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재비화] 민족문화재 수호, 백자박산향로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8. 28.
보물 제238호 백자박산향로
동양의 신선사상이 물씬 풍기는 고려 백자이다. 가토가 소장했던 것을 가스비가 한국까지 와 입수했고, 1937년 전형필이 일본으로 건너가 양도받았다. 민족문화재수호의 귀감으로 회자된다. 간송미술관 소장.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 보물 제238호), 이 백자향로는 고려시대에 부안이나 강진의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반인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대개 청자만을 제작했다고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특수한 목적에 사용하는 기물(器物)은 일부를 백자로 만들었는데, 이는 남송의 청백자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 향로는 개성 부근의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전체가 둥근 모양이다. 또 중첩된 산 모양의 뚜껑 위에는 다각형의 큰 구멍이 나 있고, 그 아래로도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구멍을 7개나 내었다. 푸른빛의 광택이 깨끗한 것은 물론 청백색의 유약이 두껍게 발라져 빙렬(氷裂) 또한 거의 없다. 대단히 우수한 명품이다.
문화재 수호와 전형필
이 백자박산향로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문화재로 지정된 배경에는 우리 문화재를 사랑한 한 외국인의 보호와 문화재를 사명감으로 수호한 한국 청년의 불같은 열정이 숨겨져 있었다. 그들은 존 개스비(Jhon Gadsby)와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다. 개스비는 영국의 귀족 출신으로 1914년 동경에서 국제적인 변호사로 활약한 사람이며 그때 나이 25살이었다. 그는 서양인이면서도 도자기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 수십 년 동안 도자기만을 수집하여 서양인으로서 최고의 감식가요, 심미가가 되었다.
어느 날, 동경 거리를 산책하던 개스비는 골동품 가게에 진열된 꽃병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 아름다움에 온몸을 떨었다. 처음으로 도자기와 인연을 맺는 순간이다.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가게 안으로 빨려 들어간 그는 꽃병 값으로 5백 원(圓)이란 비싼 값을 준 후 아기처럼 껴안고 나왔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훗날 그 도자기는 나베시아 색회화훼문병(色繪花卉文甁)이란 이름으로 일본의 중요미술품(보물급)으로 지정되었다. 제대로 본 명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호화스런 일본 도자기에는 웬일인지 금세 싫증을 느꼈다. 온갖 채색으로 문양을 내어 눈에 띄기는 쉬웠으나 보면 볼수록 인위적인 가공미가 짙어 동양의 신비한 맛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고려청자를 본 개스비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숨이 멎는 듯 했다고 한다.
“고려자기의 아름다운 빛과 형태는 세계 어느 나라의 도자기보다 훌륭합니다.”
개스비는 만나는 일본인과 서양인들에게 수차에 걸쳐서 고려청자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그 자신 또한 고려청자를 맹렬히 수집한 것은 물론이다. 명품만 있다면 일본은 물론 한국까지 건너와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고려청자를 수집했는 가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 온다. 1930년대 초이다. 개스비는 점찍어 둔 두 점의 고려청자를 입수하기 위해서 서울에 왔다. 일본인 가토(加藤)가 수장한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靑磁象嵌蓮池鴛鴦文淨甁)과 백자박산향로를 사기 위해서이다. 그는 군산에 살던 일본인 미야자키(宮崎)의 말까지 뿌리치고 온 것이다.
“개스비 씨, 때가 좋지 않습니다. 동양의 오랜 풍습 상 섣달 그믐에는 장사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여러 모로 불리합니다.”
삼남(三南) 최고의 거부이며 또 해방되기 직전에 골동품을 모조리 팔고 떠난 운 좋은 사나이 미야자키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개스비를 대면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눈을 뜨나 감으나 그 청자들만 눈에 어른거립니다. 보내 주신 사진을 어찌나 많이 보았던지, 색이 바라고 구겨질 정도입니다. 부탁합니다.”
미야자키는 난감하였다. 상대자 기토가 일본인 고관이라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몰라 망설였다. 그렇지만 그는 개스비의 열정에 감동하여 그날로 가토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토를 설득했다.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던 가토도 미야자키의 열정에 감동하여 두 사람은 밤을 새워 가며 가격을 협의했다. 결국 그 두 점의 고려청자는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개스비의 손으로 넘겨졌다. 물론 상당한 대가를 치렀지만 개스비는 뛸 듯이 기뻐했고, 골동상에게도 후한 사례를 했다고 한다. 동양의 신선 사상이 물씬 풍기는 백자박산향로는 이렇게 하여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전형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10만석지기의 땅을 이용해 문화재를 수집하여 간송미술관을 세워 민족 문화재를 수호했다.
간송(澗松) 전형필, 그는 나라를 빼앗긴 설음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 문화재 수집에 전력을 다하는 젊은 실업가며 대 수집가였다. 같은 세대, 고유섭(高裕燮, 1904~1944)과 송석하(宋錫夏, 1904~1948)가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을 학술적으로 조사, 연구하여 우리의 뿌리를 잇고자 했다면, 전형필은 십만 석 지기의 상속 재산을 이용해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그는 1930년 귀국한 뒤에는 오세창(吳世昌)의 권유를 받아들여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서화와 고서를 주로 수집했지만 점차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 및 기타 불교 문화재까지 확대 수집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사적인 취향이나 수집 열이 아니었다. 민족유산 보호를 위한 사명감의 발로요, 일종의 항일투쟁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가 모은 고미술품은 예외 없이 이 나라 최고의 걸작품들이었다. 어쩌다 일본인에게 놓친 물건이 있으면 사력을 다해 다시 사오는 불굴의 의지도 보였다.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수집한 전형필의 개인 소장품은 급속도로 내용이 풍부해져 1930년 중반에는 이미 개인 미술관 시설이 필요할 정도로 방대해졌다. 전형필은 물건만 마음에 들면 금액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전형필이란 조선의 젊은이를 차차 일본인 골동상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가토가 가지고 있던 청자정병과 백자향로를 동경에 사는 개스비가 사 가지고 갔답니다.”
심보 기조(新保喜三), 그는 퇴계로에서 ‘온고당(溫古堂)’이란 골동품 가게를 경영하던 건장한 체구에 투지와 정력이 넘쳐흐르는 오십 줄의 반백 일본인이었다. 비록 앞에 앉은 청년이 그들의 식민지 백성이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가운데 큰 열정을 지닌 인물이라 생각해 늘 존경하고 있었다. 심보는 전형필이 신임하는 중간상이었다.
“심보 상. 그 청자는 실로 명품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입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보 상은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정보를 찾아보세요.
“그런데, 개스비가 다시 팔까요?”
“제 생각으로 개스비는 언젠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모조리 처분할 것입니다. 차차 알게 될 일이지만 일본에 있을 때 느낀 바가 있어요. 혹시 그가 물건을 처분한다는 정보가 있으면 지체없이 연락해 주십시오.”
전형필의 예감은 적중했다. 1936년 2월, 일본 육군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미온적인 대신과 고위 관료를 무참히 죽인 이른바 2․ 26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일본 조정 내에서는 온건 보수파가 밀려나고 호전적인 신흥 군국주의자들이 정권을 차지했다. 군국주의로 돌변한 일본 조정은 조선총독에 미나미 지로(南次郎)를 파견하고, 위세를 몰아 중국 대륙까지 식민지화하기 위해 중국과의 일전도 불사할 정도로 군비를 확충하고 있었다. 곧 일본이 미국과 영국과도 싸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다. 사태를 지켜보다 겁이 난 개스비는 소장하던 중요한 물건들을 모두 처분하고 영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1937년 2월, 개스비와 친하게 지내던 동경의 한 골동상이 심보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내 왔다.
“개스비가 물건을 처분하려 합니다. 연락 바랍니다.”
기다리던 편지를 받고 놀란 심보는 내친 걸음으로 전형필의 집으로 달려갔다. 숨이 턱에 닿아 있었다.
“심보 상, 이 편지는 미진한 것이 있어요. 처분한다면 전부를 처분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를 처분하는 것인지요?”
“예?”
미처 확인할 틈이 없었다.
“빨리 전보를 쳐서 확실하게 알려 달라고 하세요. 그래야만 자금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며칠 후 정확한 회신이 다시 날아왔다.
“전부 처분이 확실하다. 중간 알선은 나 혼자서 일임을 받았습니다. 일간 전보를 칠 터이니, 그때는 지체없이 동경으로 오시오.”
전형필은 급히 공주에 있던 5천 석지기 땅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고, 다시 연락이 오자 거금을 싸 들고 동경으로 떠났다.
너무나 정이 들었던 물건들
다음 날, 전형필은 동경 시내 고지마치(麴町)에 있는 개스비의 집을 일본의 중간상과 찾아갔다. 개스비의 집은 일본의 다다미 집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호화 저택으로 궁성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뒤뜰에 있는 아담한 연못에는 금잉어가 유유히 놀고 있었다. 안내를 받은 곳은 이층 응접실이었다. 따뜻한 아침 햇살이 유리창으로 비쳐 들자, 응접실에 진열된 고려청자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전형필은 기쁨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오랜 시일을 두고 확실한 감식안과 열성으로 수집한 개스비의 소장품이 이제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형필은 생각했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이만큼 거대한 수집을 한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겠군.’
푸른 비색이 아무런 흠집 없이 흐르는 향로와 매병, 그리고 알토란 같이 모아 놓은 향합(香盒)과 유호(油壺)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이다. 단정한 신사복을 입은 주인 개스비가 나타났다. 나이는 오십이 훨씬 넘어 보였다.
“어제 서울에서 온 전 선생입니다”
중간상이 전형필을 소개하자, 개스비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한국 사람?”
“예. 그렇습니다. 전형필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개스비는 자못 뜻밖이라는 듯이 미소를 띠며 반가워했다. 일본의 골동상은 개스비에게 그때까지 매수인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모 수집가가 내일 올 터이니 준비만 하라고 일렀다. 개스비도 중간상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었던 터라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내심으론 동경이나 오사카의 어느 일본인 수집가일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말씀으로는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항상 한국의 훌륭한 고미술품이 통째로 일본에 넘어 와 일본인의 손에 좌우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그 미술품의 주인은 일본인이 아니니까요. 그들이 아무리 한국의 골동품을 좋아한다지만, 한국 사람만큼 애정을 가지기는 힘들죠. 그저 돈벌이로 생각할 밖예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제가 여러 번 한국 땅에 갔을 때, 한국인 수집가가 차차 생기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제야 진정한 주인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격이지요.”
“고맙습니다.”
개스비의 환대에 전형필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특히 그동안 혼신을 바쳐 수집한 도자기를 한국 사람, 그것도 진정한 애정을 가진 젊은 실업가에게 넘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개스비 또한 흐뭇한 기색이었다.
“저야 고려청자에 미처 거의 이십여 년을 보냈지만, 다른 골동품은 모릅니다. 그저 청자만을 좋아했을 뿐입니다. 청자 하나만을 보아도 한국은 대단히 우수한 문화를 가진 나라입니다. 지금은 비록 일본의 치하에 있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일어설 것입니다. 청자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람의 불굴의 의지가 느껴져요. 정말 대단한 민족입니다.”
개스비는 젊은 청년에게 무척 호감을 가지고 환대했다. 개스비의 소장품은 실로 그 규모나 가치로 볼 때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애장품 중에서 지금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만도 5~6점이나 될 정도이다. 흥정이 끝나자, 전형필은 정성스럽게 청자들을 오동 상자에 넣고 끈을 묶었다.
청자기린형향로(靑磁麒麟形香爐), 삼족의 향로에 뚜껑을 얹었는데, 뚜껑 손잡이에 웅크리고 앉아 뒤쪽 하늘을 쳐다보는 기린을 올려놓았다. 첫 눈에 보아도 희귀하고 귀한 청자였다. 사자 뚜껑은 흔한 것이지만, 영물인 기린을 올려놓은 경우는 드물다. 이밖에도 개스비의 소장품은 각종 접시와 대접, 사발, 향합, 술잔, 다기(茶器) 등 모든 기형을 망라하고 있었다.
“애써 모은 수집품을 인수하여, 귀하에게 지지 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겠습니다.”
“잠깐, 전 선생. 이것만은 안 되겠어요. 너무나 정이 들었던 것이라서.”
개스비는 황급히 청자양각모란문잔(盞) 한 개와 향합 하나를 집어 안으로 가져갔다.
“미안합니다. 이것만은 기념으로 간직하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눈이 부신 명품은 다 건네주면서 적은 것 두 개만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는 개스비의 간청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짐을 싸면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사귄 친구 마냥 가까워졌다.
“전 선생은 아직 젊으니 아무쪼록 이 훌륭한 귀국의 고미술품을 많이 수집해서 세상에 알리세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전형필은 말에 앞서 가슴으로 그 말을 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개스비 씨는 왜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는 수집하지 않으셨습니까?”
서재나 응접실 어디를 보아도 고려청자 이외에는 꽃을 꽂인 송청자(宋靑磁) 화병 밖에는 없었다.
“고려자기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나요. 다른 자기들은 다 연대가 떨어지지 않아요? 한국의 도자기를 한국의 수집가가 도로 가져가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그의 대답에는 진정으로 기쁨이 넘쳐흐르는 듯하였다. 당시 전형필은 고려청자 십 여점에 거금 십 만원을 지불하였다. 이 돈은 쓸 만한 기와집 오십 채 값으로, 어렵게 얘기를 꺼낸 개스비의 요구에 두 말하지 않고 달라는 값을 모두 지불했다.
이 일이 있자, 전형필의 이름은 한반도를 뛰어넘어 국제적으로 소문이 났다. 비록 거래를 위해서 만났지만, 서로가 깊은 우정을 간직할 수 있었다. 개스비는 그후 약 일 년여 간을 동경에서 더 머물다가 영국으로 돌아갔다.
서울에 온 전형필은 소장한 소장품을 전시하고 보관하기 위해서 다음 해, 성북동에다 보화각(葆華閣, 현재 간송미술관)을 세워 민족문화재 수호의 찬란한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오세창은 보화각의 정초명(定礎銘)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때는 戊寅(1938) 윤 7월 5일 澗松 全君의 葆華閣 상량식을 끝냈다. 내가 복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北郭을 굽어본다. 萬品이 뒤섞이어, 새집을 채웠구나. 書畵 심히 아름답고, 古董은 자랑할 만, 一家에 모인 것이, 千秋의 精華로다. 槿域의 남은 舟橋로…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당시 전형필이 개스비에게서 되찾아 온 청자 중 현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은 다음과 같다.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1962.12.20지정), 청자기린형향로(국보 제65호, 상동), 청자오리형연적(靑磁鴨形硯滴, 국보 제74호, 상동),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靑磁象嵌葡萄童子文梅甁, 보물 제286호, 1963.1.21지정), 청자상감국목단당초문모자합(靑磁象嵌菊牧丹唐草文母子盒:보물 제349호, 상동),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 보물 제238호, 상동) 등이다.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1962.12.20지정)
(참고:①이영섭이 「월간 문화재」에 기고한 글 ’문화재계 비화‘.②「간송문화」간송미술관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