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시간 회한의 삶 이겨내는 길 3세대 5백여명 주요인물 내세워 칩거의 고독속에서 찾아낸 진리
“따뜻한 차에 적셔먹던 과자의 맛 지워지지 않는 육신의 감각 통해 삶의 고동소리 다시 들어보려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같은 강물에 두 번 몸 담글 수 없는 것이라면,그 물은 흘러 어디로 가는가.호기심을 따라 저어온 인생의 강물은 어느새 우리를 회한의 언덕에 남겨두고 어디로 가버리는가.새벽 장미 이파리에 내려앉은 봄이슬이 눈부신 햇살을 맞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듯 어느덧 텅 비어버린 모래시계는 유리병 위로 희미해져 가는 우리의 그림자만을 비출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시간이라는 이름의 악몽에 젖어 몸을 떨며 춤추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그래도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마지막 안간힘으로 그러쥐어보려는 그 지푸라기의 모습은 무엇인가.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알들을 영원한 광채로,꿈과 삶의 경이로,찬란한 보석으로 바꿀 수는 없는가.
젊은 날의 꿈과 욕망이 격렬했던 것만큼 지쳐버린 마르셀은 모든 것을 접어두고 칩거의 나날을 보낸다.그러나 천식의 고통 속에서 고독만을 벗삼아야 하는 그 칩거의 시간은 외부와의 단절이기도 하지만 내면으로의 침잠을 통해 자신의 삶의 진실을 찾아가게 해주는 계기이기도 하다.어린 시절부터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사교계의 신비로운 인물들과 해변을 꽃피우던 눈부신 소녀들을 찾아 그들의 고장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마르셀에게 잃어버린 시간의 문을 열어준 것은 따뜻한 차에 적셔 먹는 마들렌 과자의 맛이었다.
끝내 잘 자라는 다정한 말 한 마디와 정겨운 입맞춤을 해주러 오지 않은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르셀이 집을 나서면 길 한쪽은 욕망이 깃들여 있는 스완의 집으로,다른 한쪽은 타락이 잠재해 있는 게르망트 백작의 집으로 이어진다.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사교계의 여인 오데트와 결혼한 스완의 집에 이른 마르셀은 질베르트에게서 어머니 이외의 여자에 대한 사랑과 그로 인한 아픔을 배운다.그러나 스완의 딸에 대한 사랑의 고통은 세련된 예술적 향취로 가득한 사교계에 입문하기 위한 통과의례만은 아니었다.마르셀을 기다리는 것은 스완의 운명이었고,발벡의 해안에서 만난 알베르틴으로 해서 겪게 되는 질투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마르셀은 우여곡절 끝에 게르망트 가문에 소개되면서 영원히 닫혀 있을 것 같던 귀족들의 사교계로 들어선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이제 쇠락해가는 종족이 신비와 세련됨의 배경 속에 감추고 있던 변태의 성역이었다.동성애자 샤를뤼 남작으로 표상되는 이 소돔의 주인들은 물론 그 주변을 떠돌며 닫힌 세계의 비밀을 함께 나누게 된 이들도 이 퇴폐의 도시를 지배하는 운명의 손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그곳에서 다시 만난 첫사랑 질베르트의 남편 로베르가 결국은 자신의 아저씨 샤를뤼 남작처럼 동성애에 빠져들고 마는 것처럼,다시 마르셀과 발벡에서 함께 지내게 된 알베르틴도 동성애자임이 드러난다.
또 이를 눈치채고 괴로워하는 마르셀은 이 고모라의 여인을 파리로 데려와 가둬버리는 독점욕에 의한 가학성을 내보일 뿐 아니라,결국 그녀를 잃고 나서는 그 자신도 동성애의 유혹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만다.
수년이 지나고 소돔과 고모라에게서 벗어난 마르셀이 찾은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스완의 딸 질베르트가 게르망트 가문의 로베르와 결혼했듯 고향길의 두 산책로는 어느새 이어져 있었고,구시대의 유물인 계급의 벽은 무너져버린 지 오래였다.
전쟁마저 휩쓸고 지나간 곳에 이제는 더이상 같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그 신비스러운 사교계의 모습은 간데 없고,그 화려했던 인물들도 혹은 사라지고 혹은 늙어버려 그들의 도시 파리는 폼페이를 연상시킬 따름이다.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영원히 사라져간 시간의 물결 뒤에 마르셀 홀로 처져버린 것은 아닌가.
게르망트 대공 부인의 초대를 받아 외출한 마르셀은 울퉁불퉁한 포석에 걸려 몸이 기우뚱거리고,식기 부딪는 소리를 듣고,또 풀먹인 냅킨에 손을 스치는 것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일을 겪으면서 실타래처럼 풀려 올라오는 느낌들을,지나간 시간을 수놓았던 그 느낌들을 다시 경험한다.어느날 문득 마들렌 과자를 차에 적셔 먹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렸던 것처럼 의도적인 기억을 통하지 않고도 과거를 되살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마침내 예술이야말로 파괴적인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확신한 마르셀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자신의 삶의 진실을 밝혀보기 위해 책을 쓸 것을 결심한다.
19세기에서 1차대전이 끝난 20세기 초반까지 3세대에 걸쳐 무려 5백여명의 주요 인물을 등장시키며 수천쪽에 걸쳐 과거를 복원해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발자크나 졸라가 구상했던 한 시대의 연대기도 아니고,그렇다고 스탕달이나 플로베르가 추적했던 한 인간의 편력기도 아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기억의 단편들을 박제된 논리의 사슬로 이으려는 역사학적 노력이 아니라,지워지지 않는 육신의 감각을 통해 되살린 삶의 고동소리를 다시 들어보려는 예술적 노력이다.
살아있는 감각을 전하기 위해 프루스트는 무려 5백18개의 단어들을 단 하나의 문장 속에 배치하기까지 하며 포착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의 타래를 이어가는 노력을 기울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르셀이라는 화자의 개인적 회고담이라기보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시간을 예술작품으로 정제해낸 작가 프루스트의 승리의 기록이다.
프루스트의 불가능한 시도가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것은 작가가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을 마르셀이나 수많은 등장인물로 설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누구도 붙잡아 본 적 없는 시간,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흘러가버리는 얼굴 없는 시간으로 설정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