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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 ‘택리지’(새로읽는 고전:85)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으뜸고을 “어디”
토산물·취락·군사 총망라 조선조 대표적 인문지리서
유배뒤 유랑 30년…전국 답사 토대 실증적 저술
“미풍양속·인정 넘치는 곳이 살림살이에 가장 좋은 곳”
요즈음 사람들은 어떤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할까.교통이 편리한 곳,주변경관이 수려한 곳,문화시설이 잘 갖춰진 곳,교육환경이 좋은 곳 등등.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곳이 과연 존재할까.있다면 과연 어디일까.
이와 관련해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에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들고 있다.
‘대저 살 곳을 정하는 데에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며,
다음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산수가 아름다워야 한다’.
여기에서 지리와 산수는 지형 토양 기후 등 자연적 조건에 해당하며,생리와 인심은 물자의 유통 및 이웃간의 미풍양속 등 인문적 조건에 해당한다.이 네 가지 조건을 기준으로 전국을 살기에 적당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으로 구분하였는 바,지형 토양 기후 등 자연적 조건과 정치 경제 문화 등 인문적 조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던 것이다.
‘택리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인문지리서다.현대 지리학서와도 다르며,중세에 나온 여타 지리서와도 다른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도 지리서가 적지 않았으니,대표적인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을 들 수 있다.그러나 그 책은 국왕의 명에 의해 제작된 관찬서로 국토에 대한 국가권력의 행정적 파악을 주목적으로 편찬된 것이었다.이에 따라 국가의 세금 징수를 위해 각 지역의 토산물을 기록하고,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궁궐의 면모를 소상히 기록하고,국왕의 교화를 칭송하기 위해 명승지를 읊은 한시를 기재해 놓았다.
이와 달리 ‘택리지’는 구성방식과 다루는 내용이 독특하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의 각 지방을 실제로 답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확인하고 검증하는 실증적 태도에 입각해 저술되었으며,18세기 전반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해 놓았다.
이 책의 저자 이중환은 성호 이익(李瀷)의 재종손으로,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 가운데 한사람이다.이익은 1751년 완성된 이 책의 원고를 읽고 나서 내용을 교열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었으며,서문과 발문을 직접 써주기도 했다.성호의 학문적 영향을 받고 성장한 이중환은 당쟁의 와중에서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가야 했으며,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정치참여의 자격이 박탈돼 전국을 유랑하며 지내야 했다.그러한 점에서 ‘택리지’는 30여년간의 고심에 찬 기나긴 방랑생활과 실학자로서의 현실을 보는 탁월한 안목 등이 결합되어 이룩된 저작이다.
이 책은 구성방식과 다루는 내용에 있어서 독특하다.대체로 현대 지리학에서는 자연환경 산업구조 교통 통신 인구 지방 등의 순서를 취하는 데 반해 ‘택리지’는 사농공상 등 사회계층의 성립 배경과 역할을 다룬 부분과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을 제외한 ‘팔도총론’과 ‘복거총론(卜居總論)’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팔도총론’은 조선 전역을 도별로 나눠 역사적 배경,지리와 형세,해당지역 인물,각종 이야기,풍속,명승지,토지 비옥도,토산물,물화의 유통과 교역,국제무역,취락,피난처,군사요충지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그리고 그 서술 순서에 있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중앙으로 접근해오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그 이전까지 대체로 왕도 중심의 서술방식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복거총론’은 기본적인 주거조건으로 네 가지를 들고 이를 근거로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저자는 지리 생리 인심 산수 가운데 인문적 주거조건에 해당하는 생리와 인심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중환은 “풍속이 좋지 않으면 자손에게도 해를 미친다”고 하여 풍속이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곳을 강조했다.그러면서 당쟁의 폐해에 따른 인심 타락상을 경고하는 한편,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 책은 당시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저자는 물자의 유통과 관련된 생리를 주거조건으로 매우 중시하였는 바,“배와 수레 사람 물자가 모여들어,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 살기에 적합하다”고 하였다..
그 예로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위치한 공주 및 안동 일대를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리고 평양 충주 상주 대구 진주 등 도회지는 대부분 강을 끼고 있어 하천을 이용한 수운(水運)이 편리하고 많은 도로가 결집돼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이라고 했다.이같은 지적은 상업이 발달하고 유통 경제가 활성화되던 당시의 변화되는 상황을 주목하면서 이를 주거조건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택리지’는 전국을 실제로 답사한 실증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 발전에 대한 저자의 새로운 안목에 비추어 각 도의 인문지리적 환경을 종합적으로 서술해 놓은 저술이다.
이 책에는 조선 후기의 사회구조 정치상황 풍속 민심 경제상황 등에 관한 내용이 풍부하고 다양하게 수록돼 있다.사회학 정치학 지리학 역사학 경제학 등 각 방면에서 접근이 가능하다.이 책이 조선조 말까지 여러가지 책명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점 또한 그만큼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에 의해 널리 읽혀왔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은 과연 어떠한 곳일까.시대적 조건은 다르지만 그 해답의 실마리를 ‘택리지’는 우리들에게 열어놓고 있다.을유문고에서 나온 번역본이 있다.
<정우봉 고려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