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서상륜의 생애 (1)
"一八七三年 (癸酉)頃에 我國商民이 中國奉川에 往하얏다가 英國 스카트란드 長老會 宣敎師의게 福音을 始聞하엿고 一八七六年(丙子)에 我族數人이 奉川 宣敎師 매킨다일의게 洗禮를 밧고 其後에 該宣敎師의 指導를 밧아 金鎭基, 李應贊 數人은 奉川에 滯在하야 漢文福音을 鮮文으로 飜譯하야 木版으로 印刷하고 徐相崙 李成夏等은 本國 賣書로 任命되야 潛縱으로 傳道케 할새 徐相崙氏난 先히 義州로 潛入하다가 鳳凰城 柵門에 至하야 當時 巡捕의게 搜索되야 聖書가 露出된지라. 卽時 別定所에 拘禁되니 當時 國禁에 依하면 生命이 危境에 至하얏더니 適其 戚屬인 本府執事 金孝順이 此를 見하고 警愕周施하야 當夜四更에 貰馬馳送으로 死地를 逃脫케 하니라. 後에 京城에 潛到하야 福音傳布키를 經營하더니 奉天 宜敎師 로스 요한이 上海 聖書公會에 委託하야 鮮文으로 譯刊한 聖經 六千餘本을 朝鮮 京城 徐邸에 輸送케 한것이 仁川 海關에셔 發覺되야 押收하고 不測의 事가 生케되엿더니 適其時 外衙門協辦 穆仁德의 婦人은 篤實한 信者라. 傳道에 有意하더니 로스牧師의 致書囑托으로 穆協辦이 徐相崙을 密招하야 事由를 聞知하고 政府에 善言하야 無事이 되엿스며 書箱은 徐邸에 送致됨으로 徐君은 隱密히 傳道에 從事하다가 其後에난 元杜尤牧師의 來京을 機會로 하야 京城에셔 傳道의 門이 漸開케 되니라."
차재명. 앞의 책. 8쪽.
기독교를 말할 때 베드로와 바울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한국 교회를 말할 때 서상륜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자이며 전도자이며 교회 설립자이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의 베드로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귀츨라프와 토마스 등 외국 선교사들이 굳게 닫힌 쇄국의 문을 열기 위하여 안간힘을 쏟았고,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열지 못한 은둔의 문을, 생명과 생애를 송두리째 바치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굳게 닫힌 문을 뚫고 들어와 복음을 이 민족의 가슴에 심은 장본인이 바로 서상륜이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였고, 어렵게 출판한 성경을 품에 품고 국경을 넘어 제 2의 고향인 소래와 서울을 왕래하며 복음의 씨를 뿌림으로써, 이 강산에 역사적인 민족 교회를 탄생시키는 위업을 이루었다. 이런 분이 한국 교회에 있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런 일이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은 세계 선교사상 유래 없는 자생적 교회를 가질 수 있었고, 내 손 내 힘으로 세운 [민족 교회]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근대사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한 이광린 교수는 이 경이적인 사실에 대하여 "언더우드나 아펜젤라는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즐거운 수확을 거두기 위해 온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논평하였고,
(이광린(1984.4.28) "여명의 개척자들" 경향신문).
민경배 교수는 "언더우드나 처음 선교사들은 세례의 적격을 문답하고 성례(聖禮)를 집행할 목회의 대임을 맡았다 함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민경배(1982). 한국기독교사. (개정판).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72쪽).
언더우드 자신도 이 사실을 시인하기를 "한국 최초의 교인들이 나의 현전(現前)에서 그들의 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거의 전부가(Almort entirely) 당신의 매서인(賣書人) 서(徐)씨의 결실들입니다."라고 존 로스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하고 있다.
(민경배. 앞의 책. 16쪽).
1) 어린 시절
세계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업적을 남긴 서상륜은 1849년 7월 19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서석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생일을 7월 27일이라는 학자도 있다.)
여기서 잠시 족보에 명시되어 있는 그의 가문을 소개를 하고자 한다. 그는 대구 서씨(大丘徐氏)로서 증조부 시절 의주로 이거한 듯하다. 대구 서씨의 족보에 의하면, 서상륜의 증조부 서유묵(徐有默)의 묘소가 의주로 되어 있고, 그 이상 3대조의 묘소는 금곡동(金谷洞)으로 되어 있다. 서상륜의 부친 이름은 족보와 구청에서 발행한 호적에 서석순(徐奭淳)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사는 모두 서필순으로 기재하고 있다. 반드시 수정하여야 할 부분이다.
그의 가문은 생활이 유족한 부유층에 속하였으나 부친이 수인성 질환인 콜레라로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닷새를 사이에 두고 모친마저 별세한다.
(박완, 김광수 등은 모친은 생존한 것으로 기록하나 사실과 다르다).
그러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어린 두 형제의 앞길에는 암운(暗雲)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이 때 형의 나이는 불과 14세, 동생 상우는 11세에 불과하였다.
(서경조의 본명은 상우(相佑)이고 경조(景祚)는 그의 호이다. 한국 교회는 호를 본명처럼 사용하고 있다.
(서상륜(1901.9.19). "셔션생 샹륜의 경력" 그리스도신문. 306쪽)
그들은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 때까지 형제는 한문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부모의 별세로 형만 서당공부를 계속하였고, 동생은 자습으로 한학을 익혀야 했다. 서상륜이 받은 한문수업은 먼 훗날을 예비하시는 주님의 섭리였다. 이 때 갈고 닦은 한문 실력은 수세(受洗) 후 성경 번역에 쓰임이 되었고 로스는 그를 "누가복음의 공역자"라고 극찬하였는데, 그 까닭은 그의 한문 실력이 걸출하였기 때문이다. 서경조의 손자 서재현도 "큰 할아버지는 한학에 능통하였을 뿐 아니라 글씨도 명필이어서 우리도 그 분에게 글씨 공부를 많이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글씨도 명필이었던 것같다. 그리고 그의 좋은 글씨체는 후에 한글 성경 발간에 크게 쓰임을 받는다.
2) 로스의 고려문 전도
스코틀랜드 교회가 중국으로 파송한 로스(John Ross)는 만주 지방을 선교지로 정하고 활동을 하였다. 1872년 만주로 온 그는 어학 연수를 마친 후 만주지방 순회전도의 길에 나선다. 이 때 고려문에서 우연히 한국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중국인과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한국인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된다. 그의 제 1차 고려문 전도는 1873년으로 추정된다.
(로스 John Ross; 한자명 羅約翰 1842-1915. 스코트랜드 장로교 목사, 중국 선교사. 중국(1872-1888)에서 선교하는 동안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이응찬, 이성하, 서상륜 등에게 세례를 주고 한글 성경을 번역 출판하다.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로스의 고려문 전도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
새문안교회70년사: 1차전도 1873년 가을, 2차전도 1876년.
김양선: 1차전도 1873년, 2차전도 1874년.
이영헌: 1차전도 1873년, 2차전도 1874년.
김정현: 1차전도 1874년 10월 9일, 2차전도 1876년 4월말.
민경배: 1차전도 1874년 10월, 2차전도 1876년 4월.
김광수: 1차전도 1873년, 2차전도 1874년.
곽안전: 1차전도 1873년, 2차전도 1874년 봄.
다음 해(1874년), 그는 다시 고려문을 방문하여 의주 청년들을 한국어 어학선생으로 초빙, 심양의 선교기지로 대동한다. 이 때 그와 동행한 의주 청년은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4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이응찬은 로스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1. 매켄타이어 John Macintyre; 한자명 馬勒泰. 1837-1905. 스코트랜드 연합 장로교회 중국 선교사, "로스, 서상륜 공역 성경"의 공로자. 로스가 안식년으로 귀국시 한글성경 교정과 출판에 힘쓰다.
2. 서상륜은 [예수 성교가 한국에 시입한 역사]라는 글에서 이응찬은 1874년에 로스목사를 만났고,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이일세 등은 1875년에 맥킨타이어를 만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국땅 만주에서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 로스를 통하여 복음의 씨가 한국 청년들 가슴에 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로스에게 복음을 듣고 신앙을 가지게 되며, 드디어 로스의 매부인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에게 세례를 받는다.
1. 의주 4청년의 수세에 대한 각기 다른 주장들.
1) 김양선: 1876년 맥킨타이어에게 4인 모두 수세.
2) 백낙준: 1876년 이응찬만 세례를 받음.
3) 사기 상: 1876년 봉천에서 수인이 세례를 받음.
서상륜의 생애 (2)
3) 회심과 수세
부모의 별세로 기울어진 가세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 서상륜은 20여 세의 젊은 나이로 상업에 종사하였는데, 국경을 넘어 만주를 왕래하며 인삼을 판매하는 매약행상이 그의 직업이었다. 그가 30세 되던 1878년의 일이다. 동생 경조와 함께 상업차 영구(營口)에 갔을 때 우연히 열병에 걸려 생명에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그 때의 일을 본인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는 1878년 戊寅에 아우와 함께 장사차 營口에 갔다가 熱病에 걸려 危至死境이 된지라"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로스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위기에서 그를 구출하신 분은 이천만 백의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그릇으로 선택해 놓으신 주님이시다. 서상륜이 위독하다는 소문을 듣고 고향친구 몇 명이 그를 찾아와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시킨다. 이 병원은 아일랜드 교회가 만주로 파송한(1869년), 의료선교사 헌터(Joseph M. Hunter ?-1884)가 경영하는 병원이었다.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한국의 안드레"라고 할 수 있는 멕킨타이어에게 끈질기게 전도를 받았으며, 결국 그는 병이 완쾌되면 예수를 믿기로 약속한다. 월여 동안의 정성어린 치료와 간호가 주효하여 완쾌되자, 약속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세례를 받는다.
그의 수세연도에 대하여 여러 주장들(1873, 1879, 1881, 1882, 1884)이 있으나, 크게 나누면 1879년 이전과 이 후가 될 것이다. 우선 서상륜 자신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한다.
"일년젼에 마근태 목사가 객뎜에셔 죽을 인생을 그 갓치 구원하여 내셧기로 내가 아모리 무인졍하고 뮤념치한 놈이라도 그때에 그 애쓴 은공과 약식갑(저자주: 藥食값) 걱졍으로 말한즉 마근태 목사가 말삼하시기를 네 생각은 됴흔 마음이나 재물이 업사니 할 수 업거니와 네가 진실노 고마온 마음이 나거든 하나님께 감샤하고 그 말삼대로 예수씨를 밋으면 이에셔 더 깃붐이 업겟다 하시더니 지금 로쓰목사가 또 이 갓치 참 사랑으로 권하시니 예수씨를 밋난 사람은 참 하날 나라 백셩이로다. 이 갓치 생각할 때에 내 마암이 감동하야 고맙고 반가온 마암이 니러나거날 이에 로쓰목사를 차져보고 내 마암이 반가옴과 이젼 불의를 행한거시 매우 붓그럽고 졀통하야 뉘웃난 말을 하니 로쓰목사가 묵묵히 듯다가 갈아대 그려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샹관이 매우 즁한지라 그리스도씨 압희 나아와 그 명하신 대로 밋고 슌복하는 거시 맛당하다하고 이에 셰례를 베풀매 내가 매우 반가히 그리스도 압희 나아와 쟉뎡하고 목사와 대쳥국 여러 교우들 압희셔 셰례를 밧고 쥬의 무리가 되엿나이다. 그 때 내가 자셰히 긔억지난 못하나 짐작건대 쥬 강생 일쳔 팔백 칠십년간이외다."
여기 서상륜의 글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첫째, 그가 매킨타이어의 전도에 쉽게 감동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동기이다. 그것은 어려운 질병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고마움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런 큰 은혜를 무료로 제공받았기에 더 큰 부담을 안게 되었고 감격하고 있다.
둘째, 그 고마움과 감격이 세례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로스를 찾아갔고 이것이 바로 세례로 연결된다. 이 부분을 서상륜은 "일년젼에 마근태 목사가 객뎜에셔 죽을 인생을 그 갓치 구원하여 내셧기로"라고 표현하였다.
셋째, 서상륜 자신은 자신의 세례연도에 대하여 정확하게 기억해 내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짐작건대 쥬 강생 일쳔 팔백 칠십년간이외다"라고 하였지만 그의 언질은 매우 중요한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가 제공한 단서들은 (1) 자신은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요, (2)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이 1년 전의 일이라는 것이요, (3)"일쳔 팔백 칠십년간"이라고 한 사실이다. 이 말들이 왜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그 연대가 로스의 안식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스는 안식년 휴가를 위하여 1879년 5월에 본국으로 들어갔고, 1881년 5월에 만주로 귀환한다. 따라서 그가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1879년 5월 이전이든지 1881년 5월 이후가 될 것이다.
서상륜은 분명히 말하기를 고침을 받은 지 일년 만에 로스를 찾아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고, "일쳔 팔 칠십년"대를 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로스가 영국에 들어가기 전에 세례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서상륜은 1879년에 세례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
4) 성경 번역
[로스역 성경]하면 어감상 로스 개인이 번역한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다만 로스가 한글성경 번역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일 뿐이며, 실은 여러 사람들의 숨은 노력의 결정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서상륜이 세례를 받기에 앞서 만주에는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그리고 이응찬 등이 멕킨타이어에게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으며, 성경 번역도 이미 착수하고 있었다. 세례를 받은 서상륜도 멕킨타이어의 집에 유하면서 성경 번역에 뒤늦게 참여한다. 그러나 국내 자료에 의하면 이익세, 최성균 등이 성경 번역사업에 가담하고 있었고, 식자는 중국인들을 고용하였으나 저들이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 서간도 한인교회의 설립자 김청송이 식자공으로 참여하게 된다.
로스역이 빛을 보기까지는 이 외에도 더 많은 사람의 수고가 있었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누가복음의 원고를 교정하면서 평북 사투리를 서울 표준말로 고쳐 준 동지사 수행원이 있었고, 행정관서의 서기로 있던 사람으로 아편 때문에 해고당한 조선인 학자 등이 있었음을 로스의 보고서 자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참여와 수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스는 그의 보고서(1883년도)에 서상륜을 평가하기를 "누가복음 공역자"라고 하였다. 로스가 진행하고 있는 성경 번역사업에 서상륜의 공헌도가 절대적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보고문이다.
1904년에 내한하여 개성 선교부에서 캐롤(Arrena Carroll)과 함께 호수돈 여고를 창설한 와그너(Ellasue Wagner)는 '로스역'성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로스 번역이라는 말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서씨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지 않은가? ... (중략) ... 로스 목사는 그의 언어학적 능력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없으나 그의 과중한 다른 업무들로 인하여 그가 이 어려운 한국어를 배워서 중국어로 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가졌을 것 같지 않다. 합리적 결론은 [로스 번역]은 이들 한국 청년들의 작품이라고 하여야 한다."
"徐相崙은 義州 靑年들 中에서 가장 年小한 사람이었으나 學識에 있어서는 앞서는 便이었고 한글에 對한 知識이 매우 정확하였으므로 성서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상의 기록들로 보아 한글성경 번역사업은 누가 먼저 참여하였는가 하는 순서의 문제를 초월하여 공헌도에서 서상륜의 역할이 월등하였다는 것을 후세의 역사가들은 인정하고 있다. 서상륜은 마치 [포도원에 오후 다섯 시에 도착한 농부가 해질녁, 한 시간만 일하였으나 한 데나리온의 노임을 먼저 받은 것](마20:1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통속적으로 [로스역 성경]이라고 불려지는 성경은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런 명칭에 대하여 한국 교회사가인 이진호 장로는 로스역 성경을 [로스·서상륜 팀역]이라 칭하고 있다. 매우 합리적인 명칭이다.
오랜 각고 끝에 성경은 번역하였으나 한글 활자가 없어 인쇄가 불가능해지자, 이번에는 또 다른 수고를 해야 했다. 동역자들과 함께 목판에 붓으로 한글을 쓰고 칼로 판 후, 이것을 일본으로 보내어 4만 개의 납활자를 만들어 오는 거대한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추리해 볼 때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의 글씨체는 서상륜의 것이 분명하다. 앞서도 언급한 바 대로 그는 이미 명필로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출판을 향한 서상륜의 강한 집념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모든 활자들은 우장(牛莊)을 거쳐 심양으로 옮겨졌고, 인쇄기는 상해에서 구입하여 역시 심양으로 운반되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드디어 1882년 3월 24일에는 <예수 셩교 누가 복음젼서> 3천 부가 출판되었고, 동년 5월 12일에는 <예수셩교 요안내 복음젼셔> 3천 부가 심양의 문광서원 발행으로 출판되었다.
반만 년 유구한 역사의 장벽을 뚫고 최초로 한글 성경이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때 발행한 누가복음 3
"한 사람의 선교사가 찾아간 일이 없는 그 곳에 한글 성경과 전도문서가 들어가므로 놀랄만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만주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한국교회사는 소흘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
서상륜의 생애 (3)
5) 권서의 출발
성경을 번역 출판한 서상륜은 우선 남만주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의 남만주 전도는 고국 복음화를 위한 전초적인 준비작업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민경배 교수는 "서상륜은 이 성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남만주 지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에게 성의껏 반포하였으며"라고 하였고, 로스는 그의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 사실을 밝히고 있다.
"上海에 있는 貴 주재원 (성서공회)을 통해서 徐氏는 3개월간 勸書 行路에 나셨다. 그는 朝鮮 전역을 여행할 수 있지만 우선 鴨綠江 연안부터 시작하였다."
(민경배(개정판). 앞의책. 169쪽).
서상륜의 남만주 전도에 대하여 역사는 1882년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밝혀 주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어디서, 어떤 활동을 통하여,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는 앞으로 계속 연구할 숙제로 남겨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국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연단 과정으로 이런 수순을 밟게 하신 것만은 확실하다.
6) 국경을 넘다
쇄국으로 굳게 닫혀 있는 은둔의 고국에 들어와 어둠과 고통에서 신음하는 동족에게 하늘의 소식을 통하여 희망을 주는 것이 그의 바램이요 꿈이었다. 그리하여 1883년 이른 봄, 로스로부터 권서(勸書)의 직임을 받고 드디어 고국 전도의 장도에 오른다.
그의 귀국 년도에 대한 제 견해
1883년: 김광수, 이장식, 박용규, 조남선, 민경배, 김득황,
1883년 초: 이찬영
1883년 이름 봄: 곽안전, 김양선.
1883년 봄: 김성준, 이덕주.
1883년 가을: 박성겸, 박완.
그 당시 한국은 기독교는 물론 성경도 국금(國禁)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한문성경 등 100여권을 지참하고 입국을 도모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결행하였을 뿐 아니라 은밀히 숨어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한중 교역로를 통하여 정정당당하게 입국을 시도한다. 이 때 그가 넘어야 할 첫 관문은 압록강에서 120리 정도 떨어진 국경의 고려문이다.
고려문이란 봉황성 바로 밑의 작은 촌 거리로서 '루카'라고도 하고 책문(柵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청태조가 중원을 통일한 후 한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책을 두른 후 설치한 6문중 하나이며, 한국의 사신이나 상인들의 내왕은 오직 고려문으로 제한함으로써 한·청 양국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그는 이 고려문을 통하여 정정당당하게 입국을 시도한 것이다.
그가 어려운 고비를 넘어 고국에 입국하는 데 성공한 후의 일이지만, 이성하는 복음서를 가지고 압록강 연안의 구련성(九連城)까지 왔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입국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며칠간 기회를 엿보다가, 휴대하였던 복음서 전부를 불에 태워 압록강에 뿌리며 "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기도하였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고사이다.그 후 이성하도 귀국하여 (1884년) 로스가 보내준 성경을 가지고 의주지방에서 열심히 전도를 했다.
이런 위험한 시절이지만 호협하고 담대한 성격에 믿음까지 겸한 서상륜은 두려움 없이 고려문 통과를 고집하며 이에 도전한다. 그는 그 당시의 심정을 후세 사람들에게 간증할 때 결코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다만 간단하게 "나는 두렵지 않았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6문은 威遠, 英額, 旺淸, 城廠, 遼陽, 高麗임.
차재명. 앞의 책. 8쪽.
李永獻(1978). 韓國基督敎史. 서울: 컨콜디아사. 64쪽.
E.Wagner. 앞의 책. 95쪽.
서상륜 자신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놓았다.
"또 로쓰목사의게 감동하샤 죠션국에 젼도할 사무를 맛기시매 쥬압희셔 로쓰목사와 그 부인과 함끠 업대여 쥬끠 도아주시며 보호하심을 긔도하고 서로 작별한후 내가 봉텬부에셔 떠나 바로 죠션국 한양으로 올라와셔 석달 동안은 남의게 붓쳐 잇다가 남대문안 창동으로 집을 졍하고 올맛나이다. 그때는 쥬강생 일쳔 팔백 팔십년 봄즘 됨나이다."
(서상륜. 앞의책. 306쪽).
기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을 때 응답해 주시는 것을 믿은 그의 순수한 믿음이 이런 거대한 일을 해낼 수 있게 한 것이다. 김양선은 이 때의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Ross牧師는 傳道人의 任務를 完遂할 수 있도록 훈련을 마친 후 파송하였다. 奉天敎會에서 派送式을 엄숙히 거행하였다. ....(중략)....친구들도 그를 奉天 郊外에 있는 十里河까지 전송하였다."
이상과 같이 하여 서상륜은 죄와 우상으로 얽혀 있는 삼천리에 복음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는다. 아직 선교사의 발자국도 나 있지 않은 영적 처녀지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자기 손으로 번역·출판한 복음서를 들고 찾아 온 것이다. 마침내 고려문에 도착한 그는 중국 관헌의 불심검문에 걸려 금서(禁書)인 성경이 발각되자 예측하였던 대로 절망적인 사항에 직면하게 된다. 성경은 압수되고, 자신은 투옥되었으며, 예상할 수 있는 일은 죄인으로 압송되어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는 비극이 그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때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이 현실을 받아들였을까? 믿음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그는 이런 때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주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도우셨다. 예루살렘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출한 주님은(행12:1
그 사역은 이러하다. 한국측 별정소에 근무하는 관리 김효순과 김천련은 의주부 집사로 별정소에 파견 근무하던 중 서상륜의 투옥됨을 보고 대경실색하였다. 이들은 황급히 말 두 필을 준비하여 야간에 탈옥 도주케 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 김효순이 안내자가 되어 고향까지 인도해 준다. 이런 숨막히는 순간에도 사명감에 투철한 서상륜은 압수당한 복음서를 찾아 줄 것을 강청하였고 마침내 10여 권을 품에 간직하고 떠나게 된다.
7) 세 가지 문제
여기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때의 형편을 알리는 사가들의 의견 몇 가지를 정리하도록 한다.
첫째, 고려문 별정소에 있던 한국 관리는 누구였을까?
둘째, 서상륜은 과연 고향 의주에서 복음을 전하였는가?
셋째, 고향을 떠난 그는 어디로 갔는가?
이 세 가지 문제는 교회사를 다루는 학자에 따라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에 큰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첫째, 고려문에 있던 한국 관리는 과연 누구이기에 자신의 신변이나 직업을 포기하면서 서상륜을 야간도주하도록 도와주었을까? 우선 이 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한 <사기 상>의 내용을 다시 소개한다.
"卽時 別定所에 拘禁되니 當時 國禁에 依하면 生命이 危境에 至하얏더니 適其 戚屬인 本府 執事 金孝順이 此를 見하고 警愕周施하야 當夜四更에 貰馬馳送으로 死地를 逃脫케 하니라"
(차재명. 앞의책. 8쪽).
위의 글에서 <사기 상>의 편집인은 그 관리들은 서상륜의 [戚屬] 즉 친척관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 때문에 많은 사가들은 그의 도주를 방조한 사람은 그의 친척이라고 한다.
(박용규, 김광수, 김양선, 곽안전, 이영헌,김득황 등이다).
그러나 또 다른 주장도 없지 아니하다. 즉, 고향 친구, 고향 사람, 혹은 하인등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 이렇게 주장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서상륜의 가문에서 전해 오는 구전을 소개하면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별정소 관리의 신분대한 의견들.
고향친구: 이진호 앞의책 142쪽.
고향사람: 이덕주 앞의책 474쪽
하인: 박완 앞의 책 119쪽
"그 날 밤 큰 할아버지를 구출해 주신 분은 본래 우리 가문의 하인으로 있었던 사람이며 큰 할아버지가 옥중에 갇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 두 필을 세내어 그 밤으로 탈옥 도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 한 필은 큰 할아버지가 타시고 한 필은 그 분이 타고, 그리고 고맙게도 그 분이 직접 길을 안내하여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의주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서재현 증언_.
둘째, 서상륜은 고향 의주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이 사실을 처음 주장한 사가는 클라크(Allen D. Clark, 한국명 곽안전)이다.
"서상륜이 국경을 넘어 자기 집으로 들어간 후 우선 가족과 친척을 위시하여 이웃에게 전도하며 복음을 전한 결과 반 년도 못되어 수십 명의 신자를 얻어서 주일마다 서상륜의 집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그것을 강해하였다. 말하자면 이 곳은 한국에 있어서의 최초의 교회였던 것이다."
(곽안전(1961). 韓國敎會史.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4쪽).
이 기록을 후대의 학자들이 인용하여 "서상륜은 고향에서 전도하여 10여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고 하며, "한국의 최초 교회는 의주에 있는 서상륜의 집에 설립되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가 고향을 떠나 황해도로 피신한 것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고 주변 정세가 점차 험악해지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후의 일"이라고 한다.
(박성겸. 앞의 책. 39쪽).
정규호(1983) 한국장로교회사. 한국복음문서협회. 22쪽.
이영헌. 앞의 책. 64쪽.
(김광수. 앞의 책. 32쪽).
박용규. 앞의 책. 39쪽.
백낙준. 앞의 책. 51쪽.
이런 가능성은 희망적인 사항일 뿐 그 때의 정황으로 보아 고향에 느긋하게 눌러 앉아 전도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평안하게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탈옥 도주하여 죄인으로 돌아 왔으며, 관가의 수색은 곧장 뒤를 따라왔을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고향에 체류하며 복음을 전하였다고 추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런 때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선 현장을 피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는 결코 가장 쉽고도 안전한 방법을 외면하면서 모험을 강행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전은 사가들의 추측보다 매우 합리적인 방면으로 전해오면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그의 손자 서재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 때 큰 할아버지는 집에 도착하자 곧 지금까지 되어진 모든 형편을 할머니와 동생에게 고하고 황해도 봉대로 내려가 은신할 것을 말하고, 동생 경조에게는 속히 가산을 정리하여 할머니를 모시고 봉대로 내려 올 것을 부탁하였으며 그 길로 그를 안내한 분과 함께 말을 총총히 몰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교회사에 "고향에서 전도하기가 두려워 장연 소래로 와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과 상륜 자신이 남긴 다음의 기록을 연결하여 생각할 때 그의 의주 전도는 없었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蔡基恩(1977). 韓國敎會史.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38쪽}.
"고향에는 몸을 의탁할 곳시 업게 되매"
(서상륜. 앞의 책. 306쪽).
셋째, 그가 자신의 몸을 숨기기 위하여 찾아간 곳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구미리에 있는 봉대이다. 그가 이 곳을 은신처로 선택한 이유는 그 곳에 외육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분과 서상륜과의 관계에 대하여 엇갈리는 많은 견해가 있다. 혹은 삼촌, 혹은 오촌 당숙, 혹은 친척 등이다. 그러나 가문에서는 외육촌으로 알고 있으며 이 분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봉대 할아버지가 전부이다. 그를 봉대 할아버지로 부르는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봉대지기이었는지, 아니면 봉대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봉대 할아버지로 통하는 것이 전부이다.
상륜은 비록 은신처를 찾아 봉대로 오기는 하였어도 쓸쓸한 이곳에 한가롭게 머물러 있을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호탕한 성격과 남을 사로잡는 언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넓은 견문, 그리고 고국 복음화를 위한 뜨거운 사명감 등은 그로 하여금 곧 행동을 개시하여 봉대에서 약 20
서상륜의 생애 (4)
8) 귀국 연대
서상륜이 로스에게 권서의 직책을 받고 귀국한 시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소래교회의 설립연대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옛일이기에 명확한 기록이 없는 한 이견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한국 교회는 깊은 연구와 살핌을 가지지 못한 것 같고, 따라서 통일된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 통일되지 않은 많은 주장들이 잡초와 같이 무성하게 난무한 상태에서 공부하는 오늘의 후학들은 정답을 가지지 못한 한국교회사를 공부하고 있다.
이제 이 부분에 대한 [한국교회사]의 기록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그의 입국연대는 1883년 초에서 1884년 겨울까지 다양한 의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퍽 다행한 것은 대부분 1883년에 귀국한 것에는 동의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1883년을 주장하는 의견들은 다시 1883년초, 이른봄, 봄, 가을등 다양한 주장으로 나뉘고 있다.
1883년 귀국에도 여러 의견이 있다.
1883년 초: 이찬영. 앞의 책. 196쪽
1883년 이른봄: 김양선. 앞의 책. 109쪽
1883년 봄: 김성준. 앞의 책. 33쪽. 이덕주. 앞의 책. 474쪽.
1883년 가을: 박성겸. 앞의 책. 39쪽
이런 여러 의견들을 검토하면서 우선 1883년 봄에 이주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이유는 서경조는 "一千八百八十三年 癸未年 長淵 松川洞에 移住하게 된지라"
(서경조. 앞의 책. 89쪽).
고 분명히 이주 연대를 밝히고 있고, 서상륜은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그때는 쥬강생 일쳔 팔백 팔십년 봄쯤 됨나이다"라고 자서하였는데, 이들 형제의 고백을 종합할 때 1883년 이른 봄, 서상륜은 귀국하여 즉시 소래로 내려왔고, 서경조는 형의 뒤를 따라 그 후에 소래로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9) 서울 전도
소래교회 설립이 그의 인생 전부일 수는 없었다. 그는 서울에서 전도하려는 꿈을 버릴 수 없어, 결국 소래교회는 동생 경조에게 맡기고 자신은 수도 서울을 공격하기 위하여 상경한다. 물론 그의 전도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도 난관은 없지 않았다. 그 중 최대의 난관은 전도의 절대 수단이 되는 성경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필요는 공급을 유도하는 법이다. 그는 만주의 로스에게 성경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새문안교회당회(1958). 새문안교회70년사. 서울:새문안교회 16쪽).
로스는 1884년 봄 상해(上海)를 경유하여 6천 권의 성경을 중국인 상인편으로 보내 주었다. 그것은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인 복음서와 한문 성경이었다.
(이진호 장로는 "6000권의 성경은 대부분 한문 성경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금서가 은밀히 국내로 반입되려다 적발되자 인천 세관과 정부는 초비상이 걸렸고 이 책을 인수하게 될 서상륜은 다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때도 주님은 그를 도우셨다.
당시 외무협판(外務協辦)으로 있는 뫼렌도르프(P.G. Von Morendorb, 한국명 목인덕 穆仁德)
(뫼렌도르프 Paul G. Von Morendorb; 한국명 穆仁德 1848-1901. 독일인, 구한말 정부의 외교고문. 청국 주재 독일 영사관에 근무중 이홍장의 추천으로 내한, 총리아문협판에 부임(1882. 11), 갑신정변(1884)시 수구파에 협력. 한독 수호 조약(1884.5) 수립에 공이 있음.
의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성경 반입 사실을 듣고 협조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서상륜은 감옥행을 면하였을 뿐 아니라 귀중한 책 상자를 모두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전도를 하게 된다.
그의 활기찬 전도의 제 1차 대상자들은 서울에서 상업을 하는 고향 친구들이다. 이들에게 복음서를 나누어주면서 전도한 결과 즉시 성과가 나타나 그 해에 친구 중 13명이 개종할 뜻을 밝히게 된다. 이 감격스런 소식은 곧 로스에게 전달되었고, 속히 서울로 와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워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로스는 그 요구에 응하지 못하였다.
(김양선. 앞의 책. 52쪽).
1885년에도 다시 편지를 보내어 세례 지원자가 79명으로 증가된 사실을 보고하며 내한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 때도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정현(1982). 한국의 첫선교사. 啓明大學出版部. 110쪽).
이와 같이 서상륜이 서울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1884년 가을, 알렌이 입국하였고, 그 다음 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였다. 이 때 서울에는 서상륜의 권서활동으로 이미 3백여 명의 신앙인이 있었으나 다만 공개되지 못하였고, 교회도 없어 정식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앞의 책. 247쪽).
참으로 그의 전도 결과는 경이적이었다. 이런 폭발적인 성과를 거둔 능력의 원천은 그가 만주에서 번역 출판한 복음서에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둔다.
10) 언더우드와의 만남
기독교에 대한 감시와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 전도에 전념하여 수확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선교사의 내한을 간절히 소원하던 서상륜에게 외국 선교사의 정식 입국은 꿈과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 그는 언제, 어떻게 내한한 선교사와 만남을 이루었을까?
이 부분에 대하여 언더우드는 <한국의 소명>에서, 그의 부인은 <한국의 언더우드>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886년 가을, 서상륜이 로스의 소개 편지를 지참하여 옴으로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H.G. Underwood. 앞의 책. 107쪽).
"1886년에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방문하여 소래의 세례 지원자들에게 세례 줄 것을 요청하였고 1887년 9월에 소래 교인 3명에게 세례를 주고 11월에 첫 전도 여행을 하였다."
(Lillias H. Underwood(1918). UNDERWOOD OF KOREA. N.Y. FLEMING H. REVELL COMPANY. 62쪽).
이런 언더우드의 기록에서 연유된 듯 한국교회사에서는 이들의 만남이 1886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한 학자들이 퍽 많다. 한국에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과 사명감에서 수륙 만리를 찾아 온 언더우드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전도하는 개척 전도자가 넓지도 않은 서울 하늘 밑에 함께 살면서 서로의 만남을 가진다는 것이 어찌 이렇게 어렵고 힘들 수가 있었을까? 납득이 가지 않는 여운이 있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언더우드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여과를 거쳐야 한다.
첫째, 서상륜은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었는데, 어찌 선교사가 입국한 후에도 1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였을까?
둘째, 언더우드의 입장에서는 어학 선생과 전도를 위해서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언제나 만났을 터인데 어찌 만주에 있는 로스의 소개 편지가 필요하였을까?
셋째,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랑방을 공개하고 그 곳에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서명원. 앞의책. 1966. 50쪽).
이런 때 언더우드는 그의 사랑방을 왜 개방하지를 아니했을까?
넷째, 1886년 가을이 오기 전에 노춘경의 세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서상륜과의 만남은 어찌 그 후에 이루어졌을까?
다섯째,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노춘경의 세례도 서상륜에게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건인데, 어찌 언더우드와 서상륜의 만남이 그 후에 이루어졌을까?
여섯째, 노춘경의 세례가 서상륜과 관계된 것이라면 1886년 가을에 서상륜이 로스의 소개편지를 가지고 왔다는 언더우드의 기록은 어색하지 않은가?
일곱째, <한국의 언더우드>에서 "1886년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방문하여 소래의 세례 지원자들에게 세례 줄 것을 요청하였다"는 글은 처음 만났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번 만나는 중에 그런 요청을 하였다는 뜻은 아닐까?
아무래도 언더우드의 기록에는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상과 같은 여러 의문점들과 가설을 제기하면서 언더우드에게 어떤 숨은 의도(?)가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우선 당시 서상륜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와그너(E. Wagner)의 글을 소개한다.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들어왔을 때, 이 외로운 사역자의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복음의 씨를 뿌리는 수고를 함께 할 몇 사람이 생긴 것이다"
(The Korea Mission Field. Vol xxxiv. May. 1938. 95쪽).
동역자의 출현을 고대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이 "외로운 사역자의 기쁨"(The joy of this lone worker)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언더우드와의 만남은 1886년 가을까지 기다리지 않았음이 분명하며,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가 소개 편지를 받기 위하여 만주까지 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 선교사의 입국과 동시에 그를 직접 찾아가 만났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왜 언더우드는 그와의 만남이 오랜 후라고 기록하였을까? 고인에게 글은 있으나 해명은 없는 법이다. 다만 살아 있는 후세의 사가들의 명석함이 요구될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이 사실은 잠시 후 현명한 독자들의 면전에서 베일을 완전히 벗게 될 것이다.
서상륜의 생애 (5)
11) 서상륜과 노춘경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886년 7월 11일에 세례를 받은 노춘경(盧春京)에 대하여, 언더우드는 <한국의 소명>에서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수고한 첫 열매"라고 주장하였고, 한국교회사는 "노춘경이 한국 최초의 수세자"라고 일제히 포문을 열고 있다. 그러나 노춘경의 수세 사실을 자세히 살피면 그의 개종과 수세도 서상륜의 수고로 얻은 열매였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노춘경에 대한 언더우드의 기록을 여과 없이 살펴본다.
"그는 한학자요 지식욕이 강했던 사람으로 알렌의 서재에서 한문으로 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고 자택으로 가져가 탐독하고 난 다음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It's good! It's grand!)고 외친다. 그 후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앞으로 될 일에 대하여 더 자세히 말을 나눔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결국 세례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노춘경의 세례식에 참석하여 감격스런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을 남긴 제 삼자의 기록들이 있어 이 부분 연구에 큰 도움을 주며, 이런 기록들은 객관성이 있어 더 좋은 자료가 된다. 이제 제 삼자의 기록들을 소개한다.
일본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톰슨(Austin J. Thomson)도 첫 세례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남겨 놓았다.
"그 主日 午後에 나는 韓國 人으로서 처음으로 洗禮를 베푸는 한국 Protestant 敎會 史上 가장 興味있는 일을 목도할 수 있었다. 韓國政府가 아직 公然한 기독교 예배의식을 許하지 않는 때문에 洗禮式은 비밀리에 가장 긴장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중략).....나는 Underwood 牧師에게서 그의 改宗의 動機가 오직 Ross Version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精讀한데 있었다는 말을 듣고 더 한층 놀랐다."
톰슨은 언더우드를 빙자하면서도 그와는 차이가 있는 주장으로 이 사건에 접근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언더우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함께 말을 많이 나누었다"고 하는 반면, 톰슨은 "성경만을 읽고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아 알았다"고 한다. 무엇인가 잘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느낌이 든다. 더욱이 큰 잡음은 언더우드가 톰슨의 말을 "입증해 주었다"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노춘경 자신의 간증을 들어보도록 하자.
盧道士는 그의 信仰간증에서 入信의 動機를 "내가 기독교의 眞理를 깨닫게 된 唯一한 길은 聖書를 읽는데 있었다"고 말하였다. 聖書를 읽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가졌다.
로스가 언더우드에게 들은 말도 "Ross Version을 정독하고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톰슨과 로스, 그리고 노춘경도 자신의 수세 동기에 대하여 듣고 고백한 것은 "성경만 보고"가 아니면 "Ross Version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精讀한 것"이 개종의 동기였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언더우드는 <한국의 소명>에서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제 우리는 어느 쪽이 진실한 기록인지를 가려야 하는 고민을 부담으로 안게 되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언더우드는 노춘경의 수세를 선교사의 "첫 열매"로 부각시켰을까? 짐작컨대, 그의 기록대로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수고한 첫 열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건이 노춘경밖에 별로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춘경,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기독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기독교의 교리를 알기 위해서는 서양인들과 사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알렌, 헤론, 스크렌톤의 어학선생이 된다. 따라서 언더우드와도 많은 말을 나누었을 것이 분명하고, 이런 사유가 언더우드로 하여금 그런 기록을 남기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김양선은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말을 남김으로 그것마저 부인하고 있다.
"1886年 7月 11日 主日 午後에 貞洞 Underwood 牧師의 저택에서 洗禮를 받고 韓國 內의 最初 受洗者의 榮光을 가진 盧道士라는 學者의 개종의 動機가 역시 徐相崙의 傳한 Ross Version에 있었다는 事實을 看過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과연 노춘경의 수세는 "선교사의 첫 열매"가 아니라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의 출판과 반입, 그리고 목숨을 던진 전도의 결과, 복음의 씨는 노춘경의 마음밭에서 영글게 되었고,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선교사는 그에게 세례를 주어 거두어 들였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러기에 노춘경의 회심과 수세 뒤에는 서상륜의 헌신적인 전도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노춘경도 서상륜이 뿌린 복음의 씨에서 맺은 여러 열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12) 최초의 수세자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교회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1886년 7월 11일 수세한 노춘경이 한국의 첫 수세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는 교회사가들이 <사기 상>의 기록과 서경조의 논문만이라도 자세히 살폈으면 이런 큰 실수를 범하지 아니 하였으리라. 더구나 필자가 종로 구청에서 확인한 서병호의 생년월일은 <사기 상>의 기록과 서경조의 논문이 정확하다는 사실과 함께 한국교회사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하였다.
이제 이상의 여러 자료들을 소개한다.
첫째, <사기 상>의 기록이다.
"一千八百八十五年(乙酉)에 義州人 徐景祚가 中國으로부터 福音을 得聞하고 歸國하야 黃海道 長淵縣 大救面 松川洞에 移住하고 ... (중략) ... 是夏에 景祚난 上京하여 元杜尤 牧師의게 洗札를 밧고 是秋에 元杜尤 牧師난 松川에 巡往하야 景祚의 幼子 丙浩의게 洗札를 주어스니 此가 朝鮮敎會의 兒洗의 始니라"
<사기 상>에는 분명히 是夏(1885년 여름)에 서경조는 상경하여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고, 是秋(그 해 가을)에 언더우드가 소래로 내려와 서경조의 어린 아들 병호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1886년 7월 11일에 있은 노춘경의 세례식보다 무려 일년이나 앞서 있는 사건이다.
둘째, 서경조의 논문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一千八百八十五年 乙酉 春에 伯氏의 下書를 보고 上京하니 元杜尤 牧師가 前年에 나왓난대 셔울 사람 一人과 의쥬 사람 一人이 셰례를 밧앗더라 ... (중략) ... 그 (저자주: 1885년) 九月에 원목사가 유담공문을 가지고 숑쳔에 내려 온 지라 丙浩가 난지 셕달되어 유아 셰례를 밧으니라]"
서경조는 자기의 둘째 아들이 출생한 지 3개월 만에 유아 세례를 받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무리 오래되고 기억이 흐리더라도 자기의 아들이 출생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강보에 싸인 영아였는지, 아니면 걸음마를 배운 3세 가량 된 유아였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태어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영아시절에 유아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하다.
셋째, 종로구청에서 확인한 서병호의 호적에 의하면 그의 생년월일은 1885년 7월 7일이다. 서병호의 호적에 적혀 있는 생년월일은 <사기 상>의 기록과 서경조의 기록이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인 문서 자료가 된다.
넷째, 일본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 톰슨(A. J. Thomson)이 첫 세례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고 진술한 바가 있다. 이 부분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톰슨의 내한은 1884년과 1885년 7월에 있었고 1886년 7월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1884년에 내한하였을 때는 부산에 상륙하였을 뿐이고, 1885년에 내한하였을 때 비로소 내한한 미국 선교사와 교제를 나누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세례식 참관은 1886년에 있은 것이 아니라 1885년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섯째, 토마스 목사 연구로 명성을 떨친 오문환은 그의 저서에서 송천의 세례식이 "1885년 가을에 있었다"고 하였다.
"徐牧師는 일찍이 지금으로부터 52年前 戊寅年 1878年 中國 營口에서 맥킨타이어목사에게 傳道를 받고 믿을 마음이 생기었다가 언더우드 목사의 來韓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乙酉 1885年에 洗禮를 받고 내려왔으며 同年 가을 언더우드 목사가 松川에 왔을 때 그 아들 병호가 幼兒洗禮를 받아 形式으로 교회를 設立하였다."
이상의 자료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언더우드는 입국한 그 해(1885년) 여름 이전에 이미 서상륜과 교분을 가졌고 그 해 여름(7월) 의주 사람과 서울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서경조도 이 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서경조의 아들 병호가 소래에서 언더우드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러면 한국 최초의 수세자는 과연 누구일까? 지금까지 한국교회사는 1886년 7월 11일에 있었던 노춘경의 수세가 최초의 것이라고 의심없이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의주 사람과 서울 사람이 있었으며, 그들의 세례식에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톰슨(A. J. Thomson)이 참석하였으니 그들이 첫 세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1885년 여름에 세례를 받은 서경조는 세 번째 수세자가 될 것이며 유아세례로는 서병호가 첫 번째가 될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 이와 같이 뚜렷한 데도 한국교회사는 언더우드의 기록 "첫 열매"(first fruit)라는 말에 매료되어 노춘경이 "첫 세례자"라고 속단하는 큰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최후로 노춘경을 "첫 열매"라고 기록한 <한국의 소명>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자. 이 책 "첫 세례식"난에는 "1886년 7월과 9월에 첫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하였을 뿐, 첫 세례자가 노춘경이라고는 하지 않고 있다. 이 첫 세례식이 "7월과 9월"에 시행되었다는 기록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7월과 9월"은 서경조의 논문을 위시하여 <사기 상> 등에 "여름과 가을"이라고 기록한 것들과 공통 분모를 이루기 때문이다. 언더우드의 기록에 혹시 차질(?)이 있어 1885년을 1886년으로 잘못 기록하였거나 고의적(?)으로 연대를 틀리게 기록한 것은 아닐런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사료를 평가할 때 사건발생의 장소나 시간은 부주의로 혹은 고의적으로 잘못 기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언더우드의 기록이라고 모두 절대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더우드의 기록과 그의 부인의 기록을 대조해 보면 연대의 차이가 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즉, 언더우드는 "처음 소래를 방문하여 그 곳의 신자 7인에게 세례를 준 것이 1887년 가을이라"고 기록한 반면, 그의 부인은 "1888년 4월에 소래의 남자 7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1887년 봄에는 소래의 신자들이 서울로 와, 엄격한 심사를 거쳐 3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기록을 검토할 때 어느 기록이든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첫 열매"와 "최초의 세례자"가 동일한 인물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를 좀 더 깊이 살피는 신중함이 있었으면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다시 살피고 역사의 오류가 있으면 바로 잡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서상륜의 생애 (6)
13) 더 많은 수세자들
클락크(Charles Allen Clark, 한국명 곽안련)는 <장로교회사 전휘집>에서 당시 세례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통계를 발표하고 있다.
"一千八百八十六年에 元杜尤氏가 九人의게 洗禮를 주엇고 一千八百八十七年에 其年 洗禮人 合하야 洗禮人이 二十五人 되얏고, 一千八百八十八年에 六十五人, 一千八百八十九年에 一百四人이 되얏고."
(郭安連(1918). 長老敎會史典彙集. 서울: 朝鮮耶蘇敎書會. 12쪽).
언더우드는 노춘경에게 세례를 준 바로 그 해에 노춘경 외에도 퍽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세례자들은 계속하여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누구에게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을까?
우선 <사기 상>의 기록을 상고해 보자.
"徐相崙이 最先 京城에셔 布敎 前路를 豫備하엿슴으로 宣敎師 等이 來渡未幾에 數十人이 洗禮를 밧앗스니"
(차재명. 앞의 책. 26쪽).
여기서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은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서상륜의 수고로 얻어진 열매라는 점이다. 설령 백보를 양보하여 노춘경이 선교사들의 전도에 의하여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고 인정을 하여도,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상륜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분명히 밝히고 있고, 선교사들도 이 분명한 역사적 진실 앞에 사실을 시인하여야 한다. 언더우드도 이런 사실을 암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 중국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 두 사람에 의해 예비 선교가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H. G. Underwood. 앞의 책. 107쪽).
"초기 개종자 중에 서상륜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개종한 후 당분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성경 번역과 인쇄를 도왔는데, 나중에는 몇 권의 책을 고향에 가지고 가, 자기가 배운 구세주에 대하여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고 로스에게 말하고, 허락을 받은 후 얼마 동안 한국의 북부지방을 여행하면서 설교도 하고 책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수도 서울을 방문하여 그가 말하는 바를 기꺼이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 뒤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 가족과 함께 정착하였다. 여기서 설교도 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생활을 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이 마을을 선교활동의 기초로 삼았다.
(앞의 책. 131쪽).
이상의 글에서 풍겨오는 느낌은, 언더우드는 서상륜에 대하여 언급은 하면서도 핵심은 로스와 매킨타어의 예비 선교로 말꼬리를 돌렸고, 소래교회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설립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회피하였으며, 이 고장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왜 유명해졌는지는 함구하고 있다.
이런 선교사들의 기록들은 역사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남긴 글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역사 자료들은 한 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것도 어쩔 도리가 없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 자료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서상륜의 지대한 활동보다는 노춘경 한 사람의 세례가 더 소중한 것처럼 오도되었고, 원인을 제공한 위대한 사역보다는 하나의 결과에 만족하는 오늘의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교회사도 내 것을 찾고 가꾸어 새롭게 자리매김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성경 번역과 국내반입, 그리고 전도에 열중하여 노춘경을 비롯하여 많은 결신자를 얻게 한 서상륜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역사를 정리하여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피나는 수고를 하였으나, 평신도일 뿐 목사가 아니었기에 세례를 주어 열매를 거두어 들이지 못하여 애타했던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 높여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결국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시간은 흘러갔고, 오늘의 역사는 심고 가꾼 수고보다는 세례를 주어 수확한 자의 공을 더 크게 부각시겨 왔다. 그러니 이제라도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간 역사의 줄기를 바로 잡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 4:37
14) 새문안교회 설립
1887년 9월 27일은 새문안교회 설립일이며, 설립자는 물론 언더우드이다. 그러나 새문안교회 설립과 관련된 한국교회사의 기록들은 창립예배에 모인 14명의 신자들 모두가 서상륜의 전도를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새문안교회70년사. 앞의 책. 22쪽. 연동교회90년사. 앞의 책. 67쪽).
그러기에 이 교회의 설립에 "한 알의 밀"이 되어 땀흘려 희생한 실제적인 창설자이며 공로자는 서상륜이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한다고 광고를 하니 14명의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클락크(Charles Allen Clark, 한국명 곽안련)는 그의 교회사에서 새문안교회 창립 예배시에 만주의 로스도 참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도한 결과 1887년 9월 12일에는 서울에 있어서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집회하였다. 이 집은 원래 어느 정승의 집으로서 현재 감리교 여선교부 숙사, 곧 그레이 하우스가 서 있는 곳인데, 안채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살고 사랑채 두 칸을 터서 약 30
(곽안전(1961). 앞의 책. 54쪽).
15) 서상륜과 장로직
새문안교회에 대한 클라크의 기록에 의하면 서상륜이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새문안교회 설립과 관련된 모든 기록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즉, 교회사는 일제히 새문안교회를 설립하는 날, 14명의 교인들에 의하여 서상륜과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참여한 바 있는 백홍준, 이 두 사람이 장로로 피택되었다고 한다.
"서상륜은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그것은 1887년 9월 27일에 14명의 신도들을 원두우의 사랑방에 모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를 조직할 때 선정한 두 사람의 장로 중의 하나로 임직된 것이었다"
새문안교회70년사. 앞의 책. 22쪽.
연동교회90년사. 앞의 책. 67쪽.
박용규. 앞의 책. 41쪽.
민경배. 앞의 책. 13쪽.
조남선; 한국의 교회사. 31쪽.
서명원; 한국교회성장사. 47쪽.
그리하여 서상륜은 새문안교회의 창설자이자, 초대 장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새문안교회에서는 이 때를 당회 조직으로 간주하지 않고 1904년 10월 2일 송순명(宋淳明)의 장로장립을 기점으로 당회조직을 인정하고 있다.
(앞의 책. 160쪽).
그 이유는 "서상륜이나 백홍준이 새문안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기는 하였으나 새문안교회만을 위해 시무하는 개 교회 장로가 아니라 전 한국 장로교회의 장로로 임직하였기 때문이며 그들도 그런 범위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연동교회(1984). 연동교회90년사. 90년사편찬위원회. 55쪽(이하 연동교회90년사로 표시).
이상은 새문안교회와 연동교회 그리고 교회사에서 주장하는 새문안교회 설립과 관계된 사건의 나열이다.
그러나 시중에서 판매되는 교회사 외의 다른 기록들을 보면 "서상륜은 장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글들도 볼 수 있다.
우선 [황해노회 100회사]가 그 선두 주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서상윤은 집사와 장로직을 가정적인 이유로 받지 못했으나 평생 평신도로서 한국 장로교 사상에 뺄 수 없는 위대한 전도자요 교회 설립에 공헌한 자이다."
(박성겸, 황해노회 100회사).
소래에서 월남하여 온 교인들도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은퇴하고 소래에 내려오신 후에도 그를 교회에서 장로로 호칭하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였습니다."
(정용하 증언).
그의 손자이며 새문안교회 장로인 서재현도 <새문안교회 70년사>에 서상륜을 장로로 기록한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교회사에서는 그를 새문안교회 설립일에 장로로 투표하여 그 다음 주일에 장로로 장립하였다고 주장하나 그는 평생 평신도 전도인으로 지낸 분입니다."
인천에 거주하는 서재현 장로의 4촌, 서재연도 이와 동일한 증언을 하였다.
"큰 할아버지는 장로가 못되었으며 그 이유는 순전히 가정사정에 의하여 그리 되었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고인을 기리기 위하여 비석을 세울 때에도 "조선 최초 전도에 가장 공헌이 만흐신 고 서상륜 (故 徐相崙)선생의 묘소 긔념비석" 건립건으로 헌의된 것으로 보아 장로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장로직을 사양하고 평생 평신도 전도인으로 만족해야 했던 가정 사정이란 무엇일까? 그는 젊은 시절, 아직 예수를 믿기 전 연로하신 할머니의 주선으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하였는데, 원치 않은 결혼이기에 첫날 밤에 소박을 하고, 다른 여성과 재혼을 하였다. 서상륜에게 있어서 "한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은 평생토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으며, 그가 소래에 정착한 후 의주에 거주하는 이 분을 소래로 모시고 와, 가정생활은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생활비 일체를 부담하면서 불편없이 살 수 있도록 돌보아 주며 속죄의 길을 걸어갔다"고 한다.
비록 불신시절에 범한 과오이긴 하여도 평생을 두고 단장(斷腸)의 회개를 하며 뉘우친 사건이다. 한 때의 실수를 평생토록 뉘우치면서 성직을 사양하고 겸허하게 헌신한 그의 숭고한 신앙인격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서상륜의 생애 (7)
16) 연동교회 설립
새문안교회의 설립에서부터 주동적 역할을 하던 서상륜은 활동무대를 동대문 방면으로 옮긴다.
이태조는 서울로 도읍지를 옮기자 모든 주민들에게 그 신분에 맞게 주거 건축용지를 분급하였다. 이런 신분에 의한 주거지 분화 현상으로 종로와 을지로 지역은 상가와 시장, 그리고 환락가 등으로 구분되어 상공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이 모여 살게 되었으며 특히 연못골에는 나막신바치, 찬우물골에는 갖바치, 방아다리에는 배추장수, 두다리목에는 병졸 등 주로 양민(良人)들과 천민(賤民)들이 살았다. 이들은 모두 양반들의 착취와 억압 속에 사는 계층들이었다. 이 곳에서 서상륜은 선교사 리(Graham Lee, 한국명 이길함)와 함께 전도하여 가난하고 눌린 자들에게 영혼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며 천국의 소망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하여 노력한다. 연동교회의 설립에 서상륜이 주동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된 글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찬영 목사는 연동교회는 "1894년 1월 8일 서상륜과 이길함에 의하여 설립되었다"고 하였고, 전필준 목사에 의하면 "서상륜씨와 그램 리 선교사의 활동으로 설립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연동교회 측은 정확한 설립연도는 알 수 없고 "1934년 10월 21일 교회창립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아 1894년에 설립된 것이 사실(史實)인 것 같다"고 하며, 이렇게 "설립 연도가 부정확한 것은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교회의 초대 교인은 이승두라고 한다.
선교사들이 직접 설립하지 아니하여 설립연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교회이기에 한국인 전도인들에 의하여 설립된 것이 더욱 분명하며 그 중에서도 서상륜의 활동이 절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못골에는 1892년, 46세의 나이로 내한하여 주로 천민들 특히 백정(白丁) 전도에 심혈을 기울인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도 한국인 조사 김영옥·천광실 등의 협력을 얻어 전도한 흔적이 있다.
이 곳에서 서상륜은 전도와 아울러 교회 건물을 준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현 연동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연지동 136번지 17호의 초가 한 채를 염준창의 소개로 매수하여 예배 처소를 삼도록 주선하였고, 이곳에 예배당을 건축하여 1896년 10월 4일에 헌당식을 거행한다. < 사기 상>에는 연동교회 설립을 1896년으로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설립연대가 아니라 예배당 건축연대이다.
17) 승동교회 조사
1904년에는 다시 선교사 웰번(A. G. Welbon), 클라크(C. A. Clark)등과 협력하여 탑골공원 뒤에 승동교회를 설립하고, 이여한과 함께 조사로 시무하게 된다.
<사기 상>에 의하면 승동교회의 전신은 홍문동 교회라고 한다. 이 교회가 내부 분쟁으로 해산되면서 일부 교인들이 동현에 있는 헤론의 병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헤론은 동현에 병원을 설립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한편 복음을 전파하면서 은밀히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 예배에 홍문동 교회의 성도 일부가 합류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 병원이 이전할 형편에 이르러 모였던 성도들은 다시 분산할 수밖에 없어 그 일부가 인사동에서 승동 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승동교회 개척의 주역은 박성춘·박중근·정윤수·송인순·다동의 김부인·박서양·김필순 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승동교회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료는 이와 판이하게 다르다. 승동교회는 1893년 공당골에서 시작된 교회라고 하며, < 사기 상>에서 승동교회의 전신이라고 주장하는 홍문동 교회는 승동교회에서 세웠던 지교회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 상>은 홍문동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홍문동 교회(홍문수골교회)는 서흥 사람 황모와 상동교회 교인 백모가 철도부설 관계로 개인적 이익을 목적으로 교인들을 규합하여 설립한 교회였으나 내부 분쟁으로 필경 해산하게 되어 다수의 교인들이 공당골 교회에 합류하게 되었고, 여타는 새문안교회와 연동교회에 편입함으로 교회의 재산도 처분하여 이상 세 곳 교회에 분배하였다.
그러나 승동교회 자체의 자료는 <사기 상>과 같이 주장하지 아니한다. 승동교회의 주장을 들어본다.
1884년에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은 구리개에 제중원을 설립하고 방 한칸을 얻어 서상륜·송석중·김필준 등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알렌이 주미 한국 공사관 비서로 전임, 귀국하자 1885년 6월에 입국한 헤른(Jhon W. Heron)이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무렵(1893) 공당골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승동교회의 전신이다. 이 교회는 다음해(1894)에 낙현으로 이전하였고, 1898년에 홍수문골 교회(홍문동교회)와 합하여 인사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전 당시는 낡은 집을 구입, 보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으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1905년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승동교회에 서상륜은 조사로 시무하였다.
서상륜의 생애 (8)
17) 다방면의 활동
선교사가 입국한 후 서상륜은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의 바쁜 발걸음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는 개인 전도요, 둘째는 선교사의 조사 역할이요, 셋째는 개 교회 목회자요, 넷째는 성경 번역의 동역자이다. 이런 활동상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개인 전도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是年(저자주: 1894년)에 宣敎師 元杜尤난 傳道의 方針을 擴張하야 徐相崙 . 金興京 . 朴泰善 . 劉興列 等으로 京城地方에 傳道케 하고...."
그는 단독으로 전도 여행을 할 경우 출발할 때 반드시 보따리 속에 쪽복음, 금계랍, 감자 씨를 지참하여 영혼의 구원과 치유를 위해 복음을 주고, 가난한 육신의 삶을 돕기 위해 약품과 감자 씨를 주면서 질병의 치료와 풍요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그의 개인전도 지역은 매우 광범위하여 경기도 일원을 두루 다녔으며, 평안도는 평양을 중심하여 선천과 의주까지 복음을 들고 다녀야 했다. 황해도는 소래를 중심하여 황해도 전역에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고, 남으로는 부산지역까지 전도 여행을 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니, 실로 한반도를 위시하여 만주 일원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실로 그의 전도구역은 한반도 전역이었다.
둘째, 선교사의 조사로, 안내자로, 통역자로 동행하면서 전도한 사실도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891년 봄에는 선교사 게일(James S. Gale)과 마페트(Samuel A. Moffett)를 인도하여 평양과 의주를 거쳐 남만주 일원과 북간도 그리고 회령·함흥·원산 등지를 다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탐험 전도여행을 하였다.
그가 전국을 누비며 선교사와 함께 혹은 단독으로 전도하는 동안 때로는 가난한 농가에서, 때로는 양반집 사랑방에서, 때로는 동구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줄기차고도 기동성 있게 펼쳐진 전도여행은 한국 교회가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박력과 열정에 넘치는 설교, 굴하지 않는 용기와 담력 등은 교회사가들이 한결같이 높이 평가해 주는 신앙인 서상륜의 모습이다.
서재현씨도 그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할아버지는 활달하고 용기있고 말도 잘하실 뿐 아니라 물욕이 없어 신앙에만 매진하신 분입니다."
셋째, 그는 순회 전도자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개 교회 목회자이며 예배당을 건축한 조사이기도 하다. 선교사 기퍼드(Daniel L. Gifford)의 일기(1898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895년에 자신은 언더우드가 부인의 신병 치료차 잠시 미국에 있는 동안 서경조(저자주: 서상륜)와 함께 새문안교회를 맡아 목회하였고, 이 때에 예배당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 ... (중략) ... 홍집사와 나의 조사는 건축 기술이 있는 사람이어서 건축 책임을 졌다"
이 부분에 대하여 언더우드 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기꺼이 일하러 나왔고, 목사와 다른 전도사 한 둘은 옷을 벗어 젖히고 일을 도왔다"
그가 조사로 섬긴 교회는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이며, 새문안교회 예배당 건축시에는 선봉장의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는 과연 순회 전도자이면서, 한 교회를 담임한 목회자이기도 하다.
넷째, 그가 한국 교회에 남긴 업적 중 최대의 것은 로스와 함께 성경 번역을 한 것이다. 그의 성경 번역사역은 만주에서 끝이 난 것이 아니었고, 서울에서 다시 계속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내한한 후의 일이다. 이들은 1887년, 내한한지 불과 2년만에 <마가의 젼한 복음셔 언해>를 번역해 출판한다. 우선 이 마가복음은 제목부터 이수정 역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의 수정본일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수정 역은 언더우드가 내한할 때 지참한 것으로 일본에서 이미 번역 출판된 성경이다. 이것을 언더우드와 아펜젤라는 수정하여 자신들의 역본으로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본은 미국 성서공회 본부에서조차 반역본(反逆本)으로 인정되어 추궁을 받기까지 하였다.
여하간 외국인 선교사가 내한한 지 불과 2년만에 성경 번역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이런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국인 조사의 적극적인 협조 때문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김양선은 "마가 복음 번역자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외에 서상륜과 백홍준"을 거론한다. 서상륜의 성경 번역 사역은 만주에서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계속된 것을 이로서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을 수정 보완하지 않고, 이수정 역을 수정하였을까? 그 이유는 언더우드가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에 대하여 가지는 부정적인 시각을 이해하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언더우드의 언급을 보도록 한다.
서상륜의 생애 (9)
18) 셔상륜 통신
1902년 5월 10일자 [그리스도 신문]에는 서상륜의 지방 순회 보고서가 [셔상륜 통신]이라는 제목으로 기재되었다. 이 통신문에는 성도들이 도우며 사는 아름다운 일화가 게재되어 있다. 물론 이 기사는 평산의 감바위교회, 우번리교회, 연안의 바루개교회 등 몇몇 교회의 미담이 소개된 것인데, 그가 순회한 지역은 송도(개성)·금천·연안·평산·해주 등지이며, 특히 우번리교회의 전도회 조직이 보도되는 것을 보아 순회 사역 중에 지교회의 기관조직을 도운 것 같다. 원문 그대로를 게재한다.
"황해도 해쥬와 연안과 백쳔과 평산과 금쳔과 숑도 등디의 잇난 각 교회 형편 (셔상륜)
하날에 계신 우리 아바지 하나님께셔 우리 쥬 예수 그리스도랄 인하샤 주신 은혜랄 감샤함나이다. 샹년에 그 곳들이 겸년을 당하야 타쳐로 떠난 교우들이 더러 잇사니 당한이와 보난이의게 매우 졀박 하오나 일쳔 팔백 오십여년 젼(행 八쟝)에 예루샬넴 문도들과 갓치 하나님 뜻대로 될줄을 아오니 감샤하오며 또 본토의 잇난 교우들의 사난 형편과 면모 형색을 보온즉 쥬 예수랄 아즉 밋지 아니하난 사람들보다 그 먹으며 주리난거산 더옥이 심하되 도로혀 몸도 셩하고 화색이 얼골에 나타나오니 이난 모든 걱졍과 금심은 쥬께 의탁하고 한푼 생애라도 힘쓰고부자런이 함이니 감샤하오며, 더옥이 감샤할거시 잇사니 평산 우번이교회에셔난 젼도회랄 셜시하고 누님 한분은 사람의 몸도 구졔하며 쇼년 형뎨 두분은 겸손한 말과 온유한 말노 령혼들을 쥬압호로 인도하고 또 평산 감바회교회도 이와갓치 서로 도아주고 또 연안 바루개교회에난 형뎨 한분이 그 집안 식구들과 쟉뎡하고 평산 우번이교회 형뎨 한분을 인쳥하야 자긔 잇난 교회 형뎨들을 인도하며 권면하여 달나고 집을 새로 짓고 이샤랄 식히난대 자긔가 돈량과 양식을 내여 재목을 담당하고 여러 교우들은 각각 힘을 내여 지금은 거의 사람이 들게되엿시니 이갓흔 겸년을 당한곳이라도 하나님 은혜 밧은 곳은 이러하오니 경향간 우리 쥬의 지톄된 형톄들은 이 몃곳을 위하야 우리 하날 아바지께 감샤도 하고 항샹 이보다 더 은혜 주시기랄 간졀이 긔도하심을 바라오며, 또 엇던 곳은 ㅅ갱각만 부자런이 하며 걱졍과 금심은 자긔들이 맛고 쥬께난 덜 의탁하난고로 주시난 은혜랄 잘 밧지 못하야 셥셥한 곳도 잇사니 이런 곳을 위하야 쥬께 더옥이 간구하기랄 바라나이다."(서상륜(1902.5.1). "셔상륜 통신" 그리스도신문. (영인본))
19) 선유위원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후 우국충정에 충만되어. 있는 분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무력항쟁을 시도한다. 사실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난 의병의 뿌리는 멀리 임진왜란까지 소급해야 되나, 한말의 의병은 1895년에 있었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동년에 선포된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봉기한 을미의병이 그 효시이다. 특히 을사보호조약 전후에는 병오의병이 있었고,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야기된 정미의병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항일전을 전개한 의병활동이었다.
이런 의병활동이 경기, 강원, 경상 등지에서 일어나 일제에 무력항거를 하자 의병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이와 같이 의병활동이 전국에 확산되었지만 의병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을미의병 당시 구연영(具然英)은 300명의 의병을 일으켜 이천 중심의 민승천 부대에 합류하여 중군장으로 활약한 일이 있으나 이것도 그가 기독교인이 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의 의병활동이 기독교인의 의병 활동이라고 평하기에는 미흡하다. 의병활동에 대하여 기독교계가 침묵하고 있을 때 황해도에서만은 본격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한 의병활동이 전개된다.
황해도의 의병은 신천·장연·송화 등지에서 우동선·조윤봉·김만석·장동찬·고익균 등이 중심이 되어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이 때 우동선은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해서지방의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는 문화읍 출신으로 기독교인이며, 용맹하고 전술에도 능하여 정부군과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는 무공을 세우기도 한다. 이런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서상륜을 황해도 지역의 의병 선유위원(宣諭委員)으로 임명하였고, 저들의 해산과 귀순을 권고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그는 효유문과 면죄문빙(免罪文憑)을 의병대장에게 보냈는데, 우동선은 귀순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항일전에 참여하지 아니하는 서상륜 등을 꾸짖는 회신을 보내왔다.
때는 망국의 울분에서 의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국민 정서로 보나 교회와 교인들의 감정으로 보아 모두 의병을 동정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시기이기에 의병들이 쉽게 귀순할 이유도 없고, 자신들을 회유(懷柔)하려는 서상륜을 비애국적인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추세였다. 그러기에 의병대장의 회답문도 부드러운 표현 대신 격렬한 표현으로 교회의 원로를 비난하고 있다.
이제 그 전문을 소개한다.
"아아, 교인동포여, 과연 신앙력이 있는가, 없는가. 조국의 위험한 경우와 백성들의 곤궁한 형편을 좀 생각해 볼지어다. 지금 이번 선유가 우리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어찌 위원이라는 한 벼슬자리에 쏠려서 장곡천(長谷川), 이완용 두 원수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복종할 수 있는 일인가. 구미 역사상에서 보더라도 이태리의 가부이(加富爾)는 종교 신도로서 절대한 위업을 이룩했고, 미국의 화성돈(華盛敦)은 종교인으로서 혈전(血戰)하기 8년간에 독립의 터전을 이루었는데, 우리 나라의 교인 중에는 어찌 이런 인물이 없을 것인가. 이제 선유위원의 성질을 보건대 저렇게도 조잔(凋殘)한 것이 이렇게도 심하니 도리어 한심한 생각이 드는도다.") 기독교대백과사전. 제 12권. 1020쪽.
이 회답문에서 당시의 민족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무모한 희생을 염려하며 사회의 안정과 생명 존중의 차원에서 선유에 임한 그의 심오한 심정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봉사할 기회를 얻어 노력하였으나 그의 선유는 크게 주효하지 못하였다.
결국 우동선은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생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옥중에서 파수병의 총을 탈취하여 적군 8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자결하여 조국 광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고 만다. 서상륜을 해서지역 선유사로 정부가 지정한 것은, 그가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업적을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서상륜의 생애 (10)
20) 서상륜과 이수정
이수정은 1842년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서 이병규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전주 이씨로 학식이 높고 가문이 좋아 쉽게 조정에 등용되어 도승지까지 역임하였고, 민씨파의 수령 민영익(閔泳翊)과도 깊은 교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더우기 임오군란 시에는 명성왕후 민비를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킨 공로로 왕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고, 선략장군(宣略將軍)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한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안종수로부터 일본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津田 仙에 대하여 소개를 받고 일본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며, 도일(渡日)할 의도를 가지고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내 1882년 9월 19일 동경 외국어대학의 한국어 교수직을 맡게 되어 도일의 길이 열린다.
그의 도일에 대한 고종의 윤허가 있었으나 이 일을 끝까지 비밀로 추진하였으니, 이유는 대원군파의 모략이 두려워서이며 도일할 때에도 외형적으로는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가장하여 인천에서 출항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수정은 신문학을 배우는 한편, 일인 기독교인에게 전도를 받고 한문 성경을 탐독하던 중 기독교의 무궁한 진리에 매료되어 그 해 성탄절에는 교회에 참석한다. 이 때 큰 은혜를 체험한 그는 마침내 1883년 4월 29일, 東京 露月町 교회에서 재일 장로회 선교사 녹스(George. W. Knox)의 입회하에 일본 목사 安川 亨에게 세례를 받는다.
세례 후 그가 착수한 일은 성경 번역이다. 이 일은 녹스의 격려와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의 권면과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그는 먼저 한문 성경에 토(吐)를 다는 방법으로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이것을 [현토 한한 신약전서](懸吐 漢韓 新約全書)라고 하며 1884년에 출간하였다. 그리고 1885년에는 순 한글 성경인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를 번역·출판한다. 이 마가복음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내한할 때 지참한 것이다.
그가 한문 성경에 토를 다는 방법에 착안한 것은 당시 한국 선비들이 한문을 읽을 때 이 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며, 그는 한문에 능통한 선비들에게 성경을 읽히고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가 한국 교회에 남긴 업적을 열거하면;
첫째, 1883년 12월 13일부 외국의 선교 잡지 [The Missionary Review]에 한국 선교를 호소하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한국 선교에 대한 동기부여를 한 것이다.
둘째, 재일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재일 한인교회를 설립한 일이다.
셋째, 김옥균·박영효·손붕구 등 당시 개화파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기독교인이 되게 한 일이다.
넷째, 일본 주재 매클레이(R. S. Maclay)를 김옥균과 접촉시켜 고종으로부터 의료선교의 윤허를 받아내는데 일조를 한 것이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은 그가 정부 고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평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1886년 5월, 4년간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급히 귀국하였는데 귀국 후 곧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서상륜과 이수정은 모두 구한말 민족 복음화의 횃불을 높이 든 복음의 선각자들이다. 이들은 한국에 복음을 심으려고 노력한 것 외에도 공통점과 상이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선 이들의 공통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은 모두 외지에서 외국인에 의하여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한 것이 공통된다.
둘째, 신앙고백과 함께 외지에서 외국인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성경 번역에 착수한 것도 공통점이다.
셋째,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어학 연수를 시킨 점도 공통된다. 서상륜은 로스의 어학선생의 역할을 하였고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의 어학교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이수정은 동경에서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들은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상이한 점도 허다하다.
첫째, 서상륜은 평북 의주 출신인데 반해, 이수정은 전남 곡성 출신으로 남과 북, 정반대의 고장에서 출생하였다.
둘째, 서상륜은 관직이 없는 서민으로 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나, 이수정은 관직을 가지고 상류층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셋째, 서상륜은 자신이 번역·출판한 성경을 지참 입국하여 친히 성경을 반포하며 전도 일선에서 수고하였으나, 이수정은 번역 출판한 성경을 선교사에게 주어 입국시켰을 뿐 자신은 성경을 지참하고 입국한 일도, 귀국 후 전도한 일도 없다.
넷째, 서상륜은 일사각오로 전도하였고 내한한 선교사들과도 함께 전도하였으나, 이수정은 외국 선교잡지에 선교사 파송을 독려하는 글을 실었을 뿐 국내 전도에 직접 동참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이수정은 드로아에 머물고 있는 사도바울에게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9
서상륜의 생애 (11)
21) 말년
주님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며 야생마처럼 삼천리를 누비던 서상륜도 오는 백발 막대로도, 가시로도 막을 수 없어 60을 넘기면서 기울어진 국운과 함께 찾아 온 인생의 낙조를 바라보게 되었고 제 2의 고향인 소래로 낙향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서운하지도 슬프지도 아니하였다. 다만 감사와 만족이 있을 뿐이었다.
[땅에 떨어저 죽는 한 알의 밀]이 된 것으로 만족했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이 자신의 상급인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낙향하는 해(1910)는 성령의 불길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점이기에 더욱 만족한 마음으로 소래로 발길을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소래를 찾아 왔지만 그 곳에는 그의 늙은 몸을 담을 만한 일간두옥도 있지 아니하였다.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손자 서재현 장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큰 할아버지는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신 분이십니다. 복음 전도를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을 뿐 아니라 시골의 재산까지도 몽땅 바쳤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때문에 패가한 분이십니다."
예수 때문에 패가한 사람, 서상륜!
이 말은 예수의 이름을 빌려서 잘 살아야 하고, 출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 한국 교회 교인들은 마음속 깊이 새겨 두어야 할 말이다.
패가를 하면서까지 황무지 한국을 일구기 위해 평생을 바친 서상륜의 고독하고 쓸쓸한 말년을 전해 들은 언더우드는 과거 서상륜이 소유하였던 기와집을 다시 구입하여 그에게 주어 그의 쓸쓸한 말년을 위로하여 주었다.
이 때부터 용사와 같이 달리고 또 달리던 전도자의 생애는 종지부를 찍고 그가 최초로 세우고, 동생 경조가 애써 가꾼 소래교회를 조용히 섬기며 고요속에 명상하는 은둔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교만도, 자랑도 없이 평신도의 위치에서 교회를 섬긴 것이다.
서상륜·서경조 형제는 말년을 소래에서 지내고 싶었으나 시대는 노약한 그들의 갸냘픈 희망조차 허락지 아니하였다.
동생 경조가 국가의 독립을 위해 고생하는 아들 병호를 따라 상해로 떠나자, 동생이 없는 소래는 더 이상 그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웃 마을인 장연군 속달면 태탄리로 이주한다. 이 곳은 소래에서 약 80
그가 태탄리로 이주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교회사는 침묵하고 있으나 혹자는 그 곳에 있는 농촌 교회를 담임하기 위하여 이주하였다고 한다.(정용하 증언).
그러나 그의 연령과 경륜으로 보아 가능성은 희박하다.
소래교회의 믿을 만한 전승은 "소래교회의 젊은 목회자를 돕는 길이 그가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 실행한 일이라"고 한다. 끝까지 자기희생을 감수하며 교회에 덕이 되고 후배의 활동에 진한 토양이 되려는 경건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회는 점차 고령화되는 반면 교회는 정년제를 실시하므로 앞으로 많은 원로 목사들이 양산되게 되었다. 그리고 원로 목사의 태도와 입김에 따라 후배 목회자들의 활동이 제한을 받는 경우도 없지 아니하다. 목회 현장에서 은퇴하는 선배 목사들은 자기 희생을 통하여 "교회에 덕이 되고 후배의 활동에 진한 토양이 되려는 경건한" 서상륜의 생활태도를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의 인생도 끝을 맺어야 할 시점이 점차 다가와 1926년 1월 마침내 거절할 수 없는 주님의 엄숙한 부름이 임하니 복음을 위하여 줄기차게 달리던 정도일생(正道一生)의 막을 조용히 내리게 된다. 그의 나이 76세의 일이다.(그의 향년이 76세, 79세 등으로 엇갈리고 있으나 1849년 7월 출생, 1926년 1월 별세이니 75년 6개월이다).
장례식은 총회장(總會葬)으로 엄숙히 거행되였고, 위대한 개척자의 마지막 길을 전국 교회가 경건하게 애도해 주었다.
그의 장례식에 관하여 어떤 기록도, 역사는 간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세인은 "총회장으로 엄수하였다"는 한 마디 말로 아쉬운 만족을 감수할 뿐이다. 그의 유해는 그가 말년을 보낸 태탄리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5회 정기 총회에서 황해노회장은 "고 서상륜 선생 묘소에 기념비석을 건립할 것을 청원"한다. 이 청원의 내용을 회의록에서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황해노회장의 조선 최초 전도에 가장 공헌이 만흐신 고 서상륜 (故 徐相崙)선생의 묘소 긔념비석 一좌 건설 청원은 당석에서 해 안건은 황해로회로 하면 총회는 후원하기로 가결함"
"하명하신 고 서상륜선생 긔렴비 건설에 대하야 비문은 총회 명의로 하겟사오며 공사비로 二百원을 청구하오니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총회 제25회 회록. 14쪽)
황해노회장의 청원은 즉석에서 허락되었고 건립 비용 200원도 배당되어 1938년 8월 24일에 기념비석을 건립한다. 규모는 세로 5.5척, 가로 2.8척 5분의 화강석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앞·뒤면에 628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보고되어 있으나 내용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황해노회가 서상륜의 기념비 건립 보고를 총회에 제출한 내용을 소개한다.
"고 서상륜 선생 기념비 입석보고는 여좌히 받기로 가결하다.
소화 十一년 九월 제 二十五회 총회에서 허락하옵신 고 서상륜 선생의 기념비는 고 5척5촌, 광 2척, 후 8촌5분, 화강석제로 구진하여 大小 자수 六百 二十八자를 정각하여 본년 八월 二十四일에 선생 묘전에 건립하였사온바 제막식은 十월 二十七일에 거행할 예정이오며 이시통지는 기독신문을 통하여 앙고하겠사오니 혜량하심을 앙망하나이다.
소화 13년 9월
황해 노회장 허간"(총회 제27회 회의록. 39쪽).
기념비석조차 없었던 10년 세월! 이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것의 소중함을 망각한 세월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의 혈육은 무남독녀로 서윤애씨가 있었고 외손으로는 4남매를 두었다. 그 중 장손녀가 백령도로 출가하였다고 하나 거처는 알 수 없고 다른 자손들은 북한에 남아 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이제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크게 자란 한국 교회는 복음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서상륜의 업적을 재발견·재조명하여야 한다. 우리 믿음의 조상과 뿌리에 대한 재발견이 여기에 있고, 뿌리에 부끄럽지 않은 가지와 열매가 되기 위해 해야 할 노력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지 않은 노병의 뒤를 우리도 따라 가야 한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 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11:16)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