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길 - 환구단(圜丘壇)
(2022년 11월 13일)
瓦也 정유순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의 제후국 지위가 청산되면서 일본은 이 때부터 마수를 들이대며 조선침략이 위압적으로 본격화 되어 조선 조정에 친일내각이 수립되고, 이후 갑오개혁 등을 통해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고 침탈한 결과 조선의 내각이 수차례 뒤바뀌고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과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이 연이어 일어나 정국이 격동했다.
<아관파천 했던 고종의 길>
아관파천 1년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군사(軍司)제도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財政)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 공관을 떠나 가까운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환구단에서 천제(天祭)를 지내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구 러시아공사관>
환구단(圜丘壇)은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에 있었다. 소공동(小公洞)은 태종이 경정공주(慶貞公主)와 사위 조대림(趙大臨)에게 하사한 곳으로, 한성부 남부의 회현방에 위치하였다. 이곳은 ‘작은 공주골’이라 불렸으며 소공주제(小公主第), 소공주댁(小公主宅) 등으로 불렀다. 이후 선조(宣祖)가 의안군에게 하사하여 소공주동궁(小公主洞宮)으로 바뀌면서 오늘날의 소공동(小公洞)이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서울 소공동 지도>
그 후 소공주댁(小公主宅)은 임진왜란 때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가 이곳에 머물렀고, 그가 물러난 후 1593년(선조 26)부터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주둔한 이래 중국 사신이 머물러 청나라 사절을 맞는 영빈소를 삼아 남별궁(南別宮)이라고 하였다. 임오군란(壬午軍亂) 후에는 3,0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우키타 히데이에(좌)와 이여송(우)-네이버캡쳐>
1897년(광무 1) 고종은 남별궁 자리에 대한제국이 선포될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이 세워졌으며, 1967년 7월 1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환구단(圜丘壇)은 일명 환단(圜壇)이라고도 하며,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둥근 단으로 된 제천단인데,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를 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서 제사 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다.
<환구단 원모습(1907년 추정)>
국왕이 정결한 곳에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기원(祈願)과 감사의 제를 드리는 것은 농경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일찍부터 있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983년(고려, 성종 2) 정월에 왕이 환구단에 풍년기원제(豊年祈願祭)를 드렸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으로 보아, 이미 고조선시대 이전부터 이러한 의식이 행하여지지 안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환구단 모형-서울역사박물관>
이러한 제천의례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다. “1398년(태조 7) 4월, 가뭄이 심할 때 종묘(宗廟)·사직(社稷)·원단(圓壇)과 여러 용추(龍湫)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는 실록의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는 환단의 위치를 보면, 한강 서동(西洞) 또는 남교(南郊)로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한남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환구단배치도-네이버캡쳐>
또한 환구단의 구조는 처음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단 주위를 6장(丈)으로 하고 단 위에 천황대제(天皇大帝)와 오방오제(五方五帝)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단상이 좁아 1411년(태종 11)에 확장하여 단 주위를 7장으로 하여 단으로 오르는 12층계를 만들고 단 아래에는 3개의 흙으로 만든 토유(土壝)를 만들어 주위 담에는 4개의 문을 냈다. 그리고 단 남쪽에는 다시 높이 1장 2척 창호방(窓戶方)의 요단(燎壇)을 쌓았고 신주(神廚)와 재궁(齋宮)을 지어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환구단 내삼문>
세조 때에도 환구단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환구단의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천자가 아닌 제후국(諸侯國)의 왕으로서 천제(天祭)를 지냄이 합당하지 않다는 논의 때문이며, 이로 인해 이후 여러 차례 제천단을 폐한 일이 있었다.
<내삼문 계단과 무늬>
<내삼문계단 중앙의 용무늬>
그 뒤 고종이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천신(天神)에게 제를 드려야 한다는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따라 영선사(營繕史) 이근명(李根命)이 지관(地官)을 데리고 지금의 소공동 해좌사향(亥坐巳向)에다 길지(吉地)를 정하여 환구단을 만들고, 이 제단에서 고종은 천지에 제를 드리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고 황제위(皇帝位)에 오른다.
<천제재연 모습>
이때에 조성된 환구단의 구성은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位)는 제1층 북동쪽에서 남향으로, 황지기(皇地祇)의 위는 북서쪽에서 남향하였다. 제2층 동쪽에는 대명(大明), 서쪽에는 야명(夜明)의 위가 봉안되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嶽)·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위와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위가 모셔졌다.
<환구단 석물유적>
그리고 제를 올릴 때 영신궁가(迎神宮架)에는 중화(中和)의 악, 진찬궁가(進饌宮架)에는 응화(凝和)의 악 등 여러 주악이 의식에 따라 연주되었다. 그 뒤 1899년(광무 3) 환구의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板)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추존하였고, 환구 황지기 위의 동남에 배천(配天)하였다.
<환구단 석물유적>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탄되면서 일제는 ‘조선의 왕이 감히 천제를 지내는 것은 하늘에 대한 불충이라며 천조대신의 후예인 일본 천황이 지내야 한다.’면서 1913년에 환구단을 철거하였다. 일제가 대부분을 허물었지만 환구단의 일부인 황궁우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1914년 일제는 환구단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건립하였다.
<조선경성철도호텔-네이버캡쳐>
지금도 남아 있는 황궁우(皇穹宇)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정이다. 기단 위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1·2층은 통층(通層)인데, 중앙에 태조의 신위가 있다. 3층은 각 면에 3개의 창을 냈다. 건물의 양식은 청나라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황궁우 옆에는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듯 3개의 석고(石鼓)가 있는데, 몸통에 조각된 용문(龍紋)은 정교하고 화려하다.
<황궁우>
<석고>
환구단의 정문은 조선철도호텔 건설로 철거되어 행방불명되었으나, 2007년 서울 강북구 우이동 그린파크호텔 터에서 발견되어 2009년 서울광장방향에 복원되었다. 1938년에는 환구단 터에 8층 건물인 반도호텔이 신축되었다. 철도호텔은 지금의 조선호텔이 되었고, 반도호텔은 롯데호텔 소공동점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반도호텔이고 조선호텔이었을까?
<환구단 정문>
그리고 이 두 호텔 사이에는 <반도조선아케이트>라는 쇼핑센터가 있었다. 이는 당시 한국관광공사가 구상하여 추진한 것으로 1965년 1월에 문을 열었다. 1964년 해외여행 자유화와 1965년 한·일 회담이 성사되어 국교정상화가 되면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에 투숙하는 관광객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건설하였다. 이곳에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국내 부유층도 몰려들었으나 1970년 1월 화재로 전소된 후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없어졌다.
<반도조선아케이트 위치도-네이버캡쳐>
그런데 문제는 ‘반도조선’이라는 이름이다. 일제는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심하게 왜곡시켜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이는 우리도 모르게 시나브로 식민잔재를 심기 위한 교묘한 꼼수임에 틀림없다. 1910년 일본에 병탄될 때 우리나라는 분명히 대한제국이었음에도 일제는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다시 명명하고 총독부 이름을 조선총독부로 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이라는 국호에 담긴 독립, 자존의 이념을 거둬들이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는‘반도’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호텔(환구단이 있던 곳)>
참고로 해방이후 종묘대제와 사직대제는 복원됐으나 환구대제만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가 2008년 11월 27일 100여 년 만에 환구대제가 복원되었으며, 2009년부터는 10월 12일에 봉행하고 있다. 이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첫제사를 올린 1897년 10월 12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환구대제 재연>
https://blog.naver.com/waya555/222960270711
첫댓글 해박한 이야기
넘 좋습니다.
쓰신 글들
틈틈이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