이다.
욕망은 사회적이다. 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암자에서 용맹정진을 하면 나 자신은 해탈을 이룬다. 그러나 화택(火宅)에서 욕망을 불태우고 있는 중생들은 어쩌란 말인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욕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확대 재생산해야만 살아남는 체제이기에 매일 매일 광고와 상징, 이미지를 통하여 욕망을 부추긴다. 담배를 끊은 자가 옆에서 담배 피우는 냄새를 맡으면 흔들리듯 욕망은 사회문화라는 맥락 속에서 우리를 부추긴다. 그럼 어떻게 욕망을 조절하고 관리할 것인가?
욕망을 조절하기 위해선 먼저 욕망의 본질과 특성을 알아야 한다. 라캉은 소쉬르 언어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결합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에 의하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하였으며 언어상징이 무의식을 만든다. 한 청년이 매일 백합꽃을 꺾는 꿈을 꾸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이러니 악몽일 수밖에 없다. 그 청년에게 정신분석요법으로 분석하였더니 그 청년은 젊은 날 귀족부인을 짝사랑하였다. 이에서 보듯 청년의 욕망은 귀족부인과 성관계를 맺고자 한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 법, 신분상의 차이 등 현실원리는 이를 억압시킬 것을 강요한다. 청년은 이 욕망을 억압시켜 왔다. 그러나 욕망이 억압만 된다면 정신병을 비롯하여 여러 병리를 낳는다. 이것은 어느 정도 해소되어야 한다. 현실적인 해소책은 귀족부인 대신 다른 여인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 욕망을 해소하는 매커니즘을 갖고 있으니 꿈이다. 왜 하필 청년은 백합꽃을 꺾는 꿈을 꾸었을까? 귀족부인의 청초함과 고귀함이 백합꽃과 유사성을 가진다고 유추하여 귀족부인을 백합꽃으로 은유(metaphor)화하였기 때문이다.25)
반면에 어떤 중년 남성은 평소엔 멀쩡하다가 다른 새도 아니고 제비만 보면 갑자기 몸을 책상 등에 숨기고 부르르 떤다. 그 또한 정신분석을 하였더니 젊은 날 학생운동을 하다가 고문을 심하게 당하였는데 고문경관의 별명이 제비였다. 의식은 그를 잊고자 하였는데 무의식은 그를 별명으로 대치하여 기억한 것이다. 즉 경찰관과 제비는 서로 인접성의 관계라고 유추하여 환유(metonymy)를 만든 것이다.26) 이처럼 무의식도 언어기호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언어처럼 구조를 이루고 있다.
욕망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가? 이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결핍에서 비롯된다. 18개월 이전의 아기는 상상계(imaginary stage)에 머문다. 그는 이미지에 속박된다. 젖을 빨면서 어머니와 자기가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외계, 주체와 객체간에 뚜렷한 구별이 불가능하다. 18개월이 지나면서 아기는 거울의 단계(mirror stage)로 진입한다. 아기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가 어머니와 다른 몸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한다. 거울 속에 비친 대상이 나를 형성하는 것이다. 아이는 조각난 몸의 고뇌에서 하나의 전체성으로 자신을 통일시킨다. 어머니의 한 조각으로 알고 있던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일관되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총체로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시기이다. 아기는 거울 속의 자기를 보면서 내면세계와 주위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여 자기 동일화를 이룬다. 이 아기는 곧 아버지의 이름(the-name-of-the-father)을 받아들이면서 사회화하는 상징의 단계(symbolic stage)로 진입한다. 언어와 상징을 수용하여 이제 말을 시작한다. 인간은 욕망을 억압하고 언어기호와 도덕, 윤리를 수용하면서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는 화자 개인을 초월하는 사회문화적 상징체계이므로 무의식은 자아로부터 독립된 질서와 체계를 갖는 큰 타자의 담론이다. 그러기에 무의식은 큰 타자(아버지의 이름, 법, 기표)의 담론이며 타자는 다른 장소에서 나타난 주체의 다른 모습이다. 라캉은 이를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27)라고 한마디로 압축하여 주체중심주의의 사유에 있었던 현대 철학자들에게 외친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 이에 기반을 두고 발전시켜 온 서구의 현대 철학은 전복된다.
라캉의 욕망이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욕망은 신기루라는 것이다. 욕망의 근본 원인은 어머니로부터 갈라져 나온 결핍에서 출발하는데 누구도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모든 이들이 욕망의 달성을 향하여 질주하지만 그에 이르는 순간 자신이 추구한 것이 그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모두들 욕망의 대상을 향해 질주하지만, 갈 때는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추구할 유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달해 보면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리 고대하고 갈망하던 이와 살을 섞고 나서야 그 여인이 한갓 비계덩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스토커처럼, 그에 이르고서야 자신이 그토록 추구한 대상이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러기에 상징과 도덕이 있는 곳에 욕구불만은 숙명적이다.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음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욕망이 자기를 소멸시키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욕망은 어머니를 잃은 결핍에서 출발한다. 이 부족함을 메우기 위하여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 뒤의 권력과 사랑, 인정을 갈구한다. 타자들을, 타자들의 성과 권력과 명예를 소유하여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타자로 자아를 채우는 것이다. 욕망할수록 나는 나에게서 멀어진다. 이것이 욕망의 아이러니이다.
2. 욕망과 연기론
라캉의 욕망이론은 불법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라캉의 욕망이론은 욕망이 신기루, 허상임을 밝혀준다. 욕망을 향하여 질주하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타인을 살해하면서까지 추구하는 대상이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린다. 어느 누구라도 욕망을 달성할 수 없음만 알아도 그리 맹목적으로, 남들에게 해를 가하면서까지 욕망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교가 욕망이 고(苦)의 원인임을 알린다면 라캉은 인간이 영원한 결핍의 존재임을 밝힌다. 불교가 욕망을 버릴 것을 당위적으로 주장한다면 라캉은 이를 합리적으로 설득한다.
라캉은 욕망할수록, 욕망은 타자를 지향하는 것이기에 나에게서 멀어진다고 주장한다. 나를 키우고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 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욕망은 아집에서 빚어진 것이다. 더 큰 집, 더 많은 연봉, 더 높은 자리, 더 강한 권력, 더 황홀한 향락을 나, 혹은 나를 확대한 가족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추구한다. 그리고는 이것을 달성할 때 행복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타자이다. 욕망할수록 나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면 나를 위하여 욕망을 채우려는 짓은 얼마나 허황된 일일까?
더불어 라캉은 인정의 변증법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모두 욕망을 지향하는데 왜 세상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았는가? 무의식은 우리들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들은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 또한 강하다.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타인을 위하여 양보해야 한다. 나〔我〕라는 루우빠〔色〕가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남에게 주는 장애를 최소화하는 것이 불교의 연기론이다.28)
결혼기념일이라고 샹들리에가 번쩍이는 특급 레스토랑에서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바닷가재를 뜯어야 두 사람은 행복할까? 그보다 갈잎들이 살랑거리며 바람이 지나는 소리를 들려주는 동네 약수터에서 싸 간 김밥을 노인들과 나누며 잎새 새로 보이는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마냥 청정한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 것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이렇듯 라캉은 아집에서 벗어나 욕망을 절제할 것을 차분히 합리적으로 설득한다. 그러기에 욕망의 이론은 연기론과 만나며 자비행(慈悲行)이라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평을 펼친다.
Ⅴ. 맺음말
서양의 언어학, 해체철학, 퍼지이론, 욕망이론을 통하여 불교철학의 깊이를 더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언어학 이론은 언어와 진여실체와의 관계를, 다시 말해 언어가 왜 진여실체를 왜곡하는 지를 언어의 특성을 통하여 밝혀 주었다. 나아가 언어가 세계 자체에 대한 왜곡이지만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알릴 수밖에 없는 역설 속에서 언어를 통하여 진여 실체에 이르는 방편을 모색하였다. 더불어 언어학을 통해 『금강경』 「정신희유분」의 관련 기록의 주해 가운데 규봉(圭峰) 종밀(宗密)과 야부(冶父) 도천(道川)의 해석은 타당하나 쌍림(雙林) 부대사(傅大士)의 풀이는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한 것이며, 육조 혜능(六祖 慧能)과 예장 종경(豫章 宗鏡)은 터무니없는 해석을 가하였음을 판명하였다. 해체철학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듯 화두에 남아있는 모든 언어의 굴레, 삿된 집착을 부수어 버리고 진정한 견성체험에 이를 수 있는 방편을 알린다. 대신 해체의 미궁 속으로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빠지고 말기에 파사즉현정(破邪卽顯正)이든 현정즉파사(顯正卽破邪)든, 해체와 함께 현정(顯正)을 하여야 한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면 답은 정확히 Yes or No로 갈리지 않는다.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하지 않아 팔을 들었다 마는 사람이 존재하듯, 실제 세계는 A or not-A가 아니라 A and not-A, 즉 퍼지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과라 하는 것도 이미 0을 향하여 닳아 없어지고 있듯, 우리는 0과 1에 대하여 말하지만 진리는 그 사이에 있다. 과학은 흑과 백을 강요하지만 세계는 회색이다. 우리 또한 퍼지식 사고를 하지 못하고, 서양의 영향으로, 또는 우리 앞의 세계가 밤과 낮, 밝음과 어둠으로 갈라지듯 그런 환상에 취하여 이원론적으로 A or not-A의 사고를 하였다. 때문에 상당수의 대중들은 불경을 분별심의 마음으로 읽는다. 불교는 세계의 실체가 A and not-A임을 깨달았기에 무이이불수일(無二而不守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 순이불순(順而不順),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상즉상입(相卽相入) 등 역설적이며 모순적인 어법을 취한다. 이는 퍼지식 사고를 하여야 불교철학에 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라캉의 욕망이론은 욕망이 신기루, 허상임을 밝혀준다. 불교가 욕망이 고(苦)의 원인임을 알린다면 라캉은 인간이 영원한 결핍의 존재임을 밝힌다. 불교가 욕망을 버릴 것을 당위적으로 주장한다면 라캉은 이를 합리적으로 설득한다. 또 라캉은 욕망할수록, 욕망은 타자를 지향하는 것이기에 나에서 멀어진다고 주장하고 인정의 변증법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 또한 강하기에 자신의 욕망을 타인을 위하여 양보한다. 이렇듯 라캉은 아집에서 벗어나 욕망을 절제할 것을 차분히 합리적으로 설득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욕망의 이론은 연기론과 만나며 자비행이라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평을 펼친다.
서장에서 언급하였듯 동양과 서양은 생각하는 방식이 상이하다. 그러나 깊이 천착하면 천착할수록 통하는 것이 많으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법장이 금사자를 통하여 화엄의 육상원융(六相圓融)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듯 서양의 인문학은 불교철학을 이해하고 깊이를 더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생략하였으나 서양의 비평이론, 텍스트 읽기 방식을 동원하면 간화선(看話禪)을 체계화, 과학화할 수 있는 방편이 열린다. 이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29) 물론 지금보다 더 엄격하게 불교를 불법의 원리로 읽는 공부가 강화되어야 한다. 순수불교를 중심으로 놓되 불교철학의 과학화와 대중화를 꾀하려면, 불교가 21세기의 맥락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을 가지려면, 불교학자와 스님들이 서양 인문학과 많은 대화를 나누기를, 서양에 불법을 펴려는 승려들이 영어회화를 습득하듯 스님들의 공부에 서양 인문학이 추가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각주
1) 이도흠,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화쟁사상을 통한 형식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종합(서울: 한양대학출판부, 1999).
2) 이도흠, 「화쟁사상과 생태이론의 비교철학적 연구」, 돈암어문 14집, 2001년 9월.
3)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兪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4) 無比 譯解, 金剛經五家解 (서울: 불광출판부, 1992), pp. 186~189.
5) 김용옥, 금강경강해(서울: 통나무, 1999), p. 68.
6) 元曉, 금강경강해(이하 金剛으로 약함). 卷下, 韓國佛敎全書 (이하 韓佛全으로 약함), 제1책, p. 653-상: “舍利弗言 一切萬法 皆悉文言 文言止相 卽非爲義 諸法實義 絶諸言說 不可言說 今者如來 云何說法…一切萬法者 世間言說 所安立法 皆無所得故 唯文言 卽非爲義 諸法實義 絶諸言說 今佛說法 若是文言 卽無實義 若有實義 應非文言 是故間言 云何說法”
7) 元曉, 大乘起信論疏(이하 疏로 약함), 卷2, 韓佛全, 제1책, p. 744-상: “…所以眞如平等離言者 以諸言說唯是假名 故於實性不得不絶 又彼言說相但?妄念 故於眞智不可不離 由是道理故說離絶 故言乃至不可得故顯體文竟”
8) Ferdinand de Saussure,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tr. Wade Baskin(NewYo가: Philosophical Library, 1959), p. 118.
9) 데리다, 해체, 김보현 편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6), p. 132.
10) 線條性(linearity)이란 해상에서의 깃발 신호가 동시에 다발적으로 펼쳐지는 것과 달리, 청각적인 성격을 지닌 언상은 오로지 시간의 선상에서 전개되며 이에 따라 의미를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아버지의모자를 쓰고 나들이를 갔다.’의 문장을 ‘나들이를 아버지의 나는 쓰고 모자를 갔다.’로 순서를 뒤바꾸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必然性(necessity) 이란 kx은 언어공동체에서는 한번 기호로 선택되면 누구도 이에 대하여 자기 주권을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씨니피앙을 청각을 통하여 들었을 때 한국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을 뜻하는 것임을 인지한다. 만약 나무를 다른 뜻으로 파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국 사회라는 집단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소통할 수 없다.
11) 이상 이도흠, 앞의 책, pp. 209~211.
12) Jacques Derrida: Writing and Difference, tr. Alan Bass(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p. ⅹⅵ.
13)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 D.F. Pears &B.F. McGuinness(London: Routeledge & Kegan Paul, 1961), p. 151.
14) Wittgenstein, ibid., p. 151.
15) "得魚而忘荃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16) 元曉, 十門和諍論, 韓佛全, 제1책, p. 838-중: “但是名言 故我寄言說 以示絶言之法 如寄手指 以示離指之月”
17) 元曉, 金剛, 卷中, 韓佛全, 제1책, pp. 636-상: “不可思議者 摠領歎深 下別領解 於中有二 先領言句 後領義理.”
18) 위의 책, 卷下, 韓佛全, 제1책, p. 653-상: “義語非文者 語當實義故 非直空文故 文語非義者 語止空文故 不關實義苦…如前遠離三相之語 契當如如義理而說 所以佛說 乃是義語 不同凡語之非義也.”
19) 여기서 언어와 분별을 넘어선 깨달음으로 화두를 내세우지만 화두 또한 언어기호로 만들어진 텍스트임을 상기하면 조사선 또한 전적으로 일자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20)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6), p. 181.
21) 바트 코스코, 퍼지식 사고(서울: 김영사, 1995), p. 26.
22) 바트 코스코, 위의 책, p. 51.
여기서 fit 값은 0과 1사이의 숫자 또는 정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 fit 값 70%란 예 70%와 예-아님 또는 아니오 30%를 의미한다.
23) 元曉, 金剛經, 卷中, 韓佛全, 제1책, p. 638-상: “若諸異見諍論興時 .....”
24) 이도흠, 앞의 책, pp. 136-137.
25) '보름달'에서 그와 같이 둥그런 ‘엄마 얼굴, 눈동자, 호수, 바퀴’등등이 떠오르고, ‘초승달’에서 모양이 유사한 ‘쪽배’가 연상된다. 이는 연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노래에서 초승달이 쪽배의 의미를 갖듯 연상된 것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유사성을 바탕으로 유추가 일어나고 의미를 연결시키는 것을 은유(metaphor)라고 한다.
26) ‘보름달’에서 공간적으로 가까운 ‘별, 구름, 언덕’, 시간적으로 가까운 ‘밤, 추석, 보름달’등등이 연상된다. 이 또한 은유처럼 연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확대된다. 이처럼 인접성을 바탕으로 유추가 일어나고 의미를 연결시키는 것을 환유(metonymy)라 한다.
27)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sis, trans. A. Sheridan(Harmondsworth: Penuin, 1977), pp. 128~129
28) 고영섭, 원효 탐색(서울: 연기사, 2001), p31.
29) 「서양의 비평이론을 통한 看話禪의 체계화 方便」, 白蓮佛敎論集, 제11집, 2001년 12월
첫댓글 불교와 서양인문학~서로 깊이천착할수록 물음에 답이 나올수 있다라는 것~!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