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 선수 사생활 매우 안좋았습니다. 사실 사고 많이 쳤죠. (저 허재빠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죠 -_-;;) 하지만 안좋은 사생활이 사실 언론에서 왜곡되면서 더더욱 심하게 비춰진 면도 없지 않기는 합니다.
아래는 예전에 후추에 올라왔던 허재 명예의 전당 글 중 허재의 사생활에 대한 부분입니다. 물론 필자가 허재에 대한 애정이 컸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싸려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이 필자의 의견에 상당부분 동의하기 때문에 퍼왔습니다.
(내용이 좀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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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나니 허재’
다음은 그 동안 언론에 공개 된 허재의 ‘비 농구 관련’ 헤드라인들이다.
잠시감상 하시길.
87년 중대4 김희애와 열애설 (최동철의 스포츠 쇼 출연 후,“오해")
기획자이자 선배 김진성과 음반 취입 계획?
88년 9.17 기아 88올림픽 개회식 선수 선서 (핸드볼의 손미나 선수와)
89년 5.25 강문영과 염문설 (과천 서울랜드에서 목격)
90년 5 `허재 선동’으로 기아 전패! 방열 감독 퇴진! (항명 혐의)
최인선씨(중대 출신) 감독 승격
91년 3.3 90 농구대잔치 챔프 결정전 대 현대전에서, 전반 4분 56초. 현대
전자 왼쪽 골밑을 파고 들다 전담 마크맨 임달식의 팔꿈치에 맞음.
흥분한 허재가 머리를 들이밀며 임달식에게 항의. 임달식 오른손으
로 펀치. 두명 다 퇴장 선언후, 허재 다시 임달식에게 대들자, 김성
욱이 또 한번 허재 구타. 전치 3주, 턱뼈에 금
91년 3.6 임달식 출장 정지 6개월. 허재, 김성욱 3개월 징계 결정
91년 3.15 허재 대표 선발 탈락. '과열된 승부, '격렬한 집중 마크'가 화근
91년 12.3 현대전자 김광. 경기 중 허재 폭행
92년 7 '허재 - 신혜수 염문설' (신라호텔 나이트서 수차례 목격)
92년 9 기아 자체 징계 '합숙 거부, 감독대행 지시 불복'
92년 11.12 이미수씨와 결혼 (부산 여대 조소과 출신)
93년 8.6. 음주운전으로 100일 면허 정지 (득남 축하연서 소주)
93년 8.18 대전엑스포 기념 농구대회. 전날밤 술먹고 경기 출전 못해
93년 8.28 대표팀 제외. 전력약화 (현실론) vs 악습단절 (개혁론)
정봉섭감독이 탈락 지지 '무한정으로 친구, 동료, 후배들을 희생
시켜온 존재'
방열 '대표선수다운 지성과 인격이 결여된 선수'
‘항몀 물의, 음주 사건'등으로 후배들에게 '나쁜 영향' 및
정신력과 팀워크 파괴 우려 때문에 제외
'재능은 최고, 정신자세는 밑바닥' 지도자 모두 동의(양문의, 방열, 정봉섭, 최인선)
93년 8.31 모일간지 인터뷰 '내가 만약 연고대 출신이라면 이런 고초는 없었을 것'
허재 선발 지지하던 정광석 (고대 출신) 감독 '허재가 연고대 출신이었더라면
그 품행으로 미뤄, 선배들의 더 냉엄한 질책을 받으며 심한 고초 겪었을 것'
94년 4.20 대표팀 '조건부' 컴백 -- '불성실할 경우 축출한다' 이인표 감독
94년 6 히로시마 AG 후 나이트서 음주 및 폭력 혐의 입건
95년 12.11 망년회 후 음주 사고로 면허 취소!
96년 7.27 '올림픽 음주 파문' - 후배 정재근 생일 파티조로 한인식당서
96년 8.8 '올림픽 음주 파문'으로 6개월 출전 정지 (허재, 최인선)
정재근, 김남기 (3개월) 이상민, 현주엽 (3개월 근신)
'스타의식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 무책임하게 마음대로 행동한데 대한 중징계'
96.11.23 무면허 음주, 사고, 뺑소니, 거짓 진술!! (친구들과 강남서)
96.12.17 보석석방,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2년 구형
97년 1.14 농구협회 '국가대표 영구 제명'
97년 5 기자회견 자청 "트레이드 요구' - 실추된 명예회복 위해…
99년 8.27 일본 ABC 대회 기간 중 '빠찡고 파문'
참, 사고를 치기도 많이 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후추가 허재의 이런
사생활을 ‘변론’ 해 줘야 할는지, 그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한가
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이런 헤드라인들에 의해서 일부 팬
들은 허재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명백한 진
실이고 언론의 ‘과대 포장’이 아닐까…? 필자의 사견으로는 아마 거의 모든 부분이
‘부분적 사실’정도는 될 것이라고 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라는 속
담을 필자는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 해야 할 부분은 ‘허재
의 모험기’를 다루어 왔던 언론의 시각이다. 우리가 언론 보도를 접하다 보면 특
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유독 냉정하고 비난성 짙은 입장을 취하는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라고 들 하는데, 이상
할 정도로 허재의 이런 사생활을 취재 하는 기자들은 냉엄했다. 대충 ‘연기만 났
다’ 하면, 사건의 경위와 진상은 무시하고 무조건 ‘굴뚝을 닫아 버리 듯’이 말이
다. 아직도 우리들의 기억 속에 생소하지 않은 ‘한 사건’을 예로 삼아 보겠다.
지난 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당시, 금메달을 기대하며 뜬눈으로 밤을 세웠던 국민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우리 올림픽 팀들은 기대 이하의 초반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뭔가 ‘기사 꺼리’를 고국의 품안에 안겨 주어야 했던 현지 특파원들은 ‘껀수’ 찾
기에 나섰고, ‘굶주린 맹수의 손아귀’에 걸려 들은 선수는 어김없이 허재였다. 정
작 허재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후배 정재근과 현주엽의 생일이 끼여 있는 날
밤, 그들의 생일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형이 그럼 간단하게 술 한잔 사 줄께.” 하
고 후배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cool하고 gentle하
게 한잔씩 하고 돌아왔다.” 라고 한다. 당시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술을 마시던
장소에서 교민들과의 시비도, 주먹 다짐도 없었고, 그냥 조용히 가서 한잔씩 하고 조
용히 돌아왔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선수촌에서, 최인선 감독은 얼굴이 ‘하얗게 질
려서’ 전날 밤 술 마시러 나간 선수들을 추긍했고, 허재는 또 한번 별 생각 없이 손
을 들었다. 같은 시간 한국에서 신문을 펼쳐 든 팬들이 읽어 내려간 동일한 사건에
대한 보도와 해석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의 말이 100% 사실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지만, 허재의 말과 기자들의 말 중 한쪽에 돈을 걸라면 필자는 분명 허재쪽에 건
다. 그렇다면, 앞에서 짚어 본 허재의 수 많은 ‘전과’는 어느 정도가 사실이었는
지 대충 짐작이 가리라 본다.
언제부터 인지 비교적 ‘조용히’ 살고 있는 허재의 지나간 사생활을 까뒤집어서, 맹
목적으로 그의 과거에 대한 대변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인간 허재’의
모습을 밝히는 과정에 있어서, 그를 가장 곤란하게 만들었고 소위 그의 ‘이미지를 구
겼던’ 사건들에 대한 배경과 분석, 그리고 나름대로의 ‘반증’ 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럼 여기서 그의 ‘전과’를 한번 분석
을 해 보자. 허재의 사생활과 관련된 기사 제목들은 대부분 3가지 부류로 나뉘어 진
다. ‘술, 스캔들, 그리고 지도자와의 갈등…’ 정도로. 이 세가지 ‘단점’만 뺀
다면, 아마도 그는 지금의 박찬호, 박세리 이상 가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되기
에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협회, 언론, 그리고 일부
팬들의 ‘허재 죽이기’에 대한 공식적인 사유도 이 세가지 단점 때문이었다.
그 동안 허재를 취재하면서 들은 주위 측근들의 ‘증언’에 의하면, 허재의 인생에
있어서 ‘술과 여자’는 따로 분류되기 힘든 ‘종목’이다. 허재가 일부러 ‘연예인
후리기’ 작업에만 매진한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여자에 미쳐있는 인간도 아니다.
우리 일반인들과 똑같이, 허재도 술을 마시는 과정에서 주위의 여자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고, 걔 중에 여배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해석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
다. 그렇다고 허재가 무슨 여배우들을 강제로 ‘겁탈’한 것도 아니고… 사실 우리
스포츠 신문들이 ‘선데이서울화(化)’만 되지 않았더라도 혈기 왕성하고 매력 있는
총각 스타가, 놀기 좋아하고 멀쩡한 여배우들을 상대로 좀 만났다는 사실이 ‘인간
쓰레기’ 취급 받을 일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또, 필자가 보기엔, 사회적으로 물의
를 빚은 일부 ‘강간 사건’을 제외한다면, 남-녀 관계야 말로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현상’ 이라고 본다. 해서, 허재와 관련된 ‘스캔들’로 비롯된 그의 ‘인간
성’에 대한 평가는 그 누구도 왈가왈부할 부분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 바이다.
문제는 술이다. 허재의 ‘인생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기로 하자. 하지
만, 허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술을 즐기는 부분 조차 부인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금새 깨달게 될 것이다. 그만큼 허재는 술을 가까이 해왔다.
하지만, ‘허재는 술을 저렇게 마셔대니 죽일 놈이다’ 라는 말 보다는, 그가 왜 그
리도 술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신선한 접근이라고 생각된
다. 그 부분에 대해선 그 어떤 언론도 시원하게 밝혀 주지 못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허재가 그 동안 겪어 왔던 지도자, 아니 ‘스승들과의 마찰’ 설이 있
다. 실제 가장 노골적으로 언론에서 이슈화 되고, 당시 농구판을 제대로 뒤집어 놓
았던 사건은 바로 1990년 코리안 시리즈에서의 기아 ‘8전 전패’ 사건이다. 이 사
건을 두고 언론에서는 대뜸 ‘사보타지’, ‘항명’, 또는 ‘하극상’으로 단정 지었
고, 그 유례없는 ‘파문의 진원지’엔 허재 이름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일제히 ‘주
모자’로 허재를 운운하였고, 기아 팀 내부적으로도 ‘중대 파 vs 연대 파’의 골이
깊어 가고 있었다는 가정 하에 허재는 ‘스승을 몰아 내는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낙
인이 찍혔다.
보도된 바에 의하면 그 사건의 발단은 대충 이렇다. 1990년 2월, 당시 기아산업 팀
의 선배 김유택은 ‘간통 사건’으로 팀 합류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강정수, 한만성
등 팀의 기둥 선수들이 모조리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 허재 역시 고질적인 허
리 통증과 코뼈 부상으로 급기야 중대 부속 용산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농
구 대잔치 2연패 달성을 위한 챔피언 결정전을 목전에 두고, 팀의 핵심 전력은 흔들
거렸고, 방열 감독 마저 얼마 전 있었던 심판에 대한 욕설 행위로 경고 처분을 받
은 상태라서 기아 농구단의 분위기는 어수선할 때였다. 입원 중이던 허재는 팀의 2
연패를 위해 이불을 걷어 차고 코트로 복귀했고, 그의 플레이는 팀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허재와 방열 감독의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농구대잔치 내내
‘펄펄 날랐던’ 허재를 제쳐두고 방열 감독은 챔프 결정전의 수훈갑이자 MVP로 유재
학을 추천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이를 보고 광분한 허재와 그의 아버지 허준씨는 구
단에게 강렬하게 항의했다고 하고, 결국엔 허재 입에서 ‘연대 출신 방열 감독이 연
대 후배를 싸고 돈 결과’로 단정 지었다는 얘기다.
이 사건의 찜찜한 결과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큰 ‘혁명’을 초래한다. 그 후
벌어진 코리안 시리즈에서 기아 농구단은 ‘8전 전패’라는 믿을 수 없는 부진을 거
듭했고, 나중에는 ‘허재가 주동하여 져 주기 경기를 지휘했다’고 한다. 더 이상
선수들에게 작전도 지시도 먹히지 않는 상황을 직감하고 방열 감독은 구단에 사표를
제출했고, 구단 측에서는 사표를 수리 했다. 그리고는 바로 중대 출신 코치였던 최
인선 씨를 ‘기아 호’의 새로운 선장으로 임명했다. 그 당시 언론의 해석에 따르면,
‘결국 기아가 방열 감독과 연세대 파를 버리고 허재와 중앙대의 인맥 쪽의 손을 들
어 줬다’고 한다. 자, 도무지 이 무슨 해괴망측한 얘기란 말인가? 또 한번 언론
측의 보도를 순수히 받아 드릴 것인가? 아니면, 그 내막을 파헤쳐 봐야 하는 것인
가? 여기서 필자는 다시 한번 ‘부분적 사실론’에 충실하고 싶다. 더 자세한 배경
은 나중에 소개 될 ‘후추 노컷 인터뷰’에서 생생히 소개 되겠지만, 한가지 짚고 넘
어가야 할 부분은, 이 ‘사건’이 있은 후로 허재의 ‘일대기’를 담은 신문, 잡지,
그리고 책… 전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허재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고 말했다.
허재의 이런 ‘음모설’은 농구 협회 관계자, 언론인, 그리고 일부 팬들로부터 ‘평
생 괘씸죄’ 를 적용받기에 부족한 면이 없었다. 허재의 대학교 진학 과정에서도 연
-고대는 중앙대에 쓴잔을 들어야 했고, 연-고대 인맥으로 명문 팀의 전통을 이어가
던 삼성-현대 역시 중앙대의 ‘기아 몰아주기’로 허재 영입에 실패했고, 결국엔 연
대 출신이었던 농구계의 지장 방열 감독마저 ‘중대=허재’ 와의 한판 승부에서 KO
패를 당했으니, 연-고대 출신이 ‘주류’로 장악하고 있었던 농구계와 언론계에서
‘꼭지’가 돌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었다. 지난 몇 십년 동안 농구계의 ‘언
터쳐블’로 군림해 온 연-고대 출신들이, 허재라는 ‘중대 출신 애숭이’ 하나 때문
에 체면이 말이 안 되는 꼴이었다. ‘스승을 배신하는 놈’ 이란 이유와 같이 우
리 국민들의 ‘유교적 정서’에 어필할 수 있는 명분이 이말고 또 있었을까? 연-고
대 동문들을 비롯하여, 농구계 원로들은 ‘두번 다시 기아에는 연-고대 출신을 보내
지 않겠다!’고 공언하였고, 연-고대 출신이긴 다 마찬가지였던, 심판, 언론, 그리
고 일부 엘리트주의 팬들의 시선은 곧 허재를 ‘갈아 마실 듯한’ 자세였다. 모름
지기 이 사건을 빌미로 허재를 취재하는 언론의 왜곡된 보도 현상, 그리고 심판들
의 편파 판정, 선-후배들의 ‘왕따 현상 및 폭행’, 그리고 일부 팬들의 ‘싸가지
없는 허재’ 주장은 더욱 더 심해졌던 것이다.
자, 그럼 허재는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일까? 애당초에 왜 ‘연
-고대 타도’ 심리가 발동된 것일까? 그 배경에는 전 중앙대 정봉섭 감독의 야심이
직결되어 있다. (허재 부친 인터뷰 참조) 더불어 허재의 ‘선천적 도전 / 경쟁 의
식’, 부친 허준 선생의 ‘의리 주의’, 그리고 ‘대학 농구의 기량 평준화’라는 그
럴싸한 ‘간판’이 뒷받침 되었기에 허재와 정봉섭 감독의 ‘엘리트주의 타도’ 외침
은 우렁차게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그 후 허재가 TV 화면에서 보여준 심판 판정
에 대한 거친 분노, ‘실력으로는 안되는’ 선배들에 대한 반항, 그런 모습을 지켜
보는 팬들의 외면… 이 모두가 복잡하고도 교묘하게 뒤엉켜 있었다. 다시 말해, 허
재의 ‘인간성’을 탓하며 그를 깔고 뭉개기엔 공개되지 않은 너무나 많은 내막이 있
었다는 얘기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허재의 ‘그때 그 사건’은 우리 농구계에 크나 큰 파문을 남기
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 농구계는 전례 없는 ‘과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작 지
금 허재 본인은 이 ‘사건’에 대해서 그다지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는 듯 싶다.
그의 성격 상, 그렇게 구체적이거나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본인을 싫어하는 협회, 언론, 팬들이라 할지언정, 그렇게까지 치밀한 계획과 지저분
한 의도하에 자신을 묻어 버리리라곤 그의 상식 선에선 이해를 못 하는 듯 싶다. 철
저하게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진 ‘왕따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 다섯에
접어 든 허재가 아직까지 그 일 때문에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성격도 아니다. 하
지만, 그 후로도 그가 ‘징계’를 당하거나 ‘불 이익’을 당했을 때에는 본인의 입
에서도 ‘내가 만약 연-고대 출신이었다면 이런 일은 안 당했을 것이다…’ 라는 투
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농구 외적인 요소’들로 인해 허재는 오기를 불 태우며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지금의 ‘농구 천재 허재’를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다.
반면, 허재 개인을 평가하는 측면에서는 ‘그때 그 사건’이야말로 평생동안 허재의
성격을 평할 때 마다 따라 다니는 “허재, 농구는 잘하지만….” 이란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미 10년 전부터 이 모든 ‘내막’이 공개 된 상태에서 그의 농구를
관전하고 그의 ‘인간성’을 들여다 보았다면, 과연 그는 어떤 인간성의 소유자로 팬
들에게 기억될지 궁금해 진다. 그 어떤 조직, 어떤 기업에서도 이런 보이지 않는
‘음모’, ‘배척’, 또는 ‘줄 서기’ 와 같은 지극히 정치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배
제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니 그런 부분들을 일일이 다 알 수 없는 우리 팬
들의 입장이라면, 농구 선수를 그저 농구 선수로만 평가해 주고 인정해 주는 풍토가
왜 그리도 받아 들이기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첫댓글 방열감독이 추천한 선수가 유재학이 아니라 정덕화선수 아닌가요? 그 사건때문에 본의 아니게 은퇴하게 되죠... 농대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였는데 아쉽습니다...
조기보면 김유택 간통사건있죠...저 사건으로인해 이혼하고 계부에 의하여 키워진 농구 유망주가 김유택의 아들 김xx군이죠(김진수던가요??확실치 않아서 xx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김진수 맞습니다.삐쩍 마른 체형도 김유택을 닮았더군요.그렇지만 새아버지가 잘 키워줫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