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문서는 2024년도 시노드를 정리해서 만든 의안을 20개로 나누어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서 세계주교회의에서 의논할 항목들입니다
그중에 전반기에 논의했던 의안중에서 '가난한 사람의 외침에 귀를 기룰인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경청이라는 단어로 알려져있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귀를 기울인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어본문을 번역기로 돌려서 인용했기에 읽는데 수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가톨릭신자를 가진 나라는 아마도 남미의 브라질과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일것입니다 인구가 많은 국가인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는 가톨릭신자가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은 신앙이 없는 무신론국가이고요 인도는 흰두교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국가라고
합니다 브라질과 필리핀은 낙후된 정치로 교민들을 잘 돌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구약
남미의 주교들의 모임에는 이를 의제로 내세워서 논의할려고 오래전부터 시도했지만
이를 정식의제로 채택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남미의 전체는 오백년이상전에 스페인과 포르투칼에 의해서 식민지정책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지요
이들은 여전히 불안한 정치로 국민들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고
그들의 가톨릭신앙과 토착신앙과 연결 거톨릭교회는 여전히 정복자인 백인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싱생활의 어려움은 그대로 원주민과 그리고 혼혈인에 의해서 갖게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전반에 흐르는 유태인의 율법에도 희년이라는 것이 들어있는데
가난한 이들엑 대한 배려라고 하지만 여전히 가진자들의 차지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서형제회가 헌장에 넣어서 그 한축으로 여기지만
이는 단지 모금을 해서 에쿠아도르의 가난한 곳으로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는지
도무지 우리나라에서는 그림자조차 찾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들어온지 거의 15년이 다 되도록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
우울하기만 합니다
2) 가난한 사람의 외침에 귀를 기울인다
「정리」보고서의 16항은, 「시노도스의 걸음의 처음 2년간과, 본총회를 포함해,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체험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정리」16a항)라는 인식을 표명해,
「시노도스적 교회는 귀를 기울이는 교회인 것이 필요하며, 이 책임은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정리」16n항)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만난 사람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정리 16d항).
「시노도스의 걸음을 통해서 교회는, 듣고 동반을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나 그룹을 만났습니다」( 「정리」16e항).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들 모두를 연결시키는 것은 다양한 상황에서,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조차 소외, 배제, 학대, 억압의 희생이 된 경험입니다.이러한 사람들이 듣게 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긍정하고 인정받는 경험이며, 그것은 깊은 변용을 가져오는 것입니다('정리' 4a, 16b항 참조).
교회로 하여금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들의 관점을 깨닫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편에 서는 것'('정리' 16i항)을
가능하게 합니다.이어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공통된 집을 돌보는 가운데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즉 지구의 외침과 가난한 사람의 외침은 같은 외침입니다.(묶음 4e항).
귀를 기울이는 것의 신학적 가치 때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교회」(「정리」16d항)입니다.
구체적으로 많은 경우 프로젝트, 단체 혹은 조직 안에서 빈곤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서려는 사람들의
활동 덕분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기본적인 것은, 귀를 기울여 동반하는 것은 교회적 행동이며,
전원에게 맡기지 않고 일부의 사람에게만 맡기는 일이 아니다, 라고 하는 인식을 넓히는 것입니다(「정리」16n항 참조).
이 연구부회는 다양한 수준, 특히 지방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의 빈곤과 소외에 귀 기울이는 교회의 능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됩니다.이하와 같은 물음에 임합니다.
귀 기울여 달라고 원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교회는 이미 어떤 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새로운 수단을 도입하는 것이 유익할까요?
책임의 방기나 불법적인 이양을 피하기 위해 귀 기울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사랑의 행위, 정의, 종합적 발전을
위해 구체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유대를 어떻게 강화할 수 있을까요?귀를 기울여 동반하는 봉사직의 창설을
검토하는 것은 유익할까요(「정리」16p항 참조).
수용, 인간성의 촉진, 사랑의 행위의 대처를 어떻게 네트워크화하면 좋을까요.
귀 기울이는 것과 배제된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고 부정의를 공개적으로 규탄한다(정리 4f항)는
사랑의 기술을 어떻게 조합해야 할까요.
신학적 탐구는 얼마나 가난한 사람이 우리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그들의 고통을 통해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직접 알게 된다(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정리 4h항).
사랑의 봉사, 정의의 추진, 종합적인 인간성의 촉진에 직접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양성의 요구와
영적 요구에 교회는 어떻게 부응할 수 있을까요?
그들을 지탱하는 영성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