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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의 음악
극도의 다성 음악으로 난해해진 유럽의 음악은 새로운 음악으로의 전환을 갈망하고 있었으며, 단순한 화음에 의한 영국 음악은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큰 특징은 모방 기법이며 이 기법은 유럽 전역에 퍼졌다.
또한, 르네상스 중기부터는 음악에도 인본주의적 사상이 반영되기 시작하여 음악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도 자유로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한편 르네상스 말기에는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으로 새로운 세대의 음악이 예고되기도 하였다.
1.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
❶ 르네상스 초기의 유럽 대륙은 새로운 음악으로의 전환을 갈망하고 있었으며, 단순한 화음에 의한 영국 음악이 그 돌파구가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❷ 모방 기법이 사용되면서, 유럽 전역에 퍼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❸ 르네상스 음악의 중기부터는 음악에도 인본주의적 사상이 반영되기 시작했으며, 음악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자유로움을 추구하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❹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으로 새로운 세대의 음악이 예고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생을 의미하는데, 15∼16세기의 유럽에서 중세 이래의 신학 중심 학문 체계에 반기를 들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예를 다시 살리려는 움직임이다. 이 사상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생겨났으며, 인본주의(人本主義)에 기반하여‘인간다움’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베이컨, 데카르트 등에 의해 발전된 과학적 사고와 방법은 성서에 기초를 둔 중세의 신(神) 중심의 사고와 대치되었다.
한편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 족에 의해 중동 지방을 통하여 이루어지던 정상적인 동방 무역로가 봉쇄됨에 따라 유럽인들에게는 새로운 무역로 개척이 필요하였고, 이는 곧 15∼16세기에 걸친 인도 항로와 신대륙 발견으로 요약되는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를 열어 놓았다.
음악에서의 고대의 재탄생은 모델로 삼을 만한 작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음악 이론에 대한 재발견과 연관된다. 앞에서 다룬 바와 같이 중세에 만연했던 난해한 수와 비율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예술로서의 음악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소리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중기에 이르면 르네상스의 정신이 음악에 투영되기 시작하는데, 교회 세력의 약화로 인한 사회 변화에 따라 음악적으로도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 십자군 원정(1096∼1291) 이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피렌체·제노바를 중심으로 서부 유럽과 동방의 이슬람교 문화권의 접촉이 확대되었다. 당시 교역의 중심지인 이들 도시들은 막대한 부(富)를 축적하였으며, 이들 도시의 부는 르네상스를 이룩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1) 르네상스의 새로운 음향들
르네상스 시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신선하고 수직적이며 단선율적인 구조의 음악을 추구했던 초기 르네상스와, 이른바 ‘르네상스의 모차르트’ 라고 불려지는 조스캥 데 프레를 필두로 음악적 절정에 이르는 르네상스 중기, 그리고 종교 개혁·반종교 개혁에 대한 반발이 나타났던 격동의 르네상스 말기이다.
르네상스 음악은 기악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기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성악중심의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고, 대표적인 연주 방식은 아 카펠라(acappella)였다. 중세 다성 음악이 3성부 구조였는데 반해, 가장 낮은 음역을
지칭하던 테노르보다 더 낮은 음역을 첨가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에는 4성부 편성이 일반화되었다. 화성의 기본을 4성부로 설명하는 전통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음악은 협화음을 중시했다. 불협화음은 협화음으로 해결되도록 유도되었는데 대위법(counterpoint)은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사용에 대한 규칙을 규정한 음악 이론으로 15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각 성부의 선율을 강조하기 위해 모방 기법이 사용되었다.
르네상스 음악은 초기에 호모포니(homophony)가 중시되었지만, 15세기 말부터는 폴리포니(polyphony)적으로 변화한다.
※ 아 카펠라(a cappella)
아 카펠라란 반주 없이 부르는 합창을 의미한다. acappella에서 ‘a’ 는 ‘~풍으로’, ‘cappella’는 ‘교회’를 의미하는데, 인간의 목소리가 가장 귀중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중세 교회에서 악기의 소리를 배제하고 반주 없이 합창을 했던 데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 호모포니
하나의 선율이 강조되고 다른 성부는 그 주선율에 화음을 채우는 방식
※ 폴리포니
여러 선율이 각각 다른 성부에서 중요성을 갖고 유지되는 것 (다성 음악)
[1] 르네상스 초기
15세기에 들어와서 유럽은 경제 사정도 좋아졌으며, 14세기를 황폐화시켰던 페스트라는 전염병도 잠잠해졌다. 이 때문에 여행 조건이 매우 나아졌는데, 이러한 변화는 음악과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음악가들은 자신이 속해 있던 교회나 궁중에서 다른 궁중, 교회로 옮기는 것이 자유로워지게 되었고 특히 멀리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교회는 이전처럼 작곡가와 가수를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성가대를 훈련하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이기도 했다. 특히 귀족들은 음악가들의 새로운 후견자로 급부상했는데, 그들은 음악가들에게 거액의 급료를 지급하면서까지 훌륭한 음악가를 자신의 성에 초빙하려고 애썼다.
Citt? del Vaticano, visita alla Basilica Di San Pietro
▲ 르네상스 양식의 대표적 건물인 바티칸 시국의‘산피에트로 대성당’
※ 영국은 섬으로서 대륙의 난해하고 복잡한 세기말적 요소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고 있었다.
1) 영국 음악에 매료된 15세기의 유럽 대륙
르네상스 초기의 유럽 대륙은 새로운 음악으로의 전환을 갈망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새로운 음악의 모범이 된 것은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영국의 음악이었다. 14세기 유럽 대륙의 작곡가들이 완전 협화 음정(1도, 4도, 5도, 8도)를 고집했던 것과는 달리 영국의 음악은 중세부터 3도와 6도 같은 불완전 협화 음정을 자유롭게 사용해 왔다. 이러한 음악은 대륙에 있는 작곡가들에게 더없는 신선함과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국 음악은 대륙으로 건너와서 포부르동(fauxbourdon)이라는 기법으로 정착되었는데, 이것은 주로 6도 병행으로 이루어진 두 선율 사이에 즉흥적으로 선율을 삽입하여 연주하는 것이다.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이 선율은 윗성부를 오르가눔처럼 완전4도 아래로 병진행시켜서 노래했다.
이렇게 대륙의 르네상스 초기 음악에 영향을 준 영국의 대표적 작곡가로서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 1380~1453년경)이 있다. 그는 영국풍 디스칸트의 감미로운 화음에 프랑스풍의 논리적인 대위법을 융합하여 새로운 음향을 탄생시켰다. 던스터블의 작품 중에 세속 음악은 2~3개 정도 밖에 없고 나머지는 60여 개에 달하는 종교 음악이다. 약 40여 개의 모테트는 던스터블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음악적으로 매우 우수하다. 부드럽고 조용한 분위기의 그의 곡들은, 당시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중시했던 영국의 성모 신앙으로부터 연유한다.
14세기 유럽 대륙의 작곡가들이 세속 음악에 몰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국 작곡가들은 전체 미사 항목에 통일성을 주는 근본 바탕을 그레고리오 성가에 두고 종교 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 포부르동
포부르동이란 프랑스 어로 ‘가짜 베이스’라는 의미인데 3화음의 음향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풍 디스칸트
영국풍 디스칸트의 특징은 거침없이 흐르는 듯한 협화음의 울림이다.
※중세에 세속 작품으로 분류했던 모테트가 르네상스에 이르면 종교곡으로 전환된다.
2) 르네상스 초기의 작곡가들
영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유럽 대륙에서 새로운 음악을 작곡한 사람들로는 뒤페(G. Dufay)와 뱅쇼와(G. Binchios), 오케험(J.Ockeghem)이 있다.
① 뒤페와 뱅쇼와(부르고뉴악파): 유럽 대륙의 음악은 선에 선을 더하는 수평적 작법으로 대위법적 기법을 써 왔지만, 뒤페(Guillaume Dufay; 1400~1474년경)에 이르러서 영국의 영향을 받아 3화음의 음향을 선호하게 된다.
뒤페는 세속 음악과 종교 음악의 전 분야에서 중요한 작품을 남긴 15세기 최고의 작곡가이다. 부르고뉴에서 태어난 뒤페는 성당의 성가대에 들어가면서 음악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여러 나라의 귀족들과 왕, 교회의 부름을 받아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뒤페는 15세기 유럽 다성 음악이 미사곡을 중심으로 작곡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는데, 미사 통상문의 각 부분을 음악적인 요소로 연관시켜 미사곡 전체의 통일감을 획득한 것이다. 이를 위해 뒤페가 주로 사용한 방법은 미사 통상문 전체에 하나의 정해진 선율을 테노르 성부의 선율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의 정해진 선율을 정선율(cantus firmus)이라고 하며, 이 방법에 의한 미사곡을‘정선율 미사곡’이라고 한다. 뒤페는 세속 음악인 발라드 형식에 따른 샹송(chanson) 선율을 미사곡의 정선율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가“만일 내 얼굴이 창백해져 있으면 그것은 사랑의 괴로움 때문이리.”라는 이러한 가사를 미사곡에 사용하면서도 이것을 교회에 대한 불복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오히려 음악가를 겸하는 성직자로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융합시키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5세기 뒤페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례적이든 아니든 라틴 어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는 모두 모테트라고 칭했으며, 모테트는 기독교의 전례 음악으로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장르로 자리매김되었다.
르네상스 초기 뒤페 세대로서 샹송에 두각을 나타낸 작곡가는 뱅쇼와(Gilles Binchios; 1400~1460년경)이다. 그 또한 부르고뉴에서 태어난 성직자 겸 음악가였다. 뱅쇼와는 미사곡, 모테트 그리고 샹송을 작곡했는데, 60여곡에 이르는 샹송은 그의 음악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르이다. 10곡을 제외한 그의 샹송은 모두 론도 형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거의 최상성부의 주선율이 아름다운 3성부나 4성부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르고뉴는 지금의 북프랑스에 해당된다.
※12세기~14세기까지 다성 음악의 중심 장르가 모테트 였다면 15세기에는 미사곡이 중심 장르로 부각되었다.
※ 샹송(chanson)
르네상스 초기의 세속 음악은 중세에 체계화된 형식이 계속 유지되었는데 프랑스 지방에서 그 중 발라드, 론
도, 비를레 같은 형식들을 모두 일컬어‘샹송(chanson)’ 이라고 했다. ‘샹송’은 다양한 형식의 가곡이라 할 수 있겠다.
※ 기독교의 전례란 미사 및 성무일도 등 교회의 의례를 의미한다.
② 오케험(J. Ockeghem)과 네덜란드악파: 네덜란드 작곡가들이 서양 음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인데 초기의 오케험의 영향력은 르네상스 중기에 조스캥(Josquin Depre`s)으로 이어지면서 그 후 200년 이상 계속되는 대위적 다성 음악의 기틀을 마련하여 서양 음악 사상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르네상스 초기의 제2세대 작곡가로는 오케험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은 뒤페와 뱅쇼와보다 더 자유롭게 음악적 표현을 확대했다.
요하네스 오케험(Johannes Ockeghem; 1410~1497년경)은 어린 시절을 네덜란드 지역에서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오케험은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작품이 놀라운 점은 미사에 대위법적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수직적인 조화가 무너지지 않도록 이를 세밀하게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선율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오케험이 뛰어난 가수였기 때문이다. 오케험은 음악으로 대단한 명성과 부를 얻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황금의 목소리를 가진 사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케험은 또한 미사의 근간을 이루던 그레고리오 성가의 사용을 더욱 자유롭게 하여, 성가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로 작곡한 새로운 모티프를 독창적으로 활용하였다.
오케험과 그 시대 다른 작곡가들은 작곡 기교를 과시하기 위하여 카논(canon)을 작곡하였다. 이때 사용된 카논의 기법은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
네덜란드란 ‘낮은 지역’ 이란 뜻으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 용어가 현대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지역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지방을 ‘플랑드르’라고도 한다.
※오케험의 곡들은 수직적· 수평적으로 완벽한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견고한 건축물을 사방에서 보는 것과 같다 해서 오케험을 ‘음악의 건축가’ 로 비유하기도 한다.
※앞서 중세의 작곡가들이 작곡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곡한 것은 동형 리듬 모테트였다.
1) 직행(mensuration): 동일한 선율과 음가로 모방하는 것
2) 반행(전위, inversion): 상행한 선율은 하행으로, 하행한 선율은 상행으로 모방하는 기법
3) 역행(retrograde): 선율의 뒤에서 시작하여 모방하는 기법
4) 확대(augmentation): 2배, 4배의빠르기로 모방하는 기법
5) 축소(diminuion): ½ , ¼ 빠르기로 모방하는 기법
<카논 악보와 연주의 예>
?카논 악보
?위 악보의 연주 방법
3) 르네상스 초기의 세속 음악
15세기 음악과 연회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음악은 기사들의 모임이나 결혼식 등 각종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 초기의 사람들이 연회에서 노래하고 연주하고 춤추었던 것은 많은 기록과 회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춤곡으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바스 댄스’ 였다. 바스 댄스는 위엄 있는 느릿느릿한 곡이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템포가 빨라져서 생생한 춤을 출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15세기의 궁중 연회
춤을 추던 사람들이 늦게 온 사람들을 환영하고 있다. 위쪽의 음악가들과 아래 왼쪽에서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피들, 파이프, 타보르이다.
▲ 연회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된 세속 음악
※ ‘르네상스 초기의 연회’에 대한 기록
파티장에 큰 탁자를 하나 놓고 종루가 딸린 교회당 모형을 만들어서 그 안에 가수 네 명이 들어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한다. 또 다른 탁자에는 커다란 과자가 놓여 있는데, 그 속에 스물네명의 합주단이 들어가 있다.
연회의 여흥으로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이아손의 모험담에서 따온 극을 상연한 후에 모형 교회당 안에서 모테트 한 곡을 오르간으로 연주한다. 그리고 세 명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과자 속에서 ‘내 생명의 보호자’ 라는 샹송을 부른다. 다음으로 교회당과 과자 속에서 각각 네 번씩 연주한 후, 연회장의 문이 열리면서 실로 멋지고
커다란 젊은 사슴이 열두 살쯤 되는 소년을 따라 달려 들어온다.
소년은 양손으로 사슴의 뿔을 움켜잡고 매우 높고 투명한 목소리로 샹송의 상성부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에 대하여 테너의 성부를 노래한 것은 바로 사슴이다. 실은 사슴 속에 가수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악사들은 끊임없이 연주와 노래를 계속한다.
[2] 르네상스 중기
르네상스 음악이 점차 무르익어 중기로 접어들게 되면서 단순히 소리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시대 정신으로서 휴머니즘을 음악에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음악에 있어서도 교회의 권위 아래에서 위축되었던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
1) 음악에 있어서의 인본주의
이전까지 음악의 템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던 음악계에서 ‘가장 표준적인 음악의 템포는 건강한 남성의 맥박 속도’ 라는 설명이 나오는가 하면, 이론가들은 옛 그리스의 음악 이론을 그대로 르네상스 시대로 옮겨 실제화하려고 했다.
또한 작곡가들이 인간의 언어를 음악에 적절히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곡을 쓰기 시작하면서 음악과 가사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2) 르네상스 중기의 대가 조스캥
16세기 초반 르네상스 중기의 정점에 이르러 유럽 음악에 큰 영향을 끼친 작곡가는 조스캥 데프레(Josquin Depre`s; 1440~1521)이다. 조스캥은 북부 유럽인 네덜란드 출신의 작곡가였는데, 밀라노 대성당의 성가대에서 음악을 시작하였다.
조스캥은 모테트에서 가장 두드러진 독창성과 예술성을 발휘했으며, 미사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에 바탕을 두지 않은 자유로운 미사(Free Mass)를 시도했고, 세속 음악에서도 3성부에서 6성부까지 다양한 형식의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의 양식사적 측면에서 조스캥이 새로운 음악 작법으로 유럽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그가 창작 중기부터 사용한 모방 기법(imitation)이다. 이것은 그때까지 큰 작품을 만들 때마다 요구되던 구성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모방 기법이란 하나의 동기를 모방해 나가는 방법으로 연결을 확대하여 악곡의 조직을 갖추어 가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조스캥이 사용한 방법은, 어떠한 곡이 5성부이든 6성부이든 하나의 동기가 각 성부별로 돌림 노래처럼 한번씩 다 나타나도록 하고, 그 동기의 모방이 모두 끝나서 하나의 모방이 일단락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을 조스캥은‘모방이 일단락된 구간(point of imitaion)’이라고 했다.
그 다음에 그 모방의 동기를 끝낸 성부는 또 다른 모방의 주제적 멜로디를 다시 시작해서 음악을 끊임없이 연결해 나가는 것이다. 조스캥의 모테트 ‘아베 마리아(Ave Maria)’는 그 좋은 예이다.
조스캥은 선율과 화성을 종합적으로 구사하여 가사의 의미를 묘사하는 ‘가사 그리기(word painting)’ 에도 뛰어났다. 이렇게 가사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음악을 그 당시에‘무지카 레세르바타(musica reservata; 함축된 음악)’라고 하였다.
조스캥의 세속 음악은 대부분 샹송으로 ⅔ 는 3~4성부 곡이고 나머지는 5~6성부 곡이다. 그는 당시 유행하였던, 주요 선율이 최상성부에 있는‘칸틸레나(cantilena)’양식을 따르지 않고 모든 성부가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모방 대위적인 짜임새를 취하였다.
조스캥의 정선율 미사, 패러디 미사, 변용 미사, 그리고 모방 기법을 사용한 기법, 샹송의 패턴은 유럽 전체에 쓰이게 되었다. 그의 음악의 매력은 당시의 세련된 감성을 담은 것으로서, 16세기 유럽 곳곳에서 기악화되거나 약간 변형된 모습, 혹은 있는 그대로 많이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적인 면에서도 조스캥에 대해서는 같은 음악의 지역적 변화,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성악과 기악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곡가이다.
조스캥의 미사곡 ‘라솔파레미’
한때 조스캥은 스포르차 추기경을 위해 작품을 썼는데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날 조스캥이 추기경에게 급료를 올려 달라고 요청하자 추기경은“생각해 두지(Lascia faremi).”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러자 조스캥은 이“생각해 두지.”라는 말에 기초를 둔 미사곡‘라솔파레미’를 작곡했다고 한다.
▲ 조스캥 데프레가 작곡한 미사곡‘라솔파레미(1502)’의 악보와 조스캥의 목판 초상화
※조스캥 데프레
조스캥을 르네상스의 모차르트라고도 한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작곡을 했으며, 특별히 영감을 느낄
때만 작품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현재 20곡이 넘는 미
사곡과 90곡 이상의 모테트가 남아 있다.
▲ 조스캥 Josquin Des Pres
조스캥의 새로운 음악 작법인 모방 기법을 추종하는 작곡가들이 유럽 전역에 생겨났다. 조스캥의 활동 중
심지는 이탈리아였으나, 그가 네덜란드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 악파를‘네덜란드 (플랑드르)악파’라고 한다.
※ 가사 그리기의 예:‘ 올라간다’는 가사에서는 선율이 상승하고, ‘내려간다’에서는 선율이 하행하거나,‘ 하
늘’에는 높은음, ‘땅’에는 낮은음, 그리고‘지옥’에는 더 낮은 음을 사용하는 것등
※ 패러디 미사
조스캥은 4성부의 미사곡에 다른 작곡가의 샹송의 세 성부를 모두 빌려 와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다
른 곡에서 주제나 화성 진행을 빌려 온 미사를 패러디 미사(parody Mass)라고 한다. 그는 이러한 기법으로 미사에 통일성을 이룩한 첫 작곡가로 간주된다.
※ 변용 미사
변용 미사(paraphrase Mass)는 정선율이 다른 성부로 옮겨 다니며, 사용되지 않고 장식되거나 변형되어 사용되는 것이다.
[3] 르네상스 말기
르네상스 말기에는 다양한 음악적 움직임이 나타났다. 르네상스 중기 유럽 음악의 패권을 장악한 조스캥의 전통을 이어 가려는 흐름과, 이러한 네덜란드악파의 영향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각국의‘르네상스적 국민 음악’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이탈리아에서는 세속 음악이 발전하여 이후 바로크를 이끌어 갈 오페라와 기악 음악의 싹이 트고, 종교 개혁 이후 유럽 전역에서 ‘프로테스탄트(신교) 음악론’ 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이에 충격을 입은 가톨릭 교회는‘반종교 개혁’으로 더욱 규제가 강화된 교회 음악을 꾀한다.
※ 르네상스 말기의 이탈리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아비뇽 교황과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 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 개혁은 교회의 혁신 운동이지만 근대 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도 밀접한 함수 관계에 있었다.
1) 조스캥의 제자들
조스캥의 제자들이었던 네덜란드악파는 모방 기법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여 진부함을 드러냈다. 이에 따라 노래가 끊어지는 부분이 없어, 항상 한 성부의 가사가 다른 가사와 겹치는 음악적 상황이 발생해 가사 전달이 매우 어려워졌다.
여기에다 기법적 묘미에 심취한 작곡가들의 경우에는 작품 전체에 걸쳐 수없이 많은 임시표를 붙여야만 연주할 수 있는 까다로운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2) 르네상스 시대의 국민 음악 양식
이 음악 양식은 네덜란드악파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세속음악을 중심으로 나타난 다양한 음악적 움직임을 말한다.
① 이탈리아 르네상스 말기의 세속 음악: 16세기의 이탈리아는 왕성해진 교역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부를 축적하게 되고, 시민층의 생활이 향상되어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연회가 자주 있었는데 모든 연회에서는 음악이 중요하게 사용되는 극이 상연되었다. 특히 극과 극 사이에 들어가는 음악극을 인테르메디오(intermedio)라고 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기에 독창과 합창, 기악이 세련되게 덧붙여지게 되었다.
세속 가곡으로서 라우다(lauda), 프로톨라(frottola)가 크게 유행하였고, 후에 예술가곡인 마드리갈(madrigal)이 많이 불리워졌다.
라우다는 공공 기도회에서 연주되던, 마리아를 찬양하며 바치는 기도를 내용으로 하는 노래이다. 이탈리아 어 외에도 라틴 어로 된 가사도 있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갖지만 세속 선율을 사용한 노래이다.
※ 인테르메디오는 장차 오페라로 발전하게 된다.
※ 라우다
라우다는 중세 때부터 불려온 단성 노래였다.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중심 선율이 제일 윗성부에 놓이며 무반
주로 부르거나 아래의 두세성부는 악기로 연주되었다.
※ 마드리갈
짧은 목가(牧歌)나 연애시 따위에 곡을 붙여 명랑하고 즐거운 분위기의 노래. 자유로운 형식에 보통 반주없이 합창으로 부른다.
Setting designed by Bernardo Buontalenti for the third intermedio from the 1589 Medici wedding: Apollo defeats the monster terrorizing Delos.
▲ 역사상 세 번째 인테르메디오인‘아폴로’(1589년 상연)
프로톨라도 라우다와 마찬가지로 대위법적 요소가 거의 없이 전체가 3성부 화음의 연속으로 진행되었는데, 두드러진 특징은 귀족들이 즐기던 풍자적이거나 사랑에 관한 노래라는 것이다. 프로톨라는 이탈리아 전역에 전파되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심각한 내용의 시를 사용한 프로톨라는 나중에 마드리갈의 전신이 되었고, 가벼운 분위기의 프로톨라는 1530년경부터 17세기 초까지 성행하였던 빌라넬라(villanella) 또는 빌라네스카(villanesca)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세속 가곡의 가사가 유행에 따라 변하면서 보다 자유로운 형식의 마드리갈이 탄생하게 된다. 마드리갈은 16세기 이탈리아의 세속 노래 중 가장 중요한 장르로,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가 유럽 음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6세기 마드리갈은 14세기 마드리갈과 차이가 많은데, 14세기의 마드리갈은 리토르넬로(ritornello)라는 후렴이 있는 유절 형식의 노래인 반면, 16세기의 마드리갈은 리토르넬로가 없을 뿐만 아니라 통절 형식이다. 초기의 마드리갈은 3~9명이 부르는 성악 실내악곡이다. 무반주(a cappella)로 부르거나 악기들이 성부를 중복 또는 대신하기도 한다.
1540년대부터 마드리갈의 중심지는 베네치아로 옮겨가게 되는데 대표적인 작곡가는 치프리아노 데 로레(Cipriano de Rore; 1515~1565년경)이다. 그는 각 단어를 음악적으로 묘사하여 시 전체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반음계적인 변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16세기 후반의 다른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6세기 후반에 중요한 마드리갈 작곡가는 루카 마렌치오(Luca Marenzio; 1553~1599년경), 카를로 제수알도(Carlo Gesualdo; 1561~1613년경)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 등이 있다.
제주알도에 이르러서 이탈리아 마드리갈에서의 반음계 사용은 절정에 이르는데, 그가 반음계를 구사한 이유는 가사에 깊게 감명을 받은 결과의 표현이었다. 제주알도는 마드리갈 작곡에 있어서 감정의 표현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 베네치아의 시인이며 문학이론가인 벰보 (Pietro Bembo; 1470~1547)가 페트라르카의 시집을 출판하고 분석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에서는 시와 음악의 본질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단어와 소리의 조화로 얻어지는 음악적 효과를 분석한 이러한 노력으로 마드리갈이 탄생하게 되었다.
※16세기 초의 마드리갈은 전원적인 장면을 묘사하거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시를 많이 사용하였다.
※16세기 초에 마드리갈과 같은 다성 노래들에 대한 수요가 많아 1530년에서 1600년까지 2000여 곡이 작곡되었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곡가로 그의 마드리갈에서 이 변화를 잘 볼 수 있다.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 모음집” 중 제1~3권은 르네상스적인 무반주 다성 성악 앙상블 곡이고, 제4~5권은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것이며, ‘콘체르토(Concerto)’라고 제목을 붙인 제7권의 마드리갈들은 기악 반주를 갖는 독주 또는 2중주곡으로 바로크적인 양식상의 변화를 보인다.
마드리갈은 쉽게 노래하기 위해 단선율로 만들어지게 되면서 더욱 더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마드리갈의 시의 내용도 저질화되고 음악도 초기의 독창성과 신선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를 쇄신하기 위하여 르네상스 말기인 16세기 말에 지성인들은 피렌체의 부유한 귀족 바르디(Giovanni de Bardi)의 집에서 카메라타(Camerata) 모임을 갖고 새로운 음악을 연구하게 되었다.
학자, 시인, 음악가, 후원자로 구성된 이들은 순수한 음악적 정신을 찾기 위해 애쓰며 그 모델을 고대 그리스로 삼고‘모노디(Monody; 단선율) 음악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극의 목적에 맞게 유연한 리듬과 불규칙한 악구를 가진 낭송조 선율의 모노디 양식을 탄생시켰고, 후에 이 양식은‘레시터티브(recitativo)’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는 바로크로의 전환에 중요한 핵심이 되었고, 당시 중요한 작곡가는 몬테베르디이다. 16세기 말 이탈리아 궁중에서 연극에 독창 또는 앙상블 마드리갈을 포함하기 시작한 전통은 이후 17세기 오페라의 전신이 되었다.
※ 초기 바로크 시대의 대가였던 몬테베르디는 그때까지의 작곡 기법을 통합해 극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를 결합시켜 작품을 만든 극음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오르페오’와‘아리안나’등이 있다.
② 프랑스의 르네상스 말기의 세속 음악: 프랑스에서는 이미 15세기부터 샹송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샹송이 프랑스의 대표적인 음악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악보들이 출판되기 시작한 16세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샹송은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에게도 중요한 생활의 일부였다. 15세기 초기 샹송들은 프랑스 어에 깊이 의존하고 있지만 15세기 말부터는 조스캥의 영향과 이탈리아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프랑스 샹송은 소박하고 온화한 선율과 유절(有節) 형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16세기 중반부터는 이탈리아의 마드리갈풍 샹송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16세기의 샹송은 대체로 호모포니적이고 주선율이 상성에 놓이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 파리 샹송들은 가사들이 실러블 양식으로 처리되었고, 대부분 2박의 리듬감이 강한 4성부 곡이다. 론도, 비를레, 발라드와 같은 정형시 형식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분명하게 구분되는 몇 개의 짧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대부분 aabc, abba, abca 형식이며 사랑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가사가 많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클로뎅 드 세르미시(Claudin de Sermisy; 1490~1562년경)와 클레망 잔느캥(Clement Janequin;1485~1558년경 이후)이다.
한편 16세기 중엽 프랑스 궁중에서 왕과 신하들의 오락을 위하여 사용되던 유절 형식의 세속 노래를‘에르 드 쿠르(air de cour)’혹은‘에르(air)’라고 하였다. 이것은 류트 반주가 붙는 독창, 또는 4~5성부의 무반주 성악으로 연주되었다. 프랑스의 16세기에는 기악곡 악보도 많이 출판되었다. 특히 류트, 기타, 시타르나 만도라 같은 악기를 위한 태블러처(tablature) 악보와 건반 악기용 샹송이나 모테트도 출판되었다.
※ 인쇄술의 발달(프랑스 인쇄공장)
※ 조스캥의 영향
조스캥의 영향은 무엇보다도 모방 기법을 이용한 대위법의 사용이다.
※ 피에르 아테냥 (Pierre Attaingnant)은 1552년까지 50권이 넘는 샹송 모음집을 출판하여 음악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③ 독일과 영국 그리고 에스파냐의 르네상스 말기 세속 음악: 독일의 음악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발전이 느렸으나,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에 걸쳐 다성 리트라는 독자적인 양식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선율과 언어 그리고 네덜란드 다성 음악 기법을 잘 조화시켜 작곡된 리트는 주선율이 테노르에 놓이므로‘테노르 리트(tenorlied)’라고도 한다.
16세기 영국에서는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을 영어로 번역하고 모음집을 출판하였고, 이것이 영국 마드리갈의 근간이 되었다. 토마스 몰리(Thomas Morley; 1557~1602)는 많은 마드리갈을 작곡하였으며 수직 화성적이고 춤
곡풍의 리듬을 갖는 유절 형식의 발레트와 칸초네도 작곡하였다. 그는 약간 의‘가사 그리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음악 형식 및 기법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여 전체적인 음악 구조를 신경썼다.
마드리갈이 쇠퇴하기 시작한 17세기 초에 영국에서는 류트나 비올 반주가 붙는 독창곡이 많이 불려졌다. 이 노래를 ‘류트 노래’ 혹은 ‘에어’라고 불렀다.
16세기 에스파냐의 세속 노래로는 로만세(remance)와 비얀시코(villancico)가 있었다.
※ 독일의 다성 리트 작곡가로는 하인리히 핑크(Heinrich Finck; 1444~1527년경)와 하인리히 이삭(Heinrich
Isaac; 1450~1455년경)이있다.
※ 서유럽 각국의 세속 음악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영국‘에어’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존 다울랜드(John Dowland; 1563~1626)가 있다.
3) 르네상스 후기의 종교 음악
르네상스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 판매에서 보듯이 타락이 심해졌다.
이에 대해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선두로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교회의 음악론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은 스칸디나비아로 전파되었고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을 주축으로 스위스, 네덜란드, 프랑스와 영국에까지 전파되어 북유럽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새로운 영국 국교(성공회)를 창설하게 된다.
※ 종교 개혁가들은 예배 의식에 라틴 어만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자연히 각 국가의
신교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에서 자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교회 대문에 면죄부를 포함하여 문제되는 사안 95개의 조항을
붙였다.
① 프로테스탄트 교회 음악: 신학 교수인 루터는 음악을 사랑하였고 음악 이론과 작곡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음악은 신이 주신 선물로 신학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사상은 16세기 루터 교회의 음악에 반영되었다. 그는 음악이 교육적으로 유익하며 윤리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으며 합창 학교를 권장하였고, 예배에서 회중도 노래 부를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루드비히 젠틀(Ludwig Sentl; 1486~1543년경)과 발터 등 당시 작곡가들과 함께 회중이 부를 노래인 코랄(choral)을 작곡하기도 했다.
코랄은 그 용도상 부르기 쉬워야 했기 때문에 가사가 규칙적이고 운문적이었으며, 선율도 여러 번 반복되는 유절 형식이 사용되었다.
루터 교회 작곡가들은 전문적인 합창대를 위한 다성 코랄과 코랄 모테트(chorale motet)를 작곡하였는데, 이로써 신교 교회 음악은 칸티오날(kantional) 양식의 회중 찬송가와 전문적인 합창단이 부르는 음악으로 나뉘
게 되었다.
한스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 1564~1612)와 미하엘 프레토리우스(Michael Praetorius; 1571~1621년경)가 대표적인 코랄 모테트 작곡가들로, 이들에 의하여 확립된 독일 신교 음악 양식은 바흐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며, 향후 200년간 독일 음악의 원천이 되었다.
한편 프랑스, 스위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칼뱅파 교회에서는 성경에 없는 가사를 노래하는 것을 금하여, 성경의 시편(psalm)만 단선율로 노래할 수 있었다. 칼뱅은 1542년에 운문으로 번역한 시편에 선율을 붙인 노래 모음집 ‘살터(Psalter)’를 출판하였다. 살터의 선율은 단순하며 음절 위주였다.
영국 교회 음악은 구교 음악의 미사에 해당하는 서비스(Service)와 모테트에 해당하는 앤섬(Anthem)이다.
※ 코랄
코랄은 찬송가(Kirchenlied)인데, 현대의 찬송가는 보통 4성부곡이지만 원래의 코랄은 하나의 선율만으로 이루어진 독일 찬미가로, 반주 없이 불렀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대부분 다성 코랄은 모든 성부가 수직 화성적 짜임새이고 주선율이 윗성부에 놓이는
칸티오날 양식으로 작곡된다.
※칼뱅은 미술과 음악이 믿음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교회 음악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② 가톨릭 음악: 종교 개혁에 충격을 받은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음악론에 대응하는 자체 개혁, 즉 반종교 개혁(counter reformation)을 단행하게 된다. 이때 가톨릭 교회는 세속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음악적 장르를 없애 버리고 소멸시켜 버렸다. 다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성스러움과 가사의 의미 전달에 용이한 음악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고, 이때 많은 음악
자료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주장과 부합하는 작곡가를 찾아냈고, 이때 부상한 인물이 바로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년경)였다. 그는 선율적·화성적으로 많은 규칙을 만들어서 작품을 구성했고, 교황청은 이 규칙들을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따르도록 규정함으로써 팔레스트리나는 16세기 대위법의 집대성자가 되었다.
팔레스트리나의 작품으로는 104개의 미사, 400개 이상의 모테트와, 많은 봉헌송(offertorium), 마그니피카트, 찬미가 등이 있으며 140여 개의 세속 또는 종교적인 내용의 마드리갈도 작곡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가톨릭 교회의 근엄하고 보수적인 정신을 잘 파악한 작곡가여서‘팔레스트리나 양식’은 다성 종교 음악의 표본으로 일컬어진다.
네덜란드의 모방 대위법적인 양식에 기초를 둔 팔레스트리나의 음악 양식은 그의 미사에 잘 드러난다. 그는 미사에서 모방적인 부분과 호모포니적인 부분을 교차하여 변화를 주었으며, 가사의 정확한 전달에 세심한 주위를 기울였고 당시 유행하던 반음계주의를 철저하게 회피하여 무지카픽타 이외에는 반음계를 사용하지 않았다.
팔레스트리나 외에도 음악의 미적인 면보다는 미사를 보좌하는 기능을 더 강조한 이 시대의 작곡가로는 랏수스, 빅토리아 등이 있다.
※ 팔레스트리나
팔레스트리나는 로마 근교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평생 동안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St. Pietro) 성당에 부속된 줄리아 예배당(Cappella Giulia)의 성가대 지휘자 및 음악 감독을 지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권고한 사항에 의거하여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을 모은 책인 “그라두알레”를 다시 쓰는 임무를 맡았다.
▲ 팔레스트리나 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4) 르네상스의 기악 음악과 베네치아악파
① 르네상스 시대의 악기: 16세기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악기도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독주나 합주를 위한 작품이 악보로 나오게 되면서 연주의 수준을 끌어올렸으며, 악기에 관한 책도 출판되었다.
특히 류트는 기타(guitar)의 초기 형태로서 어디에나 흔히 볼 수 있던 인기있는 악기였다. 류트의 음색은 작고 부드러워 음악회장보다는 실내 연주에 적합하며 독주, 앙상블, 그리고 노래 반주에 많이 쓰였다.
또한 류트 제작으로 유명했던 북이탈리아에서는 새로이 비올(viol)을 제작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음역에 따라 6개 크기의 악기가 한 벌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바이올린 크기에 해당되는 비올은 ‘비올라 다 모레’ 혹은 ‘비올라 다 브라치오’라고 했으며, 첼로 크기에 해당되는 비올은 ‘비올라 다 감바’ 라고 불렀다.
건반 악기로는 오르간이 계속 중요한 악기로서 교회에서 연주되었고, 오르간 이외에 쳄발로(cembalo)가 발달하면서 건반 악기를 위한 음악들도 성행하게 되었다. 쳄발로는 클라비코드(clavichord)와 하프시코드(harpsichord)로 나뉘는데, 클라비코드는 건반을 누르면 금속 장치가 줄을 때려서 소리가 나는 구조였고, 하프시코드는 깃털로 만든 채가 줄을 뜯어서 소리가 나는 원리로 만들어졌다.
기악곡의 발달은 새로운 근대적 조성을 확립하는 기반이 되었고, 평균율, 즉 하나의 온음을 두 개의 반음으로 나누는 것이 즐겨 쓰이게 되었다. 이렇게 발달된 악기들을 이용하여 베네치아악파는 교회 음악의 형식과 틀을 탈피해 자유로운 창작 의지를 표출해 내기 시작했고, 베네치아악파의 위대한 작곡가 가브리엘리는 이 악기들을 이용하여 바로크 시대에 수많은 협주곡과 건반 악기 작품을 만들게 된다.
르네상스 시기에 사용된 관악기로는 리코더(recorder), 크롬호른(crom– horne), 숌(shawm), 코르넷(cornett), 트럼펫(trumpet), 그리고 색벗(sackbut) 등으로 현대에 사용되는 악기의 전신이 되었다.
트럼펫은 고대부터 있던 악기로 군인들의 신호에 사용되었지만, 1480년경부터는 실내 앙상블에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타악기의 종류도 다양하여 종(bell), 심벌즈(symbals), 작은북(side drum), 탬버린, 덜시머(dulcimer), 트라이앵글(triangle), 팀파니(timpani) 등이 있었다.
※ 기악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악보뿐만 아니라 악기에 관한 책도 출판되었는데, 중요한 책은 미카엘 프
레 토 리 우 스 ( M i c h a e l Praetorius; 1571~1621)의 “악기에 관하여(De organ ographia; 1620)”이다.
이 책에는 42개의 목판화로 악기 그림이 실려 있다.
※ 하프시코드
하프시코드는 모양과 구조의 차이에 따라 클라비쳄발로(clavicembalo), 클라브생 (clavecin), 스 피 넷(spinet) 또 는 버 지 날(virginal)이라고 한다.
Lute-viol ABosse Fr 1635
▲ 실내의 합주를 그린 프랑스의 그림. 악기는 류트와 비올(1635년)
※ 색벗(sackbut)
색벗은 트럼펫의 전신이다.
※ 덜시머(dulcimer)
덜시머는 고정된 쇠줄을 막대기로 쳐서 소리 내는 악기이다.
② 르네상스 기악 음악: 기악 음악은 성악 성부를 중복하거나 대치하여 연주되었는데, 르네상스 시대부터는 악기를 위한 독립된 음악이 작곡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악곡은 성악 음악에서 유래된 곡, 춤곡, 변주곡, 그리고 즉흥곡의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악 음악에서 유래된 곡으로는 칸초나(canzona)가 있는데, 초기 칸초나는 성악 샹송을 악기로 편곡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성격의 주제들의 구성으로 대조되어 모방되고 종지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이것은 더욱 발전되어 17세기의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로 발전되었다.
리체르카레(ricercare)는 모테트를 모방한 기악곡으로 샹송보다 복잡한 모방적 짜임새를 보인다. 류트곡이었던 초기의 리체르카레는 건반 악기와 기악 앙상블곡으로 발전되기 시작했는데, 오르간 리체르카레는 한 개의 주제를 갖는 17세기 푸가로 발전하였다.
리체르카레는 점차 모테트와 관계없이 즉흥적으로 작곡된 곡을 일컫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곡들을 카프리치오(capriccio), 판타지아(fantasia), 또는 팬시(fancy)라고도 한다.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 사이에는 춤곡도 성행하여 류트, 건반 악기 및 기악 앙상블에 의한 춤곡이 기악 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춤곡들은 점차 기악곡 양식으로 발전되었는데, 중세부터의 관습대로 2~3개씩 짝지어 작곡되었다.
춤곡은 일반적으로 파반느(pavane)와 가야르드(galliard), 또는 파사메초(passamezzo)와 살타렐로(saltarello), 그리고 알망드(allemande)와 쿠랑트(courante)가 같이 연주되었다.
이러한 두 곡씩의 춤곡은 바로크 시대의 다악장 형식인 춤 모음곡(dance suite)과 실내 소나타(sonata da camera)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
16세기의 오르간 연주를 위한 즉흥곡으로는 토카타(toccata)가 유행하였는데, 이 음악은 음을 길게 유지할 수 있는 오르간의 특성을 이용하여 한 손으로 음을 길게 지속시키는 동안 다른 한 손으로 빠른 음들을 기교적·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또한 짧고 단순하며 악절이 분명한 노래가 오스티나토 베이스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동안 다른 성부에서 변주되는 변주곡이 이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대개 기악 춤곡의 첫 곡은 느린 2박자이며, 두 번째 곡은 빠른 3박자인 첫 곡의 변주곡이다.
※ 핏츠윌리엄 버지날 책(The Fitzwilliam Virginal Book, 1609~1619)에 실린 200여 곡의 변주곡에는 16세기 변주 기법들이 잘 나타나 있다.
③ 베네치아악파: 11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상업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는 온갖 시장이나 상업을 관장하는 관공서 및 어음 교환소와 베네치아 상인들의 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부를 뽐냈고 대저택을 지어 호화로움을 다투었다. 교황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된 도시 국가로 발전했던 베네치아에서는 팔레스트리나 양식에 순응하지 않는 작곡가들도 나타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빌라르트를 위시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와 그의 조카인 지오반니 가브리엘리와 같은 베네치아악파이다.
1566년부터 산마르코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였던 안드레아 가브리엘리는 미사, 모테트, 마드리갈과 건반 악기 칸초나와 오르간 토카타 등 많은 작곡으로 음악의 여러 장르에 공헌하였다.
지오반니 가브리엘리는 그의 삼촌인 안드레아 가브리엘리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고 산마르코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여러 개의 합창을 위한 작품에 대조 양식을 사용하여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켰다. 그의‘피아노와 포르테 소나타(Sonata piano e forte)’는 처음으로 작곡자가 정확한 악기 편성을 지시하고 강약 표시를 지정한 곡이다.
베네치아의 작곡가들은 다중 합창을 위한 곡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산마르코 대성당의 연주 단체는 대규모로 발전하여 각각 관현악단을 수반하여 서로 다른 음역을 갖는 2~5개까지의 합창단이 있었다.
지오반니는 이 합창단이 서로 대창 방식(antiphonal)으로 응답하며 독창과 어울려 장대하게 연주하게 하였다. 이러한 서로 다른 음향의 대비는 후에 바로크 음악의 특징인 콘체르타토(concertato) 양식의 근원이 되었다.
※ 베네치아악파
베네치아악파의 화려하고 장대한 음색과 호모포니적인 음악은 유럽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Basilica di San Marco a Venezia
산마르코 대성당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은 당시 음악 활동의 중심지로 꼽혔다.
※ 지오반니 가브리엘리의‘피아노와 포르테 소나타’에서 ‘소나타’란 용어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일반적인 기악곡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 콘체르타토
음악의 진행에서, 성부 대성부 또는 악기 대 악기 등 서로 주고받는 느낌이 드는 방식으로 곡을 전개해 나가
는 작곡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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