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길,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
1코린 4,7-15; 마태 20,20-28 /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24.7.25.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입니다. 어부였던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중요한 자리마다 데리고 다니셨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웠을 때에(마르 1,29),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켜 주실 때에(마르 5,37), 타볼산에 올라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에도(마르 9,2) 예수님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상경 길에서 야고보의 어머니가 느닷없이 예수님께 청탁을 했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생애 최후의 순간에 맞이할 고난을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남기고 계시던 예수님의 심경이나 처지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이 청탁에 스승으로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면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마다 한 자리씩 앉게 되리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나머지 제자들이 듣기에도 이 청탁은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머지 제자들의 불쾌한 표정을 보시고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채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모두 가까이 불러 놓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상상해 보건대, 이 말씀을 이르시는 예수님의 표정은 정색을 하셨을 것 같고, 어조는 단호하셨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당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단단히 혼이 나서 큰 깨달음을 얻은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가 되어 섬김에 관한 이 가르침을 깊이 새기고 당시 땅 끝으로 알려진 스페인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으며, 다시 돌아온 예루살렘에서 주교가 되어 신앙 공동체를 다스리다가 헤로데 아그리파 임금에게 체포되어 파스카 축일 전날에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그는 스승의 공생활 동안에 받았던 신임을 섬김의 사도직으로 증거하였습니다.
9세기 경 스페인 국왕 알폰소는 마침 우연히 발견된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던 자리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자 하는 뜻에서였습니다. 150년이나 걸려 완공된 이 성 야고보 사도 기념 대성당은 그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순례자들을 불러 모았고 우리나라에서도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이 순례길을 걸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기 2000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서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티아고 또는 디아고라 부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를 기념하여 지어진 성당의 이름을 따서 이 순례길의 이름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기리는 성당을 짓고자 했던 알폰소 국왕이나 이 성당까지 먼 거리의 순례를 걷는 순례자들 모두 섬김의 진리를 증거한 야고보 사도의 사도적 공로에 의지하고 그가 남겨준 섬김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닮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터입니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영어식으로는 제임스라고 부르는데, 영어권에는 이 이름을 딴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수행하던 사도의 직분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열두 제자와는 다른 맥락에서 교만한 길을 걷다가 벼락을 맞고 나서 사도의 길을 걸었던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던 믿음이란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는”(2코린 4,8-9) 사도직 의식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힘은 사도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서, 사도들이 행하는 그 고귀한 직분 덕분에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질그릇 속에 보물을 지니고 있다.”(2코린 4,7)고 자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보물을 지니고 있는 덕분에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자신들은 질그릇 같이 깨지기 쉬운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자각도 있었기에 겸손의 덕목을 지녀야 함은 당연한 것이었고, 은총의 그 보물 역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깨달음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러고 보면 사도 야고보에게 있어서나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나 그 결이 약간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사도직이 섬김의 직분이라는 본질은 공통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직은 섬김의 직분이며 따라서 예수님의 일을 계승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힘으로 수행하는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 기회나 여건은 질그릇처럼 초라하고 미약할 수 있으나 사도직 자체가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보물과도 같은 기운이 사도직을 행하는 우리들에게서 나오게 된다는 현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열두 제자 출신의 사도들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사도직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임명을 받은 적도 없고 도움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사도보다도 열심히 사도 직분을 수행했고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에 많은 공동체들을 세우는 선교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비결은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그 만남에서 받은 영적인 기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직은 섬김의 직분이라는 오늘 말씀의 초점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선교 활동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사도직 활동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목과 선교 활동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러 오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도직의 사명을 바탕으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나 국가 권력을 향해서도 섬김의 진리를 외치는 예언자 직분을 수행해야 합니다. “국가 공권력은 민중을 위해서, 지식인인 순박한 서민들을 위해서, 금력은 대중의 복지적 증진을 위해서 봉사해야 함을 가르쳐야 합니다.”(사회복지 의안, 6항)
예수님께서는 이 섬김의 직분을 수행하시느라 초래된 십자가 희생조차도 당신 목숨을 바쳐서 해방시킬 많은 이들의 몸값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계승해야 하는 교회의 예언자 직분은 국가가 수행하는 사회 개발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사회 개발이 될 수 있도록 외쳐야 할 직분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사회 개발을 교회의 사회사목적 복음화의 차원에서 보자면, 개발 활동은 단순히 기아와 빈곤을 퇴치하는 것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며 모든 인간이 참다운 인간적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 모든 인간이 타인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 모든 인간이 서로 주고 받으며 사는 사회, 그럼으로써 모든 인간이 한 형제 되는 사회,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문제”(사회개발 의안, 2항)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영웅적인 사도직의 길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도직을 행하면서 비록 우리는 질그릇 같을지라도 우리 안에는 보물 같은 힘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 그리고 섬김의 길이 버겁게 느껴질 때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담겨 있는 그 보물의 힘을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섬김은 십자가를 수반합니다.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상대방을 참고 기다려주어야 하며, 혹시 의심이나 비협조 또는 배신을 당하는 경우에도 받을 수 있는 상처마저도 각오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얻는 십자가가 천국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되고 이러한 희생의 삶이야말로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제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