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통신 53> 돌하르방과 환해장성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 출진기지 사가(佐賀)현 나고야(名護屋)성 박물관 입구에 돌하르방 하나가 서있다. 관람객들이 진기한 듯 바라보거나,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한국의 상징물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일 두 나라 국민 이해촉진을 목적으로 한 박물관의 전시물로 이만한 것도 없겠다 싶었다.
^돌하르방의 한국 대표성에는 시비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제주도의 상징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주도 관광객 가방 안에 그 기념품이 하나씩 자리 잡기 시작한지도 오래다.
^높은 벙거지를 쓰고 주먹코에 퉁방울눈을 부라리는 표정이 무서워 보이지만,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이 예술이고 문화의 향기일 것이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 제주인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실체로서 그만한 것이 또 있겠는가.
^그것을 볼 때마다 혜은이의 노래 ‘감수광’이 떠오른다. “감수광 감수광 날 어떡헐랭 감수광···” 뜻 모를 노랫말보다, 예쁜 이름과 얼굴을 가진 신인가수의 감미로운 음성에 빠져들었었다. 그렇게 생성된 제주도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고 김광협 시인의 ‘돌할으방’으로 이어졌다. ‘감수광’이라는 제주어가 가진 매력이었다.
돌할으방 어디 감수광 / 돌할으방 어딜 감수광 / 어드레 어떵 하연 감수광 / 이레 갔 닥 저레 갔닥 / 아명아명 하여봅써 / 이디도 기정 저디도 기정 / 저디도 바당 이디도 바당 / 바당드레 감수광 어드레 감수광 / 아무디도 가지 말앙 / 이 섬을 지켜줍써 / 제주섬을 살펴줍써
^돌하르방 어디를 가세요. 어디로 뭐 하러 가세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아무리 해보세요. 여기도 벼랑 저기도 벼랑, 저기도 바다 여기도 바다. 아무데도 가지 말고 제주 섬을 보살펴주세요.
^해석 없이는 뜻을 모를 말이 한국어의 하나라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은가. 제주인의 정서가 이보다 여실하게 응축된 언어가 있을 수 있을까. 제주 섬을 보살펴달라는 시어 그대로 돌하르방은 제주를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제주성곽 동서남문을 비롯하여, 대정과 정의 성문 앞에 서있던 입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제주성곽 동문 앞에 서 있는 돌하르방 옛날사진을 보면 더욱 분명하다. 성문 앞에 우뚝 서서 눈을 부릅뜬 그것이 지킬 것이 외국 침략군이었겠는가. 시시때때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질병과 잡귀와 사악한 기운, 끊임없이 바다에서 오는 액운에서 섬사람들을 지켜달라는 기원에 답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바다 건너에서 오는 관리들의 탐학에서 주민을 지켜달라는 원념도 들어있었을 것이다. 아침저녁 들락거리는 성문 앞에 서있는 돌사람은 어느새 제주인 모두의 식구처럼 되었을 것이다.
^여러 제주풍토기에 따르면 이 석물은 기자(祈子)신앙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아들 못 낳는 아낙이 돌하르방 코를 조금 떼어내 갈아서 마시면 소원을 이룬다는 속설 탓에 코 부분이 문드러진 것도 많다.
^벙거지를 쓴 석물의 이미지가 남근을 빼닮은 것도 그런 신앙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운위된다. 실제로 석물의 뒷면 벙거지 부분은 너무나 흡사해 여성 관람객들이 얼굴을 붉히곤 한다.
“제주도 용담리 냇가 사람들이 가기 어려운 궁벽한 곳에 등신대보다 작은 석불이 하나 있고, 그 앞에 남근모양의 양석이 있다. 아이 없는 부녀자들은 몰래 이곳에 와서 기원하고 이 양석에 자신의 성기를 접촉시킨다는데, 5년간의 조사로도 몰랐을 만큼 극비로 하고 있었다.”
^일제 때 초대 제주 도사(島司) 이마무라 도모(今村革丙)가 남긴 글이다. 그가 재임 5년간 민속자료를 꼼꼼히 조사했는데도 몰랐다는 이 석물은 용두암 마을(제주시 용담동) 돌미륵 서자복(西資福) ‘고추바위’다. 돌미륵 옆에 있는 높이 70cm 크기의 이 동자불 생김새가 영락없이 어른의 그것을 닮아 생긴 이름이다.
^제주도 기자신앙은 섬 탄생설화에 얽혀있을 만큼 기원이 오래다. 지상에 내려와 치마폭에 흙을 담아다 제주 섬을 만들었다는 옥황상제의 셋째공주 설문대도 서자복 미륵불에 빌어 500명의 아들을 낳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설문대 하르방을 만나 신방을 차리고 망측하게 생긴 서자복 미륵불 에 걸터앉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다. 그리고 미륵불의 코를 만지고 돌아와 그 많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아들 낳기를 비는 기자신앙이야 동서고금에 예외가 없지만, 특히 제주도가 심했던 것은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섬이라는 환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중에 여자가 많은 것은 반대로 남자가 귀한 섬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왜 남자가 귀한가? 이런 물음은 남자들의 일터인 바다와 관련되고, 그것은 또 바람과 풍랑으로 인한 잦은 해난사고와 연관이 될 것이다. 거기에 여러 환난이 겹쳐 남자들이 더욱 귀해지지 않았던가.
^돌하르방의 기원에는 여러 학설이 있어 아직 정설이 서지 않았다. <제주통사>에 나오는 문헌 속의 첫 기록은 1754년 제주목사 김몽규가 만들어 제주성곽 동문 밖에 8기, 서문 밖에 4기, 남문 밖에 4기를 만들어 세웠다는 것이다. 그때의 이름은 옹중석(翁仲石)이었다. 옹중이란 진 시황 시대 거인역사 완옹중(阮翁仲)을 말한다. 흉노족이 쳐들어올 때마다 적을 밟아서 퇴치했을 만큼 거대한 몸집의 역사였다 한다.
^그의 사후 진시황은 그를 추념하는 뜻으로 실물대의 옹중 동상을 만들어 아방궁 문밖에 세웠다. 다시 쳐들어온 흉노가 그 모습에 혼비백산 달아났다는 전설이 생겨, 궁궐이나 관아 문전에 수호신으로 만들어 세우는 문화가 탄생하였다. 제주에서는 그것을 돌로 만들었다고 ‘옹중석’이라 한 것이다.
^돌로 된 석상의 기원은 중국 요하문명 출토품에서 보듯이, 그 역사가 기원전 한참 위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다. 주목할 것은 제주도 돌하르방의 예술성이다. 제주 것은 한껏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무섭기는커녕 정겨운 인상이다.
^두 손을 얌전히 배와 가슴께에 모으고 선 모습이 코믹하고 정중하기도 하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에 서있는 것은 가슴께가 여자로 보일만큼 근육질이 강조되었지만, 오히려 귀여운 인상이다.
^제주 것보다 훨씬 작은 대정 것은 눈을 아래로 내리 감고 있는 모습이 너무 편안한 느낌을 준다. 손의 위치가 대정 것과 반대인 성읍 것은 벙거지가 작고 눈을 둥그렇게 떠 깜짝 놀란 모습에, 유독 코가 강조되었다. 크기는 제주 것이 평균 187cm인데 비하여 대정 정의 것은 136~141cm 정도다. 행정단위 목(牧)과 현(縣)의 차등이리라.
^김몽규 목사 시대에 제작된 것은 모두 48기였는데 지금 남은 것은 47기다. 제주목 돌하르방 은 지금 삼성혈 관덕정 제주대학교에 각4기, 제주시청 제주공항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KBS제주방송국에 각2기, 목석원 서울국립민속박물관에 각1기가 있다.
^이 석물은 ‘옹중석’ ‘벅수머리’ ‘우성목’ ‘무성목’ 등으로 불려오다가, 1971년 제주도 민속자료 제2호로 등록될 때 돌하르방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다. 도민들 사이에 친숙하게 불리던 애칭이 어린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유명해진 덕이었다.
^환해장성은 제주도의 만리장성으로 불렸다. 바닷가를 빙 둘러싼 성곽이 300리 길이라고 그런 별칭을 얻었지만, 규모와 쓰임새가 만리장성의 비교대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높이와 폭이 왜소하고, 때로는 이쪽을 막고 때로는 저쪽을 막는데 쓰였지만 제 구실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왜구 침입 저지에는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제주 어사를 지낸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에는 “왜적이 그렇게 여러 번 쳐들어왔는데도 한 번도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온 섬을 둘러싼 석벽이 바닷가에 깔려 있는 천연의 요새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이 장성이 축조된 것은 고려 원종 때였다. 진도에 웅거하였던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게 토벌 당하여 제주로 오게 될 것을 우려한 고려조정은 1270년 시랑 고여림(高汝霖), 영광 부사 김수(金須) 등을 보내 1,000명 병졸을 거느리고 성을 쌓게 하였다고 <신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었다.
^고여림이 그 일에 종사한 것은 불과 3개월이었다. 뒤따라 상륙한 삼별초와의 전투에서 죽었으니 축성과업을 완수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에 “고여림이 삼별초를 막을 때 쌓은 것이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고 나오는 것은 여러 차례 수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탐라국 때 역시 장성이 있었는데 아직도 남은 터가 있다”는 옛 기록은 장성의 역사가 삼별초 이전부터였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축성의 목적은 삼별초의 상륙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삼별초가 들어온 다음에는 여몽연합군 입도방지에 쓰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는 왜구를 막는데 쓰였으니 세월에 따라 그 용도도 달랐다. 하나의 성이 세월에 따라 이렇게 쓰임새가 달랐던 것은 외환(外患)이 많았던 제주역사를 말하고 있다.
^<탐라기년>에는 성을 고쳐 쌓은 일이 나온다. 1845년(헌종 11년) 영국선박이 우도에 정박하고 제주도 연안의 수심을 측량한다는 보고에 따라, 목사 권직(權稷)이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수축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름은 멋져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약간의 실망감을 주는 게 환해장성이다. 무너지고 퇴락해서가 아니다. 성이라고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왜소하다. 좀 높은 돌담 정도라고나 할까. 성곽문루와 옹성을 가진 한림 명월진성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너무 급박하게 쌓아서 그럴 것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목성도 같이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성문 같은 것은 목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환해장성 유허는 제주시 화북동 삼양동 해안, 동북 해안(북촌리 동복리 행원리 월정리), 서북 해안(애월리 한동리 온평리 신산리 고내리), 남해안 일부 지역에 흩어져 있다.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4·3 사건 취재 때 조천읍 북촌리 마을길을 샅샅이 훑어 걸을 때였다. 마을길 이정표에서 환해장성이란 화살표를 보고 따라가, 파도소리가 시끄러운 바닷가에서 허물어져 가는 성벽을 보았다. 마을 앞 갯가에 왜 저런 게 있나 싶었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모습이 옛것 그대로였어요. 문화재를 복원한다고 고증 없이 반듯반듯하게 쌓아올려 옛 맛을 잃었습니다.”
^제주 삼양동 검은 모래 해변에서 해안을 따라 화북동 별도봉 아래까지 올레 길을 걸으며 취재할 때 안내받은 주민의 말이다. 기계적인 문화재 복원사업에 대한 불만이리라. 해안에 널린 자연석을 주로 이용한 원래의 축성방식과 달리, 기계로 반듯반듯하게 자른 돌을 썼다는 말이다. 배가 드나드는 포구마을 인근에 복원된 성은 예외 없이 매끈하다.
^그러나 복원이 되지 않은 구간은 허물어지고 잡초에 가려지거나 인가에 먹혀들어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다. 길가에 성의 내력을 말하는 표지판이 없다면 무너져 가는 돌담이 무엇인지 알 사람이 있겠는가. 뭍의 도성이나 여러 산성 읍성에 비하여 축조방식과 기술, 자재와 공력의 차이가 큰 탓이었으리라.
^그것은 외환이 많았던 제주의 역사와 민중의 고난을 증언하는 유물이다. 그리고 제주도라는 지역공동체 규모와 옹색했던 살림살이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옆을 지나는 올레 객들은 환해장성이라는 이름만이라도 기억해 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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