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 / 장대성
쓰다 만 일기는 자고 일어나면 잊히고 다음 장을 넘길 때 마지막도 없이 끝나 버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그러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찬장에서 컵을 꺼내 물을 따르는 일 팔다리를 펴고 허리를 돌리며 충돌하는 뼈마디의 소리를 듣는 일도
국에 소금을 더 넣고 숟가락으로 냄비 속을 휘휘 젓다가 주걱에 붙은 밥알을 떼어 입에 넣는다 딱딱하구나 과거라는 건 바깥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
돌아갈 수 없게 굳어 버린 다짐 같아 그것의 피부를 쓸어내리면 이런 느낌일까
따뜻할까 내 손은
매일 좋아질 거라고 말해 준 올리브나무가 죽었어 밑바닥에서 물이 넘칠 때 알았지 여기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나 사실 숨겨 둔 자식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막장 드라마가 더는 막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거울 앞에서
나는 내가 숨긴 마음이다 나는 내가 훔친 물건이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굳이 찾을 필요가 없는
발에 먼지가 가득 달라붙어 있어 저녁이구나 내가 아는 어두움이라는 건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서
불을 켜고 일기장을 넘긴다
내가 있다 아주 오랫동안 공전하고 있다
― 2024년 〈파란〉 신인상 시 당선작 / 계간 <파란> 2024년 봄호 ---------------------------------------------
* 장대성 시인(소설가) 1998년 광주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2024년 계간 《파란》 신인상 시 부문, 2024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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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이번 겨울은 관측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비가 내린다, 말하지 않고 비가 온다, 말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간 나는 얼어붙지 않기 위해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빗물의 의지를 생각하고, 팔을 벌리고 품을 만들어 내게로 오는 것들의 너비를 헤아려 보며 지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금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슬프고 아픈, 그러나 아름다운 문장을 적어 냈다고 생각하면 기쁜 표정을 감출 수 없게 되기도 했어요. 무릇 곁이라는 말의 다정함을 짐작할 때쯤
내게 이다지도 많은 사람이 당도하고 흩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나의 좋음을 위해 누군가는 생활의 아픈 구석을 감추고, 풍등을 날리며 기도하고, 새벽부터 몸을 일으켜 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날 함박눈이 내렸는데요. 그때 금방 녹고 잊히더라도 선명한 문장을 적어 보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의 쓸모와 아름다움이 그저 사람의 것이기를 바랐습니다. 일단 사람이 되어서 사람 아닌 것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요.
고마운 사람의 이름과 마음을 여기에 다 남기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민호 형과 웅기 형의 그늘 아래에서, 태훈, 병헌, 아영의 눈으로, 주성, 재민, 준섭, 형초에게 곁을 배우며, 천수호 선생님, 이병철 선생님, 안도현 선생님의 다정을 기억하고, 광주 친구들의 웃음으로 기쁨을 알고, 윤겸과 가족에게 오래라는 말의 지속력을 느끼며
나는 끝끝내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어느 밤에는 시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당위를 찾으려 노력했고, 술에 잔뜩 취해 한탄도 하고 헛소리를 내뱉고 그랬는데요.
시는 대단한 무엇이 아닌 그저 살아가는, 살아온 우리의 생활과 그 속에 깃든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것임을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이에요. 오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고 적당한 바람이 불어요. 다음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사랑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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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변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답변을 포함한다는 분명한 예시가 장대성의 시에는 있었다. 장대성의 시들은 마음의 보폭과 시선의 보폭이 비슷해 보였다. 그만큼 시선의 언어가 섬세하고 기민하다. 그의 원고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을 때나, 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서나,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의 거처에서나, 심지어는 게임 속 공간에서조차 일정한 생각의 보폭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갈고 닦았다고 생각된다. 편편의 작품에서 서술들은 개성적이면서도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성이 충분하다. 예측 가능한 지점에서 예측 가능하지 않은 보폭으로 나아가지만 조금도 억지스럽거나 무리하지 않는다. 발상과 진행이 낯설지만 또한 흥미를 잃지 않는다. 신인다운 신인의 등장이다. 이러한 점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이 신인을 쳐다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최종심에서 맨 처음 언급된 작품도 장대성의 것이었고 마지막 언급된 작품도 장대성의 것이었다.
경험과 인식 사이에는 시차가 있고, 다시 그 인식과 표현 사이에도 시차가 있다고 할 때, 뛰어난 자질을 가진 시인은 경험의 내용을 인식이라는 해석적 판단 이전에 언어화하는 기민한 자기만 방법이 있다. “보고 싶어를/마지막 장이 찢어진 책을 샀다고 한다거나/날이 정말 맑다를/세상에 그림자가 참 많다고 말한 게 그것입니다//양파에게 좋아하는 시의 구절을 읽어 줬더니/멍이 들며 썩어 버린 건 비밀이에요//이처럼 말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에서 보듯 이 신인은 서두르지 않고 경험을 그 자체로 보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숨긴 마음이다/나는 내가 훔친 물건이야”라고(「복원」)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섬세하고 예민하게 바라보는 사람일 것이다. 「메아리」 같은 작품에서 묘사되는 가족의 유니크함, 아니 가족에 대한 유니크한 묘사(“양말을 뚫고 나온 엄지발가락으로 대문을 밀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나 “밤새 곰 인형의 눈을 붙이는 사람의 동공은 실핏줄로 붉게 물들었고”)는 이 신인이 지극히 익숙한 대상을 바라볼 때에도 그 익숙함에 눌리지 않도록 말을 고유하게 벼리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주걱에 붙은 밥알을 떼어 입에 넣는다/딱딱하구나 과거라는 건”이라고(「복원」) 이어 붙일 때의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보폭에도 넉넉한 깊이가 도사린다. 반려동물이든 피붙이든, 가족의 죽음 이미지가 어른거리는 「청진」이라는 작품에서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너’를 어쩌지 못하는 화자가 “너의 생활 방식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쓰지만 그것이 타박이 아니라 속 깊은 걱정과 연민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죽으라는 말보다 죽이라는 말이 더 죽음에 가까운 것이라면/죽을 한 숟갈 떠 입에 욱여넣고 다 돌아간 빨래를 건조대에 널어 둔 뒤에/아깐 말이 심했지 그래도 아침에는 함께 커튼을 열자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를 잃지 말자/말하는 일이 사는 거면 좋겠다”에서(「청진」) 보이는 삶의 자세도 미덥다. 같은 죽음일지 모르겠지만, 시 「로그인」에서도 게임 속 공간에서 ‘너’에게 전해 들은 말은 날카롭게 읽는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 “그쯤 너는 비밀을 털어놓았는데/바깥세상에서 구 년간 개를 길렀고, 이불 속에서 코를 골며 자는 개가 사람처럼 느껴진 적이 있고, 그 개는/사람은 걸리지 않는 심장사상충과 싸우다 죽었다는 일화//개의 눈물 자국을 지워 주다가/슬픔이 무엇인지 깨닫던 날에 대하여”와 같은 구절에서 엿보이는 슬픔의 깊이도 넉넉하다.
‘내’게 친절하지도 않고, 환대하지도 않는 세상에서 한 줌의 응답을 기다리는 오늘날의 청춘의 모습이 담긴 「힘이 닿는 한 좋은 마음」에서도 “죽으란 법 없다는 말이/더는 장난처럼 들리지 않을 때//어둠을 밀어내고 방에 들어서는 햇빛/창가에서 좋은 하루를 다짐할 때/몸에 깃든 어둠이 빠져나가며/바닥에 그림자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어떻게 지내냐고 가족에게 온 연락은/조금만 더 나중에 답하기로 합니다”와 같이 힘겨움과 그것을 견디고 살아 내려는 의지의 비등함이 그 경험에 한껏 생기를 부여한다. 응모된 작품들이 모두 진지하고 유연하며 감각적이다. 시업을 오래 밀고 나갈 재목이라 생각한다. 축하의 인사를 거듭 건넨다.
- 심사위원 : 김건영 송현지 이찬 이현승 장석원 정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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