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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묵상글 ( 한가위. - 한가위만 같기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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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한가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가위만 같기를>
나
높푸른 하늘이 되어
고운 벗님들
정성껏 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넉넉한 땅이 되어
고운 벗님들
고이 모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둥그런 보름달이 되어
고운 벗님들
부드럽게 감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소담한 송편이 되어
고운 벗님들
살맛 돋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도란도란 밥상이 되어
고운 벗님들
오붓하게 보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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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한가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35655
05:55. 우선 게시
+++++ < 09:50 게시 > ++++++++++++++++++++++++++++
- 한량없는 은총 안에서
2023.09.29 05:43
설 명절이 한 해의 시작을 함께 기뻐하는 명절이라면
한가위 명절은 한 해의 결실을 함께 기뻐하는 명절입니다.
그러니 한가위 명절은 수확의 기쁨이 있어야 하고,
그 기쁨을 같이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둘 다 없으면 말할 것도 없고 한 가지만 없어도
명절이 전혀 명절이 아니거나 기쁘지 않고 오히려 쓸쓸하고 슬픕니다.
그래서 수확의 기쁨에 대해서 먼저 보려고 하는데
수확이란 씨 뿌리는 것으로부터 가꾸는 것까지 다 포함하는 농사의
그 마지막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농사를 잘 지어야 하고,
무슨 씨를 뿌려야 하며 무슨 씨를 가꿔야겠습니까?
우리는 곡식 농사도 잘 지어야 하고 자식 농사도 잘 지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행복 농사를 잘 지어야겠습니다.
이 말은 행복의 씨를 뿌려야 한다는 말이고,
우리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어야 한다는 말이며,
돈이나 명예가 목적이 아니라 행복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씨를 뿌립니다.
행복이 목적이어야 하는데 돈이 목적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 욕심을 씨 뿌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이 목적이고 그래서 욕심을 씨 뿌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돈 때문에 일의 노예가 되고,
돈 때문에 늘 근심 걱정이고,
돈 때문에 늘 불평불만이고,
돈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기까지 할 것입니다.
반대로 행복이 목적인 사람은 늘 충만합니다.
일에 쫓기지 않고 마음에 여유가 있고,
불평불만 대신에 늘 감사할 것이고,
미움 대신에 사랑이 늘 충만하기에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이 목적인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고통은 불행이라고 애초에 고통에 지고 들어가고,
고통 때문에 미리 불행해지고 마는데
행복이 목적이고 행복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사랑과 행복 단련이고 행복의 결실을 위한 수고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지요.
고통으로 단련되지 않은 행복은 허약한 행복이고,
수고하지 않고 거둘 수 있는 열매 곧 기쁨과 행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으려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고와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권고하지요.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비, 바람, 햇빛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씨를 많이 뿌리고,
아무리 애를 많이 써도 씨가 싹이 트지 않고
간신히 싹이 트더라도 이내 말라 죽듯 하느님 은총 없으면 모든 것이 헛수고지요.
그런데 하느님 은총이 내게 왜 없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받지 않고 걷어차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은총을 주신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가위에 기쁨과 행복이 없다면 은총 안에 있지 않음을 반성하고,
기쁨과 행복이 있다면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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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한가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축복 가득 찬 한가위 되셰요.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입당송>에서는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고 노래합니다.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노래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주며,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것,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베풀어졌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입니다. 또한,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과 집착’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집착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신만의 것인 양 여기고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착각하고 오만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곧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임을 깨닫고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 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유당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어 ‘전부’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소유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가지게 되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을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소유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놀라우신 일을 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이기도 합니다. 천사들이 늘 우리를 돌보며 동행하심에 감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바로 내 곁에, 내 동료로 , 내 가족이 나의 천사들임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천사로 와 있는 라파엘 수사님께도 감사와 축하를 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주님!
탐욕의 온상지인 제 자신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곳간이 아니라, 당신 곳간에 희망을 두게 하소서!
제 곳간이 비워지고 , 당신 곳간이 채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비워지고, 당신 뜻의 거룩함을 이루소서.
주님, 당신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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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한가위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손수건 같은 만남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과 조상님들, 부모 형제 친지들을 기억하고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혈육의 조상뿐 아니라 천상의 삶에 눈을 뜨게 한 신앙의 조상들도 기억하며 만남을 이룹니다. 특별히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부모와 친지, 이웃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가운데 행복한 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정채봉 프란치스코 시인은 만남을 5가지로 표현했습니다. 1.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입니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2.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3.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닳아 없어질 때에는 던져 버리니까 4.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5.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명절에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가 손수건 같은 만남으로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 기쁨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부유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혼자 속으로 고민하고 궁리한 끝에 곡식과 재물을 모아두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그날 그의 생이 끝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모은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가 혼자 궁리하지 않고 자기를 지으신 분을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의논했더라면 그런 잘못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귀에 들리는 것만 들으면 누구나 어리석은 부자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이시라면 과연 어떻게 하실까?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11,3). 보이는 몸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몸이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추석 명절에 미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이들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유교적으로는 제사를 올립니다. 제사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에는 “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과 뿌리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제134조1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므로 종교의 신념을 표현하는 ‘제례 방법’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모처럼 만난 가족, 친지 이웃이 서로 자기의 신념을 강요한다면 갈등만 커질 것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다름에 대해 배려하는 가운데 성숙한 사랑이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은 세 가지 양상으로 생각하였는데 첫째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길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벼슬길에 올라서 부모의 이름을 드높여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고 효도함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생이 계속됨을 믿었고 살아계실 때와 같이 가족공동체와 계속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사는 죽은 이들을 계속 공경함으로써 효도를 이어가는 방법이며 결국 제사의 의의는 은혜를 갚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과 아무 마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신앙에 위배 되지 않습니다. 이는, 죄나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존경과 사랑으로 인사 방법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살아계실 때‘성균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는데 매스컴은 추기경님께서 과연 성균관의 예법에 따라 절을 할 것인가? 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추기경님께서는 서슴없이 절을 하셨습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었다면 그게 우상숭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는 제사문제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조상공경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우상숭배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조상제사를 철폐하였고 이는 부모의 은덕을 망각하는 인륜을 저버린 짐승만도 못한 무리라고 하여 천주교신자는 죽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939년 12월8일에 이르러서야 교황청은 “조상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미풍양속이며 민족의 훌륭한 유산이므로 수용해야 하고 토착화해야 한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아픔이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신주 문제입니다. 신주는 밤나무로 만들었는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그 신주에는 조상의 혼이 마물러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혼백(넋)의 갈림길이라고 믿었고, 이 혼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는데 떠돌아다니게 그냥 두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혼이 머무르도록 하기 위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주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 때는 바로 그 신주를 모셨습니다. 신주를 모신 것은 돌아가신 이를 섬기기 위해서는 볼 수 있는 상이 필요했고 신주는 바로 돌아가신 이의 상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돌아가신 이를 만나는 하나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영혼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브9,27). 그리하여 천국이나 지옥, 아니면 연옥에 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죽은 이의 혼이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근본적으로 대치됩니다. 만약 죽은 이의 혼이 떠돌아다닌다면 세상은 난리판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허술한 하느님을 누가 하느님으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 하느님의 권능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주를 모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위패를 만들지 않습니다. 이번은 제대 앞에 기억하는 분들의 이름을 봉헌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날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음식을 잡수시러 온다는 사상과 조상들을 잘 공경하면 조상이 복을 준다는 사상은 바꿔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돌아가신 분들이 음식을 잡수러 오시기 때문에 음식을 차렸다면 신앙과 위배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이 좋아하셨던 음식을 차리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음식을 잡숫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이나 못해 드린 음식을 차려 대접함으로써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기억하는 것이지 조상이 와서 잡숫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고 안 주고는 조상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혼을 부르고 음식을 차리고 거기에 복을 기원하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들이 천상에 들지 않았다면 천상에 오르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천상에 계시다면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심을 믿습니다. 제사의 핵심은 효요, 웃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제사는 무엇입니까?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바치신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시며 이 제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명하셨습니다. 명절에는 특별히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아직 천상의 영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연옥에 계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미사는 바로 교회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봉헌을 하여 효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유한 미풍양속인 제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참고로 불교의 49재를 말씀 드립니다. 49재는 한마디로 사람이 죽은 뒤 49일째에 치르는 불교식 제사의례, 즉 불공입니다. 석가모니께서는 25세에 출가하여 6년의 고행을 한 후 득도하여 48년간 설법을 하셨고 49년째에 세상나이 80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49라는 숫자가 중요하고 또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믿는데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49재를 치르는 날 사이의 기간을 ‘중유’라고 하여 이 기간에 생전의 업에 따라서 다음세계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즉 모든 중생은 천상, 인간, 축생, 아수라(싸우다),아귀(다툼),지옥의 여섯 세계를 윤회하며 이 가운데 아수라, 아귀, 지옥을 ‘삼악도’라 하여 고통과 지옥으로 가득찬 세계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49재는 죽은 자가 삼악도에 들어가지 않고 보다 나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비는 불공입니다. 49일째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날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9재 미사를 봉헌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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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한가위.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는 강론 대신 어르신을 모시고 ‘덕담’을 들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오랜 연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가슴이 따듯해지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 저는 덕담으로 ‘농부망서(農夫亡鋤)’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한 농부가 밭에서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본 아내가 호미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물었습니다. 농부는 큰 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밭에 두고 왔어요.’ 화가 난 아내는 그의 팔을 당기며 말했습니다. ‘좀 작은 소리로 말해요. 누가 듣고 호미를 가져가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고는 어서 밭으로 가 호미를 가져오라고 재촉했습니다. 농부가 밭으로 가보니 호미는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온 그는 아내에게 바짝 다가가 아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없어졌어요.’ 예전에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사오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깜빡깜빡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브루클린에서 플러싱으로 오려면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쪽으로 가는 바람에 한참을 돌아왔습니다. 묵주반지를 브루클린 사제관에 놓고 왔는데 플러싱의 신문사에서 찾느라고 진땀을 흘렸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추석‘ 전날이면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외할머니 댁, 고모님 댁으로 신문지에 싼 고기를 갔다 드렸습니다. 그러면 외숙모와 고모도 제게 추석에 쓸 전과 음식을 주셨습니다. 비록 모두가 어려웠지만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것이 추석의 인심이었습니다. 동네에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놀이를 저녁 먹을 시간까지 하였습니다. ‘술래잡기, 망까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이름의 유래는 잘 모르지만 오징어가이상, 말뚝박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그때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존경이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모두가 운동장에 나와서 뛰어 놀았습니다. 형편에 따라서 공고도 가고, 상고도 갔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풍족하고, 모든 것이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삶에 여유가 있었고, 친구들은 우정이 있었습니다. 성당 친구들과 성탄 때면 연극도 하고, 예술제도 하였습니다. 공부 잘 하는 것이 벼슬도 아니었고, 공부 못하는 것이 그리 창피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잘살면 잘사는 대로, 못살면 못사는 대로 그렇게 서로 어울리면서 지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녔습니다. ‘낭만, 여유, 우정, 나눔, 만족’이라는 호미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2023년 추석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집에는 자동차가 있고, 손에는 스마트 폰이 있습니다. 마트에는 먹을 것이 넘쳐납니다. ‘한류’는 바람을 타고 움직입니다. 한국의 제품들이 당당하게 세계의 시장에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당합니다. 외국 사람들도 한국의 위상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우리가 잃어버린 ‘호미’들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희망도 잃어버렸습니다. 일어날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자살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가 등장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직장, 집을 포기하는 오포세대도 등장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직장, 집, 대인관계, 희망을 포기하는 7포 세대도 등장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호미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호미를 찾자고 큰 소리로 외치면 좋겠습니다.
추석 둥근 달에 우리가 찾아서 채워야 할 호미는 무엇일까요? 끝까지 변함없는 믿음의 호미입니다. 절망 중에서도 놓지 않는 희망의 호미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의 호미입니다. 추석 둥근달에 우리가 찾아서 채워야 할 호미는 무엇일까요? 궁핍한 속에서도 잃지 않는 낭만과 여유의 호미입니다. 가난함 속에서도 버리지 않는 나눔과 헌신의 호미입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놓지 않는 친교와 우정입니다. 우리가 믿음, 희망, 사랑의 호미를 간직한다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낭만과 여유, 나눔과 헌신, 친교와 우정의 호미를 간직한다면 이 땅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석을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조상과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풍요와 여유로움의 이면에는 땀 흘리는 노력과 수고가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겠습니다. 아울러 말뿐인 사랑보다는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추석이 감사와 고마움의 축제가 되고, 풍요와 기쁨의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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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한가위.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한가위, 추석입니다. 추석이면 선조들이 하셨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은 추석의 즐거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 선조들이 주로 사용하던 말입니다.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 그래도 풍족하게 먹을 것을 나누며 즐거운 웃음을 지었던 날이 바로 추석이지요. 어른들은 추수의 기쁨을 조상들의 덕으로 여기며 기뻐하고, 아이들은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려놓았던 음식에 행복해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선조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석과 같은 행복을 누리길 바랐습니다.
하느님은 어떠실까요? 하느님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라는 말처럼, 우리가 일정한 행복을 누리길 바라실까요?
하느님은 이런 면에서 굉장한 욕심쟁이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십니다. “더도, 덜도.”가 아닌 “계속 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고, 어떻게 하면 더 평화로울 수 있을지 항상 염려하시고 또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려 하십니다.
한가위가 우리에게 기쁨이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쉼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가족과 조상님들의 축복이 우리 안에 가득 들어차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하늘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기 있고 그 연결 끈은 기도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한가위에는 더욱 풍성한 하느님의 은총 가득하세요.
잡탕찌개
명절 후 먹는 음식.
호박전
삼색전
너비아니
해물전
동태전
두부부침
어묵볶음
그리고 당면......
이런 호화로운 음식이 있을까요?
김치 넣고 특별한 간을 하지 않아도
그 맛이 차고 넘치는 음식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그렇지 않을까요?
하나, 하나, 맛도 색도, 멋도 모두 다른데
그 하나마다도 아주 특별한데
그 특별한 우리를 교회에 모아 놓으니 얼마나 더 특별하고 더 훌륭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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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한가위.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뉴스에서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이 곧 0.6명 대까지 떨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는 성당에 나오는 아이들 숫자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웬만한 성당의 초등학생 숫자는 모두 100명 이상이었습니다. 큰 본당의 경우는 거의 1,000여 명의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이 보기 힘들다면서 어린이 미사 자체가 없어지는 본당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 출산율 최하위인 우리나라, 그래서 많은 학자가 인구소멸 국가 1호로 우리나라를 꼽는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또 각 지자체에서도 많은 출산 장려 정책을 내놓지만, 그 효과는 거의 미미해 보입니다. 아이를 가짐으로 인해 생기는 희생을 떠올리면, 자기들뿐 아니라 결국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형제님께서 자녀를 가져야 할지 말지 아내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 갖는 것이 갖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자녀 갖는 것이 가치의 여부를 따져야 할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표어가 가득했습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께서는 국가 정책에 반하는 여섯 번째 자녀를 낳아야 할지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치를 따지지 않고 낳았기에 지금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에 관한 부분, 또 미래에 관한 부분은 우리 영역이 아닙니다. 분명히 불행할 것이라며 인간적인 판단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결국 생명과 미래에 대한 부분은 하느님께 맡겨드리면서 지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한가위입니다. 한가위는 수확의 풍요로움과 더불어 보름달처럼 밝고 훈훈한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만나고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사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음 그 자체로 커다란 은총이며 감사할 이유로 충분합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따지기 좋아하는 세속적인 기준을 가지고서 판단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과연 창조하셨을까요? 죄악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인간을 오히려 창조하지 않음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조상님들이 없었다면 마찬가지로 자기 존재를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전 표어를 살펴보다가, ‘무서운 핵폭발, 더 무서운 인구 폭발.’이 있더군요. 지금은 무엇이 무섭습니까? 당시에는 인구 증가가 무서웠나 보지만, 그때 생각했던 가치의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지금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생명과 미래는 하느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하느님과 조상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한가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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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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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 한가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부유하고 자유로운, 지혜로운 삶-
9월 순교자 성월 가을부터는 수확의 계절이자 기도의 계절입니다. 오늘은 4천만이 움직인다는 한국인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이자 축일미사는 봉헌하지 않지만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세 분 천사들 축일이니 참 경사스런 날입니다. 오늘도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성호경과 주모경을 바친후 만세육창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힘이 샘솟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여러분은 6째 항목에 “우리가정 만세!”를 넣어 바쳐도 좋겠습니다. 양손을 번쩍 치켜올려 만세육창하며 기도하면 영육의 건강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8월 중순부터 9월 순교자 성월은 하루하루 만세육창으로 시작했습니다.면담성사차 집무실을 찾는 분들은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받았고, 이어 하느님 사랑하는, 나라 사랑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애국가 1절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참으로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소통의 관계를 깊이하는데 기도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기도는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기도해야 인간 본연의 존엄한 품위를 지닌 참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전쟁 치열한 광야인생여정중 누구나 악마나 괴물,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태고적 예전부터 하늘님을 믿었고 평화를 사랑한 백의민족(白衣民族)이었고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숭고한 하늘나라 이상을 실현해온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문화 민족이었습니다. 오늘 한가위 미사전례중 입당송과 본기도가 참 좋습니다.
*입당송: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본기도: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참으로 추석에 우리의 모든 소원이 가득 담긴 참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참 좋은 응답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얼마전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기억할 것입니다. 주위 여건이나 환경에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결같이 “땅에서 씨뿌리는 삶”이 참으로 멋진 참삶입니다. 여기에 하나 추가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날마다 한결같이 땅에서 씨뿌리는 삶에 충실하고, 날마다 한결같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충실하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날마다 한결같이
“땅에 씨뿌리는 삶”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말그대로 진선미의 삶, 신망애의 삶의 결정체입니다. 이렇게 참삶을 살라고 하느님께 선물로 주어진 참 소중한 인생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떠오른, 참 은혜로운 강론 제목은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였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온맘으로 온몸으로, 온힘으로 온정신으로 사랑할 때 저절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기 마련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돈이 없어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기회는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 정말 행복하고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제1독서 요엘 예언자가 말하는 영적 시온의 자손들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과 감사의 삶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저절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샘솟는 기쁨과 즐거움이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의 실현입니다. 눈들면 어디나 하늘이듯 하늘을 바라볼 때 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50장 마지막 구절이 더욱 하느님 찬양의 삶에 충실할 것을 부추깁니다.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시편150.6)
둘째, 나눔과 섬김의 삶입니다.
나눔과 섬김은 이웃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음만 있다면 무궁무진한 나눔과 섬김의 기회입니다. 나눔과 섬김의 사랑 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의 실천입니다. 이런 나눔과 섬김의 사람들이 정말 자유롭고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이 우리 모두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탐욕으로 얻은 것은 재물이요 돈인데, 잃은 것은 건강이요 삶이요 생명이라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지요! 생명을, 건강을, 사랑을, 삶을 잃었는데 그까짓 재물이,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지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잃어버린 생명을, 사랑을 찾을 수는 없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후회스럽겠는지요!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바로 하늘이 아닌, 땅에 보물을 쌓은 탐욕의 결과요 자업자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유한 사람의 비유가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하느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땅에 보물을 쌓기 여념이 없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고립단절의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의 삶입니다. 아, 천국인 듯하나 지옥입니다. 땅에 보물 쌓기에 여념이 없는 삶의 자리,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에 이어, 어김없이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의 말씀이 뒤따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 부자같으나 하느님 앞에서는 참 가난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삶입니다. 나눔과 섬김의 활동에 재물을 사용함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었다면 가난한 듯하나 실상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부유하고 행복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 또한 땅에 보물을 쌓으려는 탐욕의 본능을 지닌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문득 영국의 19세기 작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소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구두쇠 스쿠르지 할아버지 일화가 생각납니다. 성탄전 하루밤 꿈중에 죽은 영혼들을 만나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보면서 개과천선해 착한 스쿠리지가 됐다는, 이제부터 땅에 보물을 쌓는 삶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일화가 어리석은 부자의 하루밤 꿈이 아니었겠나, 꿈에서 깨어난 어리석은 부자는 전격적 회개를 통해 이웃과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겠나 하는 유쾌한 상상을 해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 참으로 탐욕으로 인해 잘못 선택된 자기 중심의 참 어리석은 삶입니다. 반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참 잘 선택한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고 부유한, 아름답고 거룩한 행복한 삶이요, 이미 오늘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천국의 삶이니 심판은 추호도 걱정 안해도 됩니다. 이런 이들은 제2독서 묵시록의 성령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았던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천국의 지름길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눈만 열리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선택의 기회는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전례 시간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복된 시간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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