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일본의 풍수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풍수서적은 11세기에 쓰인 작정기(作
庭記)이다. 이 책도 사신사(四神砂), 즉 청룡·백호·주작·현무
를 중요시한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의 사신사 내용이 달랐다.
조선의수도 한양의 사신사는 북악산(현무)·인왕산(백호)·낙산
(청룡)·남산(주작)으로 모두 산이다. 조선의 사신사는 지기(地
氣)를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일본의 사신사는 산이 아니다. 현무는 언덕(丘), 백호는
큰길(大道), 청룡은 흐르는 강(流水), 주작은 연못(池)으로 상
정한다. 1000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京都)의 청룡은
가모가와라는강, 백호는 산인도라는 큰길, 주작은 오구라이
케라는 큰 호수였다. 흐르는 강, 큰길, 큰 연못은 수레와 크고
작은 배들이 다니는 통로가 된다. 일본의 사신사는 지기를 북
돋워 배가시키는 기능을 한 것이다.
산을 중시하느냐 (조선), 물을 중시하느냐 (일본)에 따라 훗날
그 국가의 운명은 다른길을 맞이했다.
개방과 은둔의 나라로...
고성혁의 서울 풍수 이야기
조선왕궁의 정궁인 경복궁의 위치.
조선왕실의 정궁인 경복궁
무학대사는 현 경복궁터는 좌청룡에 비해 우백호가 있는 인왕산 줄기가 짧게 끊어져 있는데, 이는 장자의 기운보다 차자의 기운이 더실하여 나라에 많은 변고를 가져온다고 주장함.
"한양은 백호(인왕산)가 높고 청룡(낙산)이 낮은 까닭에 장남보다는 차남이 잘된다. 더구나 인왕산 줄기가 끊어져, 살풍이 불어온다."
대안으로 지금의 명륜당터 쪽으로 옮겨 동향으로 할것을 주장함. 그러나 역성혁명의 개혁세력 (숭유억불 정책)이자 조선의 설계자이며 최고 실권자인 정도전은 동향불가를 주장하며, 남향을 고집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역사는 불행하게도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흘러왔다.
조선의 왕궁
경복궁의 주산은 북(北) 현무인 백악산, 남(南) 주작은 관
악산,좌청룡은 대학로 뒷산인 낙산, 우백호는 인왕산이 맡
았고, 물은 장대한 한강이 담당했다. (남산은 위의 네 산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불 수 있다).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전경
무학대사와 권중화는 “조선의 대궐은 현 인왕산 아래 사직공원자리에 유좌묘향 (정서쪽을 배경으로 정동쪽을 향함)을 놓아야 한양터의 국세에 들어 맞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러나 정도전 등은 “자고로 성왕들은 남향터를 잡아 집권해야 천하의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남쪽의 밝은 형상을 보고 밝은 정치를 한다”며 “대궐을 동향으로 놓을 수 없으므로 선현의 말대로 남향을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득세해 끝내는 남향을 놓을 수 있는 현재의 경북궁터에 자리잡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졌다. 혁명주체 세력의 이런 의견이 워낙 강하자 무학대사 등은 한 발 물러서 “(현재의 경북궁터에) 궁궐을 짓되 물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우선수) 국세이므로 해좌사향 (서북북에 배경을 삼고 동남남쪽을 향함)으로 입향을 정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혁명주체 세력들은 “그러면 다시 중들의 세력이 중흥할 것”이라 주장하며 끝까지 자좌오향 (정북에 배경을 두고 정남을 향함)을 놓고 만 것이다
‘산림비기’의 한 구절
“한양에 도읍을 정할때 스님의 말을 따르면 길하고 정(鄭)의 말을 들으면 궁궐 좌향을 자계좌 (배경을 북방에 두는 좌향)로 할 것이다. 그러면 남산이 태고(매우 높음)하니, 신유능군 (군왕을 업신 여기는 신하가 있게 됨)이요, 한강다탄 (한강물이 크게 여울짐)해 국무십년안 (나라의 편안한 날이 십년을 넘지 못함)이라 혹은 국난이요 또한 국상이라”
조선 왕실에는 태조에서부터 순종까지 모두 27명의 국왕이 있었다.
그런데 원자(元子)로 태어나 세자(世子)로 책봉된 뒤 정상적으로 왕
위에 오른 국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숙종, 경종, 순종 등 7명
뿐이다. 나머지 20명은 실은 왕위에 오를 수 없었던 지위에 있다가
왕위에 올랐다.
조선개국 10년만에 왕자난으로 골육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뒤이어 정종 양위, 단종애사, 연산·광해군의 폭정으로 반정이나 폐출당한 군왕, 임진왜란 7년의 풍진, 정묘·병자호란으로 임금의 남한산성 붕어, 연산생모 윤비 폐출 등 혼란이 요동쳤다.또 27명의 왕 가운데 무자(無子)의 왕이 8인이요, 적자 대통계승이 어려웠으며 군약신강(君弱臣强)으로, 명당을 쓴 권신과 척신들의 국권 실제장악, 군왕의 허약에다 경술년 망국이었다.
명종 8년과 임진왜란 등 개국 100년도 안된 사이에 두번에 걸친 궁궐소실 및 장녹수, 장희빈 등의 여인천하 시대가 있기도 했다. 원래 경북궁터는 대궐터가 되지 못하는 양택혈이라는 것이, 정통풍수지리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인왕산 밑에서는 뒤켠의 숱한 살기가 숨겨져 나타나지 않지만, 북악산 (청와대 후산) 밑인 경북궁은 살성에 노출돼 그에 의한 흉화를 면하기 어렵다. 그런데다 정북방에는 삼각산이 경북궁을 엿보며 넘겨다 보는 흉한 규봉사가 있다.
특히 궁궐의 배경이 되는 진산의 용세 하나만 보더라도 경북궁터는 왕도(王都)로서 결점이 너무 많아 진정한 궁궐터가 될 수 없는 곳이다.
[출처] 조선의 왕궁 jajuwayo
[출처] 조선의 왕궁|작성자 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