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94
5월18일[부활 제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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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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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xXixgFIE4Q&
(김영주 니코메디아의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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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문다면 아무리 나이들어도 청춘을 살수 있습니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께서 택시를 탔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운전 기사분 연세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동년배끼리 만났는지라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목적지 영등포역으로 잘 가고 있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승객 어르신께서 운전기사 어르신께 묻습니다.
'기사 양반! 내가 어디 가자 합디까?'
운전 기사 어르신의 반응이 더 웃깁니다.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습니다.
'아이고 깜짝이야! 대체 언제 타셨슈? '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는 극단적 노령화의 가속으로 인한 여파가 만만치 않습니다. 인구수가 급격히 줄어든 농촌 지역의 많은 지자체들은 존립 자체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더 이상 신자들이 오지 않는 관계로 대성전이 매물로 나오고 성전이 공연장이나 술집으로 바뀌는 유럽 교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멀지 않습니다.
한때 공동체의 주역으로 왕성히 활동하던 나였는데, 이제 새파란 후배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물려주고 무대 뒤로 내려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듭니다.
나이듦에 따른 노화와 질병, 죽음 앞에서 비참함을 느낍니다. 쪼글쪼글 얼굴에는 주름이 잡히고, 내 삶이 이토록 쪼그라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주님 손길 안에 지속적으로 머문다면, 우리는 영원히 청춘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 매일 매순간을 살아갈 때,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인도자이신 성모님께서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모님은 평생토록 주님 뜻 안에 사셨기에, 영원한 젊음을 누리며 사셨고, 지금도 젊고 활기찬 어머니로서 우리를 동반하고 계십니다.
부끄럽지만 감사하게도 성모님의 달 5월에, 성모님을 주제로 한 저의 세 번째 책 '양승국 신부의 성모님 이야기'(성바오로출판사)가 오늘 출간되었습니다.
책 소개 글에 따르면 성모님의 생애에서부터 시작해서, 성모님 관련 4대교리까지, 총 열개의 강좌를 통해 성모님에 대한 모든 것을 질의응답식으로 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관심 가져주신다면, 힘겨운 교회 출판 시장 안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성바오로 수도회 신부님, 수사님들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구입문의www.paolo.kr
02-945-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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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H7NXTV4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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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비웃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지 않으면 성령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하시며 떠나는 것은 잠시지만 그 근심은 “조금 있으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이 근심할 때는 세상이 기뻐할 때이고 세상이 근심으로 바뀔 때 우리는 기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려고 결심했을 때 주시려는 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려고 결심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주님은 성령의 도우심을 주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용서도 사랑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정원 씨가 유영철을 용서할 마음이 생긴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 때문이었고 그 마음을 채워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물론 고정원 씨는 성령을 받는 시간인 기도 시간을 꼭 가졌습니다. 고정원 씨가 고통을 받을 때는 세상은 ‘그것 봐, 용서가 안 되지?’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세상은 고통 속에 잠겼습니다. 유영철을 양자로 삼고 용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고정원 씨는 용서가 되는 신기함에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믿음과 사랑이 희망 속에서 성장합니다.
윌마 루돌프는 1940년 6월 23일 테네시 주 세인트 베들레헴에서, 그리고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정에서 22명의 자녀를 둔 가정에서 갓 1kg이 넘는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루돌프는 네 살 때 왼쪽 다리와 발이 마비된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그녀의 가족에게 그녀가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가족은 매우 종교적이었고 그들의 신앙은 이 어려운 시기에 힘과 희망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는 기적과 기도의 힘을 믿었고 자신이 직접 집에서 정기적인 물리 치료를 하였습니다. 딸의 삶을 장애로 정의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그녀의 믿음에 대한 증거였으며, 그녀는 이러한 믿음을 윌마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처음엔 어머니의 믿음을 비웃던 의사들은 아홉 살 때 루돌프가 다리 보조기 없이 걷는 법을 배운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농구와 육상 경기에 대한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녀는 걸을 수도 없었지만,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루돌프는 엄청난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루돌프가 16세의 나이에 1956년 멜버른에서 열린 첫 올림픽에 출전하여 4x1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4년 후인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그녀는 100m, 200m, 4x100m 계주에서 단일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 되었습니다.
트랙에서 은퇴한 후 루돌프는 교사와 코치가 되었고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여성들의 인권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플랫폼을 사용하여 젊은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믿음을 공유하고 그들도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무언가 하려면 비웃습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참아내게 합니다. 사랑은 믿음을 낳고 그 믿음은 인내를 낳습니다. 그 인내 뒤에 반드시 기쁨이 온다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무하마드 유누스’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그도 믿음으로 세상의 비웃음과 맞서 결국 기쁨을 쟁취한 인물입니다.
1940년 6월 28일 방글라데시 치타공 항구 도시에서 태어난 무하마드 유누스는 사회적 기업가, 경제학자, 시민사회 지도자로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고 소액 신용대출 개념을 개척한 공로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유누스는 가족 중 아홉 자녀 중 세 번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금세공인으로 항상 아들들에게 고등 교육을 받도록 격려했습니다. 유누스는 방글라데시 다카 대학교에 다녔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방글라데시 해방전쟁이 끝난 1972년 유누스는 치타공대학교 경제학과장이 됐습니다. 1974년 방글라데시의 기근은 유누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유누스는 경제에 대한 이해를 재고하고 경제 이론이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도울 방법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유누스는 학교를 나와 가난한 사람들과 머무는 실험을 계속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인력거를 17,000원에 비싼 이자로 빌려 허덕이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실험을 합니다. 그의 첫 번째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요브라 마을에서 대나무 가구 만드는 42명의 여성에게 주머니에서 총 27달러를 빌려준 것입니다.
이 소액 대출을 통해 원자재를 구입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비웃었습니다. 아무도 안 갚을 것이라고. 그러나 돈의 회수율은 98%였습니다. 세상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실험의 성공에 힘입어 유누스는 1983년에 Grameen Bank(Village Bank)를 설립했습니다. 이 은행은 상호 신뢰, 책임, 참여 및 창의성에 기반을 둔 은행 시스템인 신뢰와 연대의 원칙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그라민 은행은 생산적인 활동을 하거나 소규모 사업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액 대출로 알려진 소액 대출을 제공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라민 은행은 크게 성장했으며 전 세계의 다른 소액 대출 기관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2021년 9월을 기준으로 그라민 은행은 2,600개 이상의 지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방글라데시의 81,000개 이상의 마을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자금은 수조 원대로 늘었고 상환율은 90% 이상입니다.
소액 금융 분야에서 유누스의 업적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2006년에 그와 그라민 은행은 “아래로부터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이렇듯 세상에는 세상의 비웃음을 오히려 비웃으며 꿈을 이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비웃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고 세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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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갈릴래아 호숫가에 새롭게 조성된 성지가 있습니다. 기존의 성지는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회당, 베드로의 집터, 참된 행복 성당, 오병이어 성당,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온 사제가 성지순례를 왔다가 호수 반대편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텅 빈 공터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곳에 순례자들을 위한 피정의 집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미그달’이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고향 근처였습니다. 피정의 집을 만들기 위해서 공사를 하던 중에 가파르나움에 있던 회당보다 더 오래된 회당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전에 있었던 어부들의 마을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회의 관심과 이스라엘 정부의 도움으로 피정의 집보다 먼저 성당이 생겼습니다. 성당의 이름은 ‘더 깊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였던 베드로 사도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호수 반대편의 성지는 예수님과 만남이 있었던 곳이라면 새롭게 조성된 ‘막달레나’ 성지는 피정할 수 있도록 계획된 성지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뒤로한 제대는 2000년 전에 있었던 배의 모양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 배를 축성하였다고 합니다.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면서 배를 보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깊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배는 선교의 상징입니다. 성당 안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소재로 한 벽화가 있었고, 소성당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호수에 빠진 베드로 사도를 구해 주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고, 일곱 마귀가 들린 막달라 여자를 치유해 주시는 벽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는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이 워낙 생생하게 묘사되어서 예수님께서 지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것 같았습니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공간에는 기둥이 있었습니다. 그 기둥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수산나, 마르타, 막달레나, 살로메, 클레오패, 마리아’는 그렇게 예수님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이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조성된 ‘막달레나’ 성지를 보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로마는 막달레나에 있던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그곳의 주민들도 로마에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파괴된 마을은 2000년이 지난 지금 한 사제의 ‘꿈’에 의해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잡풀밖에 없었던 텅 빈 공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일곱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인들과 대화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은 ‘더 깊이’ 그물을 던지는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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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난 강론)
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는 본당 신부의 임기가 6년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6년을 더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인데 재선에서 당선되면 4년 더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제가 있던 서울대교구는 본당 신부의 임기가 5년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5년을 마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한국은 대통령의 임기가 5년 단임제입니다. 교회의 인사이동은 사제들에게도, 교우들에게도 큰 관심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전해서 오시는 신부님에 대해서 검색하기도 합니다. 신부님이 하였던 강의를 보기도 하고, 신부님이 있었던 본당에 대해서도 검색하곤 합니다.
사제들도 새로 가는 본당의 홈페이지를 검색하기도 합니다. 올해 서품 30년이 되는 저는 절반은 본당에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기관에 있었습니다. 사목국, 해외연수, 청소년국, 성소국 그리고 지금은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에 있습니다.
기관에 있을 때는 인사이동에 대한 느낌이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당에 있을 때는 인사이동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정이 들었고, 함께한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본당에서 인사이동은 오전 10시 미사를 마치고 전임 신부님이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떠나게 됩니다. 교우들은 떠나는 신부님과 아쉬움의 이별을 합니다. 아쉬움과 슬픔은 잠시입니다. 신부님이 떠나면 곧 새로 오시는 신부님이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새 신부님은 먼저 성당 제단 앞으로 가서 기도를 합니다. 교우들은 신부님을 환영하면서 기쁨의 박수를 칩니다. 이렇게 아쉬움은 새로운 설렘으로 바뀝니다. 헤어짐의 슬픔은 새로운 만남의 기쁨으로 변합니다. 신부님이 떠나실 때 교우들이 부르는 성가가 두 가지 있을 것 같습니다.
인정이 많고, 어른들에게 예의가 밝으며,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고, 병자성사는 어디든지 가고, 장례가 나면 교우들과 함께 연도하고, 미사시간 30분 전에는 고백소에서 교우들을 기다리고, 레지오 훈화도 꼬박 들어가고, 수단을 즐겨 입는 사제가 떠나면 성가 115번 ‘수난기약’을 부를 것 같습니다.
반면에 말을 함부로 하고, 준비 없는 강론을 길게 하고, 성당을 자주 비우고, 재정이 불투명하고, 권위적인 사제가 떠나면 성가 175번 ‘이보다 더 큰 은혜와’를 부를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을 알면서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교리도 체계적이지 않았고, 조직도 없었고, 재정적인 지원도 없었습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떠날 때면 공동체는 눈물로 환송했습니다. ‘수난기약’을 불렀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박해가 심했습니다. 사제가 다른 곳으로 갈 때면 신자들이 모시러 왔습니다. 박해를 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를 모시는 기쁨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지금도 남아서 사제가 이동할 때면 가는 곳의 본당에서 사제를 모시러 옵니다. 사제들도 초대교회의 사제들이 보였던 복음의 열정과 헌신을 배워야 합니다.
형식만 남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같이 남아야 합니다. 부르클린 교구처럼 6년씩 12년을 있는 것도, 서울대교구처럼 5년만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한국교회의 사제들처럼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열정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려는 헌신과 희생이 중요합니다.
교회와 사찰이 세상의 기준이 되고 세상을 이끌어야 하는데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직 하느님 나라는 완성되지 못하였습니다. 헌신, 희생, 나눔, 봉사는 교회가 가졌던 소중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경쟁, 성과, 업적, 재물이라는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느덧 대접받는 것에 익숙한 종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망각하곤 합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와 함께 하지 못하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여러분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겠지만 여러분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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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16-20: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셨고,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다음 무덤에 모셔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그들은 다시 그분을 보았다. 주님께서는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시어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7절).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돌아오시리라는 것, 당신이 그들을 떠나는 것은 잠시뿐이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시며 어둠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주님을 사랑한 이들은 주님께서 잡혀 결박당한 채 최고 의회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시고 묻히시는 것을 보고 울며 애통해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한 자들은 보기만 해도 거슬리던 자가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하자 기뻐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죽음에 처했을 때는 슬퍼했지만 주님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슬퍼했으나 세상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을 때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으나 세상을 사랑한 이들에게는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기뻐한다면 세상과 함께 슬퍼하게 되겠지만, 세상이 즐거워할 때 슬퍼한다면 나중에 세상이 슬퍼할 때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 기쁨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내가 죽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이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인 후에 얻는 기쁨이므로 부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옷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 옷을 입지 못한다면,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가? 내가 우선 기쁨을 가져야 기쁨을 행복을 전할 수 있다. 이렇게 얻은 기쁨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변하면 쉽게 변할 수 있으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분이 변할 수 없는 분이기에 그 어떤 세상의 힘도 빼앗을 수 없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그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며,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기쁨도 완전한 기쁨이 되어 없어지지 않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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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쁨>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지금 상황은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에게 작별의 말씀을 하시는 상황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임박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곧 닥친다는 뜻이고,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죽음 때문에 당신과 제자들이 떨어져 있는 시간은 짧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만 이틀 정도입니다.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 때문에 제자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곡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복음 선포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했던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생각하고서 안도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 때문에 너희는 ‘큰 슬픔’에 빠지겠지만, 그 슬픔은 곧 ‘큰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뜻이고, 이 말씀도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근심’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기뻐하거나 좋아했던 박해자들은 예수님 부활 후에 어떻게 바뀌었을까? 성경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당혹감, 불안감 등을 느꼈던 것 같고(사도 2,43),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분노했습니다.(사도 4,2)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죽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부활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믿음과 희망 속에서 기다려라.”> 앞의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
또 베드로 사도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 이 말씀들은 당신의 십자가의 길은 온전히 당신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과 제자들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부활 신앙이 없는 제자들이 당신의 뒤를 따르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만일에 부활 신앙이 없는 제자들이 ‘죽음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자살행위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는 말씀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지상에서의 인생은 짧은 십자가의 길과 같다.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석하더라도, 지상에서의 신앙 여정을 슬픔과 고통만 있는 십자가의 길로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금’이라는 시간은 이천 년 전에 지나갔고,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하실 예수님’이 아니라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신앙인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이고, 그 기쁨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힘든 일도 많고 슬픈 일도 많습니다. ‘영원한 기쁨’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불완전하고, 쉽게 깨지거나 잃을 때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충실한 신앙인들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작되었고 이미 누리고 있는 영원한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요한 16,2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것에 대해서 늘 기뻐해야 하고, 또 그것을 감사드려야 하고, 그러면서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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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조금 있으면”(그리스 말 ‘미크론’)이라는 낱말이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심판(호세 1,4; 이사 10,25; 예레 51,33 참조)이나 구원(이사 29,17 참조)의 때가 가까웠음을 예고할 때 쓰던 고유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때가 가까웠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두 번의 “조금”의 시간은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지내는 하루 남짓한 시간과, 죽음부터 부활까지 그분을 볼 수 없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조금”의 시간에 제자들은 엄청난 일을 겪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이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붙잡히신 주님을 배신하고 외면한 일, 주님의 수난과 죽음, 슬픔과 후회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조금”의 시간 동안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마주할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을 아셨기에, 앞으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며 누리게 될 큰 기쁨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의 한평생은 그날의 제자들이 살았던 그 “조금”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슬픔과 기쁨, 불확신과 굳은 믿음 사이를 쉼 없이 오가는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 여정이 말하여 주듯, 실패한 듯 보이는 일에서도 승리와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제1독서 참조) 희망 속에서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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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우성 비오 신부님]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어느 만큼 돌볼 수 있을까요? 스스로 힘으로 자신에게 어느 만큼 참 위안이 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어느 만큼 빛을 밝힐 수 있는 걸까요?
믿음 안에서 성찰해보면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오직 내가 주님의 뜻과 사랑의 길에 온 마음을 내어드릴 때, 지극한 믿음으로 따를 때, 나는 비로소 있는 그 자체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완벽하게 구원받으리라 믿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유혹도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세상 안에서 군림할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그런 유혹이 우리 자신 밖에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망각하도록 이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뜻하는 근심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에게 갇히는 근심이 아닙니다. 게다가 앞으로 닥쳐올 사건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근심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향해 하느님 백성을 모아들이기 위한 근심, 복음의 생명을 나누어주기 위해 자기를 비워내는 근심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근심은 스스로의 힘이 아닌, 바로 은총으로 주시는, 주님을 뵈옵는 기쁨으로 인도하는 근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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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또 사랑하는 제자들과의 이별의 안타까움과 함께 스승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6장 16절) 1)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차마 주님께 질문하지 못하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은 스승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에서야 알아듣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혀 모양의 성령을 받고 나서부터 스승의 이 말씀을 확실하게 알아듣고 부활을 나눌 수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께서는 당장 유다인들의 폭력과 죽음을 맞아야 하는 순간을 대면하고 계십니다.
구약의 인물들 중에 성조 아브라함도 결국 죽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인 사라의 죽음을 슬퍼하며 마므레 맞은 편에 있는 막펠라 동굴에 그녀를 안장했었는데, 그도 그 자리에 안장됩니다.(창세기 25장 10절)
그의 아들 이사악도(창세기 35장 29절), 야곱도(창세기 49장 33절), 요셉도(창세기 50장 26절) 다 죽습니다.
하느님의 대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모압 평야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모세도(신명기 34장 5절) 약속의 땅을 밟아 보지 못한 채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 쪽 골짜기’>에 묻힙니다. 그는 혼자 죽었기에 아무도 그 장소를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성왕이라고 하는 다윗도 왕으로서 영광의 날들을 뒤로하고 시온산 자락에 묻힙니다.(역사서 열왕기 상권 2장 10절) 성서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고 또 하느님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도 죽음 앞에는 한낱 나약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공평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죽음을 앞두시고 인간적인 슬픔과 함께 제자들에게 ‘이별과 재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스승께서 곧 돌아가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스승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표현대로 죽으셨다가 부활 후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장은 간단하지만 이렇게 죽음과 부활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간 바오로는 아퀼라는 유대인을 만납니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바오로와 같은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함께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프리스킬라라고 그와 함께 이탈리아를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는 그곳에서도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씁니다. 바오로는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와 합세합니다. 바오로와 일행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며 말씀을 전파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반대하며 모독의 말을 퍼붓기도 합니다.
바오로는 스승께서 제자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나라고 하셨듯이 옷의 먼지를 털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마침 회당 옆에 하느님을 섬기는 티티우스 유스투스 집이 있는데 바오로는 그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코린토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반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큰 기쁨과 함께 그분의 부활증인이 됩니다. 사도들은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합니다.
바오로와 그의 일행 실라스와 티모테오도 이방인들 땅에서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모욕적인 말을 듣지만 괘의치 않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제자들과 사도 바오로의 복음선포에 대한 열정을 우리도 닮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에덴동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처럼 푸대접과 수모를 겪고, 또 천막을 만드는 생업을 하면서 인간의 밑바닥 삶에서부터 더 나아가 주님을 잃고 슬픔과 고통 속에서 바라보는 십자가에서부터 시작할 수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한 하느님의 말씀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그래서 평범할 때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세상에서 평범하게 사는 우리에게도 ‘하느님 나라는 이해되지 않는 낯설기만’하는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초라한 순간을 지나칠 때도 있고, 누구에게도 다 털어놓을 수 없는 외로움의 순간도, 사람들이 버린 돌의 처지에서 하느님 나라는 늘 시작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주님처럼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절규의 순간을 맞으셔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끄십니다. ‘너희의 슬픔, 너희의 고통은 기쁨으로 바뀔것이다.’라는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희망이며 우리의 발을 비추는 등불이 됩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주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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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복음 16장 16절-20절에서 특별히 같은 문장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16절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미크론 카이 우케티 테오레이테 메(Μικρὸν καὶ οὐκέτι θεωρεῖτέ με)’
이어서 주님께서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카이 팔린 미크론 카이 오페스테 메 καὶ πάλιν μικρὸν καὶ ὄψεσθέ με)’라고 말씀하신다.
17절에서 제자들이 스승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며 말한다. 18절에서 제자들이 ‘조금 있으면(미크론 μικρόν)’이라는 스승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반문한다.
19절에서 다시 주님께서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똑같은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고 제자들은 결국 못 알아듣는다.
20절에서 주님께서 반복하신 말씀에 대한 결론으로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는 수사법은 지루하고 틀에 박힌 것 같은 답답함이 있지만, 요한이 셈족의 언어의 이 특징을 사용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강조해서 전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읽게 된다.
스승께서 수난의 시간이 다가오고 제자들은 알지 못하는 점과 제자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다인의 폭력으로 스승께서는 죽음을 맞게 되고 제자들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승의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거부하지만 제자들은 이번에는 부활하신 스승을 만나게 되고 기쁨을 맞게 되는 것이다. 반복해서 복음의 핵심인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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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 믿음으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그분과 일치하여 그 이름에 걸맞은 청을 해야 합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 아니면 서로 사랑할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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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 책상 위에는 얇은 나무 막대기가 많습니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50개 이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회초리? 저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젓가락? 이 역시 아닙니다. 환경보호를 위해서도 나무젓가락은 되도록 사용하지 말아야지요. 정답은 연필입니다.
한때 연필의 필기감이 좋아서 모든 글을 연필로 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번거로웠습니다. 흑연이 번져서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때도 있었고, 특히 연필 깎는 수고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필기감도 좋고 글씨도 잘 번지지 않는(물론 물이 묻으면 심하게 번지는 단점이 있지만) 만년필을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연필이 제 역할을 못 합니다. 그래서 현재 연필은 필기도구라기보다 그냥 얇은 나무 막대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연필의 의미가 사라진 것입니다.
의미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두고 사용해야 합니다. 책을 사서 책장에만 꽂혀있다면 어떨까요? 그냥 종이 뭉치일 뿐입니다. 목걸이, 귀걸이가 서랍 깊숙이만 있다면 그냥 쇠조각일 따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의미’ 없는 만남일 때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시간 낭비야.’
자기의 관심이 의미를 만듭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떤가요? 큰 의미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분이십니까? 혹시 관심이 없어서 주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이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께 대한 나의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조금 더 알려고 하고, 조금 더 기도하면서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귀한 분으로,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겪을 고난과 부활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직 겪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에 울며 애통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부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질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이 멈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관심이 의미를 만드는 것처럼, 주님께 대한 관심으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했던 사도를 우리는 독서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삶의 유일한 의미로 복음을 받아들인 뒤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 삶의 유일한 의미가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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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은 우리 기쁨의 바위>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이 당신을 볼 수 없게 돼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당신을 볼 수 있게 돼 제자들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기쁨으로 바뀌는 근심에 관해 성찰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모든 근심이 다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되치기를 잘하여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지만 어떤 사람은 외부 상황에 의해 자기의 근심과 기쁨이 좌우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새옹지마의 얘기는 우리 인생을 깊이 생각게 하지요.
중국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도망치고 이에 이웃이 위로의 말을 전하자 노인은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며 태연하게 말합니다. 과연 며칠 후, 노인의 도망쳤던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하자 노인은 담담하게 "이게 화가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말했는데 그 말대로 노인의 아들이 오랑캐 땅에서 온 말을 길들이다가 낙마하여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맙니다.
이에 이웃들이 노인을 위로했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담담하게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라고 말하고, 과연 노인의 말대로 몇 년이 지나 전쟁이 났을 때 다른 집 아들들은 전쟁에 나가 다 죽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친 다리 때문에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땅을 치며 애통할 일도 있고 기뻐 춤출 일도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이 출렁일 수도 있고 이 노인처럼 길흉화복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근심과 기쁨의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의 근심과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슬퍼할 일도 많고 기뻐할 일도 많지만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도 주님 때문이고,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도 주님 때문이어야 한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근심과 기쁨이고, 동양의 행불행과 다른 그리스도교의 행불행입니다.
조금 있으면 주님이 안 계시기에 우리는 근심하고, 조금 더 있어 주님께서 다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게 되는, 그런 인생이어야 하고, 그런 신앙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것들로 인해서는 우리 인생이 출렁거리지도 않고 일희일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안 계신 것이 근심거리고, 주님이 함께 계시면 온갖 근심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기쁨은 온갖 출렁거림을 막아 잔잔해지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묵직한 바위와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희로애락에 까불리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시는 기쁨의 바위라고 다시금 고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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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교의 사랑, 선교의 열정>
-치열熾㤠한 삶, 가열加熱찬 삶이 답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요한14,18;16,22)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선교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숨통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선교를 지향합니다. 그러니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 누구나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이자 선교사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이요 밖으로는 선교, 안으로는 기도요 밖으로는 선교 활동입니다.
얼마전 교황님의 성소주일 담화문중 영문해석이 잘못되었음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미션mission’을 ‘사명’이 아닌 ‘선교’로 번역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없이는 성소도 없다’로 해야 적절했습니다. 예전 2012년 오틸리아 연합회 회의에서 요셉 수도원의 자치좌 수도원이 결정될 때 회의에서 요셉수도원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일이 생각납니다.
‘선교가 본질인데 너무 관상적이지 않느냐?’는 요지의 물음에 제 짧은 영어 실력이지만 다음 한마디가 논쟁을 종결시켰고 우렁찬 박수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선교와 관상은 둘이 아닌 하나다!(Mission and contemplatiom is one without two!)”.
흡사 ‘황소 뒷걸음 치다 쥐잡는다’는 속담처럼 순간 성령의 은총으로 생각치 않은 답변으로 위기를 벗어난 것입니다. 관상은 선교 활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존재자체가 복음 선포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와 관상에 기본적 자세가 날로 치열한 삶, 가열찬 삶입니다. 선교의 사랑, 선교의 열정입니다. 어제 의기투합하는 도반과의 나눔이 생각납니다. 어느 동료 도반의 성취에 대한 제 견해입니다.
“학위논문이 기막히게 완벽하네요. 토마스 머튼의 모두를 망라했어요. 목숨 걸고 토마스 머튼에 빠져 자나깨나 머튼만 생각하며 참 치열히 한결같이 공부한 것 같네요. 내가 이미 참고 문헌 책을 거의 다 봤기에 물흐르듯 읽었고 그 분위기를 알지요. 내가 머튼에 대해 석사논문 쓴 것이 1988년이니 벌써 35년이 지났네요. 도반의 책 후기를 보면 캐나다 9년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감동깊게 유려한 문체로 감동깊게 묘사되어 있지요! 참으로 도반이 캐나다에서 이룬 성취에 감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소감을 나누니 더욱 분발심이 샘솟네요!”
이어 계속하여 보낸 제 소감문입니다.
“토마스 머튼 1915-1968 만53세, 프란치스코 신부 1949-2023현재 만74세, 머튼보다 21년 더 살고 있네요. 지금의 관심은 이미 머튼을 완전히 넘어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가 됐지요! 수도공동체 체험만해도 제가 머튼을 훨씬 능가했고, 머튼 참 문제가 많았던 장상도 참 힘들어 했던 명암明暗 양면을 지닌 분, 그리고 불우했던 분이지요. 물론 불세출의 천재이자 영성가임은 분명하구요. 통과해 가야할 분이지 결코 계속 머물 분은 아닙니다. 영원히 머물 분은 오직 한 분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지요! 토마스 머튼은 경탄의 대상은 될지언정 결코 부러움의 대상은 아닙니다. 머튼 책 안본지 참 오래됐습니다.”
어쨌든 토마스 머튼이나 논문을 쓴 도반의 공통점은 치열한 삶을 살았던 열정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수도형제의 답변입니다.
“로마에서 공부할 때 학생들 공부 엄하게 시키기로 유명했던 교수님 한분이 수업 마지막 시간에 남기신 다음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 아들아, 이 밖에도 조심해야 할 바가 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코헬12,12)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인 믿는 이들의 삶은 치열해야 하고 날로 가열차야 합니다. 하루하루 절실하고 절박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무려 아주 오래전 26년전 여기에서 써놨던 “사랑”이란 글을 여전히 공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살아온 제가 고맙습니다.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바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래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날로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어제 오랜만에 갑작스레 면담고백성사차 방문했던 참으로 열심한 아름다운 자매와의 만남도 생생합니다. 아름다움은 젊음의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치열한 삶에 있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미안합니다.”
즉시 강복 후 안아 드리며,
“자매님 자체가 제게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답하고 나니 얼마나 통쾌하던지요! 이또한 선교열정, 선교사랑의 표현일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 마음도 똑같을 것입니다. 보속으로는 '말씀 처방전'에 이어 성모성월을 맞이하여 성가 244장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정말 기도하듯 성가 부르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감동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습니다. 참으로 치열한 사랑을 살다가 빈손으로 주님께 갔을 때, 주님은 당신 품에 꼭 안아 드리며, “사랑하는 너야말로 나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수도형제들과의 공동카톡방에 올린 다음 “꽃길”이란 시와 당부도 생각납니다. 제 집무실은 천장암天藏庵의 은수처이자 선교의 장이요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 야전사령부입니다.
“내 집무실 꽃자리 주님이
계시는 곳
천국에 이르는
꽃길
저절로 난
꽃길
샛노란 애기똥풀꽃들 사이
꽃길
주님 친히 마련해 주신 사랑의
꽃길”-2023.5.5
“사랑하는 수도형제님들, 제 집무실옆 꽃길 주변의 애기똥풀꽃들 절대로 깎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하늘길입니다. 마음 아팠던 형제자매들 면담성사후 사진찍어 드리는 힐링의 꽃길입니다.”
이런저런 예화로 서론이 참 길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정이, 선교활동이 참 치열합니다. 주님 사랑에서 샘솟는 지칠줄 모르는 참 치열한 삶입니다. 아테네에서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코린토에서 치열한 선교활동을 펼치는 바오로입니다. 관계되는 도반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천막을 만드는 생업과 함께 선교활동에 전념하다 도반들이 늘어나고 여유가 생기자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고 풍부한 결실을 거둡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입니다. 복음에서 주목할 말마디는 “조금 있으면”으로 무려 7회 나옵니다. 곧 죽음의 슬픔에 이는 부활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파스카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버텨내고 견뎌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은총, 파스카의 축복입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불안은 평화로,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은 빛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니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어찌보면 이들은 영적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순간의 슬픔이나 불안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라 항구히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에 전념할 때 주님의 파스카 은총이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어둠을 빛으로, 불안을 평화로 바꿉니다. 파스카 신비의 은총이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파스카 미사은총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마태28,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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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16,16)
<하느님의 나라인 민주화!>
오늘 복음(요한16,12-15)은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의 의미로 들려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부활의 절대적 전제가 죽음이며, 성령강림을 통한 회개의 절대적 전제가 예수님의 승천인 떠남의 사건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오신 성령께서 제자들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대변신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믿어야 할 교리의 핵심을 성령께서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신 결과입니다.
성령은 고통을 고통으로만 보지 않게 해 주고 그것을 뛰어넘게 해줍니다. 오늘 독서(사도18,1-8)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박해는 또 다른 지역으로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으로 갑니다."(사도18,6)
박해로 인해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유럽으로, 우리나라로, 온 세상으로 전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흔세 번째 기억하는 5.18의 고통과 박해'는 모두가 함께 잘사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인 민주화의 결정적 초석입니다.
"주님, 불의에 맞서 항거하다가 불쌍하게 희생된 수많은 5.18 연령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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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S3BWcxTy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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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기쁨을
따라갑니다.
바뀌고
지나가는
변화무쌍한
우리들
시간입니다.
근심이 있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근심 뒤에
기쁨이 옵니다.
근심을 나누시는
주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주님을 통해
우리는
기쁨을 다시
얻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기쁨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됩니다.
기쁨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믿고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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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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