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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비호인 수나라 당나라 석문 : 묘장문화 석문의 색다른 예술
门扉胡人:中古墓葬石门上的别样艺术
2021년 08월 12일 10:02 펑파이신문 소스:이페어케이+
예를 들어 시안 북교 출토 북주(564) 이탄묘 앞 판석문의 수문인(사진8)은 '호인' 무사를 '신인(神人)'으로 만들어 지켰고, 석문 좌우 두 명의 장극자(長劇者)를 심목고비(深目高比), 곱슬머리, 상투, 목덜미, 상투, 상투, 복근, 예장백, 짧은 치마, 맨발로 연봉을 밟았다.화면에서 왼쪽 신인은 허리를 굽혀 창을 잡고 아래쪽 화단을 직시하고, 오른쪽 신인도 까치발을 하고 아래쪽 화단을 직시한다.수호신은 각각 두광이 있고, 목덜미에는 목덜미에 목걸이를 두른 채 영락, 팔팔찌, 엄숙한 모습으로 불교의 천왕, 역사(史士)에 가깝다.
이런 석문 위 외래문화의 요소로 인해 신세계 예술의 문은 두 개의 닫힘에 신경 쓰지 않고, 전체 석판문에 구도를 고려하여 투시된 작은 문으로 '신인'의 높이를 부각시키는 서양 화가들의 투시 기법으로 종심화면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수문을 지키는 '신인(神人)'을 더욱 체격감 있게 하여 야위고 왜소한 인물들에 비해 유혈육(有血肉肉)으로 변모시켰다.
산시 정변에서 발견된 채색 부조석문에도 호인무사 2개가 조형된 '신인(神人)'으로 되어 있는데, 좌측 문무사의 이미지는 곱슬머리 농수, 일월형 꼭지 장식의 속발금고리를 쓰고, 하이킥 부츠를 차고, 혁대를 차고, 긴 칼을 차고, 긴 삼지창을 잡고, 우측 무사 역시 눈높은 코, 곱슬머리 수염을 하고, 깃발을 든 호복을 입고, 한 손에는 삼지창으로 쳐들며, 다른 한 손에는 삼지수를 두었다.
그림 9 산시 정변적조명묘석조각문 陕西靖边翟曹明墓石雕刻门
이들 신인은 불교 호법 장르가 아니거나 题材교의 천신에 속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 8세기 편치켄트 벽화에는 삼지창을 든 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종교를 믿는 속특인들은 한지장제를 받아들이면서도 무덤의 대문 표현에 신경을 쓰는 등 선각화 방식을 채택하여 우리 민족의 일부 풍습을 보존하였다.당시 장인들은 대문을 그래픽으로 장식한 종교적 주술의 힘을 이용해 신의 세계를 억상하도록 시각적 감각을 자극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사람에게 불가피하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며, 묘장석문 배치는 또 다른 이미지를 부여받았으며, 호인의 형상에 빗대어 수호하는 용사, 마치 신령스러운 부적(神靈)이 있는 것 같은 우호와 항구적인 지하 저택을 지키고, 그들의 발아래로 비뚤어진 기괴한 얼굴 요괴를 밟아 마귀가 들어오지 않도록 하였다.일반적으로 문지방의 비천한 등급사회에서 관청과 절은 문장식(門裝式)을 누리게 되는데, 백성들의 평민가 두 문짝은 장식되지 않아 조정의 금문이나 달관귀인 문장과는 동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부잣집 문식은 대개 5대 송초부터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수나라 개황 2년(582) 이화 묘석문에는 좌우로 두 명의 무사가 서서 정색을 하고 공손하고 엄숙했으며, 두 사람은 각각 비늘갑과 안령갑을 입었지만 모두 돔을 쓰고 있었으며, 오른쪽 무사는 호인의 얼굴, 깊은 매부리코, 수염으로 나타나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장총을 들고 서로를 곁눈질했다.왼쪽 무사는 번인의 얼굴을 하고 있고, 같은 팔로 장총을 들고 단화를 신은 채 발을 헛디뎌 서 있다(사진 10).이런 '수문지기' '문지기'의 예술 형상은, 북조 전수 후 호번흥대의 풍조에 대한 예술 장인의 인식으로 배어 있을 것이다수서어구라전은 원초의 무공 기질을 비교해 몸길이가 8척이고 체력이 뛰어나며 기세가 웅장하고 수백 걸음의 말을 들었다고 기록돼 있다.입화호 자손들도 키와 풍채로 기품 있고 격식을 차리고 궁중의위계통이나 공경왕부의 집에 봉직하는 것도 자랑거리였다.
그림 10개황2년(582) 이화묘 석문 开皇二年(582)李和墓石门
섬서예천소릉박물관은 진나라 이세민 경위와 심복 장수인 초당우진달의 묘지 석문을 소장하고 있으며, 진왕부가 호인들을 회유해 문하생들을 모집해 용맹한 선비들 중에 이민족 호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 특징이다.사후에 좌효위대장군, 유슈도독이 추증되고 제릉을 모시는 영광이 있어 궁중생활에서 활약하는 호인들에게 특히 친숙하다.
그림11-1 우진달묘문호인탄비파도 牛进达墓门胡人弹琵琶图
그림11-2 우진달묘문호인牛进达墓门胡人
그림12-1 우진달묘문 호인손 하이발잔 牛进达墓门胡人手持高脚酒杯
그림12-2 우진달묘문호인牛进达墓门胡人
우진달묘 좌우에 있는 석문 두 개에 석각 전체에 번밀하고 촘촘한 구도를 두르고 꽃을 피우고(그림 11-1, 11-2, 그림 12-1, 12-2) 좌측면에 있는 주제는 연주문(聯珠文)을 두르고, 석문 중간에 있는 호인악기(胡人樂手)가 왼손에 높은 발잔, 팔을 구부려 공후(公后)를 끼고, 오른쪽 문짝에 있는 호인은 머리에 일월관을 쓰고, 비파를 품고 있다.화장은 매끈한 선으로 세련된 역동성을 주었고, 두 호인은 비단띠를 두른 채 나풀거리는 곡선을 그렸다.북제(北齊) 북주(北周) 때 서역호인(西域胡人)들이 자국의 악무를 가져와 궁중악공(宮中樂工)부터 민간악수까지 '호락' 바람이 불었고, 북주 무제(武帝)는 '비파(琶波)'까지 스스로 연주하여 악무로 관작에 남겼으며, 춤은 호안호노(胡安 ,)가 기시랑(器郞)을 선발하여 조묘달(曹廟達)에 봉왕)을 하였다.안 망아지가 개부를 한 것은 호인 문화가 한지에 깊숙이 녹아들어 일부 고위 관리들의 선호도가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그래서 조정에서 '사동원비기'로 조특이 유행한 '단둥지' 연주문도문에 새겨진 것은 죽은 자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무덤 주인이 땅속에 들어가서도 생전의 기쁨을 잊지 않고 평면적인 지형을 뚫고 '단옥의 꽃'을 낳는 것이다.
영하염지 1985년 당묘에서도 '호인(胡人)' 낙무석문(樂舞石門)이 출토되었는데, 왼쪽 문은 긴 생머리에 머리띠를 두르고, 몸에 딱 붙는 가랑이를 입고, 한쪽 다리로 사타구니를 빠져나와 허리를 회전시키는 형태를 띠고, 오른쪽 문은 춤을 추는 남자도 한 발로 뛰며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으고 있었다.두 무용수 모두 백건을 두르고 흔들었고, 작은 펠트인 '무연'에서 춤을 추는 등 회전감이 뛰어났다(사진 13).관상으로는 콧수염만 한 것이 아니라 돌궐계 번인처럼 호루라기를 추는 두 종족의 잡후일 가능성이 높다.고원 출토 당고종 때 사하탐 부부합장 묘석문에도 긴 수염을 가진 수문관리가 교령이 넓은 소매의 긴 옷을 입고 공손하게 시립했다.그만큼 당시 묘장석문은 풍성하게 그려졌는데요.
그림13 영하염지당묘석문호무도宁夏盐池唐墓石门胡舞图
이것은 주목할 만한 예술 전환의 초점으로, 호인이 더 이상 단일하게 수문금위(守門禁衛)를 지키고 집을 지키는 모습이 아니라, 천하의 태평한 기상 아래서 가무가 승평된 호한 관계의 새로운 모습을 나타낸다.사실 북위 북조시대에는 이미 수많은 석각관곽과 석상병풍에 호인악무의 형상이 등장했지만 당시에는 묘문에 직접 조각되지 않았을 뿐 호한사회가 융화 발전하고 '화화화'되면서 색다른 예술로 조형무대에 올랐다.
석문은 저승과 이승을 가르는 '사여사여생(事如生)'으로 매장된 상례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의 희망을 주는 예술적 함의를 담고 있다.석문 위의 호인들이 가진 춤은 허황되고 어떤 것은 장중하며 어떤 것은 예의를 준수하며 어떤 것은 유희를 부리고 어떤 것은 호인들의 당시 사회적인 마음가짐을 전력으로 드러내는데, 목적은 사망자와 생인의 감정적 유대를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허구를 아끼지 않고 미세하면서도 기발하고 풍부한 조형물을 만들어 죽음에 많은 사회적 의의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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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인형태의 석각문 장식화는 무덤뿐만 아니라 불교사원의 지궁인 석문에도 등장하고, 항마제요의 호법천신과 잘 어우러져 석문에 이르는 금강역사가 모두 눈에 띄는 수직구도를 갖추고 있다.호법문신(護法門神)의 몸에 비단고름이 아닌 관백으로 만든 줄을 그린 석각(石刻)도 있는데, 중국 민간에서는 한벽돌화 이문신(里門神)으로부터 밧줄을 사용하는데, '줄' 기호는 전형적인 화하신화의 원형으로 천신이 준 밧줄을 빌어먹으면 식인마의 침식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발에 묶인 밧줄을 벗어날 수 있다.
그림 14-1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 소장 도니사 지궁석문
大都会艺术博物馆藏中唐尼寺地宫石门
그림 14-2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 사찰지궁석문원도
大都会艺术博物馆尼寺地宫石门原图
미국 메트로폴리탄예술박물관이 소장한 중도니사 지궁 석문 위(그림 14-1, 14-2). 호인의 용모 특징을 지닌 두 수호신은 우람한 체격에 갑옷, 곱슬머리의 곱슬머리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왼쪽 호수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안색과 자태를 자랑한다.오른쪽 호인은 손에 칼을 든 것처럼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이문신(二門神)'이라 부르기도 하고, '금강(金剛)·역사(士)'라는 2상(像)이라 부르기도 한다.
불경(佛經)에 따르면 금강(金剛)은 수호신(守護神)을 가리키며, 역사(史士)는 수호신(守護神)을 가리키며, 맞은편 금강(金剛)이라고도 한다.이 두 존은 일반적으로 '이왕존(二王尊)'이라 부르는데, 절문 양쪽에 있는 금강신(金剛神)이다.호인의 용모는 하늘의 신(神)처럼 여겨져 귀신을 모두 쫓아낼 수 있는 것으로, 사실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스의 흔적에서 비롯됐다.북제 서현수 묘에서 출토된 사파이어 금반지에는 그리스 크리스(집금강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불교는 중토종교예술의 주류로서 보살의 자상한 모습을 표현하여 세상 사람들의 순응을 도모하고 있다관념은 '자미선목'이나 '도끼눈이 동그랗게 뜨는 것' 모두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 쉽도록 선교를 베풀어 경호하는 천왕신(天王神)을 빼놓을 수 없다.필요하면 역법(逆法)으로 금강의 노안(勞眼)을 부각시켜 저승사마(小鬼魔)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망상을 품게 한다.불교예술에 외래 호문화를 섞은 호인형 사무라이 조형물은 수문탕이 오물을 씻고 악을 몰아낼 여백을 보충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림 15 무주 사주자사 이무결 묘문선각도武周沙州刺史李无亏墓门线刻图
2002년 무주(武周) 만세로 등봉원년(696년) 사주자사(沙州字史) 이무결묘(李無 ,墓)를 발견한 산시 양링(楊陵)은 콧대 높은 두 명의 호인무사가 수문(守門)을 하고 있는 불교 호법(護法)인 천왕(天王)을 입고 삼지창으로 귀신을 밟으며, 다른 한 손에는 작은 구부러진 칼을 든 자태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 소장한 석문과 흡사하다(사진15).이는 당시 이런 분본 도안을 다양한 곳에 활용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중·고대에 입화했을지도 모르는 많은 예술 장인들이 장인과 업종을 결성하여 사방을 돌아다니며 기예를 바치고, 제작장을 고용하였다구, 유명한 화장은 궁중 관부나 장례주가를 고용하고, 호족의 천장은 이름을 남기지 못하지만, 사용한 도안 분본은 조특한 요소와 중토문화를 수용하여 호모의 새로운 모습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림 16 낙양용문대지선사묘문호인화洛阳龙门大智禅师墓门胡人画
그림 17 낙양용문대지선사묘문호인화洛阳龙门大智禅师墓门胡人画
그림 18 낙양용문대지선사묘문호인화洛阳龙门大智禅师墓门胡人画
낙양용문 석굴박물관이 소장한 석각묘문에도 호인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그림 16-18). 두 서역호인은 상의를 벗고 머리띠를 감아 올렸으며, 한 사람은 장검을 들고 또 다른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쥐고 어깨에 비단을 두른 것은 불교의 역사다.또 다른 호인 2명은 긴 모자를 쓰고 꽃밭에 똬리를 틀고 한다.이 대문은 연대의 기록은 없지만 문하부 좌우 귀퉁이에 공양승 광덕(光德)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석문은 무주(武周)·현종(玄宗) 때 고승 의복(義福, 칙증대지선사)의 묘탑이나 지궁(地宮) 대문에 새겨진 선각(線刻)으로 추정되며, 의복은 개원 24년(736)에 사망하였다.우용문 봉선사. 시안 비림에 소장되어 있는 또 다른 당나라 흥복사에서 출토된 대지선사의 비측에도 호인승사자 그림이 선각되어 있어 이 시기에 유행한 '동로마 불매 양식'으로 보인다.
손 선생은 "속터 용사, 즉 서역기의 '성격이 용렬하고 죽음을 직시하며 전적(前敵)이 없다'는 산수의 움직임을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며 "이들은 대부분 당나라에서 용병으로 선택했다"고 지적했다.신당서·서역전 안국조에는 '모용건자는 산수, 산수, 유중국언 전사야'라고 기록돼 있다.위의천도 산뽕을 이란어 군주와 조트 귀족들의 시위라고 지적하며 시위도 잘해야 하고 주인에 대한 봉사도 잘해야 하며 이들은 노비도 귀족도 아닌 엘리트 전사의 단체라고 말했다.조특으로서 그리고 "예락하천"이런 잡후한 병사는 국제적 시각에서 볼 때, 외국 정병을 숙위와 문금의전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어떤 학자들은 수당 궁정 내외의 호인들을 대량으로 기용한 것을 "수당의 국제적인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로마 카이사르 대제는 스페인 수비대,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인을 금군으로, 비잔틴 황제는 로스인, 흑인 및 앵글로 색슨 왕조로 구성된 다른 종족들을 사용하였다.염소군은 칼리프위대를 위해 시종했는데, 돌궐커한 주변에도 염소군이 금위하였고, 안록산 반군 중에는 염소군 천기도 있었다.바티칸 근대(1506년)에도 스위스 청년이 궁정 가디언과 수성수비대를 창설했다.이민족 가디언 출신에 배경도 없이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은 중·고시대의 '국제화' 현상이다.아쉽게도 속특 토착 이미지에서는 아직 '산뽕' 형상을 볼 수 없지만, 입화호인은 속특 토착문화보다 불교예술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는데, 중국의 묘장석문에 이것이 굴절된다면몇몇 정병 무사의 조형적 흔적도 매우 희귀한 실크로드의 예술이다전파되었다.
한나라 때 무덤인 석문에 문졸이 나타나면서부터 남조화상벽돌묘문에는 채색문관, 북조에는 호모무변이 무기를 들고 수문을 지켰고 수당에는 호풍(胡風)이 크게 일어나 호인갑사(胡人甲士), 호모무(胡母武)가 각종 묘실 석문에 자주 등장하였으나 이 석문들 상선은 요식화에서 변화를 꾀하였고, 화장은 변화를 추구하였는데, 현실적이든 번복적이든 문이라는 것을 반영하였다.송원 이후 호인 이미지는 사라졌고, 대문에 신다·울루·아서대문에 진경이 그려졌지만.위지공, 수호신을 미세하게 빛낸다는 뜻도 있지만, 수염만 있는 호인형 골키퍼는 수호신으로서의 변천이 다른 예술적 느낌을 주는 것이 호한의 사회생활 융합을 보여주는 뚜렷한 아이콘으로 지하의 무덤 공간에서도 유산으로 남아 있다.
결론
중·고시대 화사와 예장들이 유례없는 묘문 석각호인 예술 형상을 창조한 '문식'은 선각화의 전사(傳神)적 의미와 독특한 역사적 근리,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구도를 묘장석문에 배치한 것은 천마행공(天馬行空)과 같은 환상이 아니며, 종족을 분화시킨 후의 생사(生死事)적 가치를 살려내고, 선화조탁(線畵 中)에 사람들의 사회적인 지위나 예술적 지위가 반영되어 있다.풍습의 기억.
비고: 일부 선은 산시(山西)성 운강연구원 고평전(高平傳)이 모사해 감사드린다.
(전문은 《미술연구》 2021년 제4호에 실렸다.펑파이 신문은 저자의 권한을 거쳐 전간되었을 때 주석은 등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