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가방
다니구치 지로 지음/오주원 옮김
만화에는 쾌락과 읽기가 완벽하게 화해하는 놀라운 축복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만화의 이 축복을 불경스럽게 배신하여 그것을 만화의 가벼움으로 왜곡하는 일은 문화의 재앙과도 같다. 만홧가게에 앉아 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나타나는 엄마나 선생님을 망연자실 올려다 본 적이 있는 자는, 이 재앙을 개인사 속에서 미리 체험해본 자이고 그 재앙이 문화 전체에 도래하는 양상을 스스로의 희생을 통해 고지(告知)하는 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즐거운 것이 저급한 것은 아니다. 만화는 다른 여타의 독서물이 읽기의 괴로움이라는 힘겨운 장치를 통과하고 나서야 건네주는 내용물을 즐거움 속에서 건네주는 놀라운 예술이다.
사실 인간의 지성은 고대부터 만화적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었던 듯하다. 플라톤은 시간의 흐름을 "영원한 것의 움직이는 모상(模像)"이라 일컬었다. 만화의 한 컷 한 컷 같은 고정된 영원한 것들이 있으며, 만화책의 책장을 넘기 듯이 고정된 것들을 바라볼 때 비로소 시간이 움직이고 이야기가 엮인다. 즉 그림은 고정되어 있고 영원하지만, 그것의 움직이는 모상이 우리 마음에 비추인다. 플라톤은 세상을 한 권의 만화책처럼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다면, 만화책이 세상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세상을 담아내는 만화책의 저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가에 속하는 다니구치 지로의 <선생님의 가방>이 최근 출간되었다. <선생님의 가방>은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카미 히로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여성 소설가의, 30대 여성의 눈으로 진행되는 감정 선이 매우 미묘한 작품을 60대 남성의 눈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무런 서사가 없는 이야기라는 좀 모순된 표현이 허락된다면, 그는 이 표현에 걸맞은 <고독한 미식가>(구스미 마사유키 원작, 박정임 옮김)와 <우연한 산보>(구스미 마사유키 원작, 미우 펴냄)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도련님의 시대>(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의 작가이다. <도련님>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위해 그린 이 작품은 소세키라는 한 인물을 만화 속에서 되살리고, 그 인물 안에 일본의 근대 풍경과 룸펜 지식인과 그의 유명한 고양이, 협객친구들, 우울한 정치, 이시카와 다쿠보쿠 같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시인, 그 밖에 자질구레한 근대적 삶, 이 모든 것을 불어넣었다.
만화는 서사물(즉 시간적인 것)이지만, 사실 현실화되어 있는 것, 또는 실존하는 것이라고는 그려진 공간 밖에 없다. 시간은 앞서 이야기했던 플라톤의 영원한 것(공간적 정체성을 갖는 그림)의 움직이는 모사물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효과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만큼 만화에서 공간은 실질적 지위를 차지하는 듯하며, 이것이 뜻하는 바는 공간의 공간성 그 자체가 만화가에게 도전해볼만한 화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가방>은 두 남녀의 예외적인 사랑이야기인데, 순전히 공간만으로 여자의 심리, 두 남녀의 거리 등등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어 인상적이다(8장 꽃놀이). 인물 없이 공간(여기선 꽃놀이를 하는 강둑)이 사랑하고, 공간이 여자의 서운함을 전한다. 요컨대 공간이 질감과 사연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