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이 곳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금산과 남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그 광활한 경치가 황홀하다. 장엄한 남해의 일출을 보러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금산 삼십팔경과 금산을 에워싼 만경창파를 한 눈으로 굽어 볼 수 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봉수대(熢燧臺)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방조망(四方眺望)이 비길 데 없이 넓고 아름답다
천마암
망대 아래 동쪽에 있는 두꺼비 모양의 바위. 이성계가 기도하고 있을 무렵에는 회두암(回頭岩) 이라 불렀다고 한다.
삼사기단
좌선대 아래쪽에 있다. 유명한 세분의 큰 스님,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가 기단을 쌓고 기도를 올렸다고 해서 삼사기단이다. 삼사(三師)가 앉았던 자리가 바위 위에 뚜렷이 남아 있다.
화엄봉
대장봉과 농주암의 왼쪽에 있는데 바위 모양이 '화엄(華嚴)' 두 글자 모양이라고 해서 화엄봉이라 하고 원효대사가 이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고 전하나, 화엄종은 의상대사가 포교한 것으로 의상대사일 것으로 추측한다
문장암
망대를 오르는 계단을 마주하고 있는 정상 길목을 지키는 바위다. 명필바위라고도 한다. 문장암은 남해금산의 정상에 있다. 조선 중종 때 대사성을 지낸 한림학사 주세붕선생이 전국을 다니며 풍류를 즐기다가 남해에 있는 금산이 명산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금산의 쌍홍문을 통하여 이곳 정상까지 올라와 보니 과연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신비로운 전설이 가득함으로 감탄하여 자연암에다 '유홍문 상금산 由虹門 上錦山' 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주세붕(1495-1554)은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자는 경유(景游)이며 호는 신재(愼齋). 1522년(중종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했다. 1541년에 풍기군수가 되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소수서원)을 건립했다. 이 서원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이다. 홍문관, 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만장대
탑대 서남쪽 깎아 세운 듯 천인 단애를 이루고 있는 절벽. 높이가 만장이나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쌍홍문의 오른쪽에 있다.
저두암
금산 산장 바로 뒤에 있는 바위로서 어미돼지가 새끼돼지를 업고 있는 모양의 바위. 바로 오른쪽 코끼리 바위가 있다.
일월봉
화엄봉 왼쪽에는 세 개의 바위가 층암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제석봉 가는 길에서 가깝게 보면 맨 위의 바위가 보이지 않아 일(日)자형이고 탑대에 올라 전체를 멀리서 보면 월(月)자형으로 보여 일월봉이라 한다.
대장봉
금산 보리암 바로 뒤에 우뚝 솟은 큰 바위로서 웅장하고도 위엄있게 창공을 찌르고 서 있는 모습이 대장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대장봉 왼쪽에 용호농주형(龍虎弄珠形)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있으면 반드시 대장(大將)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음성굴
만장대 바로 북쪽, 높이 2m, 길이 5m 정도 되는 조그만 바위굴. 굴 속에 들어가 굴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소리와 같은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음성굴이라 했다.
금산11경 ~ 20경
촉대봉
향로봉 옆에 있는 촛대 모양의 작은 바위. 원효, 의상, 윤필 세 대사가 기도를 올릴 때 촛대로 사용했다는 전설이 있다.
흔들바위
일월봉 왼쪽 제석봉 뒤쪽 맞은편에 있는 흔들바위로 거북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구암(龜岩)이라 하였으나 한 사람의 힘으로도 움직인다 하여 흔들바위라고도 부른다. 바위의 무게는 35톤 가량 된다. 거북 모양의 목부분을 위로 추켜 세우듯 밀면 가장 잘 흔들린다.
형리암
금산 보리암 바로 뒤에 있으며 대장봉을 향해 마치 허리 굽혀 절하는 모양으로 생겨 형리(刑吏)바위라고 한다. 보리암(菩리岩)에서 처음 보는 사람은 바위가 곧 떨어질 위험을 느낄 정도로 허리 굽힌 모습으로 보인다.
용굴
음성굴 오른편에 50m의 길고 넓은 굴이 있는데 옛날 용이 살다가 하늘에 올라갔다는 전설이 숨어 있는 굴이다.
향로봉
삼사기단 왼편에 있으며 마치 향로와 같다고 해서 향로봉이라 부르며 원효, 의상, 윤필 세 대사가 촉대와 함께 향로로 썼다는 전설이 있다.
부소암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갔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법왕대라고도 한다.
박진욱의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중에서
문득 엄청나게 큰 바위가 하늘로 해처럼 솟았다. 그럴 듯한 이름 하나 주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으니, 이름하여 '부소암'이다. '부소'는 중국 진시황의 태자 이름이다. 남해 외딴섬 바위에 어이 하여 진나라 시황의 큰아들 이름 부소가 붙었을까? 누가 붙인 이름일까? 유배객이 붙인 것은 아닐까? 이 금산에 올랐던 류의양이 붙였을지도 모르고, 남구만이 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신배의 참소로 억울하게 이 고독한 외딴섬에 귀양 온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임금이 콩과 보리를 가리듯이 충신과 간신을 가리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말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진나라 시황의 태자 부소이다. 진시황의 두 아들이 있었다. 똑똑하고 착한 부소와 흐리멍덩한 호해가 그 두 아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인은 자신보다 똑똑하고 착한 사람을 싫어하는 법이다. 간신배 이사와 환관 조고는 장차 부소가 임금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시황에게 참소를 넣었다. "부소가 폐하를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부소를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라." 진시황은 호해를 가까이하고 부소를 멀리 변방으로 내쳤다. 올빼미의 무리 이사와 조고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부소가 폐하를 원망합니다." 진시황은 부소에게 칼을 내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라는 말이다. 부소는 그것이 간신배가 꾸민 간괴인 줄 알고 불로초를 찾아 삼신산으로 떠나는 서불의 배를 타고 도망을 쳤다. 서불이 동으로 동으로 배를 몰다가 남해 금산에 도착하였다.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가' 서불은 양아리 골짜기의 바위에 왔다는 흔적만 남기고 다시 떠났다. 그러나 부소는 떠나지 않았다. 신령스런 바위 아래에 움막을 짓고 살다가 주어진 수명을 누리고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부소암이라 불렀다. 역사에서 부소는 진시황이 보낸 사약을 받고 변방에서 죽고, 둘째 아들 호해가 임금 자리를 계승하였다. 호해가 임금이 된 지 3년 만에 진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움막이 지금도 있다. 부소가 살았던 그 움막일까? 절벽에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속세 사람의 집이 아니다. 도 닦는 사람일까, 부소처럼 쫓겨와서 숨어사는 사람일까? 예나 지금이나 속세를 떠나 숨어사는 이는 끊이지를 않는구나.
탑 대
천인단애 위에 보리암전 삼층석탑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탑이 서 있어 이 절벽을 탑대라 한다. 보리암 바로 밑에 있으며 전망이 좋아 봄철의 푸른 나뭇잎과 가을 단풍 경치는 천하절경이라 할 만하다. 가장 탐방객들이 많이 모여드는 자리다. 보리암전 삼층석탑은 지방유형문화재(地方有形文化財)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홍문
상주 쪽에서 금산 상봉에 이르는 암벽에 두 개의 둥글고 큰 구멍이 문 모양으로 나란히 있는 돌문이다. 이 속에 들어가 보면 속이 비어 있고, 천장 벽에도 구멍이 뚫어져 있어 파란 하늘이 잡힐 듯이 보인다. 옛날 세존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으로 나가면서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세존도에 해상동굴이 생겼다고 전해온다.
사자암
좌선대에서 상사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사자 모양의 큰 바위.
남해상주리 석각
양아리 두모에서 부소암으로 오르는 골짜기 큰 바위에 새겨진 고문자. 상주리 석각,'서불 과차'라고 하는 이 고문자는 진시황의 사신 서불이 선남선녀 500명을 거느리고 불로초를 캐려고 이곳에 와서 새겨놓고 간 글자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 거란 글자라는 이도 있고, '이곳은 그 어른의 사냥터' 표시라는 설도 있으나 판독이 어려워 아직껏 베일에 싸여 있다.
박진욱의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중에서
'서불과차'를 보려면 양아리 길로 들어야 한다. 나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워서 길가 숲에 박아놓고 김 씨 노인이 일러 준 길을 타기 시작했다. "왼쪽 편에 논이 있어. 논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곰바위가 보여. 곰바위 그 이름에서 왼쪽 편이야." 존을 지나 곰인지 개인지 이상한 바위를 지나고 계곡을 하나 건너서 왼쪽 편 오솔길에서 바위그림을 겨우 찾아내었다. 오솔길이라 눈썰미가 없는 사람은 지나치기 쉬운 길이다. '서불과차'. 우리말로 풀면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뜻이다. 해괴망측한 해석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사슴 과 새 발자국 뿐이다. 학자들의 눈에는 새 발자국도 한자로 보이는지. '서불과차'는 중국 사람이 한 해석일 것이다. 글자를 보니 새 발자국 같기도 하고 한자 같기도 하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내가 알랴 네가 알랴, 곰처럼 엉큼한 중국학자들이 '서불과차'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서불과차" 서불이 진시황의 심부름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가다가 이곳을 들렀다는 이야기였다. 한갓 전설을 학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허물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란 붓 놀리기 대로이다. 붓 잡은 사람이 자기에게 이롭도록 붓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닌가. 중국 사람이 '서불과차'라 붓을 놀리자 덩달아 '서불과차'라 새기는 사람이 우습지 않는가. 우리는 그렇게 자주 쓸개 빠진 짓을 한다. 나라 잃은 시대(일제시대) 일본사람들이 쓰던 역사 용어를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어디 한둘인가. 역사란 '등기'다. 기록에 먼저 적어서 소문을 내어 버리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했다고 하여 콜롬부스 앞으로 등기를 해 버렸다. 인디언이 오래 전부터 살았다 한들 이미 저들 앞으로 등기를 했으니 소송을 할래야 할 데가 없다. 중국학자들이 이 고문자를 서불과차라고 우기는 것은 그런 등기 심리에서 비롯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일본 사람들이 지금 열심히 등기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독도'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며 돌아다닌다. 말하자면 한창 등기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나중에 가서 땅을 두드리며 독도는 우리 땅이요 하며 한탄한들 때늦은 후회가 될 터이다. '서불과차'를 일축하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한단고기』라는 책이다.『한단고기』에 양아리 고대문자에 대한 기록이 두어 차례에 걸쳐 나온다. 먼저 '신비본기 제3'에 나오는 말을 옮겨 본다. "환웅천왕은 또 다시 신지 혁뎍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신지 씨는 왕의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찍이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이 없었다. 신지 씨는 어느 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튀는 한 마리의 사슴을 보고 활을 당겨 쏘려고 했으나 돌아보는 상에 암사슴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으나 방향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머리를 떨구고 침묵 끝에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방법은 이것뿐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이것 뿐이리라.'하며 그 날의 사냥을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되풀이하여 생각하고 사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 않아 문자 만드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태고문자의 시작이다... 남해도 낭하리의 계곡 및 경박호 선춘령과 오소리 사이의 바위 사이에서 조각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문자가 환웅천황 때에 만들어진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 흔적이 남해도 낭하리의 계곡에 남아 있고, 마주 경박호 선춘령과 우수리 강 사이 바깥쪽 바위에 그 글자가 새겨져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은 '소도경전 본훈 제5'에도 나온다. "우리 나라의 문자는 예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옛 조각이 있다... 남해현 낭하리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은 '환웅이 사냥 갔다가 제사를 삼신께 드리다'라는 뜻이다." 남해 낭하리의 바위에 글자가 있다는 사실과 뜻까지 밝혀 적어 놓았다. 낭하리는 바로 지금의 양아리다. 이어서 신시가 만든 글자를 보여주고 있다. 신시에 산목이 있고 치우에게 투전목이 있었고 부여엔 서산이 있었다. 신시, 치우, 부여는 모두 환웅의 후손이 세운 작은 나라들이다. 양아리의 바위글자는 치우의 전목을 빼어 닮았다. 앞에서 신시가 사슴 사냥을 나갔다가 그 발자국을 보고 깨달은 바 사물을 본 떠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치우는 전목이 바로 그 글자인 듯싶기도 하다.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제가 삼신께 드리다'라고 하였으니, 이 바위글자는 바로 그 말을 적어놓은 것이다. 앞으로는 이 바위글자를 가지고 '서불과차'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환웅 임금 때 신시가 만든 고대문자라고 당장 고쳐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 그 뜻도 이와 같이 적어야 할 것이다. "남해 금산 고대 임금이 사냥 갔다가 사슴뿔 새발자국 고대문자 너럭 바위마다 새려 넣은 곳이 남해 금산 양아리 골짜기라네.
환인, 환웅, 단군, 삼신 할아버지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 지내던 곳이 양아리 골짜기 남해 금산이라네."
다랭이 마을
우리 마을은 선조들이 농토를 한뼘이라도 더 넓히려고 산비탈을 깎아 곧추 석축을 쌓고 계단식 다랭이 논을 만들어 토양의 소중함과 고단한 조상들의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으며 다랭이논과 바다. 산이 어우러져 절묘 한 조화를 이루어 찾는 분들 모두 탄성을 자아내는 마을이다. 농촌전통테마마을은.... 정겨운 농가에 머물며 옛 조상님의 슬기와 지혜를 느끼고 배울수 있는곳, 지친 현실을 떠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도시민과 농업인이 서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곳,
오랜 세월을 이어온 전통과 자연이 빚어내는 멋이 살아있는 곳이다. 대를 이어 온 고향의 맛이 있으며, 넉넉하고 포근한 대지와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보며 마음으로 느끼는 관광 체험 놀이가 있다.
첫댓글 와!~~~~장편의 이 많은 글 올리느라 시간 많이 소비 했겠다. 네 정성이 엿보이는구나? 근데 웬 코쟁이 나라 글은?
ㅋㅋㅋ 코쟁이 글 지웠다.... 반갑다 친구야.. 언제 기회되면 만나보고 싶구나...
검귀 본적은없지만 남해 다녀왔구나 난 작년에 다녀왔는데 후기도 잘 올렸네, 그래 목욜 중량천에서 모여 운동하고 친목도 도모하고 잘 짖어봐라 후회없는 멋진 모임일거다~~~~~~~
작년8월에 가입하고 활동을 안 했구나! 중량천에서 매주 목요일날 활동 열심히 하라고 정회원으로 업 시킬게 온 오프에서 자주 만나자..
검귀야 자네 나하고 우리 멍들하고 만나니 반갑지 약속 꼭지키고 목요일은 되도로이면 나오너라 카폐도 자주들어와서 서로간의 정도쌓고 그래라--
흐흐흐 .. 타켓이랑 같은 버스를 탄 모양이구나. 타켓이 좀 시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잖어?
타켓~~~ 좋은 친구야 ㅎ...^^*
정회원 되었네 . 축하하고 자주보자. 정성이 가득한 글 잘봤다.
타켓 좋은 친구... 맞는 말이다.. 나쁜 친구면 공개적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게나.... 글구 정회원 시켜줘서 고맙다.. 친구들아.. 중랑천에서 빡시게 함 뛰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