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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nstiz.net/pt/1875923?capture=1 서라벌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 서라벌은 신라의 국가적 발전과 함께 대규모의 도시로 성장하여 통일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극도의 번영을 구가했다고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제49대 헌강왕(憲康王)대에는 도성(都城)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고 밥을 짓는 데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썼으며, 집의 처마와 담들이 이웃과 서로 붙어 있으며, 노래 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고 묘사되고 있다습니다. 동양화가 이재건씨가 고증을 통하여 9개월에 걸쳐 완성하였다는 '신라 왕경도' 민속 공예촌內 신라 역사 과학관에서 볼수 있습니다 당시 서라벌을 3d로 재현한 모습들 『삼국유사』권1 기이편(紀異篇) 진한조(辰韓條)에 “신라 전성시대에 수도인 경주에는 17만 8,936호(戶)가 살았고, 행정 구역은 1,360방(坊), 55리(里)로 나뉘었으며, 금입택이 35채 있었다 여기서 17만 8,936호(戶)가 맞다면 9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옵니다 당시 신라 인구를 200만이라고 가정했을때에는 더욱 놀라운 수치죠 그래서 17만여구(口)의 잘못된 기록이라고 라고 라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금입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금입택이란 말그대로 금을 입힌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왕경도에는 월성과 대궁지에 금빛으로 표현된 화려한 건물이 있습니다. 즉, 금입택의 모습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금입택은 재매정택(財買井宅: 김유신공의 조상집)을 비롯해 39채가 있었다고전해집니다 밑에 사진들은 금을 입힌 건물들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馬耳山)에 있는 '금당사'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에 위치한 황금사찰 '수국사' 재매정택(財買井宅;유신공庾信公의 조종祖宗) 39금입택 중 유일하게 위치가 알려진 곳입니다. 바로 '재매정'으로 수많은 전장터를 누볐던 김유신과의 일화가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주변으로는 건물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화려했던 김유신의 금입택을 상상해보는것도 흥미있는 일입니다. |
신라에는 금으로 만든 집도 있었다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825
신라에는 금으로 만든 집도 있었다(金入宅)
컴퓨터로 그린 신라 수도 경주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진한조(辰韓條)에 “신라 전성 시대에 수도인 경주에는 17만 8936호가 살았고, 행정 구역은 1,360방(坊), 55리(里)로 나뉘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17만 호’에 대해서는 이를 호구수로 보고 5(명)을 곱하면 85만여 명이 되는데 경주의 면적을 감안하면 이 인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호구수로 보지 않고 인구수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에서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620만이라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신라 왕경의 인구를 85만명 정도로 추측하는 것이 결코 타당성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삼국유사 권5 피은 염불사(念佛師)조에는 360방 17만 호라고 하여 이 기록과 차이를 보이나 호수는 비슷하다)
신라의 전성시대라고 함은 대체로 삼국통일 이후 약 100여 년 간인 중대(654∼780)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성 시대는 경주가 수도로서 가장 번성했던 신라 말기, 즉 헌강왕 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통일신라 헌강왕 6년(880)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9월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경주)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당시 경주의 집들은 모두 기와로 지붕을 이어 초가집이 없었고 밥을 짓는 데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썼으며, 처마와 담이 연이어 노랫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을 정도이니 그만큼 경제적으로 윤택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
신라왕경도(동그라미 안이 금입택)
삼국유사의 기록은 좀 더 구체적인데
'삼십오금입택 언부윤대택야(三十五金入宅 言富潤大宅也)'
금(金)으로 치장한 저택 즉 금입택(金入宅)이 35집이며 금입택이란 '부윤한 큰 집'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서 금(金)이 쇠(金)를 뜻하는지, 황금(黃金)을 뜻하는 것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이 금입택이 전성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가장 부유한 집을 가리키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따라서 황금(黃金)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금입택은 신라의 고위 귀족들이 사용하던 저택으로 넓은 토지에 정원을 만들고 가운데 큰 당(堂)을 세워 석회대신 금으로 칠하였던 호화저택을 일컫는다. 이 금입택은 신라의 기록외에 일본서기, 아랍제국의 기록에서도 등장하고 있어 실제로 존재하였던 건물임에 틀림이 없다.
대체로 신라 중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신라 말기에 이르러 전성 시대를 구가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삼국유사에는 35채의 금입택이 있었다라고 했지만, 39채가 기록되어 있어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 기록
삼십오금입택(三十五金入宅)의 이름과 사절유택(四節遊宅)이 적혀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입택에는
남택(南宅), 북택(北宅), 우비소택(亏比所宅), 본피택(本披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 - 본피부),
재매정 택(財買井宅 - 김유신의 조상집祖宗),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 - 반향사(反香寺)하방(下坊), 대택(隊宅), 빈지택(賓支宅 - 반향사 북쪽),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상택(楊上宅 - 양부의 남쪽), 한기택(漢岐宅 - 법류사法流寺 남쪽), 비혈택(鼻穴宅 - 법류사 남쪽) ·판적택(板積宅- 분황사芬皇寺 상방上坊), 별교택(別敎宅 - 개천 북쪽), 아남택(衙南宅), 김양종택(金楊宗宅 - 양관사梁官寺 남쪽), 곡수택(曲水宅 - 개천 북쪽).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 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이남택(里南宅- 亏所宅), 사내곡택(思內曲宅), 지택(池宅), 사상택(寺上宅), 대숙택(大宿宅), 임상택(林上宅- 청룡靑龍이란 절 동쪽이니, 못이 있다), ·교남택(橋南宅), 항질택(巷叱宅 - 본피부) , 누상택(樓上宅), 이상택(里上宅), 명남택(椧南宅), 정하택(井下宅) 등으로 39채이다.
이중에서 부명(部名)을 갖고 있는 양택(梁宅), 사량택(沙梁宅), 본피택(本彼宅), 한기택(漢岐宅) 등 4개의 금입택은 왕실의 이궁(離宮)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금입택의 기록 뒤에 '사절유택(四節遊宅)', 즉 계절마다 머무는 집이 있었다고 적혀 있어, 요즘으로 말하면 별장(別莊)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네 계절에 따라 놀던 사절유택은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그리고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이었다고 한다.
재매정택지(財買井宅址-김유신의 조상집)와 우물
이들 금입택의 경제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의 보희선사 비문인데, 신라 헌안왕(憲安王)은 헌안왕 4년 금입택중 하나인 수망택(水望宅)과 이남택(里南宅) 택주에게 하교해 금 160근과 조 2000곡(斛)을 보림사에 시주할 것을 명했다고 한다. 이 두 금입택이 보림사에 기부한 세곡 2000곡은 토지 1333결에 해당하는 것으로 엄청난 양이었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와 엄청나게 늘어난 금(金)의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806년(애장왕 7년)에 금(金)·은(銀)으로 용기(用器)를 만드는 것을 금지했고, 834년(흥덕왕 9)에는 교서를 내려 진골(眞骨)의 경우에도 용기에 금·은의 사용을 금했다. 또 거기(車騎-마차)에는 금은옥(金銀玉)으로 장식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특히 집의 서까래 끝이나 문틀 주위 등을 금·은·보석으로 꾸미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같은 왕실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금입택으로 불리는 호화저택들이 곳곳에 들어 섰다. 주인이 밝혀진 금입택들로는 김유신(金庾信)가문(즉 김유신 후손)이라든지 집사부 시중직을 역임한 김양종(金亮宗)의 가문 등 당대의 실력자들이 금입택에 거주했던 것은 그 택주들이 단순한 부호들이 아니라 왕권에 비견될 만한 유력한 진골 귀족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 839년에 신무왕이 즉위할 때까지 격심한 왕위 계승 쟁탈전을 겪었고, 그로 인해 국가 권력이 매우 약화되어 진골 귀족에 대한 사치 생활 금지령을 강제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본의 금각사
금입택이란 어떤 집을 말하는 것일까?
구체적인 형태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금(金)으로 치장한 저택이라면 일본 교토의 금각사(金閣寺)가 떠오른다.
금각사(金閣寺)는 본래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시대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1397년에 지은 별장이었으나, 그가 죽은 뒤 유언에 따라 로쿠온지라는 선종(禪宗) 사찰로 바뀌게 된 건물이다
정식 명칭은 녹원사(鹿苑寺 로쿠온지)이지만, 금박을 입힌 2,3층 누각의 사리전(舍利殿)이 금각(金閣 긴카쿠)라는 명칭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어 흔히 긴카쿠지(金閣寺)라고 불린디.
금각사는 2층과 3층 전체 벽면과 처마에 옷칠을 한뒤 순금으로 금박을 입힌 건물로서 멀리서 보아도 찬란한 황금빛이 번쩍인다
신라의 금입택도 이와 같이 금박을 입힌 건물이 아니었을까? .
금와를 올린 마이산의 금당사
벽면돠 처마를 금박으로 올린 수국사의 금불전
우리 나라에는 근래에 지어진 금불전이 몇 개 있다. 전북 마이산의 금당사나 서울 수국사가 대표적이다
신라의 금입택은 과연 금으로 지었을까?
생산량이 많았던 당시의 금값을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과연 값비싼 금박으로 집 안팎을 장식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신라시대에는 황금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황칠(黃漆)이라는 것이다. 2006년 계림 북쪽 통일신라의 건물 유적지 지진구에서 황칠안료가 담긴 합(盒)이 출토되어 신라 때 황칠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계림 북쪽 건물유적지 지진구 복원괸 지진구
2006년 경주 계림 북쪽 신라건물지 지진구에서 발굴된 황칠을 담은 유개합
황칠(黃漆)은 고대 한반도에서만 났다는 '전설의 금빛 도료'로, 기록으로는 남아있지만 그 실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실체가 미궁에 빠졌던 도료였다
옻나무에서 옻을 채취하듯이 황칠은 황칠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하는데 큰나무에서 겨우 한 잔 정도 밖에 나오지 않는 귀한 도료이다. 나무에서 체취·가공된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금속과 목재, 종이 등의 도색을 위해 삼국시대부터 고급제품의 외장에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황칠은 빛깔이 화려한 황금빛이며, 내구성을 강화시켜 칠을 한 제품의 수명을 연장시킬 뿐만 아니라, 안식향(安息香)이라는 독특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의 신경을 안정시키는데 효과가 있다.
북송(北宋) 시대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편찬한 방대한 백과사전인 '책부원구(冊府元龜)'라는 책에는 "당 태종 이세민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 황칠)을 요청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철제 갑옷에 황칠을 칠하면 갑옷이 황금빛으로 빛나게 되는 것이다.
황칠나무는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 일부지역에서만 자라는 우리나라의 고유 수종(수종)이며 신라 때 이미 이 황칠나무를 이용하여 생활도구를 황금빛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금입택은 물론 금박도 입혔겠지만 일정한 부분은 이 황칠도료를 사용하여 찬란한 금빛을 내지 않았을까?
황칠나무
그동안 황칠나무는 고려, 조선시대에 고의적으로 훼손시켜 모두 사라진 것으로 여겨왔으나 20여년 전, 전남 해남에서 우연히 야생 황칠나무가 발견되어 현재는 이 황칠나무에서 채취한 황칠도료를 사용한 공예품이 선보이고 있다.
황칠도료를 이용한 공예품
(토기에 황칠도료를 입혀 황금빛이 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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