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 즉, 무상정등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무슨 뜻인가에 대해 선문답을 피하고, 경전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는 것도 피하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無上은 위가 없다 즉 최고라는 뜻이고 正은 바르다라는 뜻이며 等은 평등하다는 뜻이고 覺은 깨달음이라는 뜻이 됩니다. 무상정등각에서 앞에 달린 무상정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버리면 결국 등각만 남습니다. 그렇다면 등각이란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하겠지요.
등이란 다들 아시다시피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등하다는 것은 불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차별을 두지 않으며 또는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평등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평등의 의미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수도 있습니다. 남녀가 평등하고, 사람이 평등하여 노예가 없으며 왕이 따로 없다는 인간 세상사의 평등(만민평등사상)이라고 생각하면 평등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평등은 획일적인 평등, 원론적인 평등과는 다릅니다. 분명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평등의 세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풀수없는 인류의 숙제가 될것입니다. 가난과 부유, 성공과 실패, 불행과 행복, 이 모든 것들이 대립적이고 비교가 되는데 어떻게 평등을 이룰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평등은 선택의 기준 즉 좋고 나쁨을 초월한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는 가난으로부터 부자가 되는법을 가르치고, 실패하지 않고 출세하는 법을 가르치며 불행해지는 방법이 아닌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분법에서는 결코 어느 한쪽도 버릴수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행없이 어찌 행복을 알고, 불편없이 어찌 편리함을 취할수 있겠습니까 편리란 추구하면 추구할 수록 계속 불편함만 생산될 뿐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될수록 자신보다 더 부자들과 비교하게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한 평등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행복과 불행이 평등하다는 이야기 일까요, 아니면 행복과 불행을 평등하게 즉, 똑같은 비중으로 받아드리라는 말일까요. 앞서 말했듯이 세상은 상대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남녀, 음양, 밤낮, 삶과 죽음 등 이런 것들을 부정하지 말고 똑같은 비중으로 평등 받아드리고 서로 분리될수 없는 것으로 받아드리라는 뜻이 바로 평등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등의 지혜를 의미하며, 부처님이 설한 중도, 즉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등함을 의미합니다.
각이란 깨달음을 의미하고 깨달음은 본래 자성을 깨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심시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는 신도 아니고 동떨져있는 존재도 아니며, 시험에 합격하면 주어지는 자격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본래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따라서 등각이란 우리말로 번역하면 '평등한 마음'이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무상정등각이란 본래 고요한 평등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부처님만 깨우친 신비한 진리는 없으며 부처님이 만들어낸 진리는 없습니다. 그 진리는 원래부터 우리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등한 마음은 어떻게 생겨나느냐 하는 것이 다음 문제라 하겠습니다. 화두를 풀고, 참선을 하고, 절에가서 기도하고, 불경을 달달 외워야할까요? 평등한 마음을 보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행방법도 다 좋습니다. 어떤 한가지 수행법이 더 좋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다시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이되고 평등한 마음가짐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평등한 마음을 찾지않고 오히려 방편에 집착하고 알음알이를 구하려 한다면 어떠한 방편도 병이 되고 말것이며 약이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자성에 만법이 있다고 합니다. 이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번뇌와 보리,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삶과 죽음, 선과 악의 문제가 자신의 성품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은 좋은 것이고, 저것은 나쁜것이다' 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등한 마음에서는 좋고 나쁜것 어느쪽에도 치우치면 안됩니다. 이것은 산술적인 평균 즉 중간에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이분법적으로 대립되는 두 극단을 취하지말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평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등각을 이루려한다면 번뇌를 없애려 하지도 말것이며 보리를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보리를 추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깨우친단 말인가? 라는 반론이 나오게됩니다. <신심명>의 첫 구절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아서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라는 말씀처럼 선택을 하는 분별심이 생기는 순간 평등한 마음은 사라진 것입니다. 초보자들에게는 이 말이 어렵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꾸준히 공부하여 안목을 높이면 이해할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말을 따지고 들 시간에 차라리 오로지 화두에 전념하던지 염불에 전념하는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도 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진정으로 화두를 참구 하고 염불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화두를 참구하고 있다'는 생각이나 '염불을 하고있다'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일어난다면 이미 화두참구나 염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렇게 닦아가다보면 어느날 기연을 만나서 깨우치는 날이 오겠지요.
첫댓글 언구에 집착함은 아니나 .. 법안님은 '등' 을 '중도'로 풀이하신 것 같네요 ..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무상정변지 (無上正遍智), 등의 표현은 석가부처님의 깨달음을 미화 포장 하려는 후손들의 충정이겠지요 .. '등각', '변지' 는 모든 것에 두루, 빠짐없이, 전부를 알아 내셨다 .. 정도 이겠지요 ..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으셨다 .. 즉, 세상의 모든 답을 모두 알아내셨다 .. 모든 진리 의 실상을 아셨다.
무상정등각 을 이해 하려면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핵심인 '사성제' '연기' '중도' 를 바로 알아야겠지요 .. 여기에 어느정도 이해가 다다르면 .. 불교가 무엇이며 .. 우리가 무엇을 위해, 무슨 수행을 해야하는가 를 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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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정등정각"이란....
설해하여서는 안되며, 또한 설해 하여서는 알 수 없는 선가의 화두나, 직지 언어가 아니라,
석존의 깨달음을, 수평적, 수직적, 공간적 좌표로 문자적 표현을 한 것 입니다.
그냥 쉽게 "무 상정등 각"이란...석존의 깨달음보다 높고 바르며, 같은 깨달음은 없다. 즉 석존께서 깨달은 진리 그 이상의 진리는 없다. 석존의 깨달음이 궁극의 진리다."라는 의미 입니다.
그리고, 그 궁극의 진리를 깨달은 분이라면..."그것을 연기다. 중도다. 그것 뿐이다.......등등의 어떤 언설이나 수식어도
사용 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아시게 됩니다.
"법성원융무이상"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말로서 진리를 표현할수 없느니 개구즉착이지요. 그러나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최대한 가깝게 표현하는 것이죠. 고추에 관한 논문을 백편을 읽어도 입에는 고추맛을 느낄수 없지요. 그렇다고 고추관한 논문이 모두 틀렸다고 할수는 없는 것이죠.()
여시여시...
모두 틀리다니요.
모두 맞다고 해도 어긋나지 않습니다요.
세간 일체의 언설과 사상, 예술이 "그것"의 설명이고 방편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조불, 즉 선사들이나, 스승 또는 "심인"등등의 상에 떨어져, 그들의 말 찌꺼기를 붙잡고,
앵무새의 깃털을 날리며, 대롱을 통해 하늘을 보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한 말씀 드린 것이니...너무 개념치 마시길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적어도 이 공부에 있어서는 불가능이 있으면 안됩니다.
과거불들께선.....언설을 떠나 그곳을 직지하고(直指人心) 설명 했습니다.
그것이 곧 "선"이기도 합니다.
"법성원융무이상"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방편이다 방편이다 하기 이전에 방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구려...방편을 또 땐목이다 땐목이다 하려거든 땐목은 또 무엇인지 참구해 보십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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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반야가 없어 방편을 이해 하지 못하니,
뗏목 인들 아시겠는가...뗏목이 방편이고 방편이 뗏목이라네....
하하하~~
그렇죠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본지풍광님께서 불가능으로 만들고 계시네용 물론 불가능과 가능이 왜생기는지도 모르실테니 제말을 알아 들을 수도 없으시겠네용... 하여턴 가능한 불교를 풍광님께서 불가능한 xxx로 만들고 있으니 반성하시지요....()()()
바보는 스스로가 "바보 인 줄 모르고 나는 천재"라고 한다,
그대의 "가능"이 바로 "불가능임을 깊이 통찰 하라".
"소 닭 보듯 한다."라는 말의 뜻을 알면, 그대를 상대 하되 그렇지 아니 하면 "소 닭 보듯 할 수 밖에"...
경거망동 하지 말기를....
일언일구가, 그대들의 논리대로, 인드라망처럼, 얽혀 있음을 알라...
이것이, 그대들이 여의주로 알고 부여잡고 놓지 못하는 바로 그 "연기법"이라는 것이다.
그대의 망언과 망견은 그대를 가르 친 분에 대한 배은이 될 것이고 욕이 될 것이며,함께 하는 도반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배우려고 왔으면, 진정성을 가지고 겸허하게 법을 청하고, 구하라...
아는 바를 스스로 점검코자 한다면, 올바른 정견으로 법 거량을 하라.
좋은 말씀이십니다. 인터넷이 대중화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을 표현할수 있는 장점이 생겼지만, 다른 한편으론 마구잡이로 정련되지 않은 글들도 올라온다는 것이 깊은 대화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기도하지요. 특히 법을 탁마하는 곳에는 법리가 어긋나게되고 토론자체가 흐려지는 폐단이 있지요. 하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용사혼잡인 것이니, 눈 밝은 자라면 가려서 취사선택할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부디 자중자애하여 그대들이 스스로 "궁극"이라 여기는 "연기법"이라도 바르게 행하라.
그러고, 눈을 크게 뜨고 귀를 넓게 열어, 보고 들으라...
이곳은 연기법, 중론" 정도의 교리적 언설을 늘어 놓으면, 유아원 취급에 아무도 상대 하여 주지 않는다...
안과 색을 연하여....라는 오온 12처 18계를 운운하면, 유치원생 취급을 한다.
이곳에선, 찰라의 순간에. 연기를 포함한 석존의 8만 4천 광장설을 초월 한다.
느끼는 바가 있으면, 돌아가서, 그대들의 한계를 스스로 돌아 보라...
그리고, 더 깊고 더 험한 곳에다 그믈을 던지라....
그리하면, 언젠가는 날마다 좋은 날이고, 범사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연기법을 알면, 연기법 아닌 줄도 알리라,
가르칠 부처도 없고, 구제할 중생도 없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누구를 제도 할 것인가?..
인연 하기 전에 그대는 어느 곳에 있다,.말씀 하시겠는가,.
스스로 그물 안에 갇혀 있으니, 그것이 그물인 줄 아시겠는가,..^^
둥근 상도 상이오, 네모난 상도 상일세,.
또한, 상이 없다,.는 것도 상 아니겠는가,..
어찌 상에만 메이겠는가,.
산은 산이오,.물은 물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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