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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8일 오후,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김아무개씨(19)의 소지품. 컵라면과 나무젓가락, 작업 공구 등이 들어있다. | |
ⓒ 유가족 제공 |
19살 청년이 남긴 유품입니다.
컵라면과 숟가락을 보니 또다시 눈물이 납니다. 올 2월 졸업해 취업 7개월 차였다던 19살 앳된 청년의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을'의 인생은 이렇게 허망하게 스러져도 되는 사회인 것일까요?
서울메트로 측은 청년의 과실이 있었다며 청년의 부모님에게 합의하자는 말을 꺼냈다고 하지요. 차마 눈 감지 못했을 푸른 청춘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입니다. 지난 5월 31일, 서울메트로는 뒤늦게 "이번 사고의 원인은 고인의 잘못이 아닌 관리와 시스템의 문제가 주원인"이라며 사과했습니다.
스크린도어 설치와 정비를 맡을 업체를 선정할 때 최저 입찰가의 값싼 외주 용역 업체를 선정하고, 사고 당일 김씨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서울메트로에서 도대체 누구의 과실을 논하겠다는 것인지요.
▲ 구의역 추모의 공간 역사에 마련된 추모공간 | |
ⓒ 이명옥 |
2015년 8월 강남역 사고 이후 서울메트로는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 시 열차 감시자를 동행해 2인1조로 출동하고, 출동 사실을 역무실과 전자운영실로 통보하라는 매뉴얼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30~50건의 고장 신고가 접수됩니다. 고작 6명이 지하철 49개 역을 담당하는 구조에서 2인 1조 출동이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가장 값싼 외주 업체를 사용하면서 관리 감독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서울메트로가 사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고 당시 구의역에 근무하던 역무원은 수리하러 작업자가 왔다는 말만 듣고 현장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고를 받았으면서 사실 확인조차 안 한 것은 명백한 직무 유기 아니던가요? 매뉴얼은 전혀 소용이 없었던 셈입니다. 외주업체를 쓰는 서울메트로의 인명 피해가 잦습니다. 반면 정식 직원을 채용하고 2인 1조 작업 규정을 지키며 보수 공사에 참여한다는 5~8호선은 지난 2012년 이후 스크린도어 수리로 인한 인명 사고가 단 한 건도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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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 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리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세상에, 태양이 저물고 있나 보군."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마치 시간을 가리키는 척하지만, 실은 고장 났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엔 이제 풍선을 가지고 놀 만한 어린애는 없단다."
자,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pp. 55-56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심보선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
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
읽다 만 소설책, 쓰다 만 편지
접다 만 종이학, 싸다 만 선물은 없었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전지전능의 황금열쇠여,
어느 제복의 주머니에 숨어 있건 당장 모습을 나타내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이것 봐. 멀쩡하잖아, 결국 자기 잘못이라니까.”
갈가리 찢긴 소년의 졸업장과 계약서가
도시의 온 건물을 화산재처럼 뒤덮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무렴. 직업엔 귀천이 없지, 없고 말고.”
소년이여, 비좁고 차가운 암흑에서 얼른 빠져나오렴.
너의 손은 문이 닫히기도 전에 홀로 적막했으니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난 그를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다고.”
허튼 약속이 빼앗아 달아났던
너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마, 여기엔 이제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는 소년은 없다네.”
자, 스크린도어를 뒤로하고 어서 달려가렴.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에게로 쌩쌩 달려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2016. 6. 9) 심보선 시인이 현장의 스크린도어에 손글씨로 써서 포스트잇으로 붙인 두 편의 시.
출처 :푸른 시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 강인한
첫댓글 소년이 남기고 간 컵라면과 나무 젓가락 그리고 공구들 뿐인, 자신을 달랠 담배 한 가치 조차 없는 그의 가방 속 물건이 어떤 시보다 더 감동에 감동의 물결로 다가와 우리를 주체 할 수 없도록 만드네요. 조금전 까지 헤헤 웃었는데 자꾸 자꾸 눈물이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