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일입니다. 서울역 그릴에서 점심식사 약속이 있었기로 예의 넉넉한 시간을 두고
지하철역에 도착하여 출구를 찾아 천천히 걸어 가고 있었지요. 눈여겨 본 것은 아니지만
저 만큼 앞의 승객용 벤치에서 평범한 옷차림에 가방을 든 60대 중반의 할머니가 나이
어린 군인에게 뭐라고 소근대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잠시후 순진한 인상의 병사는
난처한 표정을 하고는 마지못해 주머니를 주섬주섬하더니 천원짜리 몇장을 할머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잽싸게 나꿔채듯 돈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꺼져 버리는
것 이었습니다.
언뜻보아도 그렇고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군인양반, 어쩜 이리 잘 생겼누. 우리 손주도
살았으면 꼭 이랬을 거야. 딸네 가야하는데 차비가 없어서 못가고 있으니 천원짜리 몇 장만
도와주세요” 아니면 “못된 며느리 한테 학대받아서 밥을 못얻어 먹으니 밥사먹을 돈 좀 몇푼
주시구려...” 하는 따위의 말이 노파의 입에서 나왔을 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말이 진실
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1분쯤후 지하역사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어!”
조금전의 그 노파의 뒤통수가 내 코앞에 있었습니다. 노파는 속옷주머니에서 만원짜리
몇장과 천원짜리 몇장이 차곡차곡 정리된 돈 뭉치를 꺼내더니 조금전에 병사에게서 수금한
몇천원을 보태어 다시 속옷주머니에 쑤셔넣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 노파는 이렇게 돈을 버는
구나’ 조금전에 어린 병사가 당혹스러워하며 그리고 풋스런 순진함에 얼굴 붉히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 보세요. 할머니! 가진 돈이 많으시던데. 손주같은 군인한테 그런식으로 속여서 돈을
뜯습니까? 군인애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런 짓해요? 네? ” 나는 근엄하고 강한 어조로
노파의 뒤통수가 울리도록 추궁하였습니다. 그러나, 노파는 멈칫 당황하는 듯 하였을 뿐
이내 귀머거리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체의 댓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더 이상
아무말 하지 않았습니다. 곧 에스컬레이터는 우리를 서울역 광장에 뱉아놓았고 노파는
꼬리잘린 도마뱀처럼 바삐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딜!’ 나는 아직도 분을 참지 못한 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노파의 뒤를 따라 붙었고
우리는 그렇게 서울역 신청사의 1,2,3층을 누비며 쫓고 쫓기는 신경전을 계속하였습니다.
또 한번 그런 사기를 치면 즉시 요절을 내겠다는 듯이 나는 눈에 독기를 품었습니다.
‘과연 저 노파는 내가 자기를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까? ’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바쁜 걸음 으로 주변을 맴도는 것으로 보아 미행자를 끊으려는 의도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기를 10여분. 노파는 이쯤이면 미행자가 떨어져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결국 병사들이
시끌벅적 기차표를 사는 창구앞에 멈춰 섰습니다. 표를 사고 돌아서며 지갑에 거스름돈을 집어
넣는 병사를 독사가 개구리 보듯 노려보는 노파. 몇발치 뒤에서 뚫어지도록 노파를 주시하고
있는 나. 영화같은 이 순간, 이 장면을 단숨에 컷트한 것은 어느 괴상하게 생긴 40대남자의
이상한 몸짓이었습니다.
한쪽다리에 장애가 있는 듯한 그 남자는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매표소 한쪽
귀퉁이에서 갑자기 나타나서는 노파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마치 허공의 파리라도 쫒는 듯한
몸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본 노파는 흠짓 놀라는가 싶더니 도망치듯 급한 걸음으로 뒤를
돌아 보지도 않고 인파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남자가 노파에게
눈짓 몸짓의 무슨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느꼈고, 내가 노파를 잡아서 어떻게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불가한 일 일것이라고 직감하였습니다. 더구나 점심 약속시간이 임박하였으므로 아쉬운 기분을 누르고 사건을 여기서 마무리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에잇, 찜찜해”
그 날 저녁시간까지도 그 일은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지인중에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알만한 사람을 떠올리고는 전화를 걸었습니다. “세상에 별꼴을 다 보았네” 그러나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눈 딱감고 못본척 하셔야 해요.
만일 그 노파를 계속 쫓아가셨다면 어느 놈인가가 또 선생님을 뒤쫓았을 겁니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서 선생님을 협박했을 겁니다. 조용히 꺼지라고요. 그 다음은 말씀안드려도
아시죠?”
정말 개같은 경우였습니다. 세상엔 분한 일도 많고 모를일도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노파는
나 때문에 그 날은 사업상 지장이 많았을 것이고 재수없는 날이라며 투덜거렸을 거라는 것이고,
한 병사는 그래도 오늘 작은 선행을 했다는 뿌듯함에 단잠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밤에도 하늘에서는 별들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니네들 그렇게 사는 게 어제
오늘 일이냐?”하고 비웃는 듯이 말입니다. (淡虛堂)
첫댓글 마지막에 나도 모르게 한참을 웃었습니다.ㅎㅎㅎㅎ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지 인류가 끝 나는 날 까지 계속되는 삶의 한 현장입니다.
임허당님은 대단하세요.저 같으면 금방 체념 했을 텐데요.
글에 감동이 갑니다. 님 같은 의협심 많은 분이 있어야
사회가 정화되고 정의가 살아 남아 누구나 불만 없이
살아 갈만 한데요, 고맙습니다. 제 동창 싸이트에 이
좋은 글 옮겨 봅니다.
세상에나~
정말 그렇게 황당한 일도 있군요.
좋은정보가 될 것 같습니다.
저도 며칠 전에 이런 경우를 봤습니다.
뚱뚱한 할아버지가 그렇게 이사람 저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더니
나중엔 제 옆 구석에 있던 사람과 지폐를 한뭉치 꺼내 세고 있더라구요.
제가 흘깃 쳐다봤더니 왜 봐 뭘 봐 하면서 무섭게 으르렁거리더군요.
불쌍한 노인들도 도와줄 수 없게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많은도움이 되엇습니다 그런거군요 지는 그저 가엾다는 생각에 그만 ....
이제부터는 생각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