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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관 광
(태산. 운대산. 용문산. 곡부. 관림)
2008, 9, 16 - 2008, 9, 21
(5 박 6 일 간)
여 행 동 우 회
태산. 운대산 관광
이번 관광은 당초에 금요 산악회 회원 5명이 일본의 북 알프스산 4박5일 산행 계획으로 매월 10만원씩 적립하여 가기로 하였다
8월에 일본 북 알프스산 산행 경비 견적을 산출하니 170여만 원이 소요 되어서 금요 산악회원 전부가 경비가 많으므로 포기 하자고 하여 대신 중국 태산 및 운대산 관광하기로 합의 되었다.
나 나름대로 태산 관광 계획을 갖고 있는데 추진 위원인 이병 근 씨가 전화로 마침 연락이 와서 같이 가기로 하였다.
2008.9.16(1일째)일 중국 태산. 운대산. 용문석굴. 개봉. 관림. 곡부 등을 관광 계획에 의하여 자명종 시계에 의한 02 : 50분에 하고 있으니 이병 근 씨께서 친절하게 02 : 45분경에 모닝콜 하여 주시어서 간단히 샤워 하고 03 : 40분경에 집합 주유소 앞에서 대기 하고 있으니까?
유성항공 여행사에서 대절한 15인승 버스가 유성항공 여행사를 출발 하여 성정동을 거쳐서 충무병원 앞을 경유 집합주유소에서 나는 태우고 BYC 매장 앞 경유 교보문고 빌딩에서 좌회전 구 경찰서 앞을 지나 03 : 45분경에 마지막 탑승자를 태우고,
인천 국제공항으로 출발하여 04 : 45분경에 화성 휴게소에 도착 모닝 커피타임을 잠시 가진 뒤 출발 05 : 58분경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유성항공 여행사 이미자 사장이 단체 출국 수속 후 06 : 45분경 짐을 비행기에 탁송 하고 나서 나는 DSLR(니콘 D300)을 세관 신고 하니까 국내구입 품의 표시가 되어 있어 신고하지 안 해도 된다고 하여서 일행 있는데 오니까,
나 이외 3명 을 제외 하고서 아침 식사 하러 2층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기다리다가 미리 탑승 수속하고 나가서 얼마 안 있으니까 식사 하러간 일행이 곧 바로 와서 탑승 수속 하여 24번 게이트에서 KE809편(HL7757기종) 에 탑승하여 08 : 35분경에 중국을 향하여 비행기가 이룩하였다
이 비행기는 140명 정원에 100여명 탑승하고 고도 7800여m, 항속720㎞로 항진 하고 있는데 한국 시간 09 : 30분경에 아침식사를 기내식이 나와서 먹고 나서 한참 있으니 중국 현지 시간 09 : 45분경에 장저우 국제공항에 도착 하여 중국 입국 수속 후 입국장에서 정주 종주 국제여행사 소속 가이드 이형철(연변 연길 조선족)을 만났다.
우리는 미리 대기 하여 놓은 20인승 버스에 승차하여 정주시 로 이동하면서 마이크로 간략하게 자기소개와 중국 정주는 황하의 문명으로 세계 4대 문명 발생지 중의 한곳이며 라고 설명 중 버스 앰프가 안 좋고 버스 차체 소음이 커서 잘 들리지 안 아서 일행 중 전일규씨가 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하니 중국 역사는 생략 하라고 하니 설명 하다 말고 중단 하니까,
유성항공 여행사 이미자 사장이 가이드 이형철에게 차량 비를 더 주겠으니 크고 좋은 신형 차로 대체 하라고 하니까,
그 즉석에서 소속 여행사에 전화하여 협의 결과 신형 큰 차는 없고 같은 모델의 새 차 좋은 것으로 점심 식사 후에 대차 하겠다고 하면서,
현재 지나가고 있는 지역이 정주시 신정 지역으로 대추가 주산지 이며 재배면적이 1400만 ㏊로 80여종의 수종으로 재배하고 있고 청의 건륭황제 의 고향이기도 하며, 춘추시대의 마차가 발굴된 장소, 중국 최초의 왕조인 은나라의 도읍이 있던 곳, 북쪽으로는 황하와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오악의 하나인 숭산(嵩山)이 자리 잡고 있다.
정주는 3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로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와 은나라 청동기 유적이 발굴 되었다.
그러나 정주가 정작 유명한 것은 중국 무술의 본고장인 소림사(少林寺)와 5악의 하나인 숭산이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곳 정주는 인접한 황하의 잦은 범람으로 인하여 과거의 역사 흔적을 찾기 힘들며 또한 여기를 찾는 여행자의 대부분은 정주 보다는 소림사를 보기위해 오는 경우가 많다.
정주 시내에서 차창 관광 하게 될 2.7기념탑은 1923년 2월1일 군벌의 탄압과 착취, 압박에 못 이겨 철도 노동자들이 봉기 총파업 하여 2월 7일 진압 과정에서 200여명의 유혈 사태가 있었는데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중국 공산당이 집권 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정주의 상징 탑 이다.
높이가 63m이고 탑 전망대로 올라가면 시내의 경치가 한 눈으로 펼쳐지고 탑 안에는 당시의 기념품과 유품이 전시 되어 있다.
하남 성의 인구는 약1억인데 그중 정주시의 인구 700만에 한족이98% 회족이 80만 나머지는 23개 소수 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정주시의 주요 농산물은 대추와 참깨로 가이드 이형철이 친구가 준 대추라 하면서 우리들 보고 먹어보라고 2㎏ 정도의 한상자 주어서 보니 대추 크기가 폭이 1,2 - 1,5㎝, 크기 2㎝ 정도로 작은 것을 한 줌씩 집어서 맛을 보니 한국의 대추와 맛이 비슷하여 우리들 입맛에 맡았다.
나머지 대추는 최정웅씨가 차에 가지고 다니면서 며칠을 두고 혼자서 일행들도 안주고 다 잡수셨다. 일행이 안 먹어서 인지, 아니면 욕심이 많아서 인지 잘 모르겠고요 그저 욕심- - - - - .
정주시는 지금 한창 개발 중에 있는 도시로서 활기차 보이는데 공항서 정주 시내 까지 산이 없고 황토고원(황토평야)으로 황토 흙먼지가 하늘에 뿌옇게 뒤덮였다.
마치 한국의 3 ~ 4월에 황사 현상 마냥 흐린 날씨가 더하면 더 했지 조금도 낳지는 않았다.
이곳 지방은 년 간 300일은 황토 먼지가 항상 뿌연 하늘이 구름 낀 흐린 날씨처럼 수천 년 동안 이런 환경에서 살아온 이곳 사람들은 적응을 잘하고 있으며,
옷을 세탁하면 옷 속의 미세한 황토 먼지 와 옷 섬유질의 마찰 때문에 옷의 수명이 작다고 한다.
시내에 들어서니 자동차와 전동차(전기 빳테리로 운행하는 오토바이), 자전거가 한 테 뒤엉켜 교통 혼잡이 말할 수 없는 데도 자동차 경적 한번 울리지 않고 가다 서다 반복 하며 차량 속도는 5 ~ 10㎞ 가는데,
한국사람 같으면 고함소리와 욕과 경적이 함께 어울려 서로 빨리 가려고 아우성 일 텐데 이곳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느긋하게 혼잡한 곳을 교차 하며 가는 것이 이들의 교통질서의 노하우 인 것 갔다.
벌써 11 : 25분경에 정주시 에 있는 2.7기념탑을 차창 관광하고 식당으로 향하는데 도로정비는 잘 되어 있으나 교통질서는 위 글을 보시고 상상 하시길!
가는 도중에 가로수 마다 빨강 테 밑에 하얀 칠이 되어 있어 가이드 이형철에게 물어보니 빨강 테는 일정한 높이의 기준(평균이 1m)이고 하얀 칠은 석회석으로 병충해 방제와 예방 하는 것이라고 하는 데 이런 것은 우리도 배워야 할 것 같다.
11 : 38분경 대당수상찬청(하천위에 건축한 식당) 한국 같으면 감히 하천위에 건축이라 상상도 못 할 일. 식당에 도착하여 현지 식으로 중국에서 첫 식사 인데 이름도 모르는 음식 밥, 빵 외 10가지가 나오는데 가이드 이형철의 말에 의하면 특별히 부탁하여 향신료 을 적게 넣었다고 하는 데도 중국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있어 일행들은 가지고간 반찬을 가지고 밥을 먹었으나 나는 그런대로 한두 가지 제외 하고 먹을 만 하였다.
우리일행은 중식을 마치고 12 : 32분경에 황하를 향하여 출발 하였다.
가이드 이형철이 황하에 대하여 히말리아에서 발원 하여 중국의청해성, 감축성, 내몽고, 섬서성, 산서성, 하남성, 산동성을 거쳐 유역의 문명을 발달 하였으며,
황하는 3년에 2번은 범란 하여 황하의 찬란한 옛 문명이 매몰 되어서 찾기 힘들며 황하 강이 한번 범란 하면 수백㎞을 휩쓸어 버린다고 한 다.
옛 부터 왕조는 황하의 치수 사업을 제일로 손꼽았다고 한다.
중국의 7대 고도는 북경, 항주, 서안, 개봉, 낙양, 안양, 남경 등이며 그중에 3대 고도는 개봉, 낙양, 안양이라 한다.
하남성에 회족이 있는데 그들은 돼지고기 을 안 먹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옛날에 불치의 병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신선돼지가 내려와서 젓을 먹이니 불치병이 씻은 듯이 낳았다 하여서 돼지을 신으로 모시기 때문 이다.
설명 하는 도중 오늘 일정이 시간이 많으니 내일의 일정을 앞 당겨서 관광하기로 하여 12 : 47분경에 하남성 민속 박물관에 도착, 1998년 시내 북쪽에 새롭게 이전한 현대식 박물관, 황하 유역의 선사 시대 출토품과 정주시내에서 발굴된 상(商)대의 유물을 잘 보존 하고 있는 곳. 특히 도자기와 옥제 품이 볼만 하다.
현관에 들어서니 정면에 두 마리 코키리 사이에 사람이 코키리를 밀어내는 장면의 대형 동상이 있는데,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코키리가 황하를 관장하고 다스리며 치수 하던 중 인간이 태어나서 부터
코키리가 인간에게 밀려서 인간이 황하를 다스리고 치수 하였다.
그 인간이 예(豫)로서 전설적인 인물로 정주시의 대표작 이라고 하며 동상위의 그림은 황하 문명의 발상을 그린 것 이라고 한다.
1층에 구석기, 신석기유물 기원 5000 ~ 7000년 전의 매장 토기
2층에 갑골문과 3500년 전의 상(商)대의 향로, 상조의 청동기, 지동기(공원132년에 만들어진 지질 측정기로 지진이 일어나면 지구본 마냥 생긴 상, 하 중심에 12마리용의 입에서 여의주가 나와 지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장치, 이기구가 발굴된 것은 없고 고증에 의하여 현대에 만들어 진 것임)
3층에는 순금 낙골 함과 백금 낙골 함, 1978년 출토된 초국 청동기 밥상은 현대인도 모방 할 수 없이 정교하며 또한 옥 공예품이 전시 돼 여 있는 중에 왕족이 금실과 옥으로 만든 옷 모양 등 수많은 전시품이 있으나 이에 대한 지식이 없어 전 층의 전시품을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대충 눈 구경하는 것으로 하고 황하로 출발 하였다.
이곳 하남성 주민 99,5%가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음식 점 및 간이식당에서 죽으로 매식 하는데 죽의 종류가 다양해 그중에 대추 죽이 주종이라고 한다.
아침 매식 관계로 중식은 회사 아니면 식당에서 매식하고 저녁 에 집에서 먹는 다고 한다.
나는 2007년 12월에 중국 길림에 관광 가서 보니 그곳 주민 전체가 쌀국수를 아침, 점심, 저녁, 세 때를 전부 매식하고 있다.
그곳 주민은 한 때 라도 쌀국수를 안 먹으면 입에 병이 난다고 할 정도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쌀국수를 좋아 한다는 뜻이겠지요!
14 : 18분경에 황하 풍경구(공원)에 도착하니 입장료 징수 하는데 여기 오신 우리 일행 중 한강 공원에 가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본 사람 있는지요?
우리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황하 풍경구 에 들어가니 중국인의 전설속의 인물인 황제와 염제의 상을 뒤로 하고 풍경구 내에서 또다시 황하 유람선을 타기위하여 탑승료를 지불 공기 부양선에 탑승하였다.
부양선은 수로를 지나 황하 강에 도착하니 강물이 상상 이외로 황토 흙물로서 처다 보기가 흙탕물이어서 역겨웠고 한데도 물고기인 황하 잉어 외 100 여종이 이런 황토 흙물 에 있다고 하니 기막힌 이야기로 들린다.
중국인은 이 황하의 흙탕물이 무엇이 그리 좋은지 모르지만 중국인들의 하는 말로 “중국인으로 태어나서 만리장성을 오르지 못하면 사나이가 아니고, 황하를 유람하지 못하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즉 마음이 상한다. 라고 하는 데 황하의 황토 흙탕물을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공기 부양선을 타고 가다 강가 왼쪽 산봉우리를 보면 황하를 다스렸다는 대우가 보이고, 이어서 황하 분계선 (참고 황하의 분계선은 청해성과 내몽고 까지 상류이고 내몽고에서 하남성까지가 중류이며 하남성과 산동성 까지를 하류로 구분한다) 과 그 아래 삼엽홍구(삼국시대 황하의 곡창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서촉 패왕 유방과 항우가 3년간 전투 하였다는 지역을 말한다.)가 산위에 표시 되어 있으며,
15분여 타고 내려오니 강변 삼각주 모양의 하천 모래벌판에 도착 하여 하선 시켰다
특별한 볼거리라도 있나 하고 내리니까 아무것도 볼거리 없는 모래벌판에 내리는데 여기서 무었을 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으며 황하
강에서 되돌아가면 되는 것을 굿이 이곳에 내리라는 것은 이해가 안가며 아마도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돈벌이 인 것 아닌가 생각 된다.
이곳에서 내리니까 관광객을 기다리는 20여 마리의 말이 주인에 이끌리어 우르르 몰려와서 서로 자기 말을 타라고 하니까!
유성항공 여행사 사장 이미자씨가 우리일행 전부가 타는데 240위안 지불 하고 말을 타고서 일정 지점 갔다 오는 데 소요 시간이 5 ~6분소요 되는 동안 이미자 사장이 석류 15개 25위안에 사서 하나씩 나누어 주면서 맛보라 하였는데 생각 보다는 맛이 별로 없고 또한 속이 많이 상하였다.
일행 거의 전부가 대부분이 먹지 못하고 내버렸는데 앞으로 중국에 갈 기회가 있는 분은 이곳(중국)에서 석류는 절대로 사먹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이곳의 말 타기와 부양선 간에 모종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장소 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곳에다 관광객을 하선 시키지, 아무 볼 것 도 없는 넓은 모래벌판 에다!
우리일행은 말 타기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곧 바로 부양 선에 승선 하여 15 : 14분경 부양선 부두에 도착, 하선 하여 황하 풍경구로 이동 하였다.
황하 풍경 구는 산을 깎고 다듬어 위에다 콘크리트로 중국 전설의 인물인 황제와 염제 상을 20여 년간의 공사로 제작 하였다고 한다.
전설속의 황제는 정치가이며 장군이고, 염제는 농경인의 신이다.
이 상의 크기가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보다 8m 가 더 높다고 한다.
황제, 염제 상 앞 제단 5 ~ 6m 경사면 전면에 중앙에 용조각, 좌, 우 및 옆면에 중국 56개 소수민족의 대표적 상징물이 조각 되어 있으며 조선족은 장구와 상모가 조각 된 아래에는 거주지역과 연혁이 양각 되어 있다.
제단 전면에 대형 향로가 있고 좌측 에는 대형 종과 우측에는 대형 북이 있고 맞은편 에는 두 줄로 4개씩 8개 대형향로 와 10m 높이의 제단이 있어 매년 음력 3월 3일 황제, 염제의 자손(참고로 전설에 의하면 한국인은 단군의 자손 인 것처럼, 중국인은 황제와 염제의 자손이라고 한다.)들이 제사를 지내는 장소라 하며,
중앙의 향로 1개와 8개의 향로 합계 9개의 향로 숫자는 옛 중국의 9주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전면의 대형종과 북을 각각 치는데!
1회 치면 복 이오고,
2회 치면 만수무강 하고,
3회 치면 행운이 온다고 하는 대 이는 함부로 치지 못하며 이를 관리하는 사람 한태 돈을 지불 하여야 만이 칠 수 있는 데 관리 하는 사람이 다름이 아니라 종과 북 옆에서 장사 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이것도 장사 의 돈 벌이 속 인 것 같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져 나와 이병근씨 내외, 이미자 사장, 가이드 이형철씨등 5명만 남아 있고 나머지 인원 8명은 황제와 염제상의 정상 까지 같다 온다고 하면서 올라가서 황제와 염제 상 뒤 길로 내려가니 도로가 있어 도로 따라 한참을 가니,
이도로가 2개의 산봉우리 옆으로 난 도로를 확인 하고 나서 마침 좌측 등산길이 발견 되어 이등산로 접어들어 극목각 탑을 지나와서 출렁다리를 건너서 조금 내려오니,
모택동 동상 옆에서 위치적으로 볼 때 계속 길을 따라가면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고 한참 돌아오게 되어서 모택동 동상 옆에서 길도 없는 곳을 헤치면서 돌아 왔다고 한다.
한편 기다리는 사람들은(5명) 내려올 시간이 30여분 이면 충분 한데 1시간 30분이 지나도록 안 내려와서 가이드 이형철이 찾으러 간다고 정상에 거의 다 올 라 갔는데 그때서 간 사람들이 내려 와서 이미자 사장이 가이드 이형철 한테 전화 하여 다 왔으니 내려오라고 하여 땀을 흠뻑 흘리면서 숨이 가쁘게 내려와 곧 바로 오늘의 숙소로 향하였다.
오늘의 이 같은 일은 산을 좋아 하고 또 모험심이 있는 몇 분의 모험심 때문에 일어난 일로 가급적이면 관광에서는 안 했으면 좋을 것 같다.
시내에 도착 하니 퇴근 시간 때라 자동차와 전동차, 자전거가 한대 어울러져 교통 혼잡은 말 할 수도 없는 데 경적 울리는 차량은 한 대도 없다.
한국 같으면 막 욕 나오고 경적 울리고 야단 법석 일 인데 여기 중국인 은 묵묵히 세월아 좀 먹어라 하는 식으로 운전 하며 급 브레이크를 자주 하니까,
제일 앞에 승차한 이병근씨 왈 사고가 날까봐 가슴이 움 추려 지고 조마조마 하다고 하면서 항상 앞좌석(국, 내외버스 승차 시)에 앉은 분이 3일째부터는 아예 앞좌석에 안 앉고 맨 뒤 좌석으로 가서 끝나는 날까지 앉아 같다.
이곳 정주에서 경적은 법적으로 금지 되어서 경적을 울리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한다.
어느덧 17 : 36분 오늘의 숙소인 음성음지반점(4성급)에 도착하여 최정웅씨와 같이 618호 배정 받고 올라와서 간단한 샤워하고 나서 룸에 내려가 저녁 식사 장소인 대장금 식당에서 한식으로 돼지 삼겹살 을 주 메뉴로 맛있게 식사 하고서 20 : 08분경에 음성음지반점 호텔에 도착하여 각자 배정 받은 방으로 가서 오늘의 피로를 잠시 접어두고 오늘 하루 관광에 대한 일과를 24 : 27분 까지 정리 하고 내일을 위하여 잠을 청하였다.
2008년 9월 17일 (2일째)
05 : 50분경에 이병근 씨가 와서 고이 잠든 나를 깨워서 벌떡 일어나 정신 차리고 난후 간단한 여담 후에 샤워 하고나서 07 : 00에 2층 식당 호텔식 뷔페로 아침 식사 하고 룸 체크가 끝나고 08 : 10분경에 소림사로 향하였다.
가이드 이형철의 일장연설이 어제 편안히 잘 주무셨냐며, 불편한 점이 없느냐고 하니까! 일행들이 호텔방에 왜 냉장고가 없냐며 물으니,
최정웅 씨가 정수기 밑에 있는 것이 냉장고라 말하니까,
김한응 씨가 냉장고면 무엇 하느냐 가동이 안 돼는 냉장고인데 라고 말하니 다른 일행도 이에 대한 불평이 많았다.
가이드 이형철 왈 하남성 주민은 황토 고원의 흙먼지 때문에 찬물은 먹지 않고 끓여서 뜨거운 물만 먹는 다면서 이곳이 제일 더울 때는 43℃까지 올라가도 절대 찬물은 먹지 않는다고 일장 설명 하고 나서,
소림사 방장(주지스님) 이름이 스융신, 금년나이 43세 인데 부인이 3명 있으며 BMW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중국내에서 도 유명한 CEO이다.
숭산은 태실봉과 소실봉으로 나누어지는데 소림사는 소실봉의 계곡에 있기 때문에 소림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계곡이라기보다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에 가까웠다.
소림사는 495년 숭산 산자락에 창건 되었다. 6세기 초 인도의 승려 달마가 소림사에 와서 선종(禪宗)을 창시하고 9년간 면벽수도를 한 후 자신의 그림자를 남겼다는 바위가 있다.
9년간 면벽수도 후 달마대사가 들짐승의 공격을 피하고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수련 하면서 무술이 시작 됐다.
달마대사는 시간 나는 대로 쇠사슬, 장(杖), 곤(棍), 검 등을 이용한 동작을 연구하고 단련했다.
이 도구들은 후세에 달마련, 달마장, 달마검 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후 짐승이나 조수의 호흡과 자세를 연구해 창안한 것이 그 유명한 나한수(羅漢手)다.
이는 후대에 꾸준히 연구되고 새로운 보법이 가미돼 소림오권(少林五拳)으로 완성 됐다.
소림오권은 동물들의 동작과 특징을 본떠 고안한 것으로 승려의 체력 단련을 위해 용권(龍拳), 호권(虎拳), 표권(豹拳), 사권(蛇拳), 학권(鶴拳)을 개발하였다.
현재는 소림사 무술 시범 단이 세계각지를 돌며 홍보 활동에 나서고 있으며 수련생 일부는 TV광고 출연, 무술감독, 스턴트맨, 무술사범으로 활동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막대한 수입원인 소림 무술의 독점권과 상표권 보호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50년 동안 소림사는 화재와 외침 등으로 여러 번 파괴 되었으며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홍위병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28년 장개석 소속 군벌 석무상이 44일간에 걸쳐 소림사를 전소 시킨 것을 1982년부터 여러 차례 재건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였다.
소림사는 일일 관광객이 3 ~ 5만 명이며 이번 스케줄에 없으나 2008년 8월부터 소림사의 음악대전 야간 공연이 있는데 다음 소림사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소림사 음악대전을 관람하시기 바란다고 권 하였다.
어느덧 소림사 입구 9㎞ 지점 에 도달 하니 여기서부터 소림 무술 학교가 있는데 소림사 관활 구역이라 모든 상행위, 공공행위등 소림사의 승인을 얻어야 하며 또한 소림사에 사용료를 내야 한다.
거기에 대한 소림사의 수입도 엄청 나는 방면 관광객에게 들어오는 수입 또한 만만치 않다고 한다.
소림사 관활 구역의 무술학교 학생은 30,000여명이며, 소림사에는 학생이 5,000여명이 현재 교육 받고 있다.
현재 소림사의 스님은 20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 100여명은 국, 내외에서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가이드 이형철의 설명을 듣는데 09 : 34분경 소림사에 도착하니 입구에 당나라 효문제 때의 발타 화상이 우리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가이드 이형철이 무술공연 관람이 09 : 30분부터 인데 지나서 못하니 2회 공연 10 : 30분 관람 하자며 소림사 경내 입장권을 구입 하러 가고 우리 일행은“만세소림”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데,
가이드 이형철이 와서 외국인 이라고 여권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일행 여권 가지고 가서 입장권을 시간 걸려서 매표 하여 당 태종 이세민이 돌문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절이란 뜻의 천하제일명찰문을 거쳐서 경내로 들어가니 무술 상과 무술 벽화가 그려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림사의 무술에 대한 호기심을 같게 하면서,
소림사 야외 운동장에서는 소림 무술하교 학생 들이 무술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공연장으로 향하였다.
소림사가 국가 비밀 보호소도 아니고 평범한 문화재 관광지인데도 외국인 여권을 조사하여 입장권을 판매 하다니 세계 각국에 이런 일이 있을까 많은 운대산, 태산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 되어 우리로서는 상상 할 수 없는 일이 라고 생각 된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공연 10분 전 200여 좌석이 꽉 차서 않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일부는 자리가 없어 바닥에 않아 관람하였으나 우리 일행은 다행히 자리에 모두 앉아서 30분간 공연을 관람 하고 소림사 본전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무술 공연은 스님이 아닌 무술 학교 학생 들이라고 한다.
본전에 들어가기 전에 조원제본이라는 돌문을 지나 남쪽에 향해 있는 양 옆에 돌사자가 있고 이돌 사자는 명나라 때 조각 한 것이고,
산문은 청나라 때 지은 것으로, 1975년 재건하였다.
소림사(小林寺)라는 현판이 청나라 강희 황제 친필이고 강희 황제의 용인 까지 있다.
산문 안으로 들어가 보면 미륵불이 있는데, 불교사원은 제일 첫전 미륵불, 뒤에는 위타보살이 있는데 호법금강 이라고도 한다.
그는 손에 무기를 쥐고 사원의 불, 법, 승 3대 보물을 지키고 있다.
산문을 지나면 길 양편에 비석이 세워져있는데 이것을 소림사의 비림 이라고 한다.
이것은 당, 송 때부터 유명한 분들이 소림사에 왔다가 남겨 놓은 것이다. 동쪽 켠 비랑에 들어가면 소림사의 흥망 쇄 퇴를 볼 수가 있다.
소림사의 비림과 비랑은 모두 108개로 역사, 조각, 예술 등 아주 높은 연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고목과 함께 많은 비석이 있는 그중에 13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 은행나무를 일명 나한나무라고 한다. 왜냐 하면 은행나무가 결혼도 못하였고, 부인도 없고, 또한 자식도 나지 못하여서 붙여진 이름 이라 한다.
비림 서쪽은 추보당 인데 여기에 모두 42개 방이 있고 당내에는 흑조각과 나무 조각이 모두 216개로서 형상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이 은행나무 앞을 지나면 천왕전 으로 1928년 북벌군에 의해 잿더미 되었고 현재 건물은 1982년에 개건 한 것이며, 전내에 들어가면 “홍, 하”장군이 양옆에 서있는데 불교에서 대문을 지키는 장군이다.
귀신이 들어 왔다가 두 장군을 보고 무서워서 달아난다고 하는데 문에 들어서면 동서남북 4대 천왕이 있다.
이분들 직책은 사람들의 선악행위를 보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악한 사람을 처벌 하는 신이다.
천왕전 을 거쳐 소림사의 본전인 대웅보전이 나오는데 이 건물도 1928년 재화로 인해 1986년에 재건한 것이다.
전면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며, 좌측의 불상은 약사불, 우측은 아미타불이다. 전내 동서 양쪽에 18나한 조각이 있으며, 벽 후면에는 5억7000만년에 나타날 내세불인 미륵불을 모시고 있다,
대웅보전 건물 외곽 서쪽에는 보루(북)가 있고, 동쪽에 종루가 있는데 아침에 종루의 종을 쳐서 아침시간을 알려 주고, 저녁에는 고루의 북을 쳐서 저녁 시간을 알려 준다, 두 건물의 높이는 45m 이고 1928년 재화로 1995년 재건한 것이며 종도 후에 만든 것으로 무게가 6,5t이 된다.
종루 앞에는 “黃唐崇岳 少林寺碑”(황당숭악 소림사비)가 있다.
대웅보전을 지나 장경각 앞으로 가니 대형 솥과 이세민의 비석외 여러 비석이 있는데 솥은 명나라 시대에 차를 이 솥에서 만들었다고 하며 장정 4명이 겨우 움직일 정도 이며,
이세민의 비는 자기를 구해준 소림사에 대한 감사의 비라고 한다.
장경각은 명나라 때 지였고 불경과 무술 책을 보관 하는 곳이다.
藏經閣(장경각) 의 藏(장)자의 획수가 모자라는데 그 원인은 안에 보관해 두었던 불 경책과 무술 책 을 많이 도적 맞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책들을 전부 되찾으면 완전한 藏 (장)자로 만든다고 한다.
1928년 재화로 1994년 재건한 것으로 길이가 7m이고 무게가 6,5t이 되는 불상이 누워있는 와불이 있다.
장경각을 거처 방장이 나오는데 이곳은 소림사 방장(주지)스님이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1750년 청나라 건륭황제가 소림사에 왔다가 여기서 사무를 보았다고 하여 일명 용정 이라고 부른다.
방장을 지나 입설정 으로 가면 유명한 설화가 있는데 달마대사가 중국에 왔을 때 중국의 신광(혜가대사)이 달마한테 와서 불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는데 달마에게 거절 당 하였다.
그러나 신광은 실망하지 않고 달마대사를 보살피며 기다리다가 536년 의 어느 하루 큰 눈이 내려 신광스님의 무릎을 덮었으나 그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달마대사가 왜 눈 속에서 있느냐고 물었더니 신광스님은 달마스님이 불법을 가르쳐 준다고 허락 하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에 달마대사는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면 가르쳐 준다고 하자 신광스님은 자신의 왼쪽 팔을 잘라 눈이 붉은색으로 물들게 하였다,
이를 본 달마대사는 그의 성의에 감동 되어 신광을 제자로 받아 들였다고 한다. 후에 달마대사에 이어 제2대 방장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소림사의 합장이 바른손만 올리고
왼손은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입설정을 지나가면 서방성인이 있는데 이곳은 옛날에 무술을 연마 하던 곳으로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데 이 비로자나불은 명나라 왕궁에서 모시던 비로자나불 이라 한다.
그리고 옛날에 무술을 연마하던 발 자욱이 지금 까지 48개가 남아 있으며,
벽에는 500나한의 벽화가 명나라 때 것으로 무명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60년 마다 나한상의 모습이 바꾸어진다고 한다.
소림무술의 역사가 유구한데 역사 기재에 의하면 496년 북위 태화 년 간 인도스님 발타가 소림사에 있을 때 소림사의 한 재자가 항상 다른 제자들 한태 많아 맞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무술을 연습 하였는데 후에 소림 무술의 창시자의 한사람으로 되었다.
북위 효창 달마는 소림사에 온 후 수림 속 야수들의 침입을 많이 당하고 제자들도 수련하는 과정에서 피곤을 풀고 또한 절을 보호 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무술을 구상하기 시작하면서,
최초에는 동물들의 여러 가지 동작을 따라하고 인간의 무술을 수집, 정리하여 한 개의 활신법 을 만들어 가르쳤는데 이것이 바로 소림무술의 초기이다.
그 후 소림사 스님들은 중국 각종 무술을 부단히 종합 정리 하면서 특색 있는 소림무술을 만들었다.
수나라 말년 이세민이 왕세충 한 테 잡혔을 때 소림 13곤 스님이 이세민을 구해주고 함께 왕세충을 토벌 하는데 성공하여 그 후 이세민이 황제가 되어서 소림사에 500명 병사를 보내어 무술을 배우게 하였다.
소림무술은 일찍 원나라 때 일본에 전파 되었고, 개혁개방이후 매년 국내외의 제자들이 와서 무술을 배우곤 한다.
우리는 소림사 경내를 관람 하고 곧바로 300m 거리에 있는 탑림 으로 같다.
탑림은 탑이 산림처럼 빼곡히 있다고 하여 탑림 이라고 한다.
수, 당 때부터 짓기 시작 하였는데 수나라 탑 1채, 당나라 탑 1채 송나라 탑 2채, 금나라 탑 10채, 원나라 탑 46채, 명나라 탑 148채, 청나라 탑 10채, 현대 와서 지은 탑이 2채, 년대가 확실하지 않은 탑이 27채 이렇게 전부 247채의 탑이 있으며,
소림사 스님 중에서도 역대 방장, 생전에 지위, 학문, 명예, 공적에 따라서 사후에 탑림 에 올수 있다고 한다.
면적이 14000㎡ 탑림의 탑신이 뾰족하고 탑이 석재 인 것은 무술에 능한 무술 승 이고 그렇지 않고 벽돌로 조성된 탑은 문인 승 이며 소림사는 전체가 비구(남자)승 이다.
이 탑 중에 제일 높은 것은 15층이며 탑림 의 탑 층수는 홀수로 되어 있다.
소림의 육조는 달마대사, 혜가(신광)대사, 승찬대사, 도신대사, 홍인대사, 혜능대사이다.
지금 까지 소림사 관광 하였는데 입구부터 모든 경내가 상업도시화 형태로 이루어져 소림사 자체가 상업의 주인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퇴색 되어 가는 느낌은 나 이외의 여기 온 관광객은 모두가 그렇게 느낌을 받았을 기분이다,
탑림 관광을 마치고 나니 12 : 15분쯤 되어서 경내 셔틀 버스표를 구입 하여 승차 하고서 소림사 입구에 와서 주차장 까지 걸어가서 버스 타고 식당으로 향 하였다.
식당은 소림사 관활 구역 내의 영태사 담과 붙은 소제관 에서 현지식인 소림사 식단으로 된 절 음식으로서 일행이 음식 맛이 맞지 않아 유성항공 여행사 이미자 사장이 가지고 간 고추장을 이미자 사장이 밥을 비벼서 나누어 먹고 하였다.
절의 종업원 복장이 승복을 입고 있어서 영태사가 집적 운영 하는 식당으로 알았는데 이 식당은 별개의 개인 식당으로서 일종의 유니폼을 승복으로 하였다고 한다.
영태사는 비구니(여자)승 절로서 소림사 소속이 아닌 별도의 절로서 당초에는 절 이름이 영련사 이였는데,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북위 때 효문제의 딸 영태가 이절에서 비구니 승으로 있어서 그 때부터 비구니승의 절로서 현재 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효문제의 딸 영태를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도 영태사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일행 중 나와 전일규씨외 몇이서 영태사를 관람 코저 하였으나 입장료가 있어 입장료 내고 들어가려고 가이드 이형철을 찾으니 마침 나와서 물으니 일정에 의한 시간이 없어 그러니 그냥 가자고 하여 13 : 30분경 일행 전원이 점심을 마치고 관림을 향하여 출발 하였다.
낙양은 황하의 중, 하류 지역에 해당되며 우리나라에서는 중원 이라고 알려진 지역이다.
온난한 기후로 쌀과 밀농사를 지을 수 있어 예로부터 다양한 민족이 모여 황하 문명을 이루었다.
낙양은 기원전 770년에 주(周)나라의 도읍이었던 것을 시초로 후한과 삼국시대의 위(魏)나라, 서진과 북위, 수, 당 후진 등 역대 13왕조 105황제 가 1500년간 수도로 삼아 흥망을 거듭한 곳이다.
낙양이 가앙 융성했던 시기는 당나라 때로 당시 서안이 정치의 도시였다면 낙양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유명 하였다.
전국시대의 노자와 당나라 때의 두보, 이백, 백낙천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나라 시대의 고성유적지, 불교 예술사의 한 획을 그은 용문석굴(龍門石窟),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 백거이의 묘가 있는 향산사, 낙양박물관과 고묘박물관, 관우의 사당과 무덤이 있는 관림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4 : 54분경에 삼국시대 유비를 도왔던 관우의 동상과 사당 뒤쪽에 그의 머리가 묻혀 있는 무덤이 있다.
관림은 낙양시 남쪽 7㎞ 되는 곳에 위치하였으며 중국역사에 문무 2 승인 이 있는 데 문승인은 유명한 교육가인 공자이고, 무승인은 중국 삼국시기 가장 유명한 무관인 관우이다.
봉건 사회 때 사람이 죽은 뒤 생전의 급별과 칭호에 따라 규정이 있었는데 황제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들의 무덤을 종이라 하며 일반 백성의 무덤을 분이라 한다.
승인의 무덤이어야만 림이라 한다. 그래서 산동성에 공자의 무덤을 공림 이라하고, 관우의 무덤을 관림 이라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관우는 자가 운장 이고, 하동 해주 사람이며 160년에 태어나 19세 때 유비와 장비를 만나 도원결의를 하여 의형제를 맺고 유비를 도와 촉나라를 세워 영토가 없던 때로부터 나라가 대립하기 까지 큰 공을 세웠다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의 장수 여몽과 촉나라 유비의 장수 관우는 촉나라의 주요 전략 요충지인 형주를 지키게 되었다.
관우는 워낙 오만한 성격에 여몽을 안중에 두지 않았는데 방어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여몽의 기습으로 패하여 도망치던 중 오나라 여몽에게 포로 되어 호북 당양 에서 머리를 잘려 죽고 말았다.
여몽은 관우의 머리를 손권에게 같다 바치니 손권이 유비의 복수가 두려워서 관우의 머리를 낙양에 있는 위나라 조조한테 보내어 이 모든 것이 다 조조의 뜻인 듯이 보이게 하여 조조를 모함 하려고 했으나,
조조는 이것을 눈치 채고 오히려 왕후 예의로 관우의 머리에다 나무로 몸은 만들어서 관을 쓰고 후하게 매장하고 문무 관원과 함께 제사 지내어 이곳 에다 묻었다.
그리고 관우를 형왕으로 봉하니 이때로부터 관우의 머리는 낙양에 있고 몸은 당양에 있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송나라 때부터 15명의 황제가 선후로 관우를 봉하였고 이렇게 후에서 왕으로, 왕에서 제로, 제에서 성인으로 되었다.
1596년 명나라 만력 황제가 관우를 “三界伏魔大帝神威遠鎭天尊關聲帝君”(삼계복마대제신위진초천존관성제군)으로 봉하여 만력 황제는 관림을 만들고 측백나무 심기 시작 하였고, 청나라 건륭때 확장 하여 현재 규모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제왕들이 관우의 의로움과 장수로서의 예우를 제왕의 왕실 대우로 추종 되어 민간에게 전파 되고 곳곳에 관우 사당이 설치 되어 관우를 위한 제사를 민간에서 관우사상에 따른 종교가 발생 하여 한국에 까지 전파 되었다.
중국인 들은 관우를 믿음과 의리를 가장 잘 지킨 인물로 신성시화 한다.
관림에 도착 여기서도 소림사와 마찬가지로 여권을 제시(관광할 용문석굴도 같음)하고 입장권 을 구입 하여 경내에 들어가니,
길 양편에 모두 104개의 기둥이 있는데 그 위에 104개의 돌사자가 놓여 있으며 배전 앞에는 관우가 쓰던 청룡언월도가 있는 데 높이가 3,5m 이고 무게는 40㎏ 라고 한다.
이곳은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대전 관림에서 제일 큰 건물이며 높이가 20m 이고 총면적이 760㎡가 된다.
안에 들어가면 정면에 관우의 입상이 있고 우측에 왕포, 관평 좌측에 요화, 주포의 입상이 있는 곳을 지나면 이전 이 나오는데,
오나라에서 죽은 관우가 원한의 눈빛으로 동쪽에 위치한 오나라 방향을 바라보는 모습이 있고 옆에는 관평과 주창이 무기를 들고 서있는데,
이전을 나오면 마마전인데 관우가 혼자 있으면 외로워 할 것 같아서 부인의 전을 지어 놓았다.
당조일월이란 전각에 가면 관우의 입상을 흙으로 크게 만들어 져 있고 양쪽 벽면에 관우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여길 지나 노추전에 가면 전면 관우상과 우측에는 관우가 옆으로 누어있는 상이고 좌측은 관우가 앉아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책을 읽은 상이다.
이곳을 지나면 청 건륭 30년 (1765년)에 건립한 팔각정 앞에 관우의 묘 종영운이 있다.
종영운 앞에 비석이 있는데 이는 관우의 최고 관직을 말한다.
“忠義神武領佑仁勇威見關聲大帝林”(충의신무령우인용위현관성대제림)
관우의 묘 종영운에는 울타리가 쳐저 있고 나무가 무성한 숲으로 이루어 져있다.
중국에서 역대 제왕들의 황실 무덤의 예우를 받는 곳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공림과 관림 두 곳밖에 없다.
이곳 관광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곳 옆 건물에 석조전을 북위 시대부터 당, 명나라의 석물 진품이 전시 되었는데,
나는 거기에 대한 특이한 지식이 없어 2500여 년 전 북위 시대의 대형 석관등 그 시대 귀족의 매장 풍습이 이랬구나 하는 정도이며,
각각의 석조물 조각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것은 알 수가 없고 이 석조물이 진품 이라하니 그런 줄만 알고 관람 하였다.
그런데 각 전각에 있는 관우의 상이 모두 금속이 아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매년 10월에는 이곳에서 관우 축제가 있다고 한다.
15 : 28분경에 관림의 관광을 마치고 낙양의 고대로부터 주 생산 품목인 옥 판매장 을 향하여 출발!
우리는 중국 관광 도중에 30분씩 시간을 할애 하여 물품 판매장에 가서 쇼핑 하는데 이것은 중국 정부로 부터의 관광객 및 가이드에 의한 지침으로 2 ~ 3곳은 가서 쇼핑과 물품 판매장에서 확인을 가이드가 받아야만 가이드는 중국정부에서 시행 하는 가이드 고가점수를 받을 수 있으며,
고가 점수가 적을 때는 가이드 자격이 취소된다고 하며 또한 상품 판매의 전략이기도 하다.
운전기사가 옥 판매장을 찾지 못하여 한참을 헤매다가 15 : 55분경에 옥 판매장에 도착 하였다.
여기서 판매장 가이드 인솔 하에 매장 입구에 들어서니 청옥으로 만든 길이 13m, 높이5,9m, 무게 29t의 용머리가 좌, 우 각각 4개와 앞 중앙 1개 9개가 조각된 이배는 이곳 출신인 측전무후를 위하여 만들어 놓았다고 하면서,
전시물에 대한 항문이 없는 용왕의 9째 아들(항문이 없어 재물을 모으고 내보내지 않는다는 부의 상징)설명과 끝으로 용왕의 엎드린 상이 앞발이 왼쪽이 나오면 남자이고, 오른쪽이 나오면 여자라고 설명 하면서 옥 판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150여 평 이상의 넓은 매장에 각종 옥의 장식품이 있는데 여기서 전일규씨가 베개에 까는 옥 장식을 250위안에 구입 하고 양승호씨는 수정으로 된 독보기 안경을 한화 45000원에 구입 하는 등 20여분 만에 쇼핑을 끝내고 16 : 20분경에 용문 석굴을 향하여 출발 하였다.
용문석굴은 낙양시 남쪽 약 13㎞ 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석굴이 있는 산은 백가이 묘가 있는 향산(일명 동산)과 용문산(일명 서산)이 마주하고 이강이 두 산 사이에 흐른다.
수양제가 낙양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때 황궁의 문이 바로 이곳을 마주 하였는데 두 산이 기둥과 같이 느껴 용문이라 불렸다.
감숙(甘肅)의 돈황막고굴(敦煌莫高窟), 대동산서(大同山西)의 운강석굴(雲岡石窟), 낙양의 용문석굴(龍門石窟)은 중국 3대 석굴로 불리 우고 있는데 여기다 중경(重慶)의 대족석각(大足石刻)과 함께 중국 4대 석각예술 보물고로 불 리우고 있습니다.
돈황 막고굴은 북위 때부터 지였는데 석굴이 약 735개가 있고 웅장함으로 이름을 날렸다.
대동 운강석굴은 용문석굴의 선배라고 할 수 있다.
북위는 소수 민족나라였기 때문에 효문제가 정권을 공고히 하려면 한족들의 문화 을 접수해야 한다고 생각 하고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다.
대동 운강석굴은 바로 북위가 도읍을 옮기기 전에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살의 옷은 소수민족 복장으로 되어 있으며 석굴은 45개 정도 밖에 없으며, 3대 석굴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다.
용문석굴은 돈황막고굴의 웅위함 보다 정교함 그리고 효문제가 발전을 위하여 개혁을 하였기 때문에 운강석굴에서 볼 수 있었던 소수민족 복장이 아니고 한족의 복장으로 교체되고 북위 때와 당나라 때의 새로운 것이 그대로 반영 되었다.
용문석굴의 석회암 암벽을 깎아 만든 석굴로 길이는 1㎞가 되는데 471년경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도읍을 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긴 후부터 석굴 조성하기 시작하여 북위는 불교를 국가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에 운강석굴에 이어 이곳에 불사를 시작 하여 동위, 서위, 북제, 수, 당에 이어지고 송나라에 이르기 까지 약 400여년에 거쳐 만들어 졌고,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 미술의 전성기 이였다.
동굴 안에는 저마다 엄청난 수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 그 수는 석굴은 1595 가 있고, 감(龕:불상을 모시는 장) 750, 합계 2345굴, 비석이 2800여개, 불탑이 39여 채, 불상이 9만7306존이 되는데 이는 석굴 예술의 보물고로 다방면으로 살아있는 역사 자료이다.
아쉽게도 도적맞은 것도 많은데 중국 문화대혁명 시 인위적으로도 파괴 되었지만 2000년 11월 11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명록”에 선정 되었다.
용문석굴은 중국 고대 봉건 정권의 종교 예술로 불상들은 하나 같이 정교 하고 귀중한 문화 유적이라 전무가 들은 하루 만에 자세히 돌아본다는 것은 매우 힘드나 우리 같은 전문 지식이 없는 관광객은 다만 제한된 시간 내에 중요한 동굴만 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가이드가 설명하여 주는 대로 아 ~ 그렇구나?
북위, 당나라 때 황실의 참여하에 형성된 용문석굴은 황실품격을 띤 당시 정치 형세 변화와 긴밀히 관련 되어 있다.
북위 때 만들어진 불상의 목을 보면 가늘게 되어 있고 당나라 때 불상은 좀 풍만하며 목에 주름이 잡혀 있다.
우리는 용문석굴 주차장에 도착하여 18분여 이상 걸어서 16 : 55분경에 매표소에 도착 여권을 보이고 매표 후 용문석굴 에 입장 하였다
闕佛龕之碑(궐불감지비)가 계단 입구에 있는데 이비는 당나라때 당태종의 4번째 아들 이태가 태자가 되기 위하여 당 태종과 황후의 공덕을 담은 비석 이다.
그러나 이 비석은 이태가 돈을 아끼기 위하여 원래 북위 때 만들어 놓았던 비석면을 다시 수리 하고 써 놓은 것이다.
고양동(古陽洞)은 용문석굴 중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동굴로 북위 때의 귀족들이 돈을 대서 만든 이 석굴은 동굴 내부에 작은 감실들이 빈틈없이 파여 있다.
용문석굴은 조각 외에 글씨로 유명 한데, 석굴에 새겨진 글씨 중 가장 뛰어난 것을 용문20품 이라 하는데, 그 가운데서 19개가 이곳에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글씨가 많이 새겨져 있고,
글씨 외에도 굴의 벽면과 천장에 새겨진 무감과 불상이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고양동은 작은 감실로 되어 있어 제한된 시간에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리며 멀리서 전체적인 고양동을 스쳐 지나가 계단으로 올라가면 잠계사(潛溪寺)로 가장 먼저 사람들을 반기는 곳으로 9m 넓이에 길이 7m로 당 고종 초년에 조각한 것이고 안에는 일곱 개 의 조각상이 있는데 가운데 앉아 있는 불상은 아미타불이고 높이가 7,38m, 그 양 옆에는 두 제자가 있고 두 제자 옆에는 보살이 있으며 보살 옆에는 무섭게 서 있는 2천왕이 있다.
수, 당 시기 중국 불교 발전은 또 한 번의 번영기를 가져 왔다.
남북 불교 신도 들의 부단한 교류 하에 중국화 불교가 더욱 선명 해 졌고 불교 조예의 완역 을 가져 왔으며 조각 예술 방면에서 북위와 다른 품격을 가져 왔다고 한다.
그 옆으로 가면 빈양삼동(賓陽三洞)이라고 부르는 2500년 전에 24년의 기간 동안에 8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곳으로 북위 효문제 개혁으로 당시 황실 가족이 불교 석구를 제조 하는데 영향을 가져 왔으며 이것이 바로 복장과 품격에서 효문제가 개혁한 문화를 반영해 줬다.
중심에 있는 굴을 빈양중동 이라고 하는데 북위 현무제가 아버님과 어머님을 위하여 만든 것인데, 안쪽에 보면 북쪽으로부터 과거불 석가모니불이 있고, 동굴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주위는 꽃잎과 문자 도안으로 장식 되었다.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생활을 연상케 한다.
복장을 보면 이미 운강석굴의 소수민족 복장이 아닌 한족 복장으로 대체 되었다.
굴 내 양편에는 원래 큰 벽화가 있었는데 1930년 에 도둑맞아 현재 뉴욕에 있는 박물관과 칸사스주 예술박물관에 있다.
이여서 빈양남동(賓陽南洞)은 북위 때 만들기 시작 하였는데 다 만들지 못하고 당나라 초기 까지 계속 되어 만든 것으로 북위와 당 나라의 풍격을 담은 석굴 이며 안에는 아미타 불상이 있다.
또한 빈양북동(賓陽北洞)에 가면 이곳도 북위 때 만들기 시작 하여 당나라 초기에 완공 된 곳으로 바닥에는 24송이 연꽃이 있고 안에는 아미타불이 있고 뒤에는 화염문과 조롱박으로 된 조각이 있고, 옆에는 두 제자와 두 보살이 있고, 굴 안에는 이천왕이 있는데 이는 당 나라 석굴 상 가장 빨리 출연한 천왕상이라 한다.
이곳을 보고 옆으로 가면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은 여기에는 미륵불이 중심에 놓여 져 있는데 미륵불이 중심에 놓인 것은 중국 석굴 상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중국에서 미륵불을 주불로 모시는 곳은 찾아보기 어려 운데 그중 하나가 용문석굴의 마애삼불인 것이다.
이는 당시 측전무후가 황제로 된 후 정권을 공고히 하고자 자신이 미륵불 화신이라고 말하고 미륵불을 중심에 모셨던 것이다.
705년 측전무후가 황위를 내 놓으면서 석굴이 중단 되어 지금 까지 완수 되지 못한 그대로 있다고 한다.
당 측전무후의 이름은 무조이며 부친은 무사학 으로 미모가 뛰어나서 당 이세민의 후궁으로 발탁 되어 이세민 사망 후 서안의 감업사 에서 여생을 보내는 데,
당 고종의 황후가 자식이 없고 낳지 못하자 고종이 후궁 소속비들을 총애하여 황후가 소속 후궁비들을 대응 견제하기 위하여 서안 감업사에 있는 측전무후를 불러들여서 고종의 비로 삼으니 측전무후는 황제 야망이 있어 친자인 어린 딸을 죽이고,
그 후 아들이 때어나자 당 고종이 아들을 편애 하니까 아들 14살 때 음식에 독약을 넣고 독살 하였다.
당 고종 사망 후 측전무후는 황후로서 10년간을 정치하였다.
한편 측전무후는 음색 병이 있어 측전무후와 관계한 모든 남자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소리 소문 없이 죽였다 하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계속 옆으로 가면 만불동, 연화동, 봉선사, 팔작사동, 약방동등이 있는데
만불동(萬佛洞)에 오면 만불동은 그야 말로 불상을 여기다 모였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 1만 5천여 점의 석불이 새겨져 있다 하여 만불동 이라 부르며,
석굴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제자상, 보살, 천왕, 사자, 그리고 금강 역사상이 조각 되어 있다.
아미타불 뒤쪽 벽화에는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과 춤을 추는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고, 그 많은 수의 석불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하나같이 다르게 새겨진 데에 감탄이 나올 뿐 이라고 하며, 이는 680년 11월 30일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연화동(蓮華洞)은 이굴은 석굴이 3m되는 연꽃이 굴 위에 조각 되어서 연화동이라고 지어 졌다고 하는데 석불의 얼굴이 많이 훼손 되었으나 주불이 석가모니불 보다는 광배와 천정의 연꽃 모양이 아름다운 석굴이다.
안에는 석가모니의 두 제자가 있고 두 제자의 머리상은 도둑맞아 현재 프랑스 길미박물관에 있다.
남쪽 벽 좌측 위 부분에 오관이 선명한 작은 불이 있는데 그 크기는 약 2㎝로서 용문석굴 중에서 가장 작은 불상 이고, 연꽃 옆에 비천이 그려져 있다고 하며 이곳에서 발견 되는 여느 연화 모양과 달리 섬세함이 돋보인다고 한다.
이어서 봉선사(奉先寺)는 용문석굴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용문석굴 봉선사의 비로자나불 은 당나라 초기 최대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용문산 중턱에 있는데 동서 길이가 40m, 남북 길이가 36m 되는 당 나라 때 유물로서 중심에 있는 비로자나불은 높이가 17,14m, 머리 높이만 4m이고, 귀 길이가 1,9m로 용문석굴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672년에 측전무후가 황후로 된 후 자신의 모습을 본 따서 지어 달라고 당 고종한테 졸라서 건설 하는데 측전무후는 당시 건설 속도를 빨리 하기 위하여 자신의 화장품 돈 2만관을 내 놓아 3년이란 짧은
시간에 완공 하였다.
비로자나불의 얼굴은 여성스럽고 보는 위치에 따라 그 아름다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석불 이라고 한다.
양 옆에는 아난과 가섭 두 제자 인데 가섭은 엄숙 하고 풍상고초를 많이 겪었고 불교가 제일 처음 사원을 모집 할 때 모집된 사람이며,
오른쪽 아난은 총명하고 온순하며 기억력이 아주 좋은데 불교에서 제일 처음으로 “삼장”을 외운 사람이다.
제자 옆은 보살인데 높이가 13,25m로 머리에 관을 쓰고 아름다운 복장을 입고 서 있는데 조용하고 온화 하다.
그러나 여자의 질투는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자신의 미모는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도록 부처님들의 눈을 좀 멍하게 조각 하여 눈은 있지만 초점이 없는 맹한 모습으로 조각 하도록 하였다.
보살 옆에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사천왕상과 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으나 하지만 왼편 것들은 훼손 상태가 심하며 오른편의 사천왕상과 금강역사상은 그 모습이 잘 보존 되어 있으나 그래도 사천왕상 과 금강역사상이지만 몸이 많이 훼손 되어 알아보기 힘들지만 갑옷에 새겨진 문양이 웅장 했을 그 모습을 연상케 해 준다고 한다.
대부분의 용문석굴 석불 얼굴이 많이 훼손 되었지만 봉선사의 비로자나불은 손과 다리 부분을 제외한 상체는 온전하게 보존 되어 있다.
비로자나불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문수보살상은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비로자나불과 달리 머리와 몸에 치장을 많이 하고 있는 석불등과 함께 봉선사는 당 나라 조각의 최고봉을 이룬 수작으로서 그 조상 기술이 뛰어남과 높은 품격은 특기 할 만 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팔작사동(八作司洞)은 좌대에 앉은 석불 자체가 훼손이 심하여져 있고 석굴 제1628굴로 보존 되어 있다.
약방동(藥方洞)은 당대의 한약 제조법이 예술성 높은 서체로 새겨져 있으나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가이드가 가르쳐 주지 않고 약방동 위치도 모르고 그냥 내려 왔다.
그 외 수많은 동굴및 불상, 비석을 제한된 시간으로 볼 수 없는 아쉬움을 않고 와야 하는 데 앞으로 이곳에 관광 가는 일이 있으면 향산에 있는 백가이 묘도 가볼 만 하다고 하며 또한 이곳에도 여기와 같이 석굴 석불이 있다고 하니 꼭 가보시길 권장 합니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하강 건너편에는 당 나라 시인 백거이의 묘를 관리 하는 향산사가 보였다,
향산사(백가이 묘) 밑에는 이곳과 같이 석굴, 석불이 있는데 그곳은 가보지 못하고 멀리서 만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이하 강물이 잔잔하여 강물위에 유람선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는데 유람선을 타고서 용문석굴을 처다 보면 어떠한 풍광이 벌어질까 상상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은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인데, 조각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단 하나의 석굴 이지만 그 조각 섬세함과 아름다움이 표현되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자랑인 방면,
중국의 용문석굴은 규모나 모양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다양한 모양의 석불 들이 도독과 중국 문화혁명 당시 많이 훼손 되어 파괴된 아쉬움이 볼품없이 되어 있으나,
남아 있는 조각상 들이 2500년 전에 이런 거대한 조각 석굴을 조성 하였다는 것은 아연 실색케 하였다.
동굴 조각 길이가 무려 1000m 이라니! 새삼 감동과 조각 동굴에 매료 되어 진다.
17 : 43분경에 관광을 마치고 저녁 식사 을 위하여 식당으로 향하였다.
가이드 이형철이 오늘 저녁은 측전무후가 즐겨 먹던 당 나라 탕 종류의 궁중 음식 이라며 천천히 많이 먹으라고 하여 나는 큰 기대를 가지고 어떻게 몇 가지 음식이 나오나 상상만 하고서 식당으로!
18 : 29분경에 낙양시내의 용봉류 도착 식사 하는데 밥, 빵을 제외한 18가지의 이름 모를 탕 종류가 나오는데 먼저 나온 음식을 많이 먹다 보니 나중에 나온 음식 5가지는 먹지도 못 하고 그냥 내 보내는데 나는 이것 이외 후식으로 수박이 나왔는데도 못 먹고 나왔다.
기대 이상의 탕 종류와 중국 음식의 먹는 요령을 몰라서 미련하게 나머지 음식에 대한 미각도 느끼지 못 하는 식도락가!
참으로 이렇게 많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기껏해야 10여 종류이겠지 하고 상상 하였든 내 생각, 몰라도 한참 모르는 중국 음식에 대한 상식, 고작 하여 한국에서 짜장 아니면 탕수육 밖에 몰랐던 무지!
가이드가 미리 주방에다 한국 사람이니 탕에 향을 조금 넣으라고 하였는데도 향이 있어 일행 중에 입에 잘 안 맞는 탕이 있어 거의 먹지 못하는 일행이 안 먹어도 다른 사람은 먹든 말든 그런대로 배가 고파서 인지 2가지를 제외 하고 나는 맛있게 잘 먹었다.
우리일행 중에 특히 조관형씨는 중국 음식에 맞지 않아서 관광 끝나는 날까지 현지 식으로 식사 때만 되면 제일 곤욕스러워 하여 옆에서 보는 우리들이 미안할 정도 이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 오늘 일정의 마지막 스케줄인 발 마사지를 1시간 동안 받고 나서,
오늘의 숙소인 야향금륭대반점에 21 : 20분경에 도착하여 1315호 룸 배정 받고 최정웅씨와 같이 올라와 간단한 샤워 후 나는 오늘의 관광 기행을 24 : 30분 까지 기록 하고 나서 내일의 준비를 위하여 편안한 꿈나라 여행을 떠 났다!
2008년 9월 18일 (3일째)
오늘은 일정이 바뿐 관계로 06 : 30분에 호텔식 뷔페로 아침 식사하고 나니 비가 오기 시작 하였다.
아침 식사 때 까지만 하여도 잔 득 흐린 날씨 얻는데 나는 미리 가지고 온 우산을 준비하여 07 : 38분경에 운대산을 향하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출발 하였다.
어제 저녁에 전일규씨가 각 방에 다니면서 가이드 이형철의 수고가 많으니 수고비를 각출 하여서 주면 어떠냐 하여 모두가 찬성으로 1인당 한화 10000원씩 을 거출하여 모은 돈을 전일규씨 부인이 버스가 출발함과 동시에 가이드 이형철에게 우리들의 작은 성의를 모아서 그간의 고생하는 수고비라 하니까,
가이드 이형철이 너무 감사 하다고 하면서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이드 이형철이 아침 인사로 편안히 잘 주무셨냐며 지금 운대산 지역은 비가 오지 않으니 걱정 하지 말라며, 지금부터 하남성 서북쪽에 있는 운대산으로!
운대산의 담폭협에 가면 불로천이 있는데 위 진식이의 왕렬이 불로 천을 먹고 338세 까지 장수 하였다는 전설가진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이 있으며,
운대산은 기이한산, 절묘한물, 아늑한 수풀, 유구한 역사로 유명하며 크고 작은 산봉이 36이 있으며 노담구, 소채구, 온반욕, 자방호, 만선사, 백가암, 선원, 성항, 첩재동, 청룡협등 10대 경관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본 것은 가장 중요한 노담구, 소채구, 온반욕, 자방호 만 보았다.
운대산은 유교, 불교, 도교 병존하는 종교 명산이기도 하다
운대산의 주봉은 수유(茱萸=산수유나무)봉은 해발 1306m로 산봉우리에 산수유나무가 많아 수유봉 이라고 이름을 가진다.
수유봉에는 차도가 개설 되어 있어서 셔틀버스가 다닌다고 하는데 전일규씨와 김한응씨는 수유봉 정상에서 까지 같다 정경을 보고 왔으면 좋을 것을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였다.
운대산에는 풍부한 인물 경관이 있다.
한 나라의 헌재 유협이 이곳에서 피서 했으며,
진 나라 때 도가사상과 신성사상이 결합된 죽림 7현이 이곳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당 나라 때 약왕 손사막이 약왕동 에서 단약을 만들었다,
당 나라, 송 나라 때의 석각이 여러곳 있고,
당 나라 시인 왕유가 “홀로 타향에 있으니 명절 되면 고향을 더욱 그리네” 라는 절구를 이곳에 남겼다.
삼국지의 조조가 이 산을 오르며 그 아름다움을 옮긴 5언 절구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운대산은 일소, 일노, 일보라고 하는데 일소는 작은 것 하나의 의미로 소채구 골짜기에는 모양도 상이한 시내 물 들이 소리치며 흘러 담폭협을 이루고 있다.
일노는 나이든 하나라는 의미의 일노 를 말한다, 이곳에는 산이 웅장하고 물이 아름답고 산봉이 아아하고 폭포가 급하게 쏟아지는 중국 최대 314m의 대폭포가 있는 노담구을 말하고,
일보는 하나의 보물이라는 의미의 일보 즉 홍석협을 말한다, 깊이가 80m이고 최대 넓이가 3m도 안 되는 협곡 좁고 긴 골짜기의 공기가 외계의 공기와 흐름을 형성 하지 못해 그 만의 대기흐름을 유지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기 때문에 일명 온반욕(溫盤山谷) 으로 불리는 홍석협에 들어서면 기이한 지형, 웅위로운 산봉, 푸른 산물, 맑은 담소가 한 눈에 안겨 온다.
중국에서는 황산, 장가계, 구체구의 동생이 운대산 이라고 한다. 즉 운대산의 풍치는 황산, 장가계, 구체구를 합쳐 놓은 풍치와 같다 하는 뜻이란다.
운대산은 초작시 수문현에 위치하고 상서성과의 경계지역 이다, 라고 설명 하면서 오늘 저녁에 소림사 음악대전 관람의사가 있냐고 우리 일행한테 물으니, 그럼 소요 경비는 얼마냐고 질문 하니까, 1인당 입장료가 U.S 50$(한화 약 55,000원) 이라 말하니, 일행들이 입장료가 많다고 하여 거부 하니,
인터넷에서는 꼭 한번 가보라 하는 권 하는 글이 있어 문화생활에는 무뢰한이나 이런 기회에 문화생활도 즐겼으면 하는 생각으로 가 보았으면 하였는데 일행 모두가 반대 하니 서운한 마음 접어 두고 포기하기로 하였다.
이어서 가이드왈 낙양시는 매년 4월 20일 목단 꽃 피기 시작 하는 시기부터 5월 10일 까지 목단 축제를 한다고 설명 하고 08 : 25분경에 9,800m의 황하대교를 중간쯤 가니 비가 그치고 잔뜩 흐린 날씨 이었다.
여기서부터 30여분 더 가니 고속도로 휴게소가 나와서 잠시 10분간의 휴식을 취하는 사이 유성항공 이미자 사장이 휴게소 매점에서 쌀과자, 사탕, 빵등을 사서 나누어 주어서 먹었다.
10 : 08분경 초작시 수문현에 도착 하니 도로변에 옥수수 건조 하는 모습이 농촌 풍경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많은 옥수수 대의 처리 방법에 대하여 물으니 옥수수 수확 하고 난 옥수수 대는 동물사료용 또는 버섯 재배용으로 사용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동안 10 : 32분경 운대산 주차장에 도착 하여 멀리서 본 운대산의 모습은 그냥 돌산 같았다.
높이 1306m 옆으로 길게 퍼져 있어 선가 아님 중국의 땅이 넓어서 인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은데.......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산에 와서 뭘 그다지 볼게 있다고 산도 밋밋하구먼!
넓은 광장 에 길이가 30m 정도 되는 큰 건물 지붕위에 운대산 이라고 쓴 빨강 글씨만 왜 저렇게 큰 거야?
시큰둥하게 산을 올려다보니 뭐 별 특이 한 것도 없는데 케이블카도 없이 올라가려니 거부 반응이 그런데 매표소에 가서 보니 다행히 셔틀 버스가 있어 타고 올라간다니 다행이다.
매표소에서 입장권 구입 하는데 여기서도 외국인이라 하여 소림사와 같이 좀 까다로워서 입장권 구입에 시간이 좀 지체 되었다.
가이드가 입장권을 구입 하여 운대산 경관구를 운행하는 셔틀 버스에 10 ; 58분경에 탑승에 앞서 운대산의 하이라이트는 제일 나중에 보고 우선은 담폭협과 천폭협을 보자고 하여 가는데 잘 만들어진 1차선 도로로 구불구불 그렇게 얼마큼 올라간다.
그런데 부락 앞에 정류장이 몇 군데 있는데 정류장 마다 내리는 사람들 그리고 타는 사람 또한 정류장 마다 식당과 숙소 들이 있는 데를 지나 인공호수인 자방호를 돌아서 11 : 26분경에 담폭협 및 천폭협 입구에 도착 하였다.
운대산 속의 모습이 온갖 보물 창고로 2004년 중국에서 정한 10대 명산 중 운대산이 3위 이었다는 사실, 그때 장가계는 8위 이었다는데........
여기서 가이드 이형철씨가 말하기를 점심때가 되었으니 점심 먹고 관광하겠느냐! 아니면 한 코스를 관광하고 나서 점심 먹겠느냐고 물으니 모두가 한 코스 관광하고서 점심 먹자고 하여
담폭협 계곡 쪽으로 2m도 안 되는 잘 만 들어진 돌계단을 따라 가는데 이렇게 시작한 담폭협은 三步一泉(삼보일천), 五步一瀑(오보일폭), 十步一潭(십보일담) 과연 물을 담고 있는 소가 많아 담폭협 이라고 이름 하였는지?
세 걸음마다 샘이 있고, 다섯 걸음마다 폭포가 있고, 열 걸음마다 못이 있다니 말 그대로다.
우리는 1270m의 협곡 사이의 용사담, 수도석, 정인폭(애인폭포) 두 갈래로 흘러와서 아래 소에서 합쳐졌다고 애인폭포라고 하며, Y폭포는 글자 모양 그대로 생겨서 Y폭포라, 청련지, 와호석등 아니 어쩌면 가는 곳곳 마다 크고 작은 폭포가 여기저기에 제 각각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걸까?
크면 큰 것대로 웅장하고 힘차게 깊으면 깊은 대로 쪽빛의 투명함을 고스란히 간직 한 채 이런 곳에 물이 맑아 이런 이름 들은 정말 딱 맞는 것 같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이 소 들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투명 하다.
그런가 하면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불로천은 태항산의 빗물과 눈이 뒤섞여 50여리를 흘러 내려 둘도 없는 우수한 품질의 광천수라고 부른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수무현지”에 의하면 위진시기일이 왕렬 이라는 사람이 바로 이물을 마시고 338살 까지 살았고,
그 당시 걸음걸이가 마치 나는 것과도 같았다고 전해 온다고 하여서 김한응시와 이병근씨가 오래 장수하려고 그 물을 김한응씨는 받아 마시고, 이병근씨는 장수하는데 욕심이 만아서 그런지 물을 받아 마시고 나서 천년을 더 살려고 페트병에 물을 담아 와 나도 장수하려고 한 모금 얻어 마셨다.
정말로 장수 하면 얼마나 좋을까?
세현지,를 지나 예날 당왕이 자기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시범으로 쪼개 보았다는 바위, 어휴! 얼마나 큰 칼이었기에 저런 큰 바위를 잘랐을까? 지어낸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칼로 쪼개듯 나누어 진 부분이 정말 인 듯 밑 어지는 당왕시검석, 마지막으로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처럼 대칭이 잘 되는 나비석 사실은 표지판을 보고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는 보이지 않아 뒤에서 온 가이드 에게 물어 겨우 찾으니 중국 아가씨들이 사진 촬영 하느라고 옆에 서 있는 것도 모르고 한참을 찾다니.
그런데 사진은 그럴싸하게 나온 나비석과 용봉황이 나타났다는 용봉벽에 12 :10분경에 도착 하여 여기를 기점으로 숲에 둘러싸인 돌계단 따라 되돌아가는데 가는 길에는 볼거리가 없고 물소리만 들으며 그냥 앞만 보고 가면 되는 코스 이다.
담폭협을 관광 하는데 비가 오락가락 하였으나 지장은 없었다.
12 : 40분경에 천폭협과 담폭협 분기점에 도착하여 중식 하려고 10여 분간 상가에서 식당을 찾으니 마땅한 식당이 없어 일반 매점에서
중국산 컵 라면 으로 매점 앞 도로에 앉아서 먹는 것으로 점심을 대체 하고 비가 와서 우산이 준비 안 된 일행은 여기서 우산을 샀으나 관광을 끝나는 시간 까지 비가 오락가락 하였으나 관광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와 같이 점심을 마치고 13 : 30분경에 천폭협 입구에서 경내 운행 하는 전동차로 1인당 5위안씩 지불하고 승차하여 가는데 다 왔으니 내리라고 하는데 너무나 허전 하였다.
그래도 10여분 이상은 타고 가는 줄 알고서 탔는데 고작 2 ~ 3분이라니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 중국인들 돈 버는 수단이 너무나 영리 하다.
여기 내려서 가며 관광 하는데 유담호 입구 까지는 돌계단이고 여기부터는 나무판의 다리를 가로질러서 20여m의 급경사 나무 계단을 오르는데 유성항공 이미자 사장은 그 육중한 체격이 힘들었는지 “아이고 나 죽겠다” 하면서 힘들게 올라 와서 돌계단을 따라 조금 더 가니 14 : 15분경에 마지막 지점인 낙차가 314m인 운대산에서 제일 큰 대 폭포 에 도착 하여 보니 물은 흐르지 않고 있으며 물이 흘렸던 자욱이 확연이 나타나 있었다.
가이드 이형철씨의 설명에 의하면 금년은 가뭄이 심하여 자기가 3월부터 왔는데 현제 까지 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을 거처 좌측 산 중턱에 있는 다공천에 가서 사진 촬영 하고 있는데 뒤에서 전일규씨, 김한응씨, 이상열씨가 오면서 겁도 없이 혼자서 여기 까지 오느냐며?
또한 위로 계속 올라가면 사이천, 요틴, 음용탄등 경치를 볼 수 있는데 시간의 제한으로 가보지 못하고 다공천 에서 같이 내려 왔다.
천폭협은 담폭협 만큼 아기자기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크고 작은 폭포가 1000여개 있어서 천폭협 라고 하는데 말로만 천폭포지 실제로는 몇 개 안되는 것 같고 담폭협 만 큼 볼거리가 아기자기한 면이 없다.
여기서 운대산이 장가계와 비교 하여도 손색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대폭포의 물이 흘러내릴 때 그 높이가 높이인 만큼 낙하 하는 속도 때문에 물방울이 은하수를 방불케 하며 폭포는 하늘에 접은 옥으로 만든 옥기둥을 닳았다고 장관이며 그 물줄기의 풍광을 말한다.
15 :03분경에 천폭협 입구에 와서 5분여 걸어서 셔틀버스를 타고 거의 산 아래 다 왔다 싶어서 내린 버스 정류장이 홍석협 입구 15 : 27분경에 도착 하여 협곡과 협곡 사이를 연결한 다리를 건너면서 아래를 보니 야 아 ~ ~ ~ ~ ~
깍 아 자른 듯 한 절벽이 발아래로 곤두박질치듯 아주 좁은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 보는 협곡이 빛깔도 어두컴컴하게 170m나 아래로 내려가 있다는데,
저 아득한 밑에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가 쏴아 ~, 괴성을 뿜어대고 사이로 꼬불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어 ~ 어!
엄청난 물소리 까지 합쳐져 다리위에 서있는 나 까지 흔들리는 듯 금방이라도 밑으로 떨어질듯 현기증이 - - - - - -
정신 차리고!
지금부터 저 밑으로 내려간단다.
노약자와 어린이는 표지판 방향으로 우회 하여 가는 사람 아무도 없네.
저 급경사 좁은 계단을 어느 세월에 저기 까지, 뭐 타고 내려가는 것 없나 상상 하면서........
산속의 비경은 그렇게 쉽게 속을 내 보이지 않는 법,
이 계단 하나하나를 손수 발품 팔아내러 가지 않는 자에게는 산속 비경을 볼 수 없으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발 한발 조심스레 계단은 또 왜 이리 가파른지 가다보면 붉고 결이 있는 바위,
이산이 세계최초의 세계지질자연유산이며 수만 년 전부터 형성된 지질 공원으로 바로 코앞에 펼쳐진 거대한 바위 빛깔이 형용 할 수 없는 분홍빛이다.
물 흐르는 곳은 좀 더 진하게 말라 있는 곳은 좀 더 연하게 간간히 검은색도 섞여 있는데 그렇게 분홍빛 바위를 타고 내려간 물은 바닥에 모여 흐르며 비취색, 옥색등 온갖 녹색 종류를 모두 섞어서 놓은 빛으로 영롱하게 반짝인다.
그리고 그 투명한 물속에 다시 보이는 바위의 분홍색 모습! 어느 누구도 그 모습 흉내도 내지 못하며, 혼자만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저 미인들,
얼른 물속에 뛰어 들어 꼭 껴안고 싶은 욕망과 충동 간신히 억제 하고!
아 ~, 나도 모르게 터지는 탄성 소리!
이 아름다운 미인들의 물길 따라 고불고불, 울퉁불퉁 걸어가다 보면 협곡 사이로 빠져 나가는 거대한 물줄기 가다서서 바라보고 잊을 수 없는 아쉬움에 돌아서며 한 번 더 뒤 돌아보지만 앞으로 나아 갈수록 펼쳐지는 장관 뒤 돌아볼 틈 없이 본 것 금방 있고 앞에 여인 볼 욕심으로 어느새 걸음은 더 빨라지고 사진 찍고 또 찍고 아 ~ ,
아름다운 홍석협이 이렇게 내 마음을 깨끗하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너무 좋아서 너무 황홀해서 나를 정답게 꼭 껴안은 엄마 품에 안기듯이 홍석협의 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마냥 뛰다 흥분에 싸인 이곳 홍석협 품에 안기고 싶다.
그리고 영원히 오래도록꿈속에서 라도 헤매고 싶다.
이렇게 꼭 숨어 있는 秀(수), 幽(유), 雄(웅), 險(험)이 한 몸으로 결집 되어 있는 운대산의 홍석협을 몰라보고 있었구나.
협곡 깊이가 80m, 길이 2㎞, 폭이 3m도 안 되는 온통 붉은 암석 기이한 모습, 바위 틈사이로 흐르는 폭포, 산허리 절벽에 굴을 파듯 작은 길을 따라 걸으면 머리를 숙인 체 벽에 바짝 붙어서 한사람씩 살살 가는 곳도 지나고 암석 사이로 스며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를 바로 가까이에서 감지하며 마음속 깊이 서늘함을 느끼며 가는 예로부터 盆景峽谷(분경협곡)이라고 찬미를 받았던 계곡 관광, 또한 황용폭포 및 마지막에 수렴폭포를 보고,
운대산이 장가계보다 경관이 우위라고 하는데 전문가도 아닌 상식이 전혀 없는 무뢰한이 3곳 다 본 경험으로는 산봉을 보려면 황산 과 장가계, 그리고 협곡을 보려면 운대산 으로 아마 운대산을 높이 평하는 것은 지질형태의 협곡에서 붓으로도 그려 낼 수 없는 아름다움 이라고 할까?
글 새 나는 어디가 좋고, 어디가 나쁘고 를 평하기가 좀 어려운 것 같은데 평 하라면 황산을 전체 보지 못 하였어도 그래도 황산이 좋은 것 같다.
다시 자방호로 올라가야 만이 오늘의 홍석협은 관광 하는데 자방호 제방에 올라가니 제방에 노점상이 있고 제방위 정류장에서 16 : 21분경에 셔틀 버스타고 내려와서 16 : 51분경에 관광버스를 타고 정주로 향하는 도중에 18 : 43분경에 북한 물품 판매점에서 북한 여자로부터 북한 물품에 대한 설명과 판매 가격을 말 하였는데 아무도 사는 사람 없어 20여분 만에 나와서 19 : 34분경에 대장금 식당에서 주 메뉴 돼지 삼겹살, 백반으로 저녁 식사 하고 나서,
이곳 식당 주인이 태산 산행 가이드 한다고 하는 인터넷 상의 연락이 있어 주인 사장에 물어 보니 자기가 아니고 아들이 하는데 지금 지방에 내려가서 없다고 하여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오늘의 숙소인 전날에 숙박 했던 음성흠지반점에 20 : 48분경에 도착 룸 710호에 배정 받아 최정웅씨와 같이 올라가서 샤워 후 오늘의 일과를 정리한 후 24 :00시 넘어 꿈나라로 향하였다.
2008년 9월 19일(4일째)
어재 이병근씨 에게 농담으로 그 젓께는 아침에 와서 깨워 주더니 어제는 마음이 변하여 깨워주지 않느냐고 농담 하였더니 오늘은 일부러 장난 하느라고 새벽 05 : 20분에 깨워서 일어나 같이 여담 하다가 간단히 샤워 하고 07 :00시에 호텔 뷔페식으로 식사 하고 08 : 13분에 개봉으로 출발 하였다.
가이드 이형철왈!
편안히 잘 주무셨습니까? 지금부터는 개봉으로 가서 관림을 관광 하고 점심 식사는 개봉의 포자로 하겠습니다.
중국에는 3대 포자가 있는데
북경의 거불이 포자,
상해의 상해 포자,
개봉의 포자연 등이 있다.
개봉의 특산품으로는 땅콩과 마늘이며 특히 마늘은 중국의 원산지 이며, 개봉으로 가기에 앞서 라택스 판매장에서 상품 관광 하고 난후에 개봉으로 가겠으니 양해 주시기를 부탁 하여서 09 : 24분경에 라택스 판매장에 도착 하니 안내원이 우리 일행을 상황실로 안내해서 라택스 제품에 대하여 10분간 설명을 들은 후 판매장으로 이동하여 여기서도 10여 분간 라택스 제품을 구경만 하고 있으니까,
오늘 첫 손님이고 하니 한 품목이라도 구입 하여 달라고 하여서 일행 모두가 지난번 여행에서 라택스 제품을 구입 하였다고 하면서 모두 판매장에서 나와 개봉으로 향하는데,
일행들이 가이드 보고 물건을 구입 하지 못하여 미안 하다고 하니까! 가이드왈 나는 괜찮고 판매장에 들려주신 것만 으로도 감사 합니다, 라고 하면서,
개봉의 현재 인구는 60만 명 정도 되는데 북송 시대에는 100만 명을 넘는 대 도시 이었고 강남의 여러 도시와 수로로 연결 되어 있어 천하의 요화라 부른다.
개봉은 정주에서 동쪽으로 70㎞ 떨어진 곳에 있다.
개봉은 3000년 전 서주(西周)시대에 도읍이 된 후, 전국춘추 시대의 위, 5대10국의 양, 진, 한, 주 및 북송, 금까지 7개 왕조의 도읍 이였던 역사적인 도시다.
위의 혜왕이 안읍 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대량 이라 칭 하면서 위가 부강해짐에 따라 이곳도 번영 하였다.
BC3세기말에 위가 망하자 개봉도 폐허 가 되어 한(漢) 이후에는 지방 도시로서 존속 하였다.
수, 당시대에 이르러 강남 개발이 진척 되어 변하에 의해 대운하와 연락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 하자 물자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5대10국의 후량은 개봉에 도읍을 정하고 동도개봉부라 하였으며 후진, 후한, 후주도 도읍으로 삼고 동경이라 하였다.
그 후 송이 도읍으로 정함으로서 일찍이 없었던 큰 발전을 이룩하여 삼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가지가 되었다.
명, 청대 에는 하남성의 성도 이었고, 1948년에는 시로 승격 되었다.
개봉은 북송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 될 때의 전쟁에서 금나라 장수가 황하의 둑을 터뜨려 개봉은 완전히 수몰 되었고 도시 전체가 토사에 묻혀 버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개봉은 수회의 황하 범람으로 시가지와 문화재 들이 자주 매몰 되었으며 지금의 개봉은 이 매몰된 흙더미 위에 다시 건설된 새로운 도시 이기 때문에 현재의 개봉 땅 아래에는 수많은 고대도시 들과 유적들이 잠들어 있으며 지금도 문화재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고 새로운 건축물의 건설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인 들은 서안, 낙양, 개봉을 일컬어 중국 의 3대 고도라 부른다.
예로부터 대운하를 따라 항주까지 연결 되어 중국 남부에서 거두어들인 막대한 세금과 화물이 이곳을 지나쳐 갔다.
개봉이 가장 번창 했던 시기는 북송(北宋 960 ~ 1279년)때로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던 TV프로그램 판관 포청천의 무대가 이곳이다.
볼 곳으로는 1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대상국사, 송대의 건축을 복원해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송도어가, 송대 황거의 어원 일부였던 용정공원, 북송시대에 창건된 높이가 55,08m이며 8각 모양의 13층인 철탑, 개봉에 현존 하는 최고의 건축물인 번탑, 용정풍경구, 천파장부, 한원비림, 산협감회관, 우와대, 서문성루, 개봉박물관, 연상현 등이 있다, 고 하는데 우리는 일정에 없어 지나치거나 가보지 못 하는 아쉬움을 품고 글로서만 나타내는데 개봉에 갈 기회가 있는 분은 한번 꼭 가보시기를 바랍니다.
철탑에 대하여 다시 기술하면 개봉시 동북쪽에 위치하고 당초에는 철로 만든 것이 아니고 기와로 만들어 졌다.
벽돌이 철색을 띠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철로 만든 것 같이 보여서 원 나라 때부터 철탑 이라고 불리었다.
철탑 전신은 한 채의 목탑으로 982년 북송 건축가 유호가 석가모니의 사리를 놓기 위하여 8각 13층으로 된 높이가 120m인 탑을 8년이란 시간을 거쳐 지었는데 이름을 북송탑 이라고 하였다.
이탑은 당시 중국 9주중에서 제일 높은 탑이라 하여 천하지관 이란 미명도 있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탑에 아쉽게 1044년 번개로 인하여 3박4일 동안 불에 타서 잿더미로 되었다.
5년 후 송 인종은 그 자리에 다시 탑을 지으라고 명을 내려 1049년에 높이가 55,08m이고 8각 13층으로 된 탑을 지었는데 그 탑이 지금에 까지 남게 되었다.
황하의 범람으로 인하여 도시가 몇 번이나 물속에 잠겼는데 당시 산위에 탑을 지었기에 현재 까지 남아있어 현존 개봉 시에서 유일 하게 남아 내려온 송나라 때 유물이다.
철탑은 원래 서북쪽으로 기울어진 탑 이였다.
사람들이 유호에게 어떻게 설계 하였냐고 물었더니 유호는 개봉은 서북풍이 많이 불고, 황하가 얼지 않는 곳에 있으니 10년이 지나면 탑이 곧게 되고 700년 동안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지을 때도 이 원리를 이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탑이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게 하기 위하여 층마다 창문 하나씩 열어 놓았는데 1층은 북쪽 창문, 2층은 남쪽창문, 3층은 서쪽창문, 4층은 동쪽창문 이런 순서로 하나씩 열어 놓았다.
대상국사에 대하여 는 중국 10대 불교사원의 하나이다. 상국사 라면 중국 4대 명작 중 수호전에 나오는데 특히 노지심이 버드나무를 뿌리 채로 뽑았다는 이야기에 더욱 익숙한 이야기.
상국사 는 555년 북제 시대 때 일찍 전국시기 4대 공자 중 위나라 공자인 신능 궁우기의 집 유적에 지어 이름을 건국사라고 하였다.
그 후 당 용종이 상왕에서 황제가 된 것을 기념 하여 건국사의 건을 상왕의 상자로 바꾸어 지금까지 이름이 상국사라고 불러지고 있다. 역사상 북송시기에 이르러 상국사가 가장 흥성한 시기를 맞이하였지만,
상국사는 송조 때 동경에서 가장 큰 사찰로서 송 태종 때부터 황제들이 대거 건설을 하여 황제의 허락 없이는 사용 할 수 없는 황제 집안의 전용 사원으로 되었다.
매년 중대한 명절이나 제사를 지낼 때 이곳에 와서 지냈고 새로 임명된 장원들도 이곳에 와서 이름을 찍고 사원의 주지스님 까지 황제가 직접 임명 하였다고 한다.
당시 중외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활동 중심으로 되었다. 현재 상국사는 청나라 때 건물이지만, 개봉시가 황하 범람으로 여러 차례 물에 잠겨서 원나라 때 에 다시 지은 것이다.
상국사 사원은 고대 사원의 특징을 가졌고 종루와 고루가 있으며 종루에 걸려있는 것은 청나라 건륭 년간의 유물로서 무게가 5톤이고, 높이가 2,23m, 직경이 1,8m 되는데 이는 동경팔대 치중의 하나이다.
제일 앞에 보이는 대전은 천왕전 인데 그 안에 조각상은 미륵불 이라고 한다.
포 공사는 중국의 유명한 청관이고 정치 개혁가인 포증을 기념하기 위하여 회복 재건 한 것이다.
포 공사의 동쪽에는 포공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데 다년간의 연구에 따르면 1000여 년 전 북송시대의 개봉부가 바로 이 호수의 9m 깊이가 되는 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이 호수는 도굴 방지를 위하여 만들어 졌다고 한다.
포증의 자는 희인(希仁)이고 안휘성 합비 사람으로 999년에 태어나 64세에 돌아 가셨다.
포증은 지현으로부터 시작하여 용도각 대학사로 되었고 돌아가신 후 孝肅公(효숙공) 이라는 칭호를 수여 받았다.
포공은 북송시기 가장 유명 했던 관리이고 백성들의 질고를 헤아리고 탐관을 징벌 하는 청렴한 관리로서 인민들의 마음속에서 청관의 대표로 포청천은 키가 162㎝밖에 안 되고 얼굴도 하얀 전형적인 선비 모습을 가졌다.
중국 원나라 때부터 포청천의 많은 이야기가 전해 저 내려오면서 중국 경극에 나오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경극에서 얼굴 표현이 아주 중요 한데 경극에서 흰 피부는 나약하고 간사하고 주장이 없는 소인 또는 간신의 모습을 말해 준다.
때문에 포증과 같이 청렴한 관리에게 흰 피부가 어울리지 않아 경극에서는 포증을 늠름하고 주장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검은색 얼굴로 부각하여 그는 권리 앞에서 무릎 을 꿇지 않는 간경한 모습을 더 한층 빛 내 주는 것이다.
이마에 새긴 달은 염라 황제가 환생 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린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무대의 형상적인 표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포증은 검은 피부에 늠름하고 위엄 있는 모습 이라고 기억 하게 된 것이다.
포공이 죽은 뒤 황제는 조정을 하루 쉬는 것으로서 그에 대한 애도를 표 했고 또 효숙공 이라 칭호를 수여 하였다.
이 칭호에서 효숙 은 포공의 인생사를 표현 하는데 효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숙은 엄숙 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개봉에는 포공의 웃음은 황제보다 맑다는 말이 있다.
포증의 어머니는 중년이 되어서 포공을 낳아 그를 보배처럼 키웠다. 어릴 적 포공은 총명 하여 공부를 잘했으며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나라를 위해 충성을 하려는 뜻도 세워 집에서도 하루 빨리 과거시험 치길 바랐으나 그는 “父母在 不遠遊”(부모재 불원유)라는 古訓(고훈)으로 집에 남아 공부를 하면서 부모님께 효도를 하였다.
26세에 포공은 동씨 여인과 결혼 하고 부인을 집에 남겨 두고 부모님을 모시게 하고 과거시험을 보러 도읍에 가서 28세에 진사가 되어 지현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이 연세가 많아 먼 곳에 가려 하지 않자 관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유는 “자신은 아직 젊기에 나라를 위해 충성할 기회가 많으나 부모님은 늙으셨으니 자식이 보살펴야 한 다”는 것이었다.
자고로 충성과 효도는 함께 하기 힘들다고 포공은 먼저 효도 하고 다음에 충성하려고 결심 하였다.
36세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포공은 중국 예절에 따라 3년간 집에 있다가 39세 지현으로 임명 받아 관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는 당시 엄청 어려운 일이다.
포증은 또 자손에 대해 엄격 하였으며 임종 시 가훈을 남겨 자손 들이 지키도록 하였다.
가훈은
“만약 우리 포씨 집안에 누군가 관원이 되어 관직을 남용하고 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집에 발도 들여 놓게 하지 말며 죽어도 조상과 같이 묻지 말라 하였다.”
설명을 듣는 동안 어느덧 10 : 36분경에 개봉에 도착하여 이곳 가이드 여자 정홍사와 미팅 하고 난후 개봉 입장권 구입 하는데 여기도 역시 여권!
입장권 구입 후 관광 하는데 이곳 가이드 정홍사는 입장권만 구입 하여주고는 자기 볼일만 보고서 우리 일행이 관광 끝난 후 밖에서 다시 만나 우리가 개봉 떠날 때 혜여 졌다.
참으로 관할 구역 가이드 치고는 너무 무사 안일 한 것 같다, 최소한의 성의로 개봉에 대한 안내는 해주어야 되지 않은지, 이것이 가이드의 임무가 아닌지 라고 생각 해 본다?
개봉부에 들어가면 청나라 자의 태후 친필인 의문 전각 안에는 커다란“북송개봉부인”
이란 도장이 있고 正廳(정청)앞에는 公生明(공생명)이라고 쓴 석비(이는 공정 하고, 세심하게 그리고 밝게 일을 처리 하라는 뜻으로 보인다)가 있고 정청 좌측에
좌청 과 우측에 우청이 각각 포증의 집무 광경을 묘사 하고 있으며 이를지나 의사청 전각 안에는 송나라 때 세운 돌비석 위에 開封府引題名記(개봉부인제명기)라고 써져 있는데 비석에는 역대 개봉부에서 관직을 맡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총 183명의 이름이 써져 있는데 비교적 유명한 사람으로는 구양순, 범중엄등이 있다. 포공의 이름도 여기에 써져 있지만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포공이 워낙 유명하여 관광하러 온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너도 나도 한 번씩 문지르다 보니 그 자리가 파여 이름이 지워 졌다 한다.
이로부터 포공은 대대손손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正廳(정청)인 청심형부 대전 안에는 포공의 조각상이 있는데 위에 쓰인 正大光明(정대광명)이란 네 글자는 포공의 집법 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 같다.
조각상 오른쪽을 보면 원래 포공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키도 작고 얼굴도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이다. 포공의 모자 볏을 보면 다른 사람의 볏보다 길다.
이는 포공이 鐵面尤私(철면우사)하여 다른 관원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황제가 일부러 볏을 길게 하여 누구든 포공의 볏을 다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또한 대전 안에는 포승이 집무 보던 장소(재판 하는 장소)을 재현 하였고 그 앞에는
용작두 : 황재의 친척의 목을 자르는 작두
범작두 : 탐관오리의 목을 자르는 작두
개작두 : 죄 지은 백성의 목을 자르는 작두가 전시 되어 있고
뒤 돌아서 가면 명례원 이라고 당시 시험 치르던 장소가 나오고 그 옆에 계규당이 있으며 우측으로 가면 4층 탑 전각 안으로 들어가면 큰 포청천의 입상이 있고 양 옆으로 올라가는 문과 내려오는 문이 있어서 3층에 올라가면 전망 루가 있어 개봉부 전경을 바라볼 수 있으며 전각 탑 안에는 당시의 복장 문서 등을 전시해 놓았다
이를 보고 다시 내화당 으로 가서 뒤로 가면 명강청정 이란 현판 글씨 앞 벽에는 청진근 이라는 글씨가 있다.
명강청정 전각에는 포증이 재판하는 장면을 묘사 하였는데 원고 농민이 죽은 아들 피 묻은 옷을 보이면서 피고(당시관리)가 원고(농민)의 토지를 착취하고서 아들 까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는 고변 장면 이라고 가이드 이형철이 설명.........
포청천은 북송 때의 지방 관리로 죄를 지은 자기 조카에 까지 사형시킨 역사적 인물로 실제 직함은 개봉부를 맡은 부윤으로 청천이란 청렴한 관리로 뜻하는 별호라 한다.
추가로 동전에는 진세민 처단하는 이야기로
진세민은 결혼하고 아이 까지 있는 가난한 선비 이었으나 진세미는 아내와 아이를 고향에 두고 도읍에 와서 과거 시험을 보러 왔다가 장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그 후 황제의 접견을 받았는데 공주가 자신을 좋아 하는 것을 알고 결혼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공주와 결혼 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진세민 부인 진향련은 경성의 남편 을 찾으러 왔는데 만나 주기는커녕 사람을 시켜 부인을 죽이려 했다,
이에 너무 억울한 진향련은 포청천을 찾아 가 신고하였고 포청천은 조사에 따라 재판을 시작 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황 태후는 포청천을 위협하며 재판을 중지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포청천은 자신의 관직을 걸고 진향련을 도와서 진세미를 처단 하였으며 이에 진세미의 머리를 자를 때 작두를 사용하였는데 공주와 결혼 하였기에 용 작두를 사용하였다.
개봉부 안에 英武樓(영무루) 앞 넓은 광장 에서 마침 공연 한다고 하여서 관람 하는데 인터넷에서는 포청천이 재판 하는 과정을 연극 한다고 하여서 기대 하였으나 연극은 안 하고 분장한 포청천이 간단한 인사말과 소림 무술시범, 남자들의 북춤, 부채춤, 칼춤, 무용 등의 공연을 30여분 관람으로 개봉부의 관광 마치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차창으로 송 대 건축을 복원해 놓은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송도어가를 관광 하는데 버스가 빨리 가서 차창으로 보는 전통적 거리 느낌을 받지 못하고 그냥
지나 왔다.
여기서 송도어가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송도어가는 궁성에서 외성으로 펼쳐지는 4개의 어가가 있다.
이들 어가는 술집, 말 시장, 소시장, 쌀시장, 보석시장, 등등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고 번화했던 개봉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東京夢華錄(동경몽화록)을 보면 북송이 금에 쫓겨서 남쪽으로 옮겨 간 후에 변경의 융성을 기록한 책으로 40권 도성(즉 개봉, 동경)의 방시, 절서, 풍속, 전예, 의위 등을 기록 하였다. 사고(즉 전서), 제요 사 지리류 진체비서 67책에 소재하는데 북송은 당시 동경성시 인구는 150만 명으로 추산 된다. 동경은 죽소의 육로, 하등으로 사통팔달한 중심지이다.
변하에서 공사(주변국에서 공물 바치면 북송 황제가 그에 대한 답례로 물건을 하사 하는 교환 방법) 형식으로 무역이 이루어 졌다.
어가 좌우(어랑이라 함, 좌낭, 우랑)에 점포가 즐비 하였고 조시, 야시, 성행 하였다.
상국사는 사원무역이 가장 전형적으로 발달한 곳이다.
어가상업무역을 설명 하면 주교, 용진교, 일대가 가장 번성한 상업 구역 이다.
주류, 차사, 반점과 그 외의 점포가 밀집 하여 상인이 운집 하였다. 즉 주교야시라고 표현 했고 온갖 물산이 모였으나 특히 음식 업이 가장 발달 했다.
외지 사람이 오면 반드시 야시를 구경 했고 음식도 먹어 보았다. 야시는 새벽 까지 계속 되었다.
여기를 지나서 북송시대의 풍습을 담은 민속촌인 청명상하원을 관광 하는데 이곳은 민간인이 중국 돈 1억 위안의 건립비가 소요된 민간 소유의 관광지로 여기도 역시 입장 하려면 여권을 필히 제시 하여야 되는데 우리나라(한국)의 수원의 민속촌과 같이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 해 놓은 곳이다.
설명을 추가하면 청명상하원은 북송의 저명한 화가인 장택단의 명작 “청명상하도”를 기반으로 하여 설계된 문화 테마파크이다
청명상하도는 송 대의 활기찼던 개봉의 모습을 상세 하게 묘사한풍속화로 중국의 국보 제1호 회화 작품이다.
24,8㎝ * 528,7㎝크기의 얇은 비단에 그려진 이 작품은 걸작 풍속화로서의 미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 송나라의 시가지 모습 및 사회풍속을 잘 알 수 있는 사료적 가치 또한 매우 큰 작품 이라고 한다.
청명상하도는 청명절을 앞둔 동경(현 개봉)의 들뜬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느려낸 그림으로 현재 북경 고궁 박물관에 소장 되어있다.
중국인 들은 중국의100년을 보려면 상하이, 600년을 보려면 북경, 3000년을 보려면 시안, 5000년을 보려면 하남성(정주, 개봉, 낙양)을 가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개봉도 역사적으로 볼 때 중요한 도시 이다.
이곳 청명상하원 에 들어가면 첫 번에 맞이하는 것은 장택단의 동상이며 그 뒤로 가면 장택단이 그렸다는 청명상하도를 대리석에 크게 양각되어 있는 곳을 거쳐서 당시의 거리를 재현 하였는데 상점 모두 거의가 먹을거리이고 간혹 관광 상품 파는 곳 몇 군데와 놀이터, 공연장 갖추어져 있었고 주위에는 운하를 만들어 배로 한 바퀴 돌아 볼 수 있게 하였다.
우리는 이곳의 관광을 마치고 점심에 개봉 포자를 먹기 위하여 13 : 00시경에 정원루 식당에 도착 하여 들어가 식탁에 앉아 가이드 이형철 씨가 포자라 하기에 포자가 중국만의 특별한 식단으로 어떠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기대 하였는데 기대에 부응 하지 못하고 여기도 탕 종류로 밥, 빵을 제외하고는 13가지 종류의 탕 류 이다. 역시 탕에 향이 있어 우리 들이 먹기에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식당 옆에서 중국인 간이 점심 대용인 호떡(한국의 호떡은 설탕을 넣지만 이곳의 호떡은 향이든 양념한 잡채
을 넣은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한국과 같다)을 최정웅씨가 먹어보자고 하여 우리나라 에서 만든 것 같이 설탕 넣고 만든 호떡 인줄 알고 유성항공 이미자 사장이 1개 1위안씩 하는 것을 10개 구입하여 13 : 58분경에 곡부로 향하여 출발 하였다.
가이드 이형철 왈!
지금부터 고속도로로 3시간 반 이상으로 걸리니 그동안 여행의 피로 누적을 편안한 휴식을 취하면서 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고속 도로 진입 후 30여분 지나서 아까 산 호떡을 먹어 보니 중국인 식사대용으로 만든 것이어서 향이 짙고 먹기가 좀 거북 하였지만 그런대로 먹었으나 나머지 일행은 먹지 못하고 전부 버렸다.
중국의 산아 제한은 56개 소수민족은 2인, 한족은 1인 으로 제한 하였으나 2000년부터 전 민족이 2인 으로 확대 실시 된 지금도 호적을 갖지 못한 사람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무 호적 자가 호적에 올리려면 벌금이 많아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한다. 가이드 이형철도 벌금을 내고 호적에 올렸다고 하면서!
15 : 25분경에 산동 고속 휴게소 에서 잠시 휴식을 취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달리 한적 하고 쓸쓸 하였다.
중국의 도시 중심 에서는 차량과 자전거, 전동차가 많고 또한 사람이 많아 교통 혼잡이 무질서로 이루나 고속도로에 접어들면 차량이 많지 않아 드믄 드믄 있어 고속도로가 더욱 한적 하였다.
나는 이번이 중국 관광 네 번째 이지만 매번 올적 마다 중국의 발전 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번에 정주, 낙양, 개봉에 오니 도시 전체가 깨끗하고 개발 되었거나, 지금도 외곽 지역은 한 참 개발이 진행 중이고, 도시의 중심 도로는 금년도 올림픽 개최국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 인지 지방도, 국도, 고속도로 등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인구 밀집 지역인 중심가에는 도로가 잘 정비 되었으나 출, 퇴근 시간 때 보면 교통경찰이 있는데도 교통질서는 무질서 하였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무질서 상황이면 교통사고가 수십 건 되었으리라 생각 되는데 이곳의 무질서한 교통상황에서도 교통사고가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에서는 사람이 차를 피해 다니는데, 중국은 차가 사람을 피해 가는 것 같다. 이러한 무질서가 중국인 나름대로의 질서 인가 보다.
우리는 이곳 휴게소에서 출발 하여 가는데 가이드 이형철씨가 우리를 위하여 사 가지고 온 월병을 나누어 주어서 중국 명절의 대표 음식인 월병 맛을 보았다. 빵이라 그런지 먹을 만하고 맛이 있었다.
곡부는 유교 창시자 이며 동양의 성인으로 추대를 받는 공자의 고향이다.
곡부는 기원전 6 ~ 4세기에 번창 했던 노나라의 수도 이었으나 지금은 한적한 시골 도시다.
이곳은 공묘를 중심으로 시내가 형성 되었으며 주변에는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던 집과 상점이 많다.
작은 도시지만 참배객과 여행자들로 붐빈다.
공자는 기원전 552년 ~ 기원전 479년 유교의 시조로 숭앙 받는 중국의 사상가 이다.
공자는 노나라 곡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송나라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였고 아버지는 시골의 무사 이었다.
공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으며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마을의 스승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17세에 말단 관리가 된 후 시경과 서경을 비롯하여 예법, 음악 등을 배우게 되면서 공자는 시경과 서경의 저자인 周公(주공)을 평생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이 무렵 어머니를 여윈 공자는 19살에 결혼, 그가 30세가 되자 직위가 오르고 학문도 많은 진전을 보이며 나라는 법보다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여기고 무슨 일이나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였다.
즉 주공의 시대처럼 예의 바르고 평화로운 세상이 공자의 이상 이었다.
그런데 43세 때 내란으로 노나라 왕 소공이 신하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갈 때 공자도 그를 따라가 제나라의 왕과 신하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진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몇 년 후 제나라 왕 장공이 신하에게 피살당하고 그 신하 또한 다른 신하에게 쫓겨나자 공자는 실망하여 고국인 노나라로 다시 돌아온다.
공자는 50세 무렵 중도 장관을 거쳐 최고 재판관인 대사구(조선조의 대사헌, 현재의 대법원 정도)에 오르며 외교관도 겸하게 되었는데 제나라와의 강화회의를 성공시킨다.
당시 공자는 제멋대로 권세를 휘 드리는 간신 계씨를 타도하고 국정을 쇄신하려 했으나 실패 하고 말았다.
그러자 공자는 56세에 대여섯 명의 제자와 함께 자기를 등용 해줄 왕을 찾아 노나라를 떠났다.
그 후 10년이나 방랑 생활 동안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왕들은 올바른 길보다는 효과가 빠른 부국 강변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미래에 희망을 걸기로 하고 정치가로서의 길을 끝내고 교육자의 길을 가기로 한다.
공자는 옛날부터 전해오던 고서들로 제자들을 가르쳐 수많은 제자를 길러 내는데 그 중에서 안희, 자하, 자로 등이 유명하다.
말년에 공자에게는 여러 가지 불행이 겹친다, 아들인 백어(혹은 어리)가 죽고, 그 후에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휘도 죽는다.
그는 불행한 말년을 지내다가 72세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가 떠난 후 제자 들은 스승이 남긴 어록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 하였고 공자의 가르침을 유교로서 2천년이 넘도록 중국사회의 정치, 윤리, 도덕의 규범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조선시대 이후 큰 영향을 미쳐 우리 사회의 모든 규범이 유교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시간 남짓 버스로 이동하여 18 : 00시경에 곡부에 도착 하여 이 지역(산동성 관활) 가이드 김동일을 미팅 하여 숙소로 향하였다.
여기서부터 가이드 이형철은 우리를 인계하고 난 후 가이드로서의 일을 끝내고 함께 행동은 하지만 관광 하지는 못하고 버스에 남아서 우리 짐을 지키는 일로 소일 하며 제남 공항에 갈 때 까지 같이 동행 하였지만 산동성내에서 가이드 역할은 하지 않았다.
가이드 김동일은 가이드 생활 8년 중 이곳에서 6년 하였고 가이드 생활 전 에는 청도에서 한국인 회사에 2년 근무 하였다고 한다.
현재 곡부의 인구는 65만 명중 시내 인구는 20만 명이며 산동성의 주식은 면류로 식사 한다.
곡부의 첫 인상은 “예스럽다”는 거 이었다, “고풍스럽다”기 보다 “낙후됐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우리가 지나온 3개 도시를 보면 하루가 다르게 건물이 올라가고 도시 모습이 변하는데 곡부는 상대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고 조그마한 부락 같이 보였다.
사실 곡부는 예전에는 큰 도시 이었다고 한다, 성안 이곳은 공자의 예우에 대한 성스러운 땅이라 하여 성안 모든 건축물이 공부의 대성전 높이24,8m이기 때문에 이 건물 보다 높지 않도록 건축 높이를 제한하여 발전이 되지 않고 또한 철도가 들어오지 않아 경제 발전이 소외 됐다고 한다.
곡부는 철도가 놓이게 되면 지맥이 끊긴다고 생각 했다. 태안에서 내려오는 철로는 “ㄷ”자 모양으로 곡부를 피해 갔다.
하지만 그것은 철로가 놓일 적 시절의 얘기이고 지금도 발전에서 소외 되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발전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곡부의 성은 노나라의 도성으로 산성의 역사는 청나라 때 개축한 600년 전의 성이다.
이곳 산동성의 역사는 2700년 전에 곧은 낚시로 세월을 낚은 유명한 강태공의 제나라와 공자의 노나라 등이 있었다.
우리는 오늘의 숙소인 권리빈관에 짐을 놓고 발 마사지를 밭으로 갔다.
이곳에서의 발 마사지는 먼저 번보다 훨씬 잘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1시간 동안 발 마사지를 마치고 나서 오늘의 저녁 식사 을 하기 위하여 식당으로 가서 현지 식으로 밥, 빵을 제외 한 11가지 요리가 나왔는데,
나는 중국에 와서 며칠 현지 식 하였다고 해서 그런지 몇 가지를 제외 하고는 별로 거부감 없이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간의 현지식이 나올 때 마다 가이드가 주방에 특별히 부탁하여 향신료를 적게 넣어라 하여서 그런 것 같다.
그래도 우리 일행 몇 몇은 현지 식 향의 거부감으로 미리 준비해 가지고온 반찬(깻잎, 콩자반, 김, 고추장 등)으로 식사 하였다.
1시간여의 식사 을 마치고 오늘의 숙소인 권리빈관은 곡부에서 제일 좋은 4성급 호텔 이라고 하는데 낙후하기가 그지없어 한국의 모텔보다 못 한 것 같다,
그런데도 중국의 최고 정치가(주석 등)가 곡부를 방문 하면 이 호텔에 투숙 하였다고 현관에 투숙한 년도 별로 투숙 장면 사진을 계시하여 홍보 하고 있다.
이 호텔이 2층 인데 그 이유는 곡부 성안에서 의 건축물 높이 제한 때문 이라고 한다.
우리는 20 : 10분경에 배정 받은 룸 1015호에 최정웅씨와 같이 들어와 샤워 후 나는 밤늦게 까지 오늘의 일을 정리 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 이었다.
2008년, 9,20일(5일째)
오늘은 06 : 00에 일어나 샤워 후 07 : 00시에 호텔식 뷔페로 아침 식사 하고 08 : 00경에 권리빈관 에서 200여m 거리인 공묘로 가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좁은 길거리는 이른 시간인데도 기념품 파는 가계 로 난 장이 벌어 져 있다, 기념품 이래야 한 눈에 봐도 조잡한 물건 들 같다.
이것이 다들 공자 덕 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곡부에는 공자와 관련된 유적이 모두 셋이다.
하나 : 공자의 사당이자 그들의 제자를 함께 모신 고묘,
둘 : 공자 및 그 후대가 살았던 거처인 공부,
셋 : 공자 및 그 가족 묘지인 공림 이 그것이다.
여기서도 전체 여권 을 보여야 만이 입장권을 구입 하여 들어가는 데 이 곳 에서는 외국인도 70세 이상 이면 50% 활인 혜택이 주어진다.
우리는 전일규씨 부부가 해당 되었다.
공묘에 10여m 높이의 담이 있는데 들어오는 문이 만인궁장 이라고 하는데 편액은 청 건릉제의 글씨라고 하며,
이문을 들어서면 공묘에는 바깥 대문격인 앙성문 즉 “성인 인 공자를 우러러 본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하는 이문은 1513년 건립돼 황제들이 공묘 출입에만 문이 열렸다고 한다,
여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金聲玉振(금성옥진) 이라는 석문이 있다.
공묘는 원, 명, 청대에 걸쳐 공자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몇 백 년이 넘은 시간 동안 중국인들에 칭송 받는 성현이 될 수 있었던 그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덕치 이다.
덕으로 천하를 다스린 다는 것이다, 그의 정치적 이상향은 고대국가인 서주에서 찾았다,
서주는 천자를 중심으로 종법으로 사회를 다스리며 신분의 역할과 구분이 엄격한 중앙집권적 통치 사회이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사회 바로 그가 꿈꾸던 사회이다.
공자의 이념이 중심이 되는 유교를 공부한 유생들은 열심히 유교 경전을 공부해서 과거 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훗날 유교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유교가 지향하는 사회 통치는 바로 중앙 집권적 시스템이다.
바로 이 중앙집권시스템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오랜 세월 동안 통일 체제로 유지하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仁(인)과 禮(예)를 강조 한다.
인 : 이란 인간관계의 기본 이며
예 : 사회규범이 되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계최대사당, 기네스북에 등재, 중국 4대 고 건축 2500년간 의 증축, 자금성 이외 중국내 유일한 황색 기와 사용, 이 모두 공자를 기리는 사당인 공묘를 가리키는 말들이다.
공묘는 공자가 죽고 1년 후인 BC478년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노나라 애공이 3칸의 방으로 만든 것이 2500년 세월을 지나오면서 절대 권력자인 황제들의 비호아래 증축을 거듭해 공자의 왕국을 만들었다.
가이드 김동일 설명으로 공묘의 입구로 전문 역할을 하는 제1문 금성옥진은 1538년 명 세종 때 만들어 졌다.
금성옥진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맹자의 말로서 “음악을 연주 할 때 처음과 끝을 알리는 소리”로 금은 종 즉 편 종이 내는 소리, 옥은 경 즉 옥으로 만든 편경 즉 아름다운 편경을 뜻하는 것으로 제례악에서 팔음을 합주 할 때에 종을 쳐서 시작하고 마지막에 경을 치는데서 유래 한다,
즉 지와 덕을 갖춘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상이나 언론이 세상에 널리 알려서 존경 받게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 하면서 공자의 덕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존중을 받는 다는 말 일 것이다.
돌기둥에는 외뿔박이 동물인 조천후가 새겨졌는데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사연을 매일 아침 하늘에 告(고) 한다는 상상속의 동물이다.
즉 금성옥진은 공자가 유학을 집대성 했다는 것을 상징 하는 말이다.
제2문 欞星門(영성문) 공묘의 기념비로 청나라 건륭제의 친필이 적혀 있다.
공묘의 대성전 가는 길에는 10개의 문이 나오는데 만인궁장과 앙성문, 금성옥진을 지나 공묘의 제일 도의 대문인 영성문을 지나게 된다.
영성문은 삼문 형식으로 무인 상으로 보인다, 기둥사이에 끼워 놓은 석판을 삼등분하여 중앙에 영성문 이라 양각하고 양쪽에 새를 조각 하였다.
영성문이란 고대 중국 천문학에서 한문의 수호성 으로 붙여진 별을 뜻 하며 즉 인간의 문자 관리 신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공자가 바로 학문의 신이란 뜻이다. 하늘의 별이 내려와 공자가 되었다는 뜻,
명나라 영락제가 목재로 세운 것을 청의 건륭제가 증수 하면서 석조 기둥으로 바꾸고 편액도 건륭제가 썼다고 한다.
이문의 四柱三門(사주삼문)의 아름다운으로 하나의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주변의 비석에 官員人等至此下馬(관원인등지차하마)라 적혀 있는데 이는 “관리 는 말에서 내려 이곳 에서 기다리시오”라는 말이다.
높은 관리라 하더라도 공자에 대한 예우를 보여야 했던 것 같다.
제3문 太和元氣(태화원기)는 공자의 사상이 태평한 세상, 조화로운 사회와 만물의 번영을 이룬다는 의미 이다.
이곳 종묘에는 48동의 건물이 있고 1700년부터 향나무와 측백나무만 심어져 있다.
제4문 至聖廟(지성묘)는 처음에는 신성묘라 불렸으나 청나라 옹정제 때 지성묘 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황제가 공자를 기려 성인을 의미 하는 文宣(문선)의 칭호를 내렸다.
제5문 聖時門(성시문)은 현재 입장권을 확인 하는 출입문으로 사용 된다.
1415년 명나라의 영락제 때 세웠으며 1729년 청나라의 옹정제 때 보수 되면서 성시문으로 이름을 지어 현재 까지 이어 졌다.
성시는 맹자의 아성이며 공자의 유교 사에서 타 온 것이다.
성시문을 지나 중정으로 나가면 아취형의 백수교가 나온다. 푸른 물이 흘러 붙은 이름이라 하는데 더러운 물만이 고여 있다.
제6문 弘道門(홍도문)은 백수교 건너편으로 명태조 홍무제가 1377년 만든 것으로 홍지제때 보수 되었다. 홍도문은 청 옹정제가 붙인 것이라 한다.
홍도란 논어의 인능홍도 비도홍인(人能弘道 非道弘人)에서 나온 것으로“사람이 도를 넓이는 것이 아니라 도가 사람을 넓힌다.”는 뜻으로 사용 된다고 한다.
홍도문의 문턱이 높은데 이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의 지위와 권세가 높음을 나타내며 또한 문에 9개의 쇠못이 있는데 이것은 황궁 이외는 사용 할 수 없는데 공자의 예우로 황궁과 같이 9개의 쇠못을 사용 하였다.
제7문 大中門(대중문)은 금나라 때 만든 것으로 명나라 때 보수 하였다.
대중문이란 편액은 공자의 중용사상을 발양하는 이름을 붙인 문으로 1748년 청 건륭제의 친필 편액이 설치되었다.
공묘에는 464개의 비석이 있는데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이 전부 파괴 하여 후에 시멘트로 보수하여 현존 하고 있는데 그중 3개만 파괴 되지 않고 현존 하고 있다.
비석 중에 성화비는 명나라 황제의 공적 및 제 지낸 내용을 적었는데 비시의 머리는 용머리, 발톱은 매 발톱, 비늘은 거북등이다.
공묘에는 13개의 비정이 있는데 그중 1개의 비정은 명나라 주원장이 세운 비로 문화 혁명 당시 주은래가 명 태조 주원장은 무산 계급 출신이 황제가 되었으므로 이비만큼은 파괴 하지 말라고 지시 하여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제8문 同文門(동문문)은 북송 때 세워 졌다. 청나라 초기에는 참동문으로 불렸다.
웅정제 때 보수 하면서 예기에 나오는 서동문을 인용하여 동문문으로 바꾸었다.
문안 뜰에는 명나라의 홍무, 영락제, 홍치제 때 세운 비석 들이 있다. 출입구로 문만 있을 뿐 동사로 만들어진 담장이 없다.
문의 좌우에는 공묘에서 제사 지낼 때 제례 담당자 들이 머물며 몸을 깨끗이 하는 장소로 사용하는 객사이다.
제9문 금모천지는 청 건륭제의 친필이다.
금모천지를 지나면 규문각이 나오는데,
奎文閣(규문각) 높이 23,35m, 폭30,1m인 3층 누각으로 지붕 밑에 규문각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2층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원형 주춧돌 위에 석북을 놓고 팔각기둥을 세운 것이 이채롭다.
1018년 (송나라 진종)에 건립 할 당시 목조 건물에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건축한 장서류로 1191년(금나라 장종)에 증수 하면서 규문각 이라 개칭 하였다 한다.
현재 공묘의 전각들은 대부분 명, 청시대 건립한 것으로 규문각이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단청의 명도가 높으며 납작한 화문이 이채롭다.
규문각은 역대 황제가 하사한 서적을 전문적으로 소중히 보존하는 누각이다.
본명은 장서류 이며 중국 고대의 전체가 나무구조인 누각 건축의 전범으로서 중요한 고 건축 연구 가치를 소유 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각 종류의 수장 서적이 여러 번 전란을 거쳐 많이 유실 되었다.
중국 10대 아름다운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500년 전 이곳에 큰 지진이 일어났어도 다른 건물은 다 파괴 되었어도 규장각만큼은 끄떡없이 파괴 되지 않았다.
규장각 앞에 용백나무(일명 장수나무)가 있는데 청 건륭황제가 이곳에 왔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잠간 휴식을 취한 나무로 이 나무만 만지면 무병장수 한다고 하여,
일행 중 김한응씨와 최정웅씨가 오래 살라고 이 나무를 만지 이었다.
아마도 장수는 인간 본능의 욕심 인 것 같다. 옛날 같으면 현재 우리 나이는 장수 이였을 텐데 고린 장 안 한 것이 천만 다행인줄 알라고!
규문각 앞에는 비문이 만주족, 몽고족, 한족의 개개 문자가 같이 있는 비석이 있으며,
비석 중에 제일 무거운 것으로 청의 강희제가 이곳에 돌이 없어 북경에서 운반 해온 비문 35t, 비시30t 계65t으로 북경에서부터 운하를 파 겨울에 물이 얼 으면 끓고 왔다고 하는데 이 비석의 비시는 비문이 무거워서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한다.
규장각 뒤에는 先師手稙檜(선사수직회)라고 공자가 나무를 심었다는 자리를 표시하는 표석으로 그 옆에 후대에 나무를 심었는데,
당시 공자가 심은 나무는 벼락 맞아 타 죽었는데도 다시 소생하여 싹이 터서 나온 나무라고 사회주의 식으로 공갈 협박으로 주장 하고 있다.
대성전 전면에 세워진 13개 비정은 5개와 8개로 모여 2열로 정렬 되어 있는 가운데 하나하나 역대 황제들이 공묘를 방문 하면서 하나씩 비문을 세우곤 했는데,
그 중 2개는 금나라 때 세워진 것이고, 1개는 원나라, 나머지 10개는 청나라 때 건축 되었다.
비각 안에는 당, 송, 원, 명, 청, 나라 시기의 비석이 안치되어 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
비정에 보호되는 비석은 모두 53개로 당 고종이 세운 것부터 중화민국 시절 까지 다양하게 세워져 있다.
규문각을 지나 대성문 으로 가면 공자의 사당이 대성전을 들어가는 정문으로 오르지 황제만 사용 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대성문을 보면 9개로 이루어진 금속 못이 장식돼 있다.
중국에서는 황제가 사용하는 문에만 9개의 금속 못을 장식할 수 있다.
대성문 정면 전각에 돌기둥이 8개 인데 중앙 두 기둥 에는 운룡이 양각 되어 있고 나머지는 팔각이다.
기단에 운문과 방승문, 만자문이 조각 되어 있는데 단순 하면서 절재미가 넘친다.
대성전과 같이 용의 여의주를 무는 모습이 생동적이다.
공자는 황제는 아니지만 대성전만큼은 황제의 권위를 갖춘 장식 들이 사용 되는데 용의 조각을 살피면 용의 발톱이 5개로 황제만 사용 할 수 있는 장식 가운데 하나이다.
대성문을 옆으로 돌아서 가면 향단이 나오고 향단 앞에 대성전이 있다.
大聖展(대성전)은 공묘의 본전 이다,
1018년 신성전 으로 만들어져 남송의 휘종이 대성전이라 친필 편액을 하사해 대성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청 옹정제가 1724년 현재의 건물로 완공 했다.
대성전 안에는 3,4m에 달하는 공자의 상과 제자인 증자, 맹자, 안희, 자사의 상이 있고 주위에도 12명의 제자상이 있다.
대성전 편액에 생민이유 글자는 지금까지 누구도 해 본적이 없다는 뜻이란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궁전 급 건물로 송 나라(1018년) 때 창건 하였다.
지붕의 황색 기와 안에는 금으로 된 용이 그려져 있다.
편액은 청 나라 옹정제의 친필이다. 공묘의 대성전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 태안 대묘의 천황전과 더불어 중국 3대 궁중 건축으로 꼽히는 건물 이다.
본청인 대성전 등은 자금성에 만 있는 황금 기와로 돼 있다.
중국 역대 왕조 들이 공자 家(가)를 이른바 천하제일 가문으로 보호해 왔던 것이다.
현재에도 공부는 자금성과 비슷한 규모의 성벽으로 4면을 보호하고 있다.
지붕 위층에 세로로 大聖展(대성전) 이란 편액을 걸었고 아래층에는 萬世師表(만세사표)라 “공자의 학식과 인격이 높아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됨을 칭송하는 말”을 쓴 편액을 걸어 놓았다
대성전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닫집을 짓고 공자상을 모시고 있으며 위패에는 至聖先師孔子神位(지성선사공자신위)라 쓰여 있다.
면류관을 쓰고 두 손 공손히 모으고 휼 을 잡고 있다. 소상의 복장은 제왕에 해당하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소상은 문혁 때 파괴 된 것을 1982년 황금 48량을 들여 복원 한 것이다.
동서 양편에 소상 4이를 배향 했는데 안연, 증자. 자사. 맹자의 소상으로 면류관은 쓰고 있으나 장식이 공자의 것에 비하여 단순 하다.
소상 앞에는 제기와 제례 악기가 진설 되어 있다.
萬歲師表(만세사표)를 비롯한 편액과 주련이 여러 개 걸려 있다.
남색(감청색) 바탕에 글씨를 양각 하고 테두리 에는 황용을 조각 하였는데 편액 자체가 공예품이다.
대성전 안에는 여러 개의 액자가 걸려 있는데 모두 공자의 학문이다.
사상을 찬양하여 놓은 글 民生未有(민생미유)는 맹자에 나온 말로 사람이 세상에 나온 이래 공자만한 위대한 성인이 없었다는 뜻으로 공자가 성인의 최고봉임을 말 하는 것이다
대성전 전면 돌기둥 10개 인데 전부 운용이 양각 되어 있다.
대성전 전면 10개, 좌우 각각 5개 후면 10개 계30개의 돌기둥 높이 6m, 지름 0,8m 의 황색 기와를 올린 높이 32m, 길이 54m, 폭 34m의 거대한 중층 건물을 받치고 있다.
특히 전면에 있는 명대 때 만들어 졌다는 돌기둥 10개에는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용 두 마리를 양각 하였는데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다.
주춧돌 에는 연잎을 이단으로 포갠 복연을 두었고 기둥아래 끝은 연화를 위, 끝은 지름이 작아지며 구름문을 조각하였다
나머지 20개는 팔각이며 이러한 기둥은 고궁에도 없는 것으로 얼마나 화려 했던지 청나라 건륭제가 순행 하였을 때 황제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붉은 천으로 가렸다 한다.
이 돌기둥은 문화혁명의 수난기 에도 큰 수난을 당하지 않고 넘어 같다고 한다.
당시 대성전 안의 공자와 그들 제자상은 모두 내 팽겨 졌지만 홍위병들은 이 돌기둥을 건드리지 않았다.
상부의 지시가 있었는지 그들의 눈에도 대단한 문화재로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떠하든 간에 지금 훼손 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일이다.
사당은 황제의 격식을 갖추 졌지만 사실 공자의 일대기에서 보면
살아생전에 푸대접을 받았다.
지식은 고금을 꿰고, 식견은 천하를 다 꿰뚫었지만, 현실에서는 실패한 정치인이었다.
아마 그가 살아생전에 죽어서 황제의 대접을 받을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侵殿(침전)은 대성전 맨 뒤에 침전과 聖迹殿(성적전)이 있다 .
침전은 공자의 부인인 율관씨를 모신 건물로서 북송 때 지은 것을 청나라 때 개축 하였다.
성적전은 공자의 일생의 사적을 기재한 석각, 성적도를 전문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성적도 의 매 폭 이 높이가 38㎝이며 넓이가 60㎝이고 총 112폭 이다.
편년 순서에 따라 공자가 걸어온 일생의 노정을 완벽하게 표현 하였으므로 유가 사상을 형상화 하게 전파함에 있어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
대성전 오른 쪽에는 공자가 원래 살던 집인 詩禮堂(시례당)이 있다. 이곳에서 공자는 아들에게 시와 예를 가르쳤다.
시례당 옆에는 孔宅故井(공택고정)이라고 공자가 사용하던 우물과 노벽이 있다..
대성전 앞마당의 杏壇(행단)은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토론 했다는 곳에 단을 만들고 단을 세운 곳이 행단 이었다.
공자를 기리기 위해서 이곳 행단 자리에 대성전을 세웠으나 송나라 진종(1018년)때 대성전을 북쪽으로 옮기고 그 주위에 살구나무를 심었던 것을 금나라 때에 전각을 세웠다.
현재의 행단은 정자형 지붕을 한 중층으로 사방이 트여 있으며 청나라 고종이 친필로 세운 행단찬비를 비롯한 비석 들이 있다.
그리고 행단 앞에는 원과 육각을 조형 형태로 채택 하고 운룡을 조각한 조형미가 뛰어난 대석이 있다.
공묘 행단은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것을 기념해서 세운 정자, 편액은 청나라 건륭제의 친필이다.
先師門(선사문)에 들어서면 중정 좌우로 과거시험 합격자 51,600여명의 이름을 기록한 진사 제명비기가 늘어서 있다 .
공예적 특성은 이렇다 할 것이 없고 대좌에 운문과 칠보문을 조각한 것 들이 보인다. 조형적인 특성은 단순하다.
유가의 덕목으로 강조하는 검소 질박한 기풍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여 진다.
대성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13경 비림과 강희제가 썼다는 대학비가 있다.
13경은 蔣衡(장형 1672 ~ 1742) 이라는 학자가 사경 한 것으로 모두 63만자라 한다.
고전과 글씨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하지만 규모에 그 가치에 감동할 뿐 교양이 없는 나로서는 무덤덤할 뿐이다.
시례당 옆에 魯璧(노벽)은 공묘의 외벽으로 진시황이 분서갱유시 유생을 매장하고 유교 경전 들을 모두 불 살랐을 당시 이 집에 살던 9대손이 몰래 유교 경전 들을 이 벽속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지금 있는 노벽은 그 당시 것이 아니라 후 대에 다시 만든 것이다.
대성전 앞뜰에는 참도가 있고 수령이 700년 된 측백나무를 비롯한 오래된 향나무, 측백나무가 질서 있게 심어져 있다.
공묘, 공부, 공림 모두 주 수종이 측백나무 인데 왜 측백나무를 심었는지 궁금하다.
700년된 측백나무를 觸奸栢(촉간백)이라 부르는데 원대 허형이 심은 것으로 명대 간신 엄승이 황제를 대신 해서 공자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 나무 아래 지나갈 때 갑자기 광풍이 일며 가지가 그의 관모를 쳐서 떨어뜨렸다 한다.
후세 사람들이 이 나무는 능히 충신과 간신을 구별 할 줄 안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금사당은 대성문 왼쪽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데 노나라 때 공자의 옛집을 허물고 공묘를 확장 하려 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금관악기와 현 악기 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우리 일행은 공묘 관광을 마치고 옆으로 나오니 돌다리를 접한 입구인 성인지문으로 들어갔는데 공부는 크게 나누어 전원과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전원은 주로 정문에서 삼당 까지 주로 공무를 담당하고 기념행사를 거행 하던 곳이다.
후원은 내택문 부터 정원 까지 공자 집안의 거주지와 휴식처가 있다.
공묘의 오른편에 동서3,5㎞, 남북2,5㎞으로 둘러싸인 곡부 노성을 말하는데 공자의 가족들이 대대로 집무를 보거나 거주 하던 곳이다.
송나라 때 인종 황제가 공자의 46대손 인 孔宗願(공종원)에게 자손 대대로 물려 줄 수 있는 벼슬인 衍聖公(연성공)에 봉하고 이 후부터 곡부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송나라 때인 1038년에 공부가 지어 졌고 명대에도 다시 황제의 명에 의해 衍聖公府(연성공부)로 봉해 진후 증축이 계속 되었다.
그 후에도 청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현재와 같이 공무를 집행 하는 곳, 가족이 거주하는 집, 후원과 책을 읽고 공부 하는 곳, 손님 접대 하는 곳 등 463칸으로 되어 있어 당시 공 씨 가문의 권력과 규모를 보여 준다.
연성공의 벼슬은 처음에는 5품 이였는데 후에는 2품 까지 올라 갔다. 중국 관직은 1품부터 9품 까지다.
현재 공자의 후손 78대손은 국민정부 시대 장개석이 대만으로 갈 때 같이 갖는데 중국정부에서 1990년도 때 중국으로 돌아오면 현재의 공묘, 공부, 공림을 다 주겠다고 하며 초청 하였다.
현 공자 78대 손이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사망한 77대손 묘를 분묘 하여 시체에다 형벌을 가하는 것을 목격하여서 그 악몽이 생생하여 중국 본토에 안 나온다고 거절 하여 현재 대만에 거주 하고 있다고 한다.
중광문 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백호청, 사악청, 장서청, 관구청, 전적청, 지인청이 있다. 이곳은 관공서와 같은 곳으로 행정을 처리 했던 곳이다.
대당은 공자의 직손들이 사무 보던 곳으로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명나라 때 건축된 건물로 이 건물에서 정부 관리를 접견 하거나 축하 행사와 기념일 등의 각종 행사를 개최 할 때 사용 되었다.
대당 안에 당시의 무기류 18가지가 전시 되었는데 그중에 특이 한 것은 오른쪽에서 3번째로 전시된 사탕수수대(사진에 검은 것)로서 죄인들에게 벌을 줄 때 이것으로 때리면 사랑만큼 매도 달다는 뜻으로 사용 하였다 하며,
또한 뒤에는 공자가 행차 할 때 앞에서 붉은 紫禁城騎馬(자금성기마)를 들고 나가면 어느 누구도 범접 못하는 위용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만큼 권력이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당은 직급이 높은 관리를 접견 하였든 곳으로 안에는 청나라의 비석이 안치 되어 있다.
정면에는 태호석이 있는데 이 태호석의 용도는 이 당 안으로 들어 올 때,
첫째로 앞의 경치를 가리고,
둘째로 잡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고,
셋째로는 복이 나가지 못한다, 하여 정면에 있으며,
삼당은 공자 집안의 다툼과 분쟁을 처리 하는 곳으로, 또한 죄진 노비를 취조 하거나 형벌을 집행 하는 곳으로 특히 삼당 옆에는 한국의 빨래판 모양 같은 큰 넓적한 돌이 있는데 이곳은 죄 지은 사람의 형벌 기구로 남자는 엎드려서 볼기 맞고, 여자는 무릎을 꿀린 채 형벌을 가 했다고 한다.
삼당을 지나 후원으로 들어 갈 때 남자 7세 이상은 출입이 금지 이며, 연성공 이외의 남자는 출입이 금지된 지역으로서 만약 7세 어린이가 이곳 을 들어가려면 사전에 연성공의 승낙 을 받아야 한다.
후원의 전상방은 친척과 귀빈을 접대 하던 응접실 이다. 또한 가족 잔치나 혼인, 장례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첨압방은 연성공의 공무 와 개인적인 사무를 처리 했던 방이다.
공자 집안의 거주지로 전당루와 후당루가 있고 뒤쪽에는 휴식을 취 할 수 있는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공자의 76대 야화 를 소개하면,
공자의 76대는 부인이 자식이 없어 손을 이을 라고 4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도 씨, 둘째 측 씨, 셋째 풍 씨, 넷째 왕 씨인데 그중 넷째 부인 왕 씨한테 77대 아들을 생산 대를 이었으나,
왕 씨가 아들 나은지 3개월 만에 큰 부인에게 독살당하고 아들은 큰 부인이 차지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후원 문 옆에 석류라는 곳은 하인들이 물을 길어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기다 부으면 안에서 받아쓰는 곳으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물구멍을 Y자 형태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의 관광을 마치고 여기서 동북쪽으로 2㎞ 떨어진 공림으로 버스 타고 이동 하였다.
공림은 공자와 그 자손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가족묘이다.
위인성역 이라는 문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공림이 시작 된다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그의 지위가 커지고 황제들도 이곳에 와서 제사 지내고 갔다.
공림의 면적이 계속 넓어져 현재는 66만평에 담장 길이가 7㎞에 이르며 묘가 약 20,000여기가 있다.
萬古長春(만고장춘) 문에 들어서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라야 맞을지 잘은
모르겠지만 오래된 향나무 고목이 양쪽으로 줄지어 있고, 양쪽에는 관광객 을 상대로 하는 상가로 형성 되어 있으며,
여기서 200m ~
300m 전방에 至聖林(지성림)이란 문이 나오는데 명대 초기에 세워 졌으며 강희제 때 보수 되었다.
이문은 문화대혁명시기에 훼손 되었다가 1980년대 복원 되었다.
문 옆에는 매표소와 사자상이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두 번째 지성림 문을 지나면 수수교가 있고 그 앞 양쪽에 향나무 고목이 있는데,
한 줄에는 공자의 나이 수로 73주, 다른 한 줄에는 공자의 유명한 제자수인 72주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자공수직계라고 자공이 심은 나무가 자라서 벼락 맞아 불타 없어진 나무뿌리(즉 나무화석)가 있으며 자공은 공자의 72 제자 중에 유일하게 자공만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상인 이었다고 한다.
후일 공자 사망 시 한국의 초막처럼 공자 묘소 옆에 집을 짓고 6년간 시묘 살이 하였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걸어가는데 길 양편에 묘소가 많은데 풀이 묘소에 불상 흉하게 자라고 있어도 묘 손질 한곳은 한기(묘)도 없다.
중국인 들은 원래 묘를 깎지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조상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느냐면서 묘지 손질은 안한다고 한다.
우리는 제일 먼저 공자의 손자(자사)묘 近國逑聖公(근국구성공)칭호의 비석이 세워져 있고 또한 맹자의 스승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공자의 아들 (공이) 泗水候墓(사수후묘) 옆에는 공자의 묘로서 묘비는 명나라 때 만들어 진 것으로 大成至聖文宣王(대성지성문선왕)의 묘비는 황제만 쓸 수 있는 황금색으로 살아서는 대우를 못 받았으나, 죽어서 이 처럼 황제 대우를 받으며 현재 까지 내려오고 있다.
대성지성문선왕의 “왕”자가 묘지 둘레 석으로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가까이 가서야 만이 잘 볼 수가 있는데 이는 황제들이 멀리서 “왕”자를 잘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공자의 묘를 풍수지리로 보면 공자가 아들 손을 잡고서 손자를 안고 천당 가는 형극 이라 한다.
묘 왼쪽에 있는 집은 공자의 제자이자 손자인 자사가 6년간 묘지기로 지냈던 오막살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진니라 진시황은 공자보다 250년 후기의 인물로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유교를 배척 하고 경전을 불사르고 심지어 공자의 묘를 파 헤치는데,
공자는 미래를 예측 하는 예지가 있어 공자가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 무덤을 10개 만들어 놓으라고 하여서 진시황의 파묘에 화를 면하였다고 하는데,
진시황이 공자의 묘를 차례대로 파헤치는데 9번째의 묘에서 “내 무덤을 250년 후 진 씨 성을 가진 사람이 파헤치다”란 문구의 비석이 나와 이것을 본 진시황이 깜짝 놀라서 나머지 1개의 묘는 그냥 두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도중에서 사망하였다는 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공자의 묘에도 풀이 무성하게 있어서 무덤이 볼품없이 보이나 비석이 공자의 무덤 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공자 무덤의 벌초는 이곳 주민이 땔감이 없을 때 풀을 베어 말려서 땔감으로 쓸데 이외에는 한 번도 벌초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곡부에서는 매년 9월 28일 이면 공자 문화 대 축제가 열린다.
공자의 탄생 신화에 대하여 기술하면 여느 성인들도 다 탄생 신화가 있지만 공자의 신화는 좀 색다르다,
동정녀에게 마리아의 몸을 빌려 났다는 예수, 나자마자 전후좌우를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는 석가모니도 다 그 탄생 신화를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분명 성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공자는 전혀 다르다. 공자의 탄생 신화에는 野合(야합)이라는 말이 등장 한다.
중국사기에 따르면 공자 아버지가 공자 어머니와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고 나온다.
“야합” 이라니 천하의 성인 공자가 “야합의 산물” 이라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지만 기록이 그렇게 나온 것을 어떻게 할까!
“야합”이라는 말이 너무 좋지 않은 의미로 쓰여서 그런지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예순이 넘은 공자 아버지 淑梁屹(숙량흘), 스물이 채 안된(일설에 열일곱이 안 된) 顔徵在(안징재)가 야합 해서 공자를 낳았다고 쓰여 있다.
하긴 숙량흘과 안징재가 아들을 낳기 위해 니구산 에서 기도를 드리고 공자를 낳았다니 야합은 분명 야합 인 것 같다.
들에서 합쳐서 낳은 아들이니?
하지만 사기에는 야합에 대해 재미있게 정의 하고 있다.
남자는 생후 8개월에 이가 나고 여덟 살에 배냇니를 갈고 열여섯(2 * 8)이면 양도가 통하고 예순 넷(8 * 8)이면 양도가 끊어진다.
여자는 생후 7개월에 이가 나고 일곱 살에 배냇니를 갖고 열네 살(2 * 7)이면 음도가 통하고 마흔 아홉 살(7 * 7)이면 음도가 끊어진다, 이런 음도와 양도의 한계를 벗어난 혼인을 야합 이라고 한다.
여기서 양도와 음도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 기능을 예기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어쨌거나 아들을 낳기 위해서지만 예순이 넘은 할아버지와 스물이 채 안된 아가씨의 결합은 좀 심하기는 심했다.
원래 성인은 정상적으로 태어나기 힘 드나보다.(이상은 인터넷의 공부기행에서 옮긴 것임)
공자가 한국에 끼친 영향을 인터넷에 있는 자료를 참고해 보면
한국에서 공자 사당의 유래는 통일 신라 때인 714년(성덕왕13년) 김수충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그 제자인 10철, 72제자의 畵像(화상)을 왕명에 의해 국립대학에 해당되는 국학에 모신 것에서 비록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중국의 享祀(향사)제도를 따라 운영 되었으며 주자 성리학이 전래됨에 따라 대성전 건립이나, 배향자 정비가 이루어 졌다.
조선시대 들어와 정치에서 유학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그 내용이 심화 되면서 제도와 운영이 더욱 정비 되였다.
중앙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각 군현의 향교가 세워 졌는데 제도적으로 宗廟(종묘)와 社稷(사직)의 아래 있었으나 정치와 유학이 구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실적인 중요성은 오히려 더 켰다고 할 수 있다.
태종대에 공자에 대해 안자, 증자, 자사, 맹자등 4성과 그 및 의 10철을 배향함으로서 유학의 큰 도통은 정리가 되었으나, 조선의 학자 들을 모시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 되었다.
사림파의 이념적 정치적 승리가 완결된 시점도 광해군대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이른바 5현이 문묘에 종사 된 때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이이, 성혼에 대한 종사 문제는 서인, 남인의 학맥과 연결 되어 현실 정치 상황에 직결 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최종적으로 공자를 정위에 두고 좌우에 4성 10철및 중국 송 대의 6현을 배향하고 동무와 서무에 각각 중국의 명 헌 47위와 한국의 명 헌 9위를 종사 하였다.
광복 후에는 동무와 서무의 중국인의 위판을 땅에 묻고 한국의 명 헌 은 대성전에 올려 모셨다.
현재 성균관에 전해오는 문묘는 1398년(태조 7년)에 완성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1년(선조 34년)에 증건 하고 증수를 거듭 한 것이다.
우리는 이곳의 관광을 마치고 나오면서 가이드 김동일이 중국의 교육 제도에 대하여 중국은 2008년부터 9년간 무상교육제도가 실시되었는데 막상 초등하교에 입학 하려면 학교 측에 돈을 내야 한다.
돈을 내지 않을 경우 학교 측에서는 인원이 찾으니 받을 수 없다고 하여 안 받는데 이럴 때 학교에다 적게는 150만 위안 우수 학교의 경우 300만 위안 까지 돈을 지불 하여야만 입학 할 수 있고 고등학교의 경우 최하 1000만 위안 까지 지불 하여야 한다.
그래도 학생을 가진 부모는 무슨 수단을 써서 돈을 마련하여 전부 학교에 입학 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토지 제도에 대해서 중국은 일정한 시기가 도래 하면 국민 1인당 220평정도 토지를 분배 하는 데 이 땅을 매입 하면 개인 소유가 되어 자국인 들 끼리 매매가 자유로우나,
외국인은 이에 해당 되지 않고 장기(최하 50년)임대 계약하여 임대 하여야 하며,
중국은 공산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토지 사용 시(예 도로 건설등) 는 무조건 당시 토지 시가 보상을 받은 후 내 놓아야 한다.
만약 보상 가 적다고 안 내놓을시 사전 통보 후 포클레인이 와서 사람을 끌어내어 놓고 지상 물을 철거해도 말을 못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특성인가 보다.
또한 중국이 민주화 된다고 가정 하면 아마도 31개주가 국가로 독립 될 것 이라고 판단되어 현재 티베트 독립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무장 군인 투입하여 강제 진압 하는 실정 이다.
중국의 도로공사에 정부에서 건설비가 부족할 경우 외국 차관을 빌려 오는 것이 아니라 자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 건설 후 통행료 징수 하여 상환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 곡부 관광을 마치고 나와서 광장 앞에서 나는 소변이 보고 싶어서 가이드 김동길에 말 하니 공용 화장실이 없어서 중국 화패 1위안 주며 화장실에 가서 5전을 받아오라고 하여 돈 받는 공중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려고 하니 중국에 와서 이런 화장실은 처음 목격 하였다.
돈을 받는 공중 화장실이 소변보는 장소는 그렇다 치고 대변보는 장소에 칸막이는 있어도 문이 없는 화장실은 많이 보았는데,
이곳은 아무 칸막이도 없이 2명이 나란히 앉아 대화 하면서 대변보는 모습을 보고서 중국이라는 화장실 문화에 대하여 아직도 개선되고 있지 않고 존속 되고 있는 미묘한 사회라고 가이드 김동길에 말하니,
이런 환경을 사진 촬영 하면 여권 과 사진기 및 촬영한 메모리도 함께 압수당하여 중국 출국도 못한다고 하면서 사진 촬영에 있어서 주위 주며 이런 곳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광장 앞 도로서 버스를 타고 태안에 있는 태산으로 이동 하던 중 11 : 53분경에 태산 영지 대주점 식당에서 밥, 빵을 제외 한 12가지 요리로 중식 하고 나니 후식으로 수박이 나와 먹고, 12 : 45분경에 태산 주차장에 도착 하였다.
태산은 산동 지역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관광지중 하나다.
태산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 이자 셰계문화유산 으로 지정한 천하제일의 명산으로 주봉 옥화정의 높이는 1545m로 “천하제일의명산”오악( 동 - 태산, 서 - 화산, 남 - 형산, 북 - 항산, 중앙 - 숭산)의 으뜸 이라고 불리 운다,
중국의 명산들 중에 태산의 위상이 제일 높아서 수많은 중국 사람들이 흔히 태산 등정을 자기 일생의 영광으로 간주 한다.
예로부터 태산에 오르면 수명이 10년 연장 되고 죽어서도 그 영혼이 다시 돌아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여겼다.
태산은 유일하게 도교, 유교. 불교가 공존 하는 명산으로 태산에는 신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옥황전에 옥황상재와 태산 천황전의 태산신이다. 특히 태산신은 역대 제왕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태산은 시경에서부터 칭송하는 시가 나오는 중국 최고의 명산으로 최초로 태산에 올라가 봉선 의식을 거행한 이는 진시황이 이었다.
그 후 역대 72명의 황제들이 태산신에 제사를 올렸던 태산의 대묘는 황제 들이 하늘에 제사 드리는 봉선 의식 을 거행 하던 곳이다.
경내에는 진, 한, 당, 송, 명, 청나라 때의 봉선 의식 자료와 의식에 쓰던 악기, 의식을 거행하러가는 황제의 행차도 그림, 태산의 산신령(태산신)을 그린 그림 등이 있다.
2000년 전에 한 무제가 심었다는 측백나무도 있는데 한백 이라고 표시된 비석을 찾으면 되고 본전인 천황전은 송나라 때인 1009년에 창건 되었으며, 안에는 태산의 산신령(태산신)이 안치 되어 있다.
천황전은 북경의 자금성의 태화전, 곡부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 3대 건축물의 하나로 알려 져 있다.
태산 시내에 있으며 뒤 쪽에는 태산을 바라 볼 수 있는 누각이 있고 오래된 나무와 비석이 많아 조요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태산은 중국인 들은 물론 바다 건너 한국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렸다.
태산은 우리 조선시대 문신이자 서예가 이었던 楊士彦(양사언)의 시로 더 유명한 산 이다.
泰山雖高是亦山(태산수고시역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登登不已有何難(등등불이유하난)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 만을
世人不肯勞身力(세인불긍노신력)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只道山高不可攀(지도산고불가반)
뫼 만 높다 하더라.
태산은 우리나라 오대산 정도 높이로 처음 보는 태산의 특색 이라 할 것이 별로 없는 나무가 적은 일반 산과 비슷하다.
정상에 올라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로 일천문 에서부터 태산 중턱의 중천문 을 지나 정상 부근의 남천문을 거쳐 정상 까지 난 7,412계단을 3시간 ~ 4시간 오르면 되고,
둘째는 도화곡 입구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8부 능선 까지 오르고 20여분 계단 따라 올라 가면 정상에 도착 할 수 있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태산 축제가 거행 되는데 작년(2007년)도 축제기간 등산대회에서 1등한 사람이 외국인으로 1시간 10분소요 되었으며 2등으로 한국 사람이 1등 보다 5분 늦게 도착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일주일 후에 이곳에 관광 왔으면 좋은 축제 구경을 하였을 것을 마음으로 아쉬워하며!
태산은 60년 전에 땔감으로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서 나무가 없는 산이 이었는데 60년도 중반에 15년 계획으로 나무 심기 하여 현재의 상태로 회복 하였다고 하는데도 나무가 별로 많지 않았다.
그 당시 나무 심은 사람이 직장에서 퇴직 하면 다른 직장을 알선 하여 생활이 지장 없도록 현재도 관리 하고 있다고 한다.
산동성은 3/4가 평지로 삼국시대에 중원(산동성) 차지가 천하를 얻는다고 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이곳 태산은 제일 먼저 해맞이 하는 곳으로 역대 황제가 제사 지내는 명산 이라고 한다.
우리는 볼거리가 많은 일천문, 중천문, 십팔반, 남천문, 진시황이 태산에 오르다 갑작스런 소나기를 만나게 되어 소나무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 했다 하여 후에 이 소나무는 황제가 비를 피 할 수 있도록 한 공덕으로 오대부(이 관직은 진나라에서 9번째등급의 높은 관직이라고 한다)란 관직을 부여 받은 소나무 오대부송을 보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여 일정상 맞지 않아 두 번째 방법으로 태산에 오르기로 하였다.
일천문은 등반이 시작 되는 곳으로 정상인 옥황봉 까지는 9㎞로 무려 7412개의 돌계단이 이어져 있다
일천문에서 중천문 까지는 2시간이 걸리며 도중에 만선루와 두모궁을 경유한다.
만선루는 명나라 때인 1620년에 세워진 건축물로 전설상의 선녀 서왕모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만선루 앞에는 삼의백 이라 불리는 커다란 측백나무 세 그루 있는데 이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은 도원결의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두모궁은 오래된 도교사원으로 예전에는 용천관이라 불렸다. 내부에는 두모궁이라 불리는 여신상이 안치되어 있으나 별다른 볼거리는 없다.
중천문은 등반의 중간 지점으로 이천문이라고 부른다.
주변에 상점과 음식점, 숙소가 있다. 이곳에서 쉬었다 올라가는 여행자가 많다. 중천문에서 남천문 까지는 3,5㎞거리로 걸어서 2시간 30분 걸린다.
십팔반은 남천문을 향해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양쪽 산을 가로지른다. 이 계단 중간에 쟁반처럼 평평한 판이 모두18개가 있다고 해서 십팔반이라 부른다.
태산에 올라가는 길 가운데 가장 힘이 드는 곳으로 우리의 깔딱 고개라 할 수 있다.
계단이 무려 1,600여 개가 되는데 언제 올라 갈까하며 힘이 쭉 빠지게 되는데 하지만 천리 길도 한 걸음이라는 생각으로 쉬엄쉬엄 올라가도록 하면 된다.
남천문은 1264년 원나라때 세워졌으며 해발고도 1460m에 있다 남천문으로 들어가면 광장이 나오는데 그곳에 태산의 일출 시간표가 설치되어 있으니 일출 볼 사람들은 확인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와 같이 태산에 등산 코스로 오르면 볼거리가 많으니 다음에 올 기회가 있는 분은 꼭 등산 코스로 오르시길 바라며 시내에 있는 대묘(천황전)도 함께 관광 하시기를 권 합니다.
여기서도 입장권 구입에 여권 제시 등 구입 절차가 까다로워서 많은 시간 지체 후 주차장에서 모노레일 까지 운행하는 셔틀 버스 타고 15분 이상 이동 한 뒤 도화곡 계곡에 있는 삭도(모노레일)를 타고 올라가서 내린 후 잘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20여분 걸어서 서북쪽으로 올라가 다시 동쪽 방향으로 정상에 올라가니 도교의 성지인 옥황정 이다.
옥황정 정상에 전각이 있는데 勅修玉皇頂(칙수옥황정)중앙에 옥황대제가 모셔져 있고 앞에는 태산극점 1545m 표지판 그 앞에 큰 향로가 있어 사시사철 옥황상제에
소원과 가족의 복을 비는 사람들로 중국인은 큰 향을 피우면서 기도하기에 나도 중국인 틈에 살짝 끼어서 향은 피우지 않고 잠시 “가족 모두 건강하고 하는 일 모두 잘 되길” 소원 하면서 기도 하였다.
또한 향로 앞 태산극점 비석 둘레 경계 쇠줄에는 이름을 적은 수 많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중국 의 명승지 어디에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여기서도 재현 된다.
연인과 함께 이름을 쓴 뒤에 자물쇠를 채우면 서로 헤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참 말로 그랬으면 연인 이 있는 사람은 같이 함께 꼭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옥황대제 전각 좌측 전각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고 우측 전각에는 재인을 모셔져 있다.
나와 전일규씨는!
옥황정에서 가이드 김동일 보고 천가 쪽을 가리키며 가보자고 하니 가이드 왈 그 쪽으로 가면 다시 이쪽으로 와야 한다면서 그러면 가자고 하여 계단에 내려가니 바로 밑에 無字碑(무자비)란 비석은 원래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 2100년 전에 한 무제가 세웠다,
태산에 위대한 풍광에 겸손한 마음으로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한 후세인 들이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무자비를 지나 태산을 명산의 칭호에 높이는 五嶽獨尊(오악독존)이라는 칭호를 쓴 곳을 지나 공자가 동남쪽 방향의 노나라를 바라보았다는 瞻魯臺(첨노대)가 있는 데 울타리가 만들어 져 있었다.
그 이유는 명나라 때 불치의 병에 걸린 부모님의 치유를 기원하기 위해 자식들이 이 벼랑 아래로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고 해서 “목숨을 희생하는 벼랑”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후에 명나라 사람 들이 주위에 울타리를 만들고부터 “목숨을 소중히 하는 벼랑” 이라 바꾸어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를 지나면 하늘의 거리인 天街(천가)가 시작 된다.
천가의 거리에는 송나라 풍의 2층 건물인데 남천문빈관과 옆에 기념품 판매소를 거쳐 拱北石(공북석)을 보고서 되돌아 나와서 도로 천가를 거쳐 내려가면 절벽 사이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돌 세 개가 끼어 있는데 돌 들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이 아슬아슬한 선인교를 보고나서 대관봉 벼랑에 글자들이 다양한 서체로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화장실로 같다.
가장 유명 한 것은 당 현종이 쓴 紀泰山銘(기태산명)으로 높이 13m, 폭 5,3m에 총 1000자가 새겨져 있다.
역대 사상가와 문인들이 태산에 올라와 이곳에 글귀를 남기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공자, 이백, 사마천, 곽말약등 으로 힘겹게 오른 문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듯하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나오니 우리 일행인 이상열 씨가 내 앞에서 계속 내려가기에 불러서 우리 일행이대관봉 벼랑 글씨 쓴 곳으로 갔으니 이리로 오라고 하여 일행 뒤를 쫒아가서 대관봉 벼랑 글씨 밑으로 가서 보니 전일규 씨가 있어서 이곳을 보고 옥황정 으로 갈 거라고 예측 하고 사진 촬영에 열중 하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일행이 보이지 않아 부지런히 옥황정에 올라가는데,
칙수수제궁이 있어서 다 돌아보고 나서 부지런히 일행을 쫒아 간다고 뛰다시피 하여 옥황정(정상)에 올라가니 우리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서야 - - 나는 아차 - - 우리 일행과 해어졌구나 하면서 은근히 걱정하며 10여 분간 그 자리에서 기다리다가 혹시나 저 아래(대관봉 벼랑)에서 나를 찾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시 내러 가서 천천히 일행을 찾으면서 한 바퀴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아 다시 옥황정에 올라갔다.
옥황정에서 가만히 생각 하니 우리 일행이 나를 일어버려 찾지 못하면 삭도(모노레일)정류장에 올 것이라 예측 하고서 나는 삭도 정류장에 같다.
거기서 삭도 정리 하는 여직원 에게 一行 行不(일행 행불) 이라고 하니까 저 멀리 있는 중국 사람보고 말 하여서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그 남자에게 가서 수첩에 적은 가이드 이름을 보여 주니까! 아마도 가이드를 잘 아는 조선족 중국 사람인가 보다, 머리를 끄덕이며 곧 바로 가지고 있는 핸드폰으로 전화해서 나를 바꾸어 주어서 나는 미아가 되지 말라는 팔자인가, 아니면 행운아 인가, 어리 벙벙한 상태에서 핸드폰을 받으니,
가이드 김동일씨가 어디냐고 하면서 한 참을 찾았다고 하기에 미안하다고 대답하고 이곳은 삭도 정류장이라 하니까 알았다고 하면서 곧 내려 갈 테니 그 자리에 있으라 하여서 그간에 놀란 가슴이 확 풀렸다.
그런데 국제 미아가 나뿐아닌 김한응씨도 대관봉 벼랑 글씨 보고 나서 하산 도중에 벽화사가 있어 벽화사는 1009년 송나라 때 창건한 것으로 태산의 여신인 碧霞元君(벽하원군)을 모신 사당이다.
특이 한 것은 벼락을 막기 위해 전통적인 건축 양식인 벽돌과 모래에 금속 합금을 사용해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건축 구조는 중국에서도 드물다고 하지만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
벽화사를 보고 나서 일행과 떨어져서 홀로 되었는데 김한응씨 생각에 이곳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으면 일행 누구든지 자기를 찾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변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나 찾아보아라, 하며 서 숨바꼭질하고 있으니까 가이드 김동일씨가 보고서 찾았으니 내려오라 하여서 미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일행이 대관봉 벼랑 글씨를 보고 삭도 정류장으로 내려가는 길로 가는 것도 모르고 아까 옥황정에서 저기 가면 이곳으로 도로 와야 한다기에 그런 줄 알고 벽화사도 못보고 헤맨 것이 나의 착각 이였다.
대관봉 벼랑에서 곧 바로 삭도 장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옥황정(정상)으로 갔으니 일이 발생 하였다.
핸드폰을 끈 은지 불과 5분도 안되어서 우리 일행이 내려와 만나니 그 때 시각이 15 : 10분경 이였다.
우리는 바로 삭도를 타고 내려가 셔틀버스 타고 정류장 까지 가서 우리가 타고 온 버스에 승차하여 태안으로 출발 하였다.
우리 일행 중 조관형씨가 말하기를 오늘 두 사람 중에서 높은데 올라간 사람과 삭도 정류장에 간사람 중에 누가 똑똑한 사람이냐고 물으니,
모두가 높은 데서 나 찾아 라고 숨바꼭질 한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라면서 박장대소 하였다.
그 후부터 김한응씨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명칭 되었다.
우리는 태안으로 가는 도중에 태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담수호로 만들어서 깨끗한 이 담수호에서 생산된 담수 진주 판매장에 가서 담수 진주에 대한 설명 하는데,
담수 진주는 작은 조갯살로 핵을 만들어 작게는 20개에서 최대 50개 까지 생산 된다며 진주조개 쪼개면서 진주 숫자 알아맞히기에서 이병근씨가 22개로 알아맞히어 진주 화장품을 선물 받고 현황 설명을 마치고 나서 판매장으로 이동하여 5여분간 구경 하다가 나와서 식당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5분만 가면 북경의 자금성 보다 더 큰 건물인 태안시청을 가이드 김동일씨가 차창으로 보라고 하면서 당시 건축한 시장은 이것으로 인하여 강제 퇴직 당하였다고 한다.
개혁 개방 전에는 관공서 마다 울타리가 쳐져 있으며 군인 들이 초병을 섰다고 한다. 그런데 개혁개방 후부터 관공서의 철조망 울타리가 사라지고 초병들도 철수 하여 현재와 같이 울타리 없는 관공서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시내버스에 난방 시설이 없는 버스는 승차비가 1위안 인데 난방 시설이 있는 고급시내버스인 경우 일반버스의 곱이 넘는 3위안 이다
중국인은 절약 정신이강하다.
세탁기가 있어도 전기료 때문에 평시에는 사용 하지 않고, 가로등도 태양열 발전으로 교환하고, 아파트 및 주택을 건축 할 때는 반드시 태양열 시설을 하여야 하며 난방시설 및 전기까지 의무 규정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은 열 소비량이 세계 1위인데 전체 인구가 절약 하지 않고 사용 하면 지구는 3년 만에 에너지 가 고갈 된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식 식당에서 돼지고기 김치 전골 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돼지고기김치찌개로 돼지 비개 5㎝이상 되는 것을 통째로 가위로 쓸어서 주는데 한국 같아서는 안 먹을 것 같은데 중국 땅에서 며칠 만에 맛보는 찌개라 그런지 다 먹는데 나는 식성이 까다로운 편이 아닌데도 그놈의 돼지 비개 때문에 거부감이 있어 살만 발라서 그냥 대충 먹었다.
일행이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과일 가게에 잠시 들려 유성항공 이미자 사장이 사과, 포도. 밀감을 사서 각 룸에 넣어 주어서 먹었는데, 사과는 크기가 밀감 크기 만 하며 맛은 모두가 먹을 만 하였다.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오늘의 숙소인 용해국제대주점(호텔)에 20 : 50분경에 와서 1021호실을 배정 받아 최정웅씨와 같이 들어가니 방이 북향으로 되어서 환기가 안 되어서 그런지 곰팡내가 몹시 심하게 났다.
마침 가이드 김동일이 왔기에 방을 바꾸어 달라고 하자 가만히 있어 보라고 하면서 카운터에 전화하여 방을 교체 하여 달라고 말하니 카운터에서 잠간 기다려 달라고 하여 10여분 이상 기다려도 연락이 안와 다시 전화 연락 하니 방이 없다고 하여서 할 수 없이 곰팡내 나는 방에서 오늘의 피로를 풀 겸 샤워 하고 오늘의 일을 정리 한 후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그놈의 곰팡냄새 때문에 휴식 취하기가 좀 힘들었다.
2008년 9월 21일 (6일째)
오늘은 이방에서 얼른 나가고 싶다. 냄새가 몹시 나니까!
07 : 00시에 호텔식 뷔페로 아침 식사 후 건너편 방에 가니 그 방은 남향이고 환기가 잘 되어서 그런지 방 공기가 신선 하여 밤새 이런 방에서 휴식을 취한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하고 최정웅씨와 같이 부러워하였다.
08 : 30분 경 우리는 오늘은 관광의 끝 일정으로 제남으로 향하여 출발 하였다.
제남은 남으로 태산 줄기 북으로는 황하유역에 접하고 있는 산동성의 성도다.
전국 시대 에는 제나라와 노나라의 수도이며 송나라 때는 제남부가 있던 역사적인 도시로 다른 도시에 비해 물이 풍부해 예로부터 많은 사람 들이 살았다,
지금도 시내에서 분출하는 표돌천 을 비롯해서 72개의 샘물의 도시로 또한 석회석 지층이 얇아 음용수로도 가능 하며,
1904년 에 독일이 조계지를 설치하고 이곳을 통치하였기 때문에 아직도 독일 풍의 건물 들을 종종 찾아 볼 수 있으며 그 유명한 태산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여기서(태산)부터 제남 까지는 1시간 30분소요 되며 제남에 샘물이 많은데 3년에 2번 변한다고 한다.
중국의 전체 자전거 대수는 인구 3명당 1대로 약 4억 3천만대로 추산 된다.
산동성의 약칭은 魯(노)로 한자 풀이를 하면 매일 마다 물고기 먹고 잘사는 부유한 나라이다.
산동성은 157,000㎢로 동서로 9시간, 남북으로 6시간 버스로 이동 하여야 한다.
중국에서 상점에 간판이 빨강 글씨는
첫째 : 불을 상징하여 장사 잘 되고,
둘째 : 빨강색은 잡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또한 황금색은 부귀와 영화를 뜻 한다.
중국에서 제일 많은 자동차는
첫째 : 독일의 폭스바겐
둘째 : 일본의 혼다
셋째 : 미국
넷째 : 한국의 현대차 이다.
현재 북경의 택시가 전부 현대차 인데 이렇게 된 이유는 2008년도 북경 올림픽 행사용으로 현대가 무상으로 차량을 제공 하는 조건을 중국 정부와의 약속하였다.
그 대신 올림픽이 끝난 후에 북경 공안 자동차는 모두 현대차로 교환하는 추가 조건으로 공안은 물론 택시 까지 전부가 현대 자동차로 대체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주유소 명칭이 석화 또는 석유로 되어 있는데 90% 이상이 공유(국가)소유이며 나머지는 외국 회사 소유이다.
중국에서 결혼식은 한국과 같이 주로 주말을 이용하여 저녁에 호텔에서 예식 하기에 앞서 신랑 측에서 같은 모델의 승용차 8 ~ 10여대를 동원 하여 선두 차에는 양쪽 백미러와 본 네트 중앙에 꽃 장식 하고 그 외 차량은 양쪽 백미러에만 꽃 장식 하여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와 신부 가족을 모시고 예식장(호텔)으로 가서 저녁에 결혼식을 올리는데,
참고로 한국의 축의금은 3 ~ 5만원, 일가친척인 경우가 10만 원 이상 형편 따라 하지만 이곳 축의금은 보통 10만 위안 이상 이여서 절친한 친분 이외는 참석이 어렵다고 한다.
우리는 10 : 10분경에 제남 시내 도착 하여 일정에는 황하 강 유역을 관광하기로 하였으나 첫날 황하 강 유역을 관광 하였고 시간상 시내 공원과 표돌천을 관광하기로 하였는데 때마침 오늘이 일요일이라 제남 시민들의 휴일 나들이로 인파가 그야 말로 인산인해로 시내 천성광장 과 명인광장 은 차창으로 보고 표돌천만 관광하기로 하였다.
제남시내 72개 샘물이 1초에 1,6t씩 나온다고 한다.
천성광장은 1997년 홍콩반환 기념으로 만들어진 공원으로 지하에는 상가로 조성 되었고 위에는 시민의 쉼터인 광장으로 조성 되었다.
명인광장은 중국의 역대 명인 공자, 맹자, 제갈량등 12명의 동상이 세워진 시민의 휴식처로 조성된 광장으로 우리 일행이 관광하고자 하였으나 제남 시민이 너무 많이 나오고, 주차할 공간이 없어 입구에서 차창으로만 보고 표돌천으로 향하였다.
표돌천 입구에 解放閣(해방각)의 건물이 성벽 위에 건립 되었는데 중국 정부가 일본군으로부터 점령당한 토지를 탈환한 기념으로 제남성 성벽 위에 건립한 기념물이다.
표돌천은 제남에 있는 72개 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샘으로 2700년 동안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다.
청나라 고종이 천하제일천 이라 말한 이 샘이 유명 해진 것은 송대의 여성 문인인 이청조와 중국 근, 현대의 문인 곽말약, 노사 등이 이곳에서 머무르며 저작했기 때문이다.
표돌천 안에 黑虎泉(흑호천)은 세 마리의 검은 호랑이 입상에서 맑은 샘물이 흘러나오는데 호랑이 모습이 대련의 老虎灘(노호탄)공원에 있는 하얀 호랑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흑호천을 중심으로 구녀천(아홉 구멍에서 샘물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백석천(하얀 돌 사이에서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등을 둘러보고 나서 제남 공항으로 출발 하였다.
제남 도로의 특이점으로 민국시대 산동성 도지사 한 씨는 무식한 사람 이였는데 제남시 도로 명 결재 시에 부하 직원이 경도와 위도로 같은 방향의 도로 명 결재 서류에 그와 반대인 경도를 남북으로 위도를 동서로 도로 명으로 변경 결재하여 중국에서 특이한 도로 명을 같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12 : 55분경 제남 국제공항에 도착 하여 출국 수속 후 중국시간 14 : 20분발 대한항공 KE848가로 이룩하여 고도 9500m 항속840㎞의 속도로 좌석 149석 중 142석이 탑승한 가운데중국시간 15 : 30분경에 기내식으로 중식을 대신하였다.
한국시간 17 :12분경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 후 미리 유성항공에서 대기한 16인승 버스에 탑승 하여 고속도로 화성 휴게소에서 나를 제외하고 전부 가 간단한 저녁 식사 후 천안에 20 : 00경에 도착 하여 각자의 집으로 데려다 주어서 집에 들어오니 20 : 25분 경이였다.
끝으로 이번 여행을 추진한 이병근 씨에게 감사의 글 올리며, 그리고 우리일행을 끝까지 보살펴 주신 유성항공 이미자 사장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일행의 여행에 끝 까지 도움을 준 가이드 이형철 씨의 고마움에 감사하며, 산동성 가이드 김동일 씨를 태산에서 놀라게 한 나의 불찰을 이 글로 사과하며,
아울러 두 분에 대한 고마움을 글로서 표하며 같이 간 일행한테 심려를 끼쳐 죄송하였으며 두서없이 들은 것, 본 것, 읽은 것을 종합하여 기행문 이라는 글로서 서면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2008년 9월 24일
윤 광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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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img 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네요. 사진을 못보니 답답합니다.
하이고.......읽다읽다................기행 소설.......다는 못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