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남아있는 이들은 모두 소녀인가요☆]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남아있는 이들은 모두 소녀인가요◎]
김명신 시집 / 시작시인선 0310 / 천년의 시작(2019.11.21) / 값 10,000원
================= =================
말할 수 없는 소녀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따라갔다
무슨 나무야, 모르겠어
이젠 아무 데도 못 가
대신 이렇게 한 번씩 휘파람을 불어야지
얼마나 다행이야
멀리서 이렇게 와주시다니요
휘파람은 날아가는 바람 중에 가장 아름답고 쓸쓸합니다
남아있는 이들은 모두 소녀인가요
비밀은 날아가고 목은 닫혔어요
찾는 게 소녀라면 당신은 잘못 왔어요
팔월
그것들이 돌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분에 흙이 적어 좋구나
상자가 어두워졌으니 좋구나
무엇도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고 말할 때까지
모두 다 똑같다는 말로 위로하지 않겠어요
그해 여름은 그해 여름
실언들은 자라고
저 닫히지 못하는 입들
그해 여름이라니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무엇도 돌려보내지 않을 거예요
네잎클로버가 위험합니다
는개
오래 기다려야 해
무겁고 어눌한 눈알들
감시의 냄새들
흙이라면 좋겠지
숲이라면 더 좋을 거야
어린 땅꾼들은 길고 아득해
콧노래를 밤새 부른 건 아직 미숙한 채비
진득하니 내리는
소문은 겁 없이 자라고
개망초꽃을 헤치며 멀리 마을을 돌아보고
막대기를 휘저으며 휘파람을 불며
온다 온다 다리도 없이
싸늘하고 찐득찐득한 목덜미로
검은 머리들도 소리도 사라지고
멈추면 안 돼, 걸어만 가
눈 뜨지 말고
잠 속으로 잠 속으로
길은 있을 거야
혼혼몽몽
어머니가 그러시네
자궁 물을 다 마셔버린 아기도 남아 죽어버린 아기도 모두
내 잃어버릴 어머니시라네
그리고 깨어났어요
여자아이였어요
제법 큰 아이였는데 단벌머리를 하고 있었어요
눈썹이 없고 입이 없고 눈이 얼마나 컸는지요
아이는 오래 기다렸어요
뒤를 돌아보면서
따라올 그 무엇이 아직 오지 않아서인지
뭐라도 따라오라는 것인지
마지막 장면에서 일렬로 선 물고기들이 보였어요
종류가 같았는지 달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물고기들은 아이와 같이 일시 정지 상태였어요
그러다 움찔!
물이 없었어요 물론 물고기나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호흡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요 무엇보다 그 장면은 따뜻했어요
그렇게 느낄 즈음에 아이가 남은 한 발을 땅에 올려놓았어요
어떤 안도와 함께
죽어버릴 아이를 꿈꾸기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기분 나쁜 건 아니었어요
버지씨를 그냥 뱉지 마세요
버찌, 퉤!
크게 멀리 한 번
버찌, 퉤퉤
버찌, 퉤 퉤 퉤
버찌, 퉤 퉤퉤
버찌, 퉤퉤 퉤퉤
버찌, 후
버찌, 후후
버찌, 후후 훅!
버찌, 푸
버찌, 푸푸
버찌, 푸푸 푸푸
버찌, 푸푸 퉤
버찌, 푸퉤, 푸풰
버찌, 푸퉤 푸퉤 푸퉤 푸
버찌, 푸푸퉤퉤 푸푸퉤퉤
버찌, 푸푸퉤퉤푸푸퉤퉤푸푸퉤퉤 푸
버찌 버찌 버찌 퉤
버찌 버찌 버찌 퉤투
배고플 때까지!
11월의 비
우리는 얼어갑니다
언제 따뜻한 적이 있었나요
잠시라도 멈춘 적이 있었나요
우리의 질문은 막힌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대안은 노래였는데 오래전 잃어버렸습니다
함께할수록 외로워지지만
나무를 생각하는 새
눈을 기다리는 소년의 하품
11월에 내리는 비의 얼굴입니다
한곳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억새, 풀벌레, 텃새, 고추잠자리, 나비, 애벌레, 청둥오리, 저수지, 불투명 비닐 천막 속의 의자들, 부러진 옷걸이, 동강 난 삽, 널브러진 밥그릇들, 찌그러진 양은 냄비, 찢어진 비닐의 먼지, 나이 든 여자의 빛바랜 꽃무늬 치마,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유난히 작은 귀, 짧은 인중, 자주 립스틱, 노 없이 떠있는 배, 출렁이는 저수지, 먼 곳의 새들, 저수지로 내려앉는 해
해 지기 전에 도착했으니 손을 잡아도 될까요
꽃은 피면서 죽는다
여기 멈춰보시오
저리도 푸지게 피어나는 것을
어찌 다 못 보고 떠날 것이냐
늙으나 젊으나
떠난 사람만 불쌍하네
꽃은 늘 건너편에 있다지요
입술이 파래지고 눈이 감기니
분명코 곧 사라질 것이니
꽃이 꽃을 탐내서 저리도 환하다지요
봄볕에 좀 타면 어떠냐
저 꽃잎은 다 진다 해도 내년에 또 필 것이니
바람은 봄에 부는 바람이라면서요
꽃이 흐드러지게 저리도 풍성한 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바람을 기다려서라지
바람이 와서 흩어놓아야 달빛은 더 요상해지는 거라지
바람이 꽃에 흔들릴 때
아이의 주먹을 개가 핥고 있어요
꽃들이 바람을 먹고
개들이 바람에 부풀어 오른다
구르는 꽃들
꽃을 따 먹는 개들의 입술
개의 어금니에 앉은 꽃들
꽃이 꽃을 본다
꽃이라도 꽃을 다 알진 못해요
개를 꽃이라고도
바람을 꽃이라고도 해
꽃 속에 바람 속에 개 속에 아이 속에
바람이 살아
꽃망울 눈망울
먼저 있던 왕벚나무는 몇 살인지 몰라요 여러 나무들 사이로 자라는 풀들의 이름도 다 못 불렀는데요 왕벚나무는 뻣뻣하게 잎만 무성해 가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치지만 사건을 모르죠 누군가 그 자리에 몸을 놓고 안녕을 숨죽여 빌었다는 것을요 시간은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로 흘러들어요 도무지 살아날 것 같지 않은 나무에 꽃망울이 생기고 자잘한 꽃잎들이 환해서 어떤 사실도 떠올리지 못하겠지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지금의 당신 이전의 일들을요 비가 내리고 바람이 어지러운 날 꼭 왕벚나무만 환한 이유를 조금만 생각할 수 있다면요 앵무새 꼬오는 태어난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왕벚나무 아래 심어졌지요
아이의 시간
빛을 업고
춤을 추는 잎들
바위에 흘러내리는데
아이는 그것을 잡으려 하고
아이야, 거긴 벼랑이야
바람이 등을 끌어내리고
새들이 머리를 쪼아댔지
아이야, 아이야
아이는 위험을 모르고
아이를 나에게 올려줄 수 없겠니
햇살이 검은 나무 한 그루를 주었어
이제 더 이상 벼랑은 없을 거야
아이는 때도 모르고
여태 춤을 추고 있어
흙산 엘레지
이봐, 이봐, 너!
이걸 정말 할 수 있어
뱀을 목에 걸고 무덤에 올라 춤을 출 수 있어
목을 하늘로 쳐들고 어둑새벽까지 달을 노래할 수 있어
여기 아이들을 손가락에 끼울 수 있어
욕을 아름답게 먹을 수 있어
상수리나무 꼭대기에 올라 별이 될 수 있어
배고플 때 휘파람을 분해할 수 있어
못써, 땅강아지
날개는 절대 떼지 말
흙 묻은 손을 오십 번 빨아 먹은 후에
하늘에 침을 백 번 뱉은 후에
알락꼬리여우원숭이처럼 걸어 다니며
미안해 사랑해 천 번 외쳐
아차, 뱀
아이들이 산으로 다시 뛰어
산은둥글어둥근것은따뜻해따뜻하면엄마
아니 다시
산은둥글어둥근것은호떡호떡은맛있어맛있으면엄마
아니 다시
산은둥글어둥근것은수박수박은빨개빨가면핏물핏물은무서워무서우면엄마
아니 다시
산은어두워어두우면까매까마면무서워무서우면달려달리면아파아프면엄마
땅강아지 날개를 잘 묻어줘
무덤엔 이름을 쓴 막대기를 높이 꽂아
소년은 산 꿈을 꾸고 꿈은 소년을 죽이고
앗, 저 허물
검은 개는 빛나고
검은 개들이 분명한가
엉덩이에 꽃을 꽂고 꼬리를 노래하고 오줌을 누지 않는
붉은 눈동자 초록 눈동자 반반
길목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비켜주지 않는
털로 생각을 위장할 수 있을까
꼬리가 미래를 계획할 수 있을까
아침 이슬에 입술을 바치는 걸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나의 이름은
나무에 매달려 기도하면 들어줄지도 몰라
검은 개들은 화려를 상상한다
화려하면 꽃
꽃은 바치기 위해 피는 거지
꽃은 침을 뱉기 위해 지는 거지
기도할 것이 너무 많아 나무를 잘라버리는 검은 개들이여
일제히 침을 뱉고
일동 쉬잇!
저지대
저 구름은 어디서 온 시간일까
바깥을 살피는 안의 상황은 비교적 느려
태연한 우리들의 높이
지나온 시간은 끄집어낼수록 빛을 잃어
어서 기도를
어서 눈물을
어서 노래를
어서 무엇이라도
우리의 장소는 언제나 축축하고!
누가 먼저 춤을 추었나
우리는 부서지기 위해 껴안고
누가 초대했을까
흘러가는 저 음표의 행방을
지금은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무례라고 말하지 못하네
그들의 춤에서 빠져나와 다시 춤을 추네
아직 멈추지 않은 흐름에 우린 더 격렬한 춤을 추네
죽음을 알고 추는 우리
결속의 여러 날을 보내고
끝내고 싶지 않은 지금을 몰락시키면서
끝은 보고 싶어 하는구나, 누구나
규정할 수 없는 저 눈동자들
침묵하는 입
저들은
모르고 리듬을 만들고
어머니는 어디서 날아가나
아가, 바람을 잡을 수는 없는 거란다
꼭 새를 잡아주셔야 해요
새는 많은 것들의 기도
기도는 모두 어머니
새들이 날아오르는 일을 스치지 마라
당신의 카니발
그렇게 춤을 잘 추는 줄 몰랐습니다
악인의 등은 또 언제 만져보셨습니까
최근의 소식은 늘 이렇습니다
매일매일 어떻게 파티에 있을 수 있나요
손을 잡을 수 없게 하면서 두고 가진 말라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매일 밤 치아와 구두들은 빛납니다
늪에서 올린 것들은 어둠의 빛살이 엷어도 층층의 옷들을 알 수 있다면서요
어서 그 진흙의 맛 좀 봅시다
모두가 아는 환대의 장소는 어딥니까
깃발
헐렁한 버스에서 깃발이 나부낀다
사람들의 귀가 커지면서 웃음소리가 커졌다
그들은 계속 깃발을 만지러 왔다
질문하지 않으면 나부낄 수 없어요
버스는 누구도 태우지 않았지만 누구도 내리지 않았다
갑자기 버스가 멈추었다
손에 잿더미가 수북했다
집이란 무엇인가
율리시스
뒤돌아보면 온기만 남아있어
눈은 이방인의 침묵
황폐하다는 말보다 너의 행색을 좀 봐
내장이 풀려 버린
길에서
집 밖을 나와 집을 찾아
애써 나왔다 찾아 들어가 구석진 소파에 눌러앉지
꼿꼿한 것은 치켜든 율리시스의 꼬리가 아니지
시대의 장르가 네게 장착되어진 거라곤 너의 젖은 양말 후줄그레한 타인의 말들
빌린 돈들 내다 버린 상자들 속 그것들의 주소
당신을 치워버리기 전에 치워요
그것도 노래라고
그것도 시라고
구석을 찾아
어둠을 찾아
이봐요, 가장 어두운 곳이 어딘 줄 알아요?
우린 둘이었는데 하나였는데 하나이고 보니 우린 둘이어야 해요 하나여야 해요
헤이 헤이헤이, 내장을 감아야 해요, 슬슬
해마다 착하지 않으려고
앵무새 이름을 번갈아 부를 때
강아지의 털을 바람으로 만질 때
여우 고양이의 얼굴만 기억하려 할 때
메리골드의 꽃을 따버릴 때
잎이 무엇을 하기도 전에 꽃을 피워 버린 루꼴리를 자를 때
모르는 짐승의 말을 알아들었을 때
갑작스런 사이렌 속에서 고요를 보았을 때
작년보다 언제나 견딜 만하다고 입 밖으로 내비쳤을 때
노력하고 있어요
로또가 당첨되면 월요일엔 신당동 떢볶이를 먹으러 갈 거야
우리 함께 묻어보자
수북한 동전과 몇 장의 지폐
얼마나 기다리면 싹이 날까
우리의 기다림이 진실할 때
주렁주렁 뭐라도 달리면 우린 웃을 수 있을까
엄마는 더 이상 찾지 않을 거야
사람이 사람을 낳지 않은 지 오래되었잖아
그래도 춤은 출 거야
공룡을 타고 뒷걸음질 치는 내가 보이네
영화에서
동화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 뭐가 있을까
나만 쏘옥 빼놓고
건너편에서 푸른 눈이 계속 내리는 거
돼지를 데려와 예쁘고 날씬한 한 마리로
볼 때마다 횡단보도에 서있는
친구는 말합니다
.♣.
=================
■ 시인의 말
매일 북쪽 창문을 열면
어린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등 뒤 거실과 안방 베란다에서도 일제히
롤랑_발터_알들_꼬나_크림_벨라_꼬두_민트_테오_꼬네_초검
베드로와 함께 우린 곧 최소 열두 명 이상의 대가족입니다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로또가 되지 않는다 해도
조롱산 자락 북쪽 작업실에서
2019년 10월 안개 자욱한 날 아침
.♣.
=============== == = == ===============
김명신詩集 [※남아있는 이들은 모두 소녀인가요※]
[ 발문 ] -
이방異邦 소녀, 마홍의 시간에 기대어
마 홍
0
3년 전 소형 앵무새 두 마리를 집에 들였다. 혹시 함께 살 생명을 선택한다면 단연코 새였다. 물론 그냥 로쟈와 발터가 온 것은 아니었다. 길어질 이야기는 생략. 지금도 베란다 건조대에서 노래하며 놀고 있는 소형 앵무새 동생 조카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소녀 마홍의 입술은 시작한다.
로쟈- 발터- 롤랑- 꼬나- 꼬두- 꼬세 꼬네- 꼬오- 초검- 민트- 크림. 이 밖에 이름을 갖지 못한 꼬나꼬세의 네 아이들아, 안녕
1. 꼬꼬잠년에게
아직 눈은 쌓여 있고 볕이 드는 흙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여자아이 둘. 실눈을 뜨고 아무 할 일 없이 콧물을 닦아내며 나뭇가지로 뭔가를 그리고 있을 때 노랫소리가 들이닥친다. 제법 긴 그림자들, 동네 아이는 다 모인 것 같다. 특별히 겁을 주는 것은 아닌데 집단으로 부르는 노래에서 들려오는 “꼬꼬잠년”. 노래가 끝날 때까지 딱 붙은 채로 눈물 콧물이 흙에 섞이고 등이 차가워질 때까지 옴짝달싹 못 한다.
이젠 아무 데도 못 가
대신 이렇게 한 번씩 휘파람을 불어야지
-「말할 수 없는 소녀」 부분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침묵. 그들이 등을 돌릴 때 반사적으로 집으로 뛰어 들어가 안도의 숨을 쉬었던, 이후 어떻게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오이 서리를 하고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동네를 싸돌아다녔는지는 모른다.
그해 여름은 그해 여름
실언들은 자라고
저 닫히지 못하는 입들
-「8월」 부분
도시에서 굳이 시골까지 와 바느질을 가르치는 김 선생 큰딸에 대한 소문은 참말 거짓말도 없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것이고 엄격한 외할머니는 속 시린 말을 계속했을 것이다. 일종의 친정 더부살이라 그 누구도 고개를 들 수 없는 때였다.
지난여름 사공을 먹어치운이 강은 절대 또 건너지 말아야지 했지만 우린 살기 위해 어둔 강물에 흘러야 했어요 아슬아슬하죠 이 강물에 닿으면
-「도강」 부분
엄마는 저녁이 되어서야 마을 입구에 들어섰고 집으로 가기 위한 저수지를 지날 때면 밤이 되었다. 어떨 땐 노도 없는 강을 건넌 것도 같은데, 희끄무레한 달빛도 본 듯하고 출렁거리는 강물도 본 듯하고.
우리의 대안은 노래였는데 오래전 잃어버렸습니다
-「11월의 비」 부분
저수지를 통과하며 불렀던 노래는 밤을 잠재우는 노래였지 등에 업히고 한 손에 잡힌 두 아이의 것은 아니었다. 밤에 잠에 먹히지 않기 위한 엄마의 무기였다.
“뱀 같아, 어디, 바람이야, 어디, 발목으로 기어오르고 있어…(중략)…이렇게 투명한 뱀”(「차력사와 십이지장충」)처럼 지금까지 맴돌고 있다.
2. 물 없이 죽어간 아이에게
“해 지기 전에 도착했으니 손을 잡아도 될까요”(「한 곳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라고 묻고 싶었다. 그저 손을 잡아주면 손끝이라도 닿으면 돌아와 가슴에 안길 줄 알았다.
마흔이 훨씬 넘어 결혼을 하고 아이는 저절로 생길 거라는 막연함으로 보냈던 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류’가 와주길 바랐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의학의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은 없었던 차에 꿈으로 왔다 떠났다
‘류’는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었는데, 이미 강물 저 끝에 있었고, 일어서기 전 뒤를 돌아보며 웃는데,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일렬로 ‘류’를 향하고 있었다.
“꽃은 늘 건너편에 있다지요” “꽃이 꽃을 탐내서 저리도 환하다지요”(「꽃은 피면서 죽는다」).
사실 아이를 탐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이라면 무조건 예뻐했는데,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한 연민은 늘 많았었는데 이젠 정말 기다리지 말라는 듯 ‘류’는 살포시 웃어주고는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류’가 헤엄쳐 가던 강엔 물이 없었다. 그 꿈을 꾸고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너무나도 또렷한 꿈은 지금도 떠오르고 그때마다 ‘류’의 웃는 얼굴과 강 맨 끝에 올라선 장면이 남실거린다.
‘류’를 잃지 않기 위해 바친다.
감기지 않는 꽃의 눈꺼풀을 먹어버리자
내 말의 눈망울
첫눈은 하얗지
신은 첫눈을 거둬 가
끓는 차 한 잔에 잠을 자고 싶어
추워, 따뜻해, 추워, 따뜻해
묻지 말고 계속 말해 보면 좀 따뜻해져
한 번 지핀 불꽃만큼씩
꽃잎이 얼어가
우린 모두 간절한 생을 살아
마음을 아주 놓고 싶다면 그건 잠의 세상이지
-「나비잠」 전문
‘류’는 물 없이 죽어간 아이 이름. 미리 지어 불러서 오다 가버렸을까.
3. 어머니에게
철문이 갑자기 닫혔다
스치는 것들은 모두 가루로 흩날렸다
…(중략)…
이대로 허물어지기가 쉽지 않을 때 당신은 살을 벗고 벗기고
-「자비에 돌란-에르베 기베르-베르나르 포콩」 부분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십 년이 된 올해까지 단 한 번도 찾지 않으셨다. 철문을 닫고 다시는 열지 않겠다는 것처럼. 한시도 아버지를 언급하지 않은 적 없으신데도, 배우자를 잃고 방치(?)되어서일까. 지금도 생전의 검은 구두가 반듯하게 놓여 있다. 검은 가죽이 삭아 신을 수 없다 해도 부재의 살을 벗겨 내기 싫으신 것인지 매일 닦고 또 닦다가 어느 때는 잊기도 하고.
나는 무릎을 자주 꿇었어요
당신은 늘 길게 내려다보았고요
…(중략)…
당신 같은 눈빛을 갖고 싶었어요
그사이 당신의 눈은 닫혀 버렸지만
-「눈빛」 부분
어느 날인가 어머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독한 말과 함께 손가락을 여기저기 쑤셔대면서 밀쳐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소녀는 그 단호한 눈빛을 도려내 멀리 던져버린다. 버려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 눈빛. 강한 척하는 약자가 보다 더 약한 자를 향해 쏟아내는 말들은 치사량의 독극물 같았다. 물론 이것은 환영일 수도 있다.
아침 이슬에 입술을 바치는 걸 기도하고 할 수 있을까
-「검은 개는 빛나고」 부분
아직 다 울지 못하는 어머니의 눈
-「12월 31일」 부분
엄마, 안 따라갈 거야, 안 따라갈 거냐고!
…(중략)…
우리는 매일 집으로 들어가면서 울지만
-「그러니 라디오를 켜볼까요」 부분
어머니는 늘 기도한다. 기도와 어머니는 동의어.
초대받지 않은 곳에 나타나 구원을 향해 삶을 벗어놓고 “규정할 수 없는 저 눈동자들/침묵하는 입”(「누가 먼저 춤을 추었나」)을 향해 “어서 무엇이라도”(「저지대」) 이뤄지라고 행동한다. 그러니 “우리의 장소는 언제나 축축하고!”(「저지대」), “무기의 방향성은 분명치 않아도 생활은 분명”(「우린 언제 닥칠지」)하다.
우린 지금도 짐승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여전히 머리맡에 무기를 두고 잠이 들지
-「우린 언제 닥칠지」 부분
어머니를 날려 보내기 위해 이 시를 소리 내어 읊자!
아가, 바람을 잡을 수 없는 거란다
꼭 새를 잡아주셔야 해요
새는 많은 것들의 기도
기도는 모두 어머니
새들이 날아오르는 일을 스치지 마라
-「어머니는 어디서 날아가나」 전문
4. 그러려니와 기타 등등에게
모두가 아는 환대의 장소는 어딥니까
-「당신의 카니발」 부분
당신 스스로 ‘코끼리’라고 생각하자. 당신은 작정하고 원시림을 향한 눈빛을 투사한다. 눈을 감는다. 콧구멍을 최대치로 늘인다. 이것을 반복한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까지.
“볼 때마다 횡단보도에 서있는”(「코끼리」) 생명들은 로또를 사지 않으면서 당첨을 꿈꾼다.
“우리만 살고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이런 생이 계속되어도”(「젤레피쉬 위의 거북이」) 좋을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코끼리의 살결 같아서 굽이굽이 다른 장면들이 기다리고 있다.
“질문하지 않으면 나부낄 수 없어요”(「깃발」)
세상에 나부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요. 그러니 매 순간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려니와 기타 등등님. “손에 잿더미가 수북”(「깃발」)할 때가 오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알맹이만 사라진다는 것”(「아름다운 곳이라 들었습니다」)이 안타까워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그세요 아니라면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릴……”(「귀향」)수 있기 위해 빗장을 풀어놓습니다. “슈베르트 교향곡 8번”을 켜놓고 찻물을 올리고 커피콩을 갈고 “새로운 프라이팬”에 못난이 쿠키를 굽습니다. 아울러 “봄에 죽은 앵무새”(「아내 없는 저녁에 라디오를 켜요」)로쟈, 꼬오, 꼬나꼬세의 아기 셋을 위해 화살기도도 하고 베란다 건조대에서 놀고 있는 발터, 꼬나, 꼬두, 꼬네, 초검이와 알을 품고 있는 롤랑, 민트, 크림이를 나지막하게 불러보는 겁니다.
생은 “노력하고 있어요”(「해마다 착하지 않으려고」)가 아닌 살아가는 그 자체가 아닐까요.
“우린 언제고 끝장날 거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우연의 장소를 공유하는 사이 서로가 할 수 있는 건」)라고 말합니다.
‘개새끼’를 ‘개, 새, 끼’‘개새,끼’ ‘개새끼’로 써보았다
얼굴들이 스쳤다
불이 꺼지기 직전 얼굴 하나가 크게 들어왔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 부분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험한 말 하나를 적어봅니다.
엄마는 더 이상 찾지 않을 거야
사람이 사람을 낳지 않은 지 오래되었잖아
-「로또가 당첨되면 월요일엔 신당동 떡볶이를 먹으러 갈 거야」 부분
그리고 이런 말은 어떤 질문을 받을까요.
제 경우는 이렇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소설의 첫 문장으로」)
0
시란 무엇인가. 이 무용한 일을 왜 하는 것인가. 시는 정말 시대의 구원이 될까. 꼭 구해야 하는 걸까. 이 얼토당토 않은 말은 아주 오래된 물음이면서 계속될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이 시 하기는 마홍이 하는 그림 하기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옷을 갈아입었을 뿐, 이들은 어떤 것들의 드러냄이다. 드러냈을 때 저편의 양상은 저편의 일이 되었으면 한다. 그것은 아무도 모를 곳의 사마귀의 행보일 수도 있고, 지구의 위태로움을 감지한 외계인들이 도모할 계획일 수도 있겠다.
시집을 낼 때마다 촛불을 드는 정국이다.
두 번째 시집 여기 어디에서 시인도 깃발을 들고 촛불을 켜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지구 별 여행자로 함께 통과 중이다.
여기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이 더 많이 웃을 수 있길!.★.
.♣.
=================
◆ 표4의 글 ◆
남아있는, 혹은 남겨진 소녀들은 저마다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이 노래가 되어 날아가는 사이 한때 ‘무엇’이었던 한 소녀의 가슴속엔 ‘무엇’의 고향이 뭉클하게 피어나고, 한 소녀의 눈앞에는 “지난여름 사공을 먹어치운” 검은 강이 펼쳐진다. 어느 외딴 나무를 덮친 칡덩굴처럼 실언들이 무성히 자라는 여름. 꽃은, 그리고 꿈은 늘 저 ‘건너’에 있었고. 한 소녀는 늘 “당신 같은 눈빛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지. 꿈속에서마저 피 맺힌 채 얼어버린 꿈들에 이어, 깨어나면 범람하는 가혹한 현실들. ‘건너’는 감히 꿈꾸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날들. 그러는 사이 어둠이 내리고 그만 ‘당신’의 눈은 깜깜히 닫혀 버리고 말았다. 환한 눈빛이 열어놓은 “환대의 장소”는 어디쯤일까. 부디 저 강 너머, 그 너머의 너머로 이 노래가 스미기를. 소녀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를 날려 보낸다. 그러므로 “새는 많은 것들의 기도”다. 이 시집은 ‘건너’를 열망하며 날아가는 희멀건 노래이자, 기도이자, 눈물이자, 마지막 꿈이다.
― 이근일. 시인
.♣.
=================
▶ 김명신 시인∥
∙ 전남 곡성 출생.
∙ 2009년 계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 시집 『고양이 타르코프스키』 출간.
.♣.
================= =================
[책 소개]
김명신 시인의 시집『남아있는 이들은 모두 소녀인가요』가 시작시인선 310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전남 곡성 출생으로 2009년 계간『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집으로『고양이 타르코프스키』가 있다.
시집 『남아있는 이들은 모두 소녀인가요』는 소녀의 발걸음처럼 명랑하고 경쾌한 리듬감을 지니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삶의 비애悲哀로 가득 차있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어른이 되기를 꿈꾸고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아이로 돌아가기를 꿈꾸듯이, 이 시집의 화자는 소녀일 수도, 소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시집에는 여러 목소리들이 혼재해 있다. 가령 아이가 어른을 호명하거나 어른이 아이를 호명하는 것인데, 이는 시집 안에서 서로 교차하고 스며들어 읽는 이로 하여금 낯선 감각을 환기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소녀가 펼쳐놓는 기억의 편린들이다. 소녀가 펼쳐놓는 기억의 풍경은 대부분 어둡고 스산한 기운이 감돌지만, 이면에는 더 나은 세상을 염원하는 희망의 목소리가 그 옛날 소녀가 부는 휘파람처럼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집에 등장하는 소녀들의 비애는 어른이 된 ‘나’가 기억 속의 ‘소녀’를 호출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을 수도, ‘나’가 어머니 혹은 어른으로 대변되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생겨난 감정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우리가 김명신의 시를 통해 감지할 수 있는 비애의 감정은 정서적 감응을 넘어 더 나은 세계로의 비상을 꿈꾸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가혹한 현실을 노래하는 소녀의 입술에는 때로 피가 고여있고 흙냄새가 진동하지만 그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꾸밈이나 과장이 없어 믿음이 간다. 표4를 쓴 이근일 시인의 말처럼 이번 시집은 지금 여기의 현실 너머를 열망하며 날아가는 “희멀건 노래이자, 기도이자, 눈물이자, 마지막 꿈”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 =================
*음악: 달빛자락 / 명상음악
*출처: 이동활의 음악정원(http://cafe.daum.net/musicgarden/5r73/4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