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본은 우리나라 동포들이 민립대학설립을 추진하자 이것을 방해하고 고등교육기관을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경성제국대학이다.
우리국민이 시도한 민립대학설립을 막은 건 이 대학이 설립될 경우 민족주의가 살아나고 각 개인과 집단의 각성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해서 였다.
원래 이름은 '조선제국대학'이라고 하려했으나 조선은 망한 나라였고 일본제국이 존재 하고 있는데 '조선제국'이라는 명칭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고 일본에서 제국대학의 명칭이 쿄토니 도시이름을 쓰는 것에 맞춰 당시 서울의 이름을 경성이라고 부른데 맞춰 경성제국대학이라고 했다.
학교가 문을 열 당시 이완용이 축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관심이 적었다고 하며 입학생의 비율에 있어 조선인 보다 일본인이 많았으며 일본본토에서 건너온 유학생(후쿠오카나 야마구치, 히로시마 현의 입학생)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도의 입학생 보다 많았다고 한다.
조선인 입학생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는 지금의 경기고 (경성제일고보) 였고 일본인들이 많이 다닌 경성중과 용산중이 입학생 배출에서 1위와 2위를 했었다고 하는데 3위가 경성제일고보인 것이다.
서울과 지방의 명문고보 졸업생들이 골고루 있었다고 하며 어짜피 일본으로 유학을 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어가다 보니 기차를 타고 서울(경성)에 와서 입학을 한다.(비평준화 시기 고교서열과 유사)
우리의 힘으로 고등교육기관이 만들어 졌다면 다양한 인재들이 나올 수 있었겠지만 일본의 무단통치나 이것을 교묘하게 바꾼 문화통치기간에 만들어진 교육기관인 경성제대의 학과설치에 있어 눈여겨 볼 것은 조선사학이나 어학 그리고 문학등을 설치 하고 연구하여 조선을 확고하게 알고 지배하며 나아가 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키 위한 것이었고 외규장각 도서를 대학의 것으로 소유하며 연구한다.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연구하며 우리의 정신을 지배했던 이 학교는 고등문관들을 많이 배출 일제의 지배를 공고히 하였고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다시 재구성되는데 해방 후 많은 인재를 길러 내기도 했지만 대학을 서열화 시키는 정점에 서서 많은 것을 한꺼번에 독식하는 구조를 만든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사회가 특정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구조를 만드는데 이것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 보다 나쁜 영향을 너무 많이 주었다면 그 구조를 혁파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