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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중국을 통일한후 중국은 전근대기간에서 명대까지는 인도와 자웅을겨루는 세계인구대국이었고 명-청대 독보적인 세계 인구대국으로 군림합니다.
중국의 인구를 살펴보면 한~당까지는 보통 4800~5900만대이고 송, 남송, 원대는 대략 8500~1억3천만까지 이르고 명 청대는 6500~4억 3천만까지 이르는 기이할정도의 인구수를 보여줍니다.
그런이유와 인도와는 다르게 당시 세계에서 가장발전된 중앙집권체제를 이뤄냈던점이 있었기에 중국은 근대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군을 보유할수있었습니다. 중국과 그나마 비슷하게 병력을 보유한 나라들은
인도의 통일왕조정도가 있지만 이도 시스템이 분권적이고 봉건적이었다는점에서 중국을 따라가기힘들었고 그 이외에는 중국에 그나마 근접하는 나라는 없다고 보아도 될것입니다.
그래서 살펴보고자하는것은 중국의 시대별 총병력은 어느정도 되었는가와 가용병력이 어느정도되었는가입니다. 한번 중국의 시대별 왕조들의 총병력수를 살펴봅시다.
첫번째 은-주 시대.
은과 주의 군제는 비슷한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두왕조 모두 전문적 무사계층이 군대를 이루었다는것, 청동기의 무기와 병거가 주축이 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는점이 그렇습니다. 은의 병력규모는 문헌상으로 찾기 힘들지만 갑골문자나 유적등에 기반하여 살펴보면 보통 1천, 3천, 1만명정도의 '야전군'(총병력과는 다른개념입니다.)을 동원할수 있었던거로 보입니다.
은나라의 야전군동원병력과는 따로 총병력을 살펴보면 건국 직후 쯤에는 1사(師)가 1만명이되니 3사로하여 3만명, 중-후반대로가면 6사로하여 6만명에서 6만5천정도에 육박하지않나합니다.
주는 은보다 조금더 영역이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는 은보다 세력이 조금더 강성해지고 따라서 총병력도 함께 증가합니다. 주의 총병력은 주례,서경, 청동기 명문등을 살펴보면 7만5천에서 8만2천정도의 병력을
확보하지않았나싶습니다.
춘추- 전국 시대
춘추시대의 군제는 주에서 크게 진보한것은 없었습니다. 주와 마찬가지로 각 제후국들은 여전히 병거를 주력으로 삼았고, 전문무사계층이 전장의 핵심으로써 활동했던것도 유사합니다. 허나 춘추시대는 전투가 잦았기에 주나라 보다 군사력이 더 필요해졌고, 여러나라가 건국됨에따라 각 국가들의 동원병력이 주나라보다 훨씬 증가합니다. 춘추시대의 동원병력은 초楚나 진晉과 같은 강대국일 경우엔 3만여명선 이였다고 추정됩니다. 일반적인 제후의 경우에는 보유병력이 대체로 병거 1000승에 1만여명정도의 군대였습니다.
이러한, 아직까지 보기에 아기자기해보이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전환되면서 병거를 핵심군력으로 삼는 전쟁과 청동기의 무기에서 철기와 보병중심의 전쟁으로 바뀌어가고 각국의 병력은 그야말로 그전과는 비교조차 할수없을 정도로 폭증합니다. 대충 전국시대 초기에 동원병력이 최대 10만여명까지 증가합니다. 전국시대 후반무렵 군대의 거대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각국마다 최대수십만대군을 동원하게됩니다.
장평대전에서의 조나라만하더라도 40만가까이 동원했다는것을보면 무리는 갔을지라도 동원은 가능했다고보여집니다. 전국시대 말기 강대국이였던 진과 초의 경우에는 여러 기사를 보면
총병력이 가히 100만에 이르고, 약소국이라도 10만명이상을 동원할수있다고합니다. 진의 통일전쟁 당시 초에게 진이 쏟아부었던 병력은 대략 60만에 이릅니다.
전국시대의 병력을 기록한 사서의 기록을 보면 전국시대 국가의 병력 상황은
진 : 갑병80~100만, 병거 1000승, 기병1만4천
위: 보병 36만
주 : 보병 20~40(?)만, 병거 1000승, 기병1만
기: 총병력 30~50만.
초: 보병 100만, 병거 1000승, 기병1만2천
연: 보병 10만, 병거 700승, 기병 6천~6천8백.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말아야할점은 사서를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는것입니다. 사서의 기록을 총합한다면 전국말기 중국에 있었던 병사의 숫자는 300만명이 넘게됩니다.
그런데 사서에서는 위의 수치가 각 국가가 '비상' 시에 동원할수있는 최대의 병력이라는것입니다. 또한 사서의 문맥상 전투병력이 아닌, 노역부대, 보급부대, 수비군, 감찰군 등 모두 포함한수치입니다. 당시 100만대군을 보유하고있다는
진은 600만인구 초는 450~500만인구인데 위의 수치대로라면 인구의 4분의 1이 총병력이라는 이야기인데 이수치는 전근대 국가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성인남자의 비율이랑 일치하게됩니다.
전근대 국가에서 여자,노인,아이를 제외한 15~60세 사이의 자가 전체인구의 4분의 1정도 였습니다. 결국은 사서에 기록된 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총군사는 실제로 각 국가가 보유하고 있던 병력의 수치가 아닌, 당시 등록되있던 병역대상자의 총수의 합계가 100만에 이르렀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고 보입니다. 더나아가 위병력에 노역부대, 방어군, 보급부대등이 포함되있다는걸 감안해본다면, 실제 전국시대 국가의 총병력은 위 기사에서 나온수치의 절반이나 3분의1로 줄가능성이 높습니다.
진나라
진의 총병력을 사기에 기반해서 살펴본 결과 진의 인구는 2000만명이고 강병이 100만이라고 하는 기사가 하나있습니다. 그럼 과연 실제 진나라의 평상시 총병력은 어느정도 였을까란 의문이듭니다. 진의 군제는 기본적으로 모든국민이 2년간 군에서 근무하게 배정해놓는 국민개병제식의 징병제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2년간 전국민이 복무할 경우 그 총수가 '병역면제자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 최대인구의 2퍼센트 정도에 이릅니다. 이는 전근대 국가의 인구구조를 볼시에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의 인구가 2000만이라면 대략 징집병인 정졸의 숫자는 32~40만정도에 이른다는 결론이 나오게됩니다. 진의 강병100만또한 비상시에 추가징집을 할시에 100만명까지 병력을 증가시킬수있다라는 얘기로 보입니다.
한나라
전한의 경우에는 당시 등록된 호구조사의 집계와 군사제도를 바탕으로 계산해보면 전한의 전성기라 볼수있는 한무제 시절에 107만까지 추정이 가능합니다. 역시 이수치에서 고관대작, 중요장인, 대상인
특히 지주에 딸린 노비등의 병역면제자를 뺄시에 한의 총병력은 100만을 크게 넘을수없다고 보입니다.
후한은 모병제를 최초로 도입한 국가입니다.
즉 이말은 전국시대부터시작하여 진한대까지 내려온 국민개병제(모든 성인남성이 병역의무를 지는 제도)를 버리고, 지원자나, 거지등의 사회 하류층을군에 편입시키는 식으로 군제를 재편합니다. 그 이유는 농민병의 활과 무기등의 숙련도와 조직력이 급격히 저하가 잘된다는점에서 전투가일어날시 도주하는 자가 속출하였다는점이 있습니다. 이후 중국은 농민병에 의존하는 군제에서 탈피하기 시작하고 직업군인제로 점점 변화합니다.
군호를 지정하여 군호의 가정에서 성인 남성 1명씩 대대로군인을 징병한 제도나(삼국시대,원,명) 거의 지원제에 의존한 군제(당 중-후반기, 송, 청)으로 군제가 여러측면에서 바뀝니다.각설하고 후한의 총병력을 설명하자면 수도와 변경등을 지키는 직업군인으로만 이루어진 중앙군이 4만5천정도 이외에 각 지방에 주둔한 향군성격을 지닌 주군병등이 있었습니다. 1개군당 대충 1만2500~1만5천대정도로 조직되었으므로 주군병의 총수는 25만명가량이됩니다. 그렇기에 후한의 총병력은 중앙군과 주군병을 합쳐서 계산해보면 30만명 가량이됩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중국의 군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습니다. 전술의 변화를 보자면 삼국시대를 전후하여 등자가 도입되고 채용됨으로써 기병이 전장을
누비게됩니다. 군제의 변화로 보면 여러 중국왕조에서 채택하여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일부지방)까지 이어내려지는 둔전병제도의 시작이 됬다는점등이 삼국시대의 주요한 특징입니다. 후한 왕조가 자멸하고, 정부에서 파악할수있는 호구 수가 후한말의 6분의1에서 8분의1수준으로 급갑하기 시작하자더이상 후한에서 채택했던 직업군인식의 제도로는 도저히 병력을 확보할수없게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조조는 유랑민, 마적, 군벌들의 사병을 모아 군호에
등록을시키고 군호에 등록된 가족은 자손 대대로 내려가며 1명의 병사를 제공하는식으로 합니다. 이러한 군제를 변화시켰던 위나라 즉 세병제로 변화시켰던 위는 총 30만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가 가능케됩니다. 2년동안만 군에서 근무하는식의 원정에는 단점이 있었던 진-한대의 징병제와는 다르게 세병제의 경우 한번 병사로 등록이 될시에 20-60세까지 계속 군에서 근무를 해야만하였고,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그리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맡는식으로 계속적으로 병사직이 세습되었습니다.
촉과 오또한 위의 세병제를 답습하여 병력을 확보했는데 촉은 총 10만의 병력, 오는 멸망 직전 20만명의 군세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위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서진의 경우에도 오를 멸망시킬때 총병력이 대략 50만명에 육박하였습니다.
서진 오호 십육국시대
서진에서 오호 십육국시대까지 오를 멸망시키고 남북의 중국을 통일하게 된 서진은 오의 패잔병들을 흡수하여 70만명의 병력을 확보하게됩니다. 하지만 서진이 짧은기간만에멸망해버리고 이민족들이 중국북부에 나라를 세우기 시작함으로써 시작된 혼란기인 오호십육국대에 인구와 병력자원이 기근, 전쟁등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보통 남조는 10만에서 25만까지의 군세를 유지하였고, 북조는 대체적으로 10~30만까지를 보유합니다. 동원가능병력은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킬때 8만명정도라고하니 최대 전투에 동원이가능한병력은 10~15만정도가아니였나합니다. 그리고 수 문제가 중국 북부를 석권하고 통일전쟁을 일으킬때 동원한 군사가 518,000명 가량되었습니다.
당나라
당 초기의 군제는 징집제형식이였는데 군호에 등록된 병사들이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1년에 겨울과같은 일정기간동안 1~2개월가량을 훈련을 받는형식의 부병제였습니다. 건국 초의 당은 아직 지방군벌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중앙정부의 지배력도 지방까지 확실하게 미치지못하는 상태였고 호구조사도 실제인구의 5분의1정도밖에 조사를 하지못하던상태였기에 아직 많은수의 부병을 확보할수는없었습니다.
당 초기에 당군은 35만명정도의 병력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당이 지배력이 완전해지고 국가가 집계가능한 호구수가 급증하는 시점인 당고종-측천무후대쯤되면 병력이 총60만명으로 늘어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부병에 속한 병사들이 건달이나 부랑배같은 사회 하류층, 50~60대의 노인등의 질이 낮은 병사들로 채워지게 되자 병력의 조직력이나 사기의 하락이 옵니다. 이것 때문에 당현종 대부터 국경지방의 병사들은 전투경험이 많고 젊은 병사를 위주로하는 모병제로 바꾸기시작했고, 천보 대에는 거의 모든병사가 지원자 즉 직업군인으로 이루어진 군대가됩니다. 이시기의 총병력은 당태종말기 당고종 정도대의 군사인 60만명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전한과 후한의 부병제와 모병제의 차이를 볼시에 수가 비슷하다더라도 똑같이 볼수는없을것입니다. 서기 805년에 당의 총군세는 대략 80만으로 늘어나고 그 이후 당말기에는
병력이 100만이상증가하게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좋은것이 아닌것이 이 군세의 대부분이 지방 절도사의 자립으로써 생긴 사병들이었다는것입니다. 그렇기에 병력은 늘어났지만
중앙정부가 매우약해지는 결과를 야기하고 결국 당은 멸망의 길로 치닫게됩니다.
송나라
송도 기본적으로 당 현종대부터 이어지는 식의 모병제로 군을 충원합니다. 즉 급료를 주고 병사를 젊고 건장한 성인남성만을 뽑아 60세가 될때 까지 군에서 제대하게 만든것입니다.
당과 또다른 차이점은 당 중-후반에는 거의 군대가 지방 절도사 휘하의 군벌성격을 띄는 병력들인데 비해, 송의 군대는 모두가 황제 손에있는 중앙정부에 예속된 직할군이었다는것입니다.
하여튼 송의 병력은 송태조가 건국시에 22만, 태종때 66만, 진종때 91만, 인종때 126만으로까지 증가합니다. 동시기에 중국의 인구도 북송말기의 조사에따르면 2천만호가량으로써 대략 1억명으로
엄청나게 불어납니다. 하지만 늘어난 인구에도 불구하고 서하와 요등의 매우강력해진 이민족들이 존재했던탓에 태종말때부터 시작하여 80~90년동안 가파른 군세확장으로써 국방비가 1년예산의 80퍼센트 가까이 담당하게됩니다.
원나라
쿠빌라이가 건국한 원의 군제는 세병제와 천호제만호제등에 기반을 하고있습니다. 이말은 앞서말했듯이 국가에서 작성한 군호에 소속된 가족은 1호마다 1명의 병사를 보낼 의무가있고
한번 뽑힌병사는 60세가될때까지 군에서 제대해야했습니다.
원은 몽골족이 중국을 정복할때 데리고 온 유목기병이 병력의 핵심이되고 보병은 예전 구 남송군, 한인 금군이나 그들의 후예들이 부족한 병력을 확충하는 방식이였습니다. 이런 전투에서 항복한병사들에게는 각자 2~5호의 첩군을 배정해 병사들의 비용을 부담하게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원은 전성기에 총 100만여명의 군세를 유지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100만대군은 사실상 만호나 왕공들의 병력이었고 대칸이 직접지휘할수있는군은 1만5천에서 2만에지나지않았다는것도 염두에 두어야할것입니다.
명나라
명은 원의 군제에서 약간 변형을 시켰지만 기본적인 틀은 원의 것이라 볼수있습니다. 민간인과 구분되는 군호를 작성해 군호에 등록된 병사로 군대를 충원한것입니다. 천호제 만호제와 비슷하게 100호소의 위를 최소단위로 100호소 10개를 1000호소 하나로 이루고 5,000호소로 1위를 편성하는 방식이였습니다.
원과의 차이점은 원이 군인들에게 몇가구를 배정하여 한명의 병사를 지원하게하고 자신이 장비에 대한 비용을 내고 봉건적성격이 강했다는데에 비해 명은 병사중 일부를 땅을 경작하게하고, 장비를 국가에서 보급하고, 송 이상으로 황제에게 병력이 직속되있었다는점등이있습니다.
그리고 명의 군제에서 빼놓고 갈수없는것은 둔전제인데 변경지방에서 40~50프로정도의 병사가 복무할때 50~60프로의 따른병사들은 지방을 지키는 향군겸 경작을하는식으로써 중국 내지의 지방군들은 자급자족하게 했다는것입니다. 명의 정부장부에 기재된
병사가 전성기에 최대 350~400만에 이르렀지만 실제로 복무하는 병사는 230만~280만정도 밖에 되지않았습니다. 명의 병사또한 원과 마찬가지로 대대적으로 세습이 됬음은 물론입니다.
청나라
청의 군제는 누르하치가 조직한 팔기군과 태종때 요동을 경략하면서 조직된 한인 지원병으로 이루어진 녹영병으로 분립될수있습니다. 팔기군은 청이 중국에 입관할 때 약 15만명이었지만, 시간이지나고 군세를 늘려 약20만에 육밥합니다. 녹영병은 오삼계의 난 이후에 상당한양의 증가 추이를 보이는데 강희 초반에 40만, 건륭 말기에는 총수가 60만까지증가합니다.
청의 병력총합은 전성기 무렵인 18세기 중반에 총 90만명에 달했다고 보여집니다.
읽기 귀찮으신분들을 위해 요약해보자면 중국의 역대왕조 총병력은
은 초-중반 : 3-4만
은 후반 : 6만-7만
서주 : 8만
춘추시대 : 강대국의 경우 3만전후
전국시대 초반 : 10만 안팎
전국시대 후반 : 최대 수십만
진 : 평상시 40만, 비상시 100만까지(2천만명)
전한 : 100만( 무제시절 5360만)
후한 : 30만 (인구 5700~5800만)
서진 : 70만가량( 집계인구 1600만, 추정인구 4000만대 중반)
오호 십육국 : 혼재했던 국가들 10~30만가량.
당 초기 : 35만 ( 등록인구 약1200만, 추정인구 4000~4600만)
당 고종-현종 초반 : 60만(인구 약 5천2~3백만)
당 현종 말기 : 80만 ( 인구 약 5천6백만)
당 말(8세기 후반이후부터) : 100만
송 건국직후 : 22만 (인구 6천만가량)
송 태종 : 66만 (인구 약 6천4백만)
송 진종 : 91만
북송 인종이후 : 126만(인구 7500만~1억)
전성기 원나라(1300년무렵) : 총 100만 ( 등록인구 6천만, 추정인구 약 8000만)
명 초 : 총 180만 ( 인구 6천8백만)
명 15세기 초-중반 : 총350~400만(인구 7500만)
명 말 : 총 330만 ( 1억~1억5천만)
청 강희제 초 : 약 60만 ( 등록인구 8천만, 추정인구 1억2천~3천)
청 건륭제 : 90만~95만 ( 인구 2억8천~3억2천대)
중국왕조의 실제 공격을 위한 야전군 가용능력
이 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야전군과 총병력수는 별개로 계산되어야됩니다. 보급의 문제성때문이지요.
이러한 보급때문에 야전에서 대군을 동원하는경우는 거의없었습니다. 국가간의 니가 죽니 내가죽니 식의
한국가를 거덜낼정도의 총동원이 일어났던 전국시대 후반기를 제외하고는 보통 중국의 야전군 규모는 1만 5천에서
5만정도 였습니다. 중요하거나 대규모 원정군의 규모는 10만명을 전후했습니다.
황제가 직접 친정할정도의 규모는 보통 20만대를 이루는게 중국 야전군의 한계성이였습니다. 20만대군을 동원한경우에는 중국 역사에서 사실 손을꼽을정도인데, 예로는 서진이 삼국통일전쟁에서 동원한 20만대군, 적벽대전에서의 조조의 20만대군, 송이 연운16주로 북진할때 동원한 20만대군 정도가있습니다.
20만 이상을 동원한대군은 정말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적어지는데, 수의 통일전쟁 당시 동원한 518000명가량의 군대나, 홍무제가 북원에서의 부아르누르때보낸 30만대의 군대나 서달의 카라코룸공격당시 20~25만대의군대. 영락제때 5차례정도 50만대군이 간것, 명 서달의 북벌때 동원한 25만대군 그리고 수양제가 고구려정벌당시 조직한 113만대군정도밖에없습니다. 결론을 내려보자면 중국왕조의 대체적인 병력은 50만~90만대였으며 명이 예외적인 경우로 쳐져야할것입니다.
중국왕조의 인구가 보통 5~6천만대였다는것을 고려한다면 중국의 평상시 군대는 인구의 1~1.5퍼센트정도였다고 생각해볼수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사서에나오는 100만대군을 동원할수있느냐란 의문이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100만대군을 동원하긴 불가능이라는것입니다. 총병력과는 다르게 동원할수있던 야전군의 규모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거국적인 동원을하더라도 보급의문제로인해 재정의 심각한 손실이있었기에 15-20만을 크게 넘지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보급의문제때문에 중국의 왕조들의 전통적인 전투방식은 중국내지의 한거점에 적이오기를기다리고 순식간에 향군과 주둔군으로 포위하는 방식을 즐겨사용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중국에서 100만대군을 동원할수는 없었다고 봐야 될것입니다.
[출처] <U>중국왕조의 병력에관해서.</U>|작성자 <U>Rothschil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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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에 동양 vs 중양 vs 서양 이야기를 했죠?
중국만 있어도 동원력에서 차이가 난다.
옳으신 말씀들이십니다.
사실 저도 서양 중양을 높게 평가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근소하게 우세하다고 했지 내심 '중국만 해도 뭐' 했습니다.
어느 국가의 인구 = 병력 이라는 착각은 버려야 합니다.
병력이란 최소한의 무장을 갖추고 최소한의 군사훈련을 거쳐서 적어도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소총같은 최소한의 무장도 없으면 그냥 불쌍한 민간인일 뿐이고 무장을 갖추었어도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할 정도로 최소한의 훈련을 받지 못하면 그냥 무장폭도일 뿐입니다.
이런 병력을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이 동원능력입니다.
따라서 동원능력이 뛰어나려면 인구 자체가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최소한의 무장을 시킬 수 있는 공업력과 인력을 찾아내어 훈련시킬 시스템과 노하우, 국민에 대한 장악력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소련의 동원능력이 압권이었던 것입니다.
인구 자체로야 중국이 훨씬 많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동원능력은 소련에게 택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전의 중국이 출동하면 어떨까?
첫댓글 참고로 100년 전 인구조사만 해도 파악이 힘듭니다.
저기에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기저기 자료를 수집하여 가장 현실에 접근하기 위하여 노력한 글
이 정도로 봐주시면 감사합니다.
다시 말해서 죽자사자 덤비는 분 없으셨으면 합니다.
뭐 지금까지 한 분도 안계셨지만 희희 ^^
사기네 허러거러거걱 고구려는 저런놈들이랑붙은거임?
으음... 그동안 고대,중세국가 평가하던 기준이 대대적으로 수정되도록 하는 글이군요...
뭐야... 은나라 무서워;;;
음역시 대단한 -ㅂ-
마지막 추가글에서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건 제 착각이었으면 하는데요.
어느 국가의 인구 = 병력. 이라는 댓글을 제가 달았던 것으로 압니다만.
정확히는 명국의 군대(장부상) = 영국의 인구 라고 달았습니다만. 이게 착각이라고요? 분명히 댓글상 장!부!상! 이라고 밝혔습니다.
즉 동원가능한 군대를 기록한 장!부!상! 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런식으로 왜곡하시면 곤란합니다.
죄송한데 혼자 기분 나빠하시면 더욱 곤란합니다.
심지어 저는 원효대사님께서 왜 그러시나 하면서 제가 올린 글에서 원효대사님 글을 '찾기까지 했습니다'
즉 누구를 겨냥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솔직히 무엇때문에 이러시는가 하면서 찾아본 댓글.
그 댓글을 원효대사님께서 이러셔서 방금 제대로 읽어봤습니다 ㅡㅡ;;
그리고 마지막 추가글 자체가 제가 몇 달 전에 썼던 글을 생각나서 그대로 퍼온 것입니다. ㅡㅅㅡ
제가 미래를 예견하고 원효대사께 반박할려고 저런 글을 몇 달 전에 썼으면 저는 점집차려야.....
원효대사님이 말씀하셨던 것 명나라 장부상 인구 = 영국인구라고 하셨던 것도 동의합니다.
원효대사님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인데 저보고 그걸 가지고 뭐라그랬다고 하시면서 혼자서 열내시니 제가 당황스럽네요. ㅎㅎ;;;
그리고 저기에 '인구=병력'은 인구와 병력의 비례식이 꼭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산업혁명 이전의 중국은 압도적인 인력과 산업력과 국가장악력을 가지고 있으니 병력수부터 엄청난 압권
제가 오해했나보네요. 죄송합니다. 글 본문 잘 읽어보다가, 맨 마지막에 댓글을 글 올리실때 다신건줄 알고 혼자 괜히 울컥했네요.
죄송합니다...ㅜㅜ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사과란 당사자가 기분 나빠야 하는 것이죠.
저는 기분 나쁘기 보다는...
<뭐..뭐야 아무것도 안했는데 >
이랬습니다 ㅎㅎㅎ
안서절도사님이 말하는건 실질적인 동원능력이고 제가 말한건 장부에 기록된 동원능력을 말하는 건데 말이죠.
더군다나 글 내용을 보면 15만에서 20만이 야전군이 '전투병'개념인거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수나라가 동원한 113만의 대군조차 전부다 전투병과가 아닐텐데요? 저 중 실질적인 전투병과는 대략 30만에서 40만 정도될텐데, 수나라 동원병력은 보급+전투+기타잡병과 =113만으로 계산하고 이전 왕조의 병력동원은 순수 전투병과만 계산하는 건 오류 아닌가요?
수의 2차 원정군(양제의 첫 원정)은 보급대 200만이 따로 있습니다.-_-;
@범나비 .........네......3년전 글에 댓글이 올라와서 무척이나 당황;;;;;;;;;;;;;;;;;;;;;;;;;;;;;;;
시대적인 한계가 제약하는 바가 크군요. 하긴 유럽이나 중동-유럽과 중동은 특히 2번의 흑사병 크리를 맞으면서 중원과의 격차가 더 커졌는데, 첫째 흑사병의 피해만으로도 그때까지 가장 오랜 문명의 출발점으로 중국과 맞먹는 인구 '밀집도'를 가진 근동이 쑥대밭이 되고 중국의 엄청난 회복력으로 인해 결정적인 차이가 나는 ㄷㄷ-에서도 보통 원정시에는 많아야 5-7만 수준이고 군주가 이끄는 친정 정도나 가끔 20만~30만 몰고다닐 뿐이니;; 제정 러시아만 보더라도 1,200만 대군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하지요(문제는 그걸 유지하고 운송하는 게 ㅎㄷㄷ한 일이라)
전근대국가의 동원력이란게 한계가 명확한데요. 더군다나 특정재화의 생산에 전문화 될수록 그 특정재화의 생산비용이 체증되기때문에 10만의 군대와 100만의 군대는 단순 수치상으로는 10배지만 비용이 체증되어 기하급수적으로 비용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규모가 클수록 원정이나 야전군을 만드는게 더 어려워지죠. 산업혁명 이전의 중국은 출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 군대 유지하는것만 해도 벅찹니다. 그 많은 군대를 원정이나 야전이 가능하게 만드는 건 산업화되고 근대화된 국가가 가능한 거지, 전근대국가 중국으로서는 안 되는 거죠.
ps. 전근대국가를 근대화된 국가랑 착각하면 안 됨..
늘얘기하는거지만 왜 100만대군 10만대군이라고 말하졍? 934939대군일수도잇는데 말이죠.
읭? ㅎㅎ
그러개 ㅋㅋㅋㅋㅋㅋ 반올림한듯 구장산술의위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마가 전성기(2세기)에 추산 8800만 인구에 군대가 30만 수준이었는데, 제정 이후 모병제로 전환한데다가 대체적으로 내전과 파르티아와의 전투를 제외하면 큰 전투는 없던 시대여서 군대 규모를 작게 유지했던 것을 감안해보면
당대 중국하고도 맞설만했을 것 같습니다. (떡밥)
8800만은 너무 높은 추산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위키 기준으로는 한나라와 비슷하게 5500만 명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중앙집권체계에 의한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중국이 월등해서 어지간하면 한나라 >= 로마로 기울더군요.
위키 기준으로 로마 인구는 대략 5600만에서 8800만 정도로 '추정'하거나 '제시'하는 수준입니다. 2006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로마 인구가 8800만이 될 것이라는 논문이 나온 이후 다시 논쟁이 재점화되었구요. 대신에 19세기에 횡행했던 1억 2천만 설은 잠잠해졌습니다. 로마의 인구는 당시까지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집도도 높고 생산력도 높았던 지역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 지방에 많이 의존한 까닭에 5600만~8800만 사이의 수준으로 추정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은-주 시대 수치는 믿을 만한 것일런지;; 애초에 중앙집권국가였는지 아닌지도 모르니;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가장 가까운 근사치를 구할려고 여러가지 자료를 생각해보고 여러가지 가설을 생각해서 저런 수치가 나온 것이기에 믿고 안믿고는 개인 자유지요. ㅎㅅㅎ
그리고 은나라 주나라는 엄연히 봉건제국이었죠.
그러니 춘추전국시대 발발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