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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킬리언 머피·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오스카 유력 후보 물망
이데일리 2023-08-08 오후 1:45:28
[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신작 ‘오펜하이머’가 글로벌 개봉 17일 만에 월드 와이드 흥행 수익 5억 5000만 달러 돌파에 이어 국내 개봉을 10일 앞두고 전체 예매율 1위에 등극하는 등 폭발적인 흥행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역 킬리언 머피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열연은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며 또 한 번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오는 8월 15일 국내 개봉을 앞둔 ‘오펜하이머’에서 세상을 바꾼 천재 과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와 미국 원자력 위원회 창립 위원인 ‘루이스 스트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 남우조연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미국 연예 매체 버라이어티는 평소 한 인물의 전기를 다루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연기상 후보에 자주 지명됐다는 아카데미 수상 계보에 주목, 이번 작품에서 실존 인물인 ‘오펜하이머’와 놀라울 정도의 싱크로율을 선보이며 새로운 인생 연기를 펼친 킬리언 머피가 남우주연상에 오를 것이라 예상했다. 이미 북미 개봉 후 “킬리언 머피의 연기가 영화를 지배한다”, “영화를 이끄 는 킬리언 머피의 다채로운 연기” 등 뜨거운 호평 세례가 쏟아진 바 있어 그의 노미네이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킬리언 머피가 맡은 ‘오펜하이머’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인물이자 폭발적 카리스마로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루이스 스트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오를 것이라 예측됐다. 이미 두 차례 남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된 이력이 있는 그는 캐릭터의 무게감과 날카로움을 완벽하게 그려내며 가장 유력한 후보로 손꼽히고 있다. 여기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또한 작품상, 감독상 후보에 오를 것을 예상하는 외신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어 압도적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는 ‘오펜하이머’가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또 어떤 존재감을 드러낼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개봉까지 일주일을 앞두고 국내 박스오피스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오펜하이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천재 과학자의 핵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작품이다. 8월 15일 국내 개봉 예정이다.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원자탄 개발한 오펜하이머 “핵은 위험” 인류에 경종
중앙일보
2023.08.01 00:57
새로운 앞날 만들어가는 자기 성찰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원자탄 개발의 책임자였던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요즘 화제다. 그는 1945년 원자탄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2차 세계대전을 끝낸 영웅으로 시사주간지 타임 표지에도 등장했다. 그런데 오펜하이머 평전을 쓴 작가는 그에게 ‘미국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를 붙였다.
영웅 대접받던 오펜하이머, 수소폭탄 반대하며 공직서 쫓겨나
1991년 이항녕 홍대 총장 “하동군수 때 일제 징병 도와” 고백
DJ에 정치적 부채 있다는 JP의 회고록도 한국 사회에 큰 울림
8·15 앞두고 생각하는 역사 문제…과거 성찰이 미래를 열어가
미국의 프로메테우스, 영광과 좌절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 유니버설픽쳐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반대에도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고, 그로 인해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 또한 화가 난 신은 인간에게도 판도라의 상자를 열도록 하여 큰 재앙을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기회와 큰 고통을 받을 가능성을 동시에 준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책임자였던 맨해튼 프로젝트는 인간이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주로 화석연료 에너지를 사용해 왔던 인류역사에 큰 변곡점이 되었다. 그러나 원자탄은 인류가 공멸할 수 있는 위험성도 던져주었다. 핵무기뿐만이 아니다.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위해 세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발전소에서 재앙이 발생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의 후회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사용되자마자 그 위험성을 인식했다. 더 이상 핵무기가 개발되거나 사용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매카시즘 시대에 그는 핵 통제 필요성을 건의했고,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했다가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았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제 그는 더이상 영웅이 아니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탄을 개발했지만, 원자력이 무기로 사용될 때 인류에게 재앙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히틀러의 핵무기 개발 시도를 알게 되면서, 독일보다 미국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건의했던 실라르드 박사도 막상 원자탄이 개발되자 그 사용을 반대했다. 살라르드 박사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탄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낼때 자신의 이름으로 사인했던 아인슈타인 역시 핵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오펜하이머가 참여하지 않았다면, 원자탄이 개발되지 않았을까. 2차 대전 중 독일뿐만 아니라 일본도 원자탄을 개발하려 하였고, 영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만약 1943년 퀘벡회담에서 영국이 미국에 기술 이전을 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에 원자탄이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오펜하이머가 아니었어도 원자탄은 결국 태어났을 것이다.
원자탄이 사용되지 않았다면
원자탄 사용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물론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도 일본 정부에서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어쩌면 소련군 참전이 일본의 조기 항복에 더 큰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원자탄이 일본의 전쟁 중단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이른 항복으로 미군이 본토 상륙작전을 실행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미군의 목숨을 살렸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원자탄이 사용되지 않았다면 소련군의 참전이 늦어지거나 참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미군 전략사무국(CIA의 전신)의 훈련을 받은 한국광복군이 국내에 진공 작전을 펼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당시 미 해군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진 ‘리틀보이’나 ‘팻맨’ 없이도 해상봉쇄를 통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매우 흥미롭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확한 답을 줄 수는 없다.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한국이 해방되지 않았고, 지금도 일본 제국의 일부로 계속되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이 가정은 80년 전인 1943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규정했던 카이로 선언에 위배되기에 잘못된 추정이라고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보면서 주목되는 점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봤다는 점이다. 자신의 행동이 과연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성찰한 것이다. 원자탄 개발 과정과 마찬가지로 그가 반대했어도 수소폭탄은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성찰은 이후 원자력 사용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50년 전 과오 반성한 이항녕 전 총장
이항녕
한국 현대사에서도 자신의 성찰이 한국 사회에 큰 경종을 울린 경우가 있다. 1991년 7월 10일 경남 하동초등학교 강당에서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의 초청을 받아 단상에 오른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부터 50년 전인 1941년 하동군수로 부임해 1년간 재직한 적이 있습니다. 사과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그 당시 공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중략) 군민들을 괴롭혔던 사실을 사과드립니다. 저는 하동군수로 1년, 창녕군수로 3년간 있었는데 그때는 징용·징병·학병을 보내기 위한 일을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집을 떠나야 했던 분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일본의 앞잡이로서 그런 일을 저질렀던 나쁜 죄인이었습니다.”(이상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1945년 9월 당시 충청남도 광공업 부장은 “고급관리로 일한 친일파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며 그해 9월 충남도지사로 부임한 미군정 육군 대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는 시점에서 자신들의 부일 협력에 반성하면서 검사 8명이 사표를 낸 사례도 있다. 일제강점기 교사였던 분 중 평생을 반성하면서 동대문구 회기동 주변의 쓰레기를 주웠던 분도 있다.
프로 잡(Pro Job)? 프로 잽(Pro Jap)?
일생을 살면서 과거를 성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자신과 같은 일을 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군정 하에서 부일 협력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에 협력하기 위한 것인지(Pro Jap), 아니면 직업에 충실했기 때문인지(Pro Job)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시대의 조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탓한다면 누구도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이후 과거를 성찰하는 것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2000년 이후 한국의 천주교와 조계종,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과거 문제에 대한 입장문을 내놓았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 정치의 한 획을 그었던 JP(김종필)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의 53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그는 중요한 정치적 이슈를 회고했지만, 그중에서도 과거 문제와 관련하여 두 개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유신 시절 죽음의 고비를 넘긴 DJ(김대중)에 대한 부채였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의 DJP 연합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중앙청 국기게양대 남겼더라면”
다른 하나는 1995년 중앙청 철거의 아쉬움이었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의 유명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던 중앙청 국기게양대라도 남기기를 원했다. 유물을 통해 과거를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만약 친일 잔재 문제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졌다면, 중앙청도 옮겨서 보존하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재앙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다면, 그는 미국의 영웅이자 정부의 고위 공직자로서 인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48년 사표를 냈던 검사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를 성찰했고, 미래를 고민했다. 아마도 그러한 고민이 좀 더 큰 물결을 만들어냈다면, 국립묘지에 있는 일부 인사들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기 성찰은 그들 자신에 대한 평가와 함께 후손들에게 논란거리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히틀러를 경계하며 원자탄을 만들었고,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똑똑했던 젊은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했다. 단지 일본 군국주의를 위한 것이었겠는가. 그럼에도 오펜하이머 박사, 이항녕 전 총장, 그리고 JP의 회고가 2023년 8·15를 앞둔 지금 또 다른 울림을 주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알쓸별잡] 〈오펜하이머〉 보기 전 시청 추천📌 김상욱&이동진이 알려주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 배경 지식🔍
오펜하이머
J(ulius) Robert Oppenheimer
출처 : 다음 백과
요약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 개발기간 동안(1943~45)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다. 1947~66년에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충성심과 신뢰도를 문제삼아 기소당했고, 이로 인해 열렸던 정부 청문회 결과로 보안사항 취급허가와 정부 고위층의 자문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정부 안에서 과학자의 역할과 관련된 정치적·도덕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1925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러더퍼드 경의 지도 아래 원자구조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히틀러의 도발에 따라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의 책임을 맡았다.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 공무원 에너지 부/wikipedia | Public Domain
원자폭탄 개발기간 동안(1943~45)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다.
1947~66년에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충성심과 신뢰도를 문제삼아 기소당했고, 이로 인해 열렸던 정부 청문회 결과로 보안사항 취급허가와 정부 고위층의 자문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정부 안에서 과학자의 역할과 관련된 정치적·도덕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계의 관심사가 되었다(핵무기).
오펜하이머는 뉴욕 시에서 직물류 수입으로 부를 쌓은 독일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버드대학교 학부과정 중 라틴어·희랍어·물리학·화학에서 탁월함을 보였고, 시집을 발간했으며,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1925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러더퍼드 경의 지도 아래 원자구조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캐번디시에서의 연구기간중 영국 과학자 단체들과 함께 원자연구의 대의 명분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할 기회를 가졌다.
막스 보른의 초청으로 괴팅겐대학교로 간 오펜하이머는 그곳에서 닐스 보어와 폴 디랙과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었으며, 1927년 괴팅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후에는 레이덴과 취리히의 과학센터에 잠시 머문 뒤, 미국으로 돌아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와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1920년대에는 새로운 양자론과 상대론이 등장하여 과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이며 물질은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어렴풋한 함의만을 내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초기 연구는 주로 전자·양성자·우주선(宇宙線)과 같은 원자구성입자들의 에너지 과정에 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에 양자론이 발표된 이래, 대학은 그에게 양자론을 연구하여 그 완전한 내용을 발전시키는 데 자신의 총력을 집중시킬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미국 물리학의 전세대를 교육했고, 그들은 오펜하이머의 지도력과 지적 독립성의 영향을 받았다.
독일에서 히틀러주의의 등장은 오펜하이머의 정치에 대한 최초의 관심을 일깨웠다. 1936년의 스페인 내전에서는 공화파의 편에 섰으며, 그곳에서 공산주의자 학생들과 친숙해지게 되었다. 1937년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상당한 유산을 남겨주었고, 그는 이 유산으로 반파쇼 단체들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스탈린의 탄압에 의한 러시아 과학자들의 끔찍한 고통을 본 후 공산당과 절연했으며(실제로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음), 그와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철학이 강화되었다.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레오 실라르드는 미국정부에 대해, 나치가 먼저 핵폭탄을 제조한다면 이는 전인류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는 천연 우라늄에서 우라늄-235(235U)를 분리시키는 공정과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 질량을 결정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8월 미국 육군은 핵에너지를 군사적 목적에 도입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의 물리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조직할 책임을 맡게 되었고, 이 연구계획은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임무 수행을 위해 연구소를 설립했고 이를 관장했다. 1943년 그는 어린시절을 보냈던 기숙학교가 있던 뉴멕시코 샌타페이 근처의 로스앨러모스 고원을 연구소 부지로 선정했다.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1942년 오펜하이머는 군 보안요원의 조사를 받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은 그와 친분관계에 있는 친구 몇 명이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혐의와 더불어 정점에 달했다. 한 친구는 이 사건으로 캘리포니아대학교의 교직에서 쫓겨났다. 1954년 안보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들의 조사 가운데 자신의 기여부분은 거짓말투성이라고 진술했다.
독일이 항복한 후 탁월한 로스앨러모스 과학자들의 공동 노력의 성과는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앨러머고도에서 있었던 최초의 핵폭발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같은 해 10월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직책을 사임했다. 1945년에는 프린스턴대학교 부설 고등연구소 소장이었다가 원자력위원회 일반자문회의(General Advisory Committee of the Atomic Energy Commission) 의장(1947~52)으로 재직중이던 1949년 10월에는 수소폭탄 개발계획에 반대했다.
1953년 12월 21일 그에 관한 적대적인 내용을 담은 군 보안 보고서가 발표되어 과거 공산주의 활동 경력, 소련 간첩 명단 제출의 지연, 수소폭탄 제조 반대 등과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기소당했다.
보안 청문회는 오펜하이머의 모반혐의가 무죄임을 발표했으나 그의 군 기밀에 대한 접근을 금지시켰다. 그결과 원자력위원회와의 계약이 취소되었다. 미국과학자동맹(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은 그의 기소를 반대하며 즉각적인 변론에 나섰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적 발견으로 야기된 도덕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애써 시도하다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된 과학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사상을 정립하는 데에 바쳤다. 냉전이 쇠퇴해가던 1963년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에게 원자력위원회의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를 복권시켰다. 1966년 프린스턴을 퇴직한 오펜하이머는 다음 해에 후두암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