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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의 몸에 출가의 마음 그 행위 아름다워라 비록 재가자이지만 사문(沙門)의 청정한 계율행을 받들어 지켰으며, 雖為白衣,奉持沙門清淨律行; ‘백의(白衣)’란 평민을 대표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관료나 출가자에 대해 상대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중국의 출가자는 검은색 옷인 치의(緇衣)를 입습니다. 예쁘지 않은 색깔을 물들인 천입니다. 저는 때로 출가자에게 편지를 쓸 경우 이름을 쓸 곳에 ‘백의’라고 써서 제가 재가속인임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그의 제자라고 자칭할 처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마거사는 비록 재가자이지만 출가자의 모든 계율행위를 지킬 수 있으며 마음은 출가했습니다. 비록 세속에 살지만 3계(三界)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雖處居家,不著三界; 비록 재가자의 모습을 나타냈지만 마음은 이미 3계인 욕계ㆍ색계ㆍ무색계를 뛰어넘었고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처자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항상 청정한 범행(梵行)을 닦았으며, 示有妻子,常修梵行; 비록 재가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인도 있고 아이들도 있지만 한결 같이 닦는 것은 청정행입니다. 권속이 있음을 나타내더라도 (세속적인 애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항상 좋아하였으며, 現有眷屬,常樂遠離; 그 자신은 많은 권속들, 예컨대 부모ㆍ처자ㆍ친구ㆍ학생 등등이 다 권속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의 수행 경계는 이런 사람들에게 미련을 두지 않고, 이미 초월했습니다. 마치 제가 오랜 친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이 다 자라면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서로 간에 빚지지 말아요. 자녀들이 보답해주기를 기대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다음 생에 당신 자녀의 자녀로 변해서 빚 갚아야 할지 모릅니다.’ 또 어떤 친구는 불초한 자녀들 때문에 근심하는데, 저는 그런 친구들에게 그냥 좀 보아 넘기라고 충고합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젊은이들은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저마다 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녀들도 모두 다 좋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래도 좀 분담해야 합니다! 자기 집안이 뭐든지 다 좋기를 바라면, 그것은 보살도가 아닙니다. 남의 고난을 우리가 좀 짊어지는 것, 이것도 회향(回向)에 해당합니다. 비록 보석 등으로 몸을 단장하지만 (공덕으로 성취한) 상호로써 몸을 장엄하였으며, 雖服寶飾,而以相好嚴身;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모 여사는 이미 부처님을 배웠는데 여전히 화장을 짙게 하네요.’ 제가 말합니다.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설마 부처님을 배우고 나면 자기 외모에 아랑곳하지 않아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당신을 친근히 하고 싶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겁니까? 보세요, 관세음보살님은 얼마나 예쁘게 몸단장을 하고 계신가요. 머리에는 쓰고 손에는 들고 계시고, 온통 장엄 물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보살은 상호로써 자기 몸을 장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남이 자기를 싫어하지 않도록 합니다. 결코 예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유마거사도 보석들을 달고 있는데,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색신(色身)을 장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색신은 너무 더럽습니다. 이 피부를 벗겨보면 그 안은 더럽기도 하고 냄새도 납니다! 그러므로 색신을 장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보통 범부들의 단장은 모두 남이 보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에게는 사랑하는 비(妃)가 있었는데 그녀가 중병이 났더랍니다. 무제가 그녀를 보러 갔습니다. 이 비는 한사코 얼굴을 가리고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시녀가 이 비에게 왜 그러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황제가 나를 총애한 것은 나의 용모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병든 얼굴을 황제에게 보여준다면 황제의 총애를 잃을 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도 이후에는 돌봐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런 도리입니다. 비록 음식을 먹기는 하지만 선정의 희열로써 맛을 삼았으며, 雖復飲食,而以禪悅為味; 재가자들은 당연히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음식영양은 자기가 도를 얻기 위한 용도입니다. 만약 먹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도를 배우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만 먹습니다. 만약 도박장이나 오락 장소에 이르면 그때마다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함이었으며, 若至博奕戲處,輒以度人; 유마거사도 도박장에 드나듭니다. 바둑도 두고 오락 장소에도 갑니다. 그렇지만 그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은 방편으로 남을 교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여전히 그대로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지킵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하는 것이 아닌데, 특히 출가자 여러분들은 이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외도의 가르침을 받는다 해도 올바른 믿음을 깨뜨리지 않았으며, 受諸異道,不毀正信。 온갖 외도를 배워서 외도와 서로 오고 갑니다. 그렇지만 불법의 올바른 믿음으로써 사람들을 교화합니다. 세간의 학문에 밝았지만 항상 불법을 좋아하였다. 雖明世典,常樂佛法。 ‘세전(世典)’이란 세간의 온갖 학문입니다. 그는 할 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진정한 중심은 불법을 닦는 것입니다. 대승도의 거사(居士)의 행위입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그 존경은 공양 가운데 제일이었으며, 一切見敬,為供養中最; 그러므로 유마거사는 어떤 장소에 가든지 가장 존경을 받고 사람들의 공양을 받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유마거사 자신이 온갖 중생을 대함에 있어서 가장 존경하는 마음으로 한다. 어떤 사람도 깔보지 않고 모두에게 법공양을 행하고 있다.’ 시종 바른 불법의 길을 걸어가면서 어른들과 아이들을 섭수하여 가르쳤으며, 執持正法,攝諸長幼; 그는 시종 바른 불법의 길을 걸어가며 털끝만큼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바로 제가 늘 이렇게 말하는 대로입니다. ‘차라리 이 몸을 지옥에 떨어지게 할지언정, 불법을 가지고 인정에 대하지 않는다[寧可將身下地獄, 不把佛法當人情].’ 불법 얘기라면 조금도 사양하지 않습니다. 인정으로 말하지 않아서 틀린 것은 어디까지나 틀린 것입니다. 학우들이 여기에서 늘 저에게 꾸지람을 당하는데, 일단 여기를 떠나갔다가 가끔 돌아오면 저는 아주 겸손하게 그를 손님으로 대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이던 간에 진정으로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저는 그 사람을 존경하고 그 사람을 공경합니다. 만약 그런 척 가장(假裝)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생계를 도모하는 사업에 종사하면서는 어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면서 비록 세속의 이득을 얻을지라도 그것을 기뻐하지는 않았으며, 一切治生諧偶,雖獲俗利,不以喜悅; 유마거사도 장사를 했습니다! 생계를 도모하는 온갖 사업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부양한 겁니다. 예컨대 보적보살 같은 사람들은 장사를 하지 않았는데, 돈이 어디서 올까요? 이 ‘어울릴 해(諧)’ 자란 그가 담소하면서 아무 부담 없이 화목하게 잘 어울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짝 우(偶)’ 자는 뭐든지 다 온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돈을 벌더라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중생을 위해서 버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거리들을 노닐면서는 중생에게 이익 되는 일을 하였으며, 遊諸四衢,饒益眾生; 외출해서 놀러 다니되, 언제 어디서나 남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면 거기 사는 사람들은 그의 덕을 보게 됩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용이 한걸음 걸어가면, 온갖 풀들이 그 은혜에 젖는다[龍行一步, 百草沾恩].’고 했는데, 이게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공직(公職)에 나아가서는 법을 바르게 하여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고 보호하였으며, 入治政法,救護一切; 그는 자신이 사는 비야리성에서 그 곳의 주석(主席)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가능한 한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아껴주고 무거운 벌은 가볍게 해주고 가벼운 벌은 취소해 주었습니다. 만약 거사가 정치에 종사하거나 법을 집행한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자비로워서는 안 됩니다. 자비에서 화근이 나오고, 방편에서 저급한 것이 나옵니다[慈悲生禍害, 方便出下流]. 학술을 강론하는 곳에 나아가서는 대승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으며, 入講論處,導以大乘; 학술단체에 가게 되면 그는 갖가지 방법을 이용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불법의 대승도에 들어가도록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학당에 나아가서는 철모르는 아이들을 순순히 깨우쳐주었으며, 入諸學堂,誘開童蒙;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가게 되면 유도적인 교육을 이용해서 철모르는 아이들을 가르칠 줄 압니다. 유곽에 들어가서는 음욕의 허물을 가르쳐 보여주었으며, 入諸婬舍,示欲之過; 그는 기생방에조차도 갑니다. 하지만 그는 그 속에서 설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음욕에서 벗어나도록 합니다. 술집에 들어가서는 (항상 깨어있으면서) 능히 자신의 뜻을 세우고 있었다. 入諸酒肆,能立其志。 그는 음주장소에도 갑니다. 음주도덕[酒德]이 있어서 술은 마셔도 마음이 취해서 어지럽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자신이 깨어있기 때문에 술 마시는 무리들을 술에 빠져 미혹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능히 스스로 건지고 스스로 헤어 나옵니다. 이 한 편의 문장에 대해 저는 그 제목을 ‘유마거사 행위의 아름다움’이라고 붙였는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제목을 붙일까요? 당신은 이 단락을 유마거사의 덕행을 찬탄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사실상 여기의 매 조목은 우리가 대승불법을 배우면서 본보기로 삼아야 하고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마경은 유마경이고 당신은 당신일 뿐입니다. 재가에서 부처님을 배우는 계율의 본보기는 다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얼굴에 굶주린 빛이나 병색이 돌거나 쓸데없이 말을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이 되라는 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젊은이들의 경우 오자마자 무릎 꿇고 절하려고 하는데, 저는 당신이 공경심이 있으면 문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알아봅니다. 그냥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되어요!. 무릎 꿇고 절하는 그런 것 할 필요 없습니다. 저로 하여금 역시 무릎 꿇고 답례하지 않으면 안 되록 하지 마세요. 당신이 착실하게 부처님을 배우는 게 저에게 절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당신이 부처님이 되면 제가 절합니다. 저는 일생동안 남의 무릎 절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팔관재계(八關齋戒)를 받았기 때문에 높고 커다란 의자에 앉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미계와 비구계의 기본으로서, 높은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제가 경전을 강의하러 재가자의 옷을 입고 자리에 오르는 것도 이미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상을 앞에다 모셔 둡니다. 여러분은 부처님께 절한 것이지 저에게 절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여 누가 절을 하더라도 저 역시 상관하지 않습니다. 유마경은 형식주의적인 냄새가 조금도 없습니다. 진정한 대승도는 도를 배우는 티를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 얼굴이 부처님 상입니다. 하는 말마다 부처님 이야기를 하고 온 몸이 부처님 끼를 뿜어서 실내에 들어오면 공기를 다 오염시켜 버립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물론 불교도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보니 그런 기독교도들도 마찬가지로 두렵더군요. 한번은 기독교 선전 차량 한 대가 우리 집 앞에 왔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이나 선전하고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인욕바라밀을 여러 개 먹었지만 할 수 없어서 쪽지를 하나 써서 건네주었습니다. 쪽지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남의 안녕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보고나서 차를 몰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쪽지를 써주었느냐고 남이 묻더군요. 제가 그랬습니다. ‘도교(道敎)의 장천사(張天師: 도교 교단의 창시자인 장릉/역주)의 부적을 써주었습니다. 오직 그가 알고 내가 알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형식주의를 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사람들의 반감을 부릅니다. 유마경 강의에서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