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857]단기지계(斷機之戒)
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故事成語)
단기지계(斷機之戒)
‘맹자(孟子)’의 유학 시절
중도(中途)에 돌아왔지
그러자 홀어머니
짜던 베를 잘랐다네
‘맹자’는
충격 크게 받고
공부 다시 열중했지
<語義> : 베틀의 베를 끊는 훈계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훈계)
<出典> : 烈女傳(열녀전, 한나라 유향이 지은 여성 전기집 · 교육서) 母儀(모의)
<原文> 孟子之少也(맹자지소야) 旣學而歸(기학이귀)
孟母(맹모) 方績(방적) 問曰(문왈) 學何所至與(학하지소여).
孟子曰(맹자왈) 自若(자약) 孟母(맹모) 以刀斷其織(이도단기직)
孟子(맹자) 懼而問其故(구이문기고)
孟母曰(맹모왈) 子之廢學(자지폐학) 若吾斷斯織也(약오단사직야)
孟子懼(맹자구) 旦夕勤學不息(조석근학불식)
師事子思(사사자사) 遂成天下之名儒(수성천하지명유).
君子謂(군자위) 孟母知人母之道矣(맹모지인모지도의)
孟子(맹자)가 유명한 학자가 되기까지는
어머니의 정성과 노력이 대단하였다.
맹자가 자라서 遊學(유학)을 갔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네 학문은 어느 정도 나아졌느냐?” 하니,
“전보다 별 진전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어머니가 짜고 있던 베를 다 끊어버렸다.
맹자가 놀라서,
“그 베는 왜 끊어버리십니까?”하니, 어머니가
“네가 학문을 중단하는 것은,
내가 이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맹자는 어머니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그 길로 집을 떠나 子思(자사)를 스승으로 섬기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학문에 힘써
마침내 천하의 이름난 聖人(성인)이 될 수 있었다.
군자가 이르기를,
“맹자의 어머니는 사람의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 孟子(맹자, 인명. B.C.372 ~ B.C.289) :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
鄒(추)나라 출생. 공자가 죽은 지 100년쯤 뒤에 태어났다.
본명은 軻(가). 자는 子輿(자여).
공자의 仁(인) 사상을 발전시켜 性善說(성선설)을 주장하였으며,
仁義(인의)의 정치를 권하였다.
유학의 정통으로 숭앙되며, 亞聖(아성)이라 불린다.
춘추시대 노환공의 후예였지만, 추나라로 이주한 맹자의 가문은
이미 몰락한 시기였다. 어머니 仉(장)씨는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로
유명한 현모로서, 맹자는 어머니에게도 큰 감화를 받으며 학교의 수업을 마친 뒤,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인 子思(자사)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자사의 계통은 공자의 경우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天(천)’의 신앙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당대에 墨翟(묵적, 송나라 철학자. 묵자)과
楊朱(양주, 위나라 사상가)의 사상과 경쟁하며 유가사상을 확립했다.
40세 이후에 仁政(인정)과 왕도정치를 주창하며 천하를 遊歷(유력)했다.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은퇴했다.
60세 이후의 삶은 알려진 바가 없다.
※ 子思(자사, B.C.483 ~ B.C.402) : 공자의 손자이자,
孔鯉(공리 : 공자의 아들)의 외아들이다.
본명은 孔伋(공급), 中庸(중용)을 편찬한 사상가.
학자 曾子(증자)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유학의 전통 학맥을 이었으며,
賢人(현인)이라고 일컬어지며 존경받았다.
3세에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 양육되었으나,
할아버지 공자 역시 기원전 479년에 사망하였다.
공리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고, 출처한 전처 외에 후처에게서 자사를 보았으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예기의 단궁편에 庶氏(서씨)의 어머니라고 언급되어,
서씨 집안으로 재혼하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있었던 것 정도만이 확인된다.
장성한 뒤에는 공자의 애제자 중 생존자였던 曾子(증자)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고 학맥을 계승하였다.
이로부터 孔子(공자)-曾子(증자)-子思(자사)-孟子(맹자)로 이어지는
유교의 정통 학파가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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