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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통신 54> 제주를 바꾼 맥그린치 신부
^제주 한림 이시돌 목장은 참 멀다. 어린이날인 5일 제주국제공항 관광안내원은 “공항 리무진버스를 타고 가다가 동광리 환승센터에서 로컬버스를 갈아타면 금세”라고 가르쳐 주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로컬버스가 하루 네 번밖에 없어 무한정 기다릴 수가 없었다. 길가 편의점 직원에게 물으니 택시를 권하였다.
^버스는 없는데 승용차 통행량은 제주시내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시돌 단지 안 성당에 주일미사 보러 모여드는 사람들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제주공항으로 갈 때도 그랬다. 타려던 버스를 놓쳤다. 이시돌 센터 직원에게 부탁하여 택시를 불러 한림까지 가서, 시외버스 편으로 겨우 비행기 시간에 댈 수 있었다.
^목장에서는 산방산이 지호지간처럼 내려다보이지만, 옛날 인근지역 초등학생들에게는 2박3일 견학 코스였다. 그때 벌써 그곳은 인근 주민들에게 ‘가서 보고 배워야 할 곳’이 되어 있었다. 1961년 가을 대정읍 무릉리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은 선생님의 안내로 종일 걸어 금악국민학교에서 잤다. 다음 날 목장을 견학한 뒤 같은 학교에서 또 하룻밤 묵어 돌아갔다. 그만큼 이시돌 목장은 멀고 넓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그 목장과의 인연이 끈이 되어 축산업에 종사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 제주대 양영철 교수가 쓴 <제주 한림 이시돌 맥그린치 신부>에 나오는 성공사례들은 젊은이들에게 마치 태곳적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한림성당 맥 신부가 목장을 개발할 때 품팔이를 했다는 98세 홍군석 할아버지는 지금 4,000평의 농장주인이다. 목장개발 초기인 1950년대 말 제대하고 귀향한 홍 청년은 놀다가 지쳐 목장 품팔이를 시작하였다. 목장 담장을 두르는 육체노동 일당이 옥수수 두 되였다. 다른 잡곡을 좀 섞으면 식구들의 일주일치 식량이 되었다. 일당 주는 곳에 그 옥수수를 사려는 상인들이 줄을 서던 시절이다.
^좋은 체격과 성실한 작업태도 덕에 그는 곧 공사감독이 되었다. 얼마 후에는 목장 측 권유로 교육과정을 이수하여 정식 직원이 되었다. 2년차 작업조장 월급이 6,000원이었다. 당시 한림읍장 월급이 4,500원이던 시절이다. 20년을 일하고 목장에 사표를 내고 양돈업을 시작하였다. 퇴직금이 넉넉한 종자돈이 되었고, 양돈기술은 그동안 익힌 것으로 충분하였다. 그 덕에 지금도 삼겹살 구이에 소주를 즐기는 유복한 노후를 즐기고 산다.
^맥그린치 신부는 자기 목장 일에만 눈이 먼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주민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일에 더 열성이었다. 개척 양돈농가 사업이 그것을 증명한다. 목장주변 7개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그는 가구당 3만평의 농지를 분양하여 축산업 붐을 일으켰다. ‘제주 축산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일이다.
^그가 분양한 땅은 PL 480 미국 원조물자였던 수만 톤의 옥수수를 현금화하여 마련한 기금으로 매입한 임야였다. 한라산 중산간의 돌밭이라서 싸게 사들인 땅이 수백만 평이었다. 땅값은 30년 상환, 연리 3%라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3만평씩의 땅을 분양받아 개척농가로 들어온 18가구를 상대로 특별 목축기술교육이 실시되었다. 사료는 외상으로 공급되었다. 일할 의욕과 노동력만 있으면 되었다.
^1963년 개척농가의 일원이었던 박영근의 고생담에 제주의 과거사가 사진처럼 담겨 있다. 그는 거의 맨몸으로 그 넓은 땅을 개간했다고 말한다. 아버지와 둘이서 죽도록 일해도 개간된 땅은 하루 5~6평 정도였다. 한라산 중 산간 지대라서 거의가 돌밭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외국산 트랙터가 들어왔지만 돌밭에는 무용지물이었다.
^“한림읍내에 나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똥세기’라고 놀렸습니다. 똥 먹고 자라는 돼지와 같이 산다는 말이지요. 우리 몸에서 냄새도 났겠지만 한림보다 추워서 두꺼운 옷을 입은 것을 보면 대뜸 알아보았던 것이지요.”
^개척농가 사업은 그 뒤로도 한동안 계속되어 고생 끝에 목장을 갖게 된 사람이 98가구에 이르렀다. 그 사람들이 오늘의 ‘목축 제주’ 공로자들이다. 거슬러 올라가 벽안의 신부 맥그린치, 90세를 일기로 2018년 4월 타계하여 제주에 묻힌 벽안의 신부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시돌 목장의 기적은 맥 신부가 1957년 경기도 한미농장에서 몰고 온 새끼 밴 암퇘지 한 마리에서 비롯되었다. 절대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 하는 제주도 사람들을 구하는 방법으로 조직한 4-H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해 제주도에는 혹심한 가뭄이 들어 절량농가가 3만 가구에 이르렀다. 제주인구의 반 이상이 끼니를 끓이지 못 하게 된 해였다.
^사제복을 입은 신부가 배부른 돼지를 몰고 배를 타고 온 광경을 상상해 보라. 굶주린 사람들을 구하려는 그의 열정에 짐작이 갈 것이다. 태어난 새끼들은 4-H 열성회원들에게 한 마리씩 나누어졌다. 분양조건은 키워서 반드시 새끼 한 마리로 갚는 것이었다. 그렇게 늘어난 돼지가 오래지 않아 170마리가 되었다. 가축은행의 탄생이었다. 돼지와 함께 들여온 레그홍, 뉴햄프셔의 달걀이 늘여준 800마리의 닭은 닭 은행의 모체였다.
^그 가축들은 소년소녀들 손으로 정성껏 사육되어 기하급수적으로 숫자가 늘었다. 그들은 돼지와 닭 기르기에 관한 책을 구해다 열심히 읽고 실험하여 더 높은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조개껍질을 이용하여 산화한 땅을 석회질로 바꾸고, 더 연구하고 실험하여 값싼 사료를 개발하였다. 그것을 본 어른들이 제주도에서는 아무것도 안된다던 생각을 고쳐먹게 되고부터 맥그린치의 꿈은 영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목축사업은 차차 소와 면양과 말로 옮겨갔다. 소를 들여온 이야기 한 가지만 해도 장편소설 감이다. 소를 기르려면 넓은 목초지가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나라에는 목초지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런 나라였는데 고 박정희 대통령과 맥그린치 신부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맺어져 본격적인 목축산업이 태동하였다.
^1968년 9월 뉴질랜드를 방문한 박 대통령은 넓은 초지에서 소들이 풀을 뜯는 풍경에 큰 부러움을 느꼈다 한다. 귀국 후 곧 “3년 안에 목초지를 개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비상이 걸린 농림부가 연구팀 실습팀을 꾸려 법석을 떨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목초전문가는 물론, 목초 씨앗을 구경한 사람도 없었다.
^천우신조는 역시 뉴질랜드에서 왔다. 저개발 국가 원조계획인 ‘콜롬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유명한 목초전문가 조지 홈스(Gorge Holmes)가 3개월 동안 한국에 파견돼 온 것이다. 이 사람을 어떻게 활용할지 아이디어가 없었던 농림부는 그를 이시돌 목장으로 보내버렸다.
^맥그린치에게 그는 너무 귀중한 손님이었다. 사제관에 머물면서 그는 제주도에 알맞은 목초 재배실험에 착수하였다. 해발 50m 저지대부터 380m 고지대에 맞는 씨앗을 골고루 시험 파종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500만평이 넘는 이시돌 목장 목초지가 그렇게 개발되었으니 정부의 덕, 아니 박 대통령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실은 정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초지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한 허위보고가 들통 날 것이 두려운 관리들이 꽁꽁 숨긴 것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그것이 알려졌다. 제주 출신 청와대 경호실 간부가 국회위원이 되어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난 것이다. 자연스레 이시돌 목장의 성공담을 자랑한 것이 대통령 귀에 들어갔다.
^이시돌 목장을 견학한 경제수석은 수백만 평 광활한 목장에 목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을 대통령에게 본대로 보고하였다. 농림부에 다시 비상이 걸리고, 공무원들이 이시돌 목장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맥그린치 신부를 지치도록 괴롭힌 끝에, 박 대통령과 맥 신부의 대면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한 말이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배석했던 고 김종필 총리가 “이시돌 목장의 소는 큰데 왜 우리나라 소는 볼품이 없느냐”고 물었다. 대통령이 대신 답하였다. “임자! 나를 보면서도 몰라? 난 어릴 때 못 먹어서 이렇게 작잖아.” 김 총리가 박장대소하자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무도 웃지 못 하다가 총리가 웃으니까 따라 웃었다는 이야기다.
^이때부터 이시돌 목장의 해묵은 숙원들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맥그린치 신부가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 갔다 온 힘은 대단하였다. 한림 항으로 돼지를 실어내는 도로를 포장하고, 양잠단지와 마을 공동목장 조성, 농가의 소 입식 지원사업 등이 그 힘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1,000마리의 소를 입식한 것도 화제 거리였다. 목초지가 완성되어 소를 들여올 차례였다. 뉴질랜드에서 500두를 들여올 입식자금은 독일의 저개발국 원조단체 미제레오르(Misereor)의 지원으로 해결되었으나 수송이 문제였다. 1,000마리가 안 되면 배를 움직일 수 없다는 운송업체의 횡포, 한림항의 하역시설 미비, 집단검역 체제 불비 등등 산적한 문제들은 다 우리나라최초의 일이어서, 지독한 통과의례를 치루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비하면 제주 땅에 온지 한 달도 안 되어 맨주먹으로 시작한 한림성당 건축은 너무 수월하였다.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4월 한국에 첫발을 디딘 맥그린치가 한림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것은 이듬해 4월이었다. 그때 제주도에는 성당이 제주와 서귀포 두 곳뿐이었는데, 서쪽에 또 하나의 성당을 만들라는 본당지시가 떨어졌다. 그 시절 한국의 모든 것이 그랬듯이, 집지을 땅도 예산도 없이 맨땅에 헤이딩 하기처럼 시작된 사업이었다.
^한림의 가톨릭 신자는 젖먹이까지 포함해 고작 25명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거처는 방 두 칸짜리 오두막이었다. 한 칸은 전교사 부부, 한 칸은 맥 신부 차지였다. 신자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여 앉지도 못 한 채 예배를 보았다. 그런 형편에 천우신조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기대하지 않았던 여러 도움을 받아 성당을 지어냈다.
^성공의 동력 첫째는 열성적이고 착한 신자들과 주민들이었다. 두 번째는 우연과 필연이 결합된 운이었다. 전임신부가 성당 터로 사놓은 100평 땅에 350평을 더 얹은 부지에 무작정 건립공사를 시작했는데, 천우신조가 찾아든 것이다.
^그때 한림 앞바다에 좌초한 미군 수송선에 산적한 목재를 갖다 쓰게 된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다. 좌초된 수송선의 아일랜드인 선장이 주일을 맞아 움막성당 미사에 참석하여 즉석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국땅에 와서 어렵게 선교사업을 하는 동족신부의 사정을 딱하게 본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옥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운반수단이 없어 신부가 발을 구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내 일처럼 달려들었다. 이웃 한경면 주민들까지 달려왔다. 달구지에 마차까지 동원되어 목재를 실어 날랐다.
^“눈이 파란 신부님이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겠다고 옥수수죽 쑤는 고생 다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 사람이 일손이 없어 애를 태운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어요?” 그때 노력봉사에 나섰던 주민들 입에서 나오는 한결같은 말이다.
^소문은 무섭다. 그 이야기가 모슬포 주둔 미군부대원들에게 퍼져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장병의 40%가 가톨릭 신자였던 것이다. 군산 주둔 미군부대 장병들도 나섰다. 내는 사람은 1달러 10달러였지만, 다달이 모인 돈은 적지 않았다. 한림성당은 그렇게 지어졌다. 교육관에 사제관까지 짓고도 목재가 남았다. 1955년 5월 제주 한림에서 일어난 기적이다.
^맥 신부는 그 일로 주민들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였다. 굶주리고 헐벗은 그들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해 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골똘하던 그에게는 애달픈 일들만 맞닥뜨려졌다.
“1950년대 말이었어요. 어린 여자아이 신자가 신이 나서 사제관으로 찾아왔어요. 부산 공장에 취직이 되었다고 인사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3,4개월 후 어떤 사람이 그 아이의 유골함을 들고 찾아왔어요. 자기 공장 물탱크에 빠져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집을 떠나가지 않도록 여기에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이 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림수직은 그렇게 하여 시작한 겁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어려서 면양 방목장과 양털물레 돌리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고 자랐다. 그 경험이 그 일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담이었다. 제주도가 면양 목축업의 적지라는 생각에 그는 고국에 편지를 썼다. 종자돈과 물레가 그렇게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성당 마당에서 키우다 새끼가 늘어나자 4-H 회원들에게 골고루 분양하였고, 공터에 축사를 만들어 방목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양을 기르고 털을 깎아 직물을 짜는 한림수직 사업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성공과 실패의 교차 끝에, 1977대 서울 롯데호텔과 제주 KAL 호텔에 직영매장을 열기에 이르렀다. 그 성공 스토리는 유명한 미국 시사주간지 TIME지에도 소개되었다.
^맥 신부의 제주도 사랑은 갈수록 커갔다. 목장 개발사업 중 중상을 입은 인부를 도립병원에 싣고 갔다가 의료시설의 후진성에 충격을 받은 그는 병원건립에 뛰어들었다. 무일푼에 의욕 하나만으로 시작한 사업은 이시돌 목장 같은 기적을 이루어냈다. 아일랜드 계 골롬반 수녀회에 호소한 것이 반향을 일으켜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이시돌 농촌개발협회가 비용을 책임지고, 운영은 병원 설립·운영의 경험이 있는 수녀회가 맡기로 되었다.
^주민들에게 싼 이자로 영농자금을 빌려주는 한림 신용협동조합은 계 파탄으로 자살한 신자가정의 비극이 계기였다. 인생의 종점에서 하염없이 세월을 원망하던 노인들의 보금자리가 된 이시돌 양로원, 요양원, 호스피스 병동도 그렇게 생겨났다. 가톨릭 교인들을 위한 피정시설과 두 개의 성당, 교육시설, 마을목장 탄생의 원동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주 유일의 고속화도로인 평화로와 서일주도로 사이 한라산 중 산간 지역에 자리 잡은 ‘이시돌 공화국’에는 지금 봄이 한창이다. 정수리에 넓은 화구호를 이고 선 금오름(今岳) 기슭에 자리한 고원에 서면, 산방산과 그 너머 해안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문득 70여 년 전 4월의 한라산 ‘산사람’들이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밤마다 해안마을 불빛을 바라보며 그들이 느꼈을 고독과 절망감이 오늘의 유토피아와 너무 대비가 되어서였을까. 세상이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되기도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지에 달렸음을 절감한 하루였다. 이날은 맥그린치 신부 1주년 추모미사 날이었다. 미사객 자동차가 다 떠나가자 이시돌 공화국은 다시 정적에 파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