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약 100여 년 전에 태어나 70년 전에 죽은 에바 페론이란 여성 정치인이 있었다. 그때는 아르헨티나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나라였다. 그녀는 1945년 결혼한 군인 출신 정치인 후안 페론이 이듬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덕에 아르헨티나 영부인이 됐다. 실질적으로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든 그녀는 남편보다 유능했으며 남편보다 훨씬 더 인기가 높았다. 그녀가 자궁암으로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남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김건희 여사의 박사 논문이 완전한 표절이라는 견해에 100% 동의하지만, 그녀가 학문이 아닌 현실 정치에서 충분히 박사 실력을 갖췄다고 믿는다. 김 여사의 실체에 대한 ‘더탐사’나 ‘뉴스타파’ 같은 탐사보도를 통해서 얻은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통해서나, 심지어 그녀의 행보에 대해 분칠과 마사지에 여념이 없는 조중동 류의 보도를 통해서도 그녀의 박사급 정치 실력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사람의 심리와 권력의 속성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런 그녀가 이제 본격적인 정치인 행보를 시작하는 듯하다. 27일 한남동 공관에 여당 여성 국회의원 10명을 초청해 점심을 한 것이 그 신호탄이라고 본다. 외교무대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연출하거나 남편과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등의 행보와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정치, 정당정치에 발을 들여놓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그녀에게서 에바 페론의 그림자를 느끼는 이유다.
에바 페론의 비천했던 어린 시절
에바 페론의 과거는 비천했다. 시골 농장주와 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딸로 인정을 하지 않아 청소년기에 이를 때까지 가난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5세 때 무작정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출을 감행했지만 가진 것 없는 시골 소녀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에바는 어린 나이부터 성공을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재산은 몸과 미모였다.
에바는 자기의 앞길을 이끌어 줄 것 같아 보이는 남자와 스스럼없이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실속이 없으면 가차없이 떠났다. 에바는 여러 명의 남자 품을 전전하며 삼류극단의 배우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삶을 시작했으나 성공을 향한 물불을 가리지 않은 노력 덕분에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차츰 영역을 확장해갔다. 그리고 1940년 경 마침내 작은 방송국을 소유한, 어느 정도 유명한 연예인으로 그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화려한 사교술을 익히고 권력의 속성을 스스로 깨치며 성공의 최종 방정식을 정치에서 찾은 것은 젊은 날에 겪었던 바로 이런 인생역정을 통해서였을 것 같다.
에바가 후안 페론을 만난 것은 1944년 산후안에서 발생한 대형 지진의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 마련 현장에서였다. 노동부장관이었던 후안 페론과 구호기금 마련 행사에 연예인 자격으로 동참한 에바는 만나자마자 서로의 이용가치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던 후안 페론은 50세였으며 에바는 25세였다. 이후 에바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을 총동원해, ‘페론주의’를 내걸고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던 페론을 도왔다. 두 사람이 동거 중에 후안 페론이 군부세력에 의해 축출되고 구속까지 되는 위기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성장 배경과 성공신화를 활용한 선동적인 연설로 노동조합의 후안 페론 지지 총파업을 이끌어내 반 페론주의자들을 굴복시켰다. 이후 두 사람은 정식 결혼했고 이듬해 에바는 결국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다
에바 페론을 알면 알수록 김건희 여사가 오드리 헵번이나 재클린 케네디를 흉내내고 싶어서 외국에 나갈 때마다 그런 우스꽝스런 쇼를 한 것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녀에게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라든가,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국정을 돕는 귀여운 이미지 정도가 아니라, 그런 이미지를 더 큰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데 활용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는 건 아닐까? 에바 페론도 자신이 빈민 출신이요, 가난한 자들과 노동자들의 친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출도 하고 장치도 만들었지만 결국 그런 모든 노력들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세력을 강화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김건희 여사가 일찍이 에바 페론을 알고 열심히 배워 따라 하는 건지, 두 사람의 성장 배경이 비슷해 이후 자연스럽게 자수성가 과정이나 정치적 행보가 비슷하게 오버랩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김 여사가 여러모로 에바 페론과 닮은꼴이라는 확신이 든 나는 이제 김건희 여사가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전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에바 페론도 부유층들의 자선협회에 대한 정부 보조금을 폐지하고 대신 국민복권 등 각종 기금에 대한 실질적인 세금 삭감과 자발적인 노동조합 및 기업 헌금에 의해 후원을 받는 자신 소유의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에바 페론 재단기금은 수천 개의 병원 · 학교 · 고아원 · 양로원, 기타 자선단체를 세우는 데 쓰여졌다.
나는 김건희 여사가 국민의힘을 사당화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새 정당을 만든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에바 페론도 여성참정권법 통과를 이끌었고, 1949년에는 여성 페론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전 학교에 의무적으로 종교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는데, 김건희 여사가 차마 무당교를 가르치는 국립학교를 세우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천공이 IP채널에서 널리 가르침을 퍼뜨리도록 만들어 드리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라고 본다.
급기야 김건희 여사가 총선에 나서든지 끝내 다음 대선에 출마한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에바 페론도 1951년 자신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끝내 부통령 지명을 얻어냈다. 그녀가 죽지 않았더라면 다음 번 대선에서 남편 대신 출마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아르헨티나에서 외경스러운 존재로 남아 그녀를 추종하는 노동자계급에서는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성녀로 추대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나는 민주주의가 확립된 나라에서조차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특별한 가문이나 학벌, 재산, 직업의 배경을 가져야 한다는 일반적 인식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까마득한 옛날 왕조시대, 봉건시대에도 왕후장상 영유종호(王候將相 寧有種乎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라는 외침이 있었지 않았나. 오히려 나는 역경을 딛고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비록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가사에 크게 공감하지는 못할망정, 짧은 삶을 살면서 비천함을 극복하고 높은 정치적 성취를 이루어낸 에바 페론의 인생역정에서 감동을 받는 측면이 있다. 더구나 그녀는 박사논문을 조작하지도 않았고 경력도 부풀리지 않았고 주가조작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성형수술도 하지 않고 정상에 이르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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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www.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