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복음: 루카 4,24-30
혹시 우리도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즉 선민의식으로 어깨에 힘 좀 주던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눈엣가시처럼 날카롭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즉시 유다인들에게 폭풍 분노를 유발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사상에 젖어 으스대는 유다인들에게 삼십 육개월이나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도 과부가 많았지만,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에게만 파견되어 도움을 준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엘리사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는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진 사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에 힘을 빼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나는 선택받은 그리스도인, 나는 선별된 사제, 특별한 불림 받은 수도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날선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밀치고 밀쳐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마침내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군중은 작정하고 예수님을 추락사시키려고 합세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이고,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러온 메시아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분을 살상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자렛 사람들의 악행은 정말이지 너무한 처사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처신을 보십시오.
저 같았으면, 즉시 분노로 이글거리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능력과 힘을 발휘해서 그 고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십니다.
하고 싶은 말씀은 속 시원하게 하신 다음,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벌써 떠나면 공생활과 인류 구원 사업에 큰 자질이 발생하니, 그들을 뒤로 하고 홀연히 길을 떠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어떤 분 보면 마음 속에 이는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한달 두달, 일년 이년, 그리고는 어느 순간 화산 폭발하듯 대폭발시킵니다.
순식간에 관계는 끝장나고, 서로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마음속에 이는 분노를 너무 오래 쌓아두지 말아야겠습니다.
적정한 순간 적절한 언어로, 편안한 음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내공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틈만 나면 대폭발을 시키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 하나도 없습니다.
적정한 순간에 균형 잡히고 성숙한 표현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가운데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아직도 성경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요즘 흥행하는 영화 ‘파묘’(2024)에서 많은 가축과 사람들이 죽어가자 정부는 곰의 소행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결국 귀여운 곰 한 마리를 발견하여 살릴까, 죽일까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무당과 풍수사, 장의사가 합세한 주인공 팀은 그 원인이 관에서 나온 ‘험한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진짜 적과 싸웁니다.
현상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석이 나옵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지식대로 판단합니다. 한 가지 현상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각자가 가진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음을 키워주는 무엇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것을 해석하여 믿음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는 어리석습니다. 개신교에서 아무리 성경 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틀렸습니다. 현상을 파악하는 능력은 전문가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2베드 1,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리고 대놓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믿음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십니다. 엘리야 때 하느님께서 기근을 주셨는데 예언자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사렙타 과부에게만 보내신 것, 또 이스라엘에도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이방인인 나아만만 치유해 주신 내용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의 권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꽃 편지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랑을 고백한 대상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성경을 통해 구원의 믿음에 이른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분노를 터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해 이뤄지는데 성경은 그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 만을 설명하지, 그 믿음에 도달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 묵상을 하면 자기 생각 안에서 맴돌고 성경 공부를 하면 그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을 성경을 통해 전달 받을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2티모3,15)
성경은 믿음을 주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을 가장 완전히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지 성경을 파고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각자의 믿음대로 해석되기 때문에 성경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기 가장 쉽습니다. 성경을 맹신하다가 성경을 이용해 자기 사상을 주입하는 이들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쓰였기에 성령님만이 참된 해석자이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장 완전한 성경 해석자입니다. 성령 강림은 각자에게 내린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내렸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도 계셨고 베드로도, 열두 사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개별적 해석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히고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성령으로 해석한 성경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 3,16)
성경은 무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스텔스 전투기처럼 우리 힘 만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입니다. 그러니 그 전투기를 잘 조종할 수 있는 이들에게 배워야 하는데 미국은 그 능력을 몇몇에만 부여하였습니다. 스텔스기를 만든 기술자들이 그 운행 능력을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자기 조국을 위해 맡깁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성령을 맡기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라 불린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는 성경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닌 교회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배운 교리를 가르치는 도구입니다. 그러니 개신교처럼 성경을 절대화하여 각자가 자신이 옳은 해석을 한다고 하며 수백 개 종파로 갈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자렛은 성경은 가졌지만, 결국 예수님은 배척하였습니다. 성경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면서 성체성사나 고해성사를 배척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춥시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
하늘이 알고
땅도 알지만
사람은
모릅니다.
일생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는
선입견입니다.
선입견은
환영을 받지
못하는
예수님과
예언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편견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
현실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부끄러운
믿음은
편견을
내려놓기가
힘이 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고
판단합니다.
선입견을
비워내는
자기성찰이
참으로
부족합니다.
교만에 취해있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편견이 빠져나가는
복음화의 과정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편견을
뒤엎는 사랑입니다.
못 자국으로
우리의 편견을
들여다봅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구원은
서로를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이유가
사랑의 기쁨이듯
우리 만남의
이유가
서로를 향한
선물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그 어떤 사람도
결정되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정된
그 생각을
뒤엎듯이
사람을 회개로
바꾸어 놓습니다.
환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입니다.
환영받지
못해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이들이 있기에
복음은 단절이
아닌 이어지는
연속이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사순이며
사순의 복음입니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등급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수능 시험 등급이고, 또 하나는 내신 등급입니다. 그런데 엄마들이 보는 자식의 등급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1등급: 공부를 잘한다.
2등급: 공부는 못하지만, 성격이 좋다.
3등급: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나쁘지만, 건강하다.
4등급: 지 아빠 닮았다.
공부 잘하는 것이 1등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아이를 위한 엄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뭐라 하기도 뭐합니다. 하지만 성적을 위해 학원 열심히 다니고, 각종 스펙을 쌓느라고, 성격도, 건강도, 또 가족 간의 사랑도 잃는다면 성적과 스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습니다. 즉,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과는 다른 하느님 나라에 가는 기준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던 고향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 더 화가 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자기들만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은총이 넘어감을 이야기했다고 화가 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얼굴만 닮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야 진정으로 닮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은총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갑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걷어찼습니다. 겸손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기도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 버리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다른 면’을 직접적으로 찾는 것입니다(토마스 머튼).
6)이병우 루카 신부님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루카4,28)
오늘 복음(루카4,24-30)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과 '참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은 '나자렛에서의 희년 선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에 대한 말씀과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언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과 유다인들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모두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이십니다. 그것도 모든 예언자들 중에 으뜸이신 참예언자이십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참예언자이신 예수님께 맡겨진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어 속죄 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의 큰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이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고, 그로 인해 모두를 위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의 으뜸이며,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으뜸입니다.
'사순시기가 거룩하고 은혜로운 때이며, 구원의 날인 이유'는 이 으뜸 교리와 감사를 다시금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새기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하느님과 너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이 나의 구원의 결정적 장애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모두의 구원에 결정적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장애물들을 치워내는 사순시기, 그래서 부활을 잘 준비하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정숙(사비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7)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열왕5,15ㄷ)
시돈 지방의 사렙타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알고 있었네.
주 하느님만이
세상에서 단 한분뿐인
신이심을.
그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수도 없이
세상에 파견하셨지만
믿지 않는 이들의
지식과 지혜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고향에서는
더더욱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네.
복음 말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