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텐베르그는 조선 활자를 어떻게 구했을까
역사는 항상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새로운 반전을 하게 된다.
얼마전 미국 대통령 후보였던 엘고어 대통령이 2005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1997년 금속활자 발언이후 2번째 중요한 발언을 하게 된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2005. 5.) 19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혁명은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인쇄술에 이어 세계에 주는 두 번째 선물이라고 말했다. ...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과 이야기했는데
그 사절단은 한국을 방문하고 여러 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고 전한 내용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한국을 높이 평가해 준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 하는 모습이었다.
얼마 전 청주TV방송국에서 활자실크로드라는 다큐멘타리가 실감나게 방영되었으며
인기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뭍으로 떠난 서방님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많은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근본적인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비록 중국,일본,프랑스, 독일 등 전 유럽과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옛 말에 칭찬은 많이 하고 병은 알리라 했듯이
멀리서온 벽안의 손님이자 미국의 큰손인 앨 고어 부통령이
“한국의 디지털 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인쇄술에 이어
두 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발전에 기여하는 사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 교황사절단이 조선에는 왔었다는 이야기를 암시적으로 하였다.
그의 발언은 1997년 이후 2번째 발언으로
그는 미국 부통령 출신으로 미국 극비정부문서를 접근할 수 있는 신분이었으며
극비문서를 통하여 구한말 미국이 한 짓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야기 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은 이성계의 건국이후
고려의 인쇄문화를 충실히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켰으며
계미자(1403년),경자자(1420년),갑인자(1434년) 등
전성기 조선의 활자는 고려의 ‘상정예문’ 이래 200년 가까이 실험을 거듭해 탄생했다.
반면 구텐베르크는 1455년 성서 인쇄에 성공할 때까지 고작 10년을 투자했을 뿐이다.
조선 활자가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 창작품인 반면,
구텐베르크는 어느 날 갑자기 세계적인 발명품을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가
중국의 교니 활자나 조선 계미자 등으로부터 영향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의 목판 인쇄술이 널리 유럽까지 전파된 것과 달리,
활자 인쇄술은 아랍에도 닿지 못했다.
14세기 초 페르시아의 대재상인 라시드 에딘의 ‘역사집성’을 보면
목판 인쇄술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을 뿐 활자 인쇄술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아랍에 닿지 않았다면 독일에 중국의 활자 인쇄술이 전해졌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가 조선 활자를 만났을 가능성은 없을까.
조선 활자 인쇄의 전성기는 15세기 초반으로 구텐베르크보다 20∼30년 앞선다.
당시에는 해상 실크로드가 활발했고
조선은 명나라와 티무르, 위구르를 거쳐 유럽까지 사신을 보내고 무역 교류를 했다.
활자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런 교류 사실을 토대로 영국의 허드슨은 그의 저서 ‘중국과학사’에서 “한국의 금속활자가 볼가 강을 넘어서 서양에 전파됐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학자도 있지만 19세기 서세동점은
세계사적인 변화와 자본주의 첨병이자 제국주의의 리더국가인 영국을 중심으로한미국,프랑스,독일,일본,중국의조선의 의 분할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발명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구텐베르그는 좋은 친구 덕분에
최고의 장사아이템을 얻었고
그는 로마교황청에서 보낸 사절단의 일행이 조선을 방문하여
얻어간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알파벳으로 바꾸어 크게 히트한 것이
구텐베르그 금속활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