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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안보 어려운 때일수록 그리운 채명신 장군 ! "
(정 재 성 .OCS 224기)
채명신 장군에 대해선 이미 여러 언론이 소상하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채명신 장군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언론이 소개한 것과 직접 들은 사실과 다른 경우 몇 가지만 바로잡고 사병묘역에 모시기까지 있었던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북괴 유격부대 사령관을 생포하다.
채명신 유격부대장은 1951년 6.25 당시 강원도 양구북방에서 백골병단을 이끌고 적 후방에서 유격전 수행 중 당시 인민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이던 인민군 중장 길원팔이 마을 세포위원장 집에 은거중이라는 첩보를 접하고 습격을 감행 생포했습니다.
당시 길원팔은 북한 노동당 제2비서로서 김일성의 오른팔인 거물이었습니다.
길원팔의 출중함을 알아본 채 부대장은 "너희들이 말하는 인민을 위해 남에 가서 함께 일하자."고 설득하자, 길원팔은 "당신은 괜찮은 사람 같은데 어떻게 이승만 괴뢰 밑에서 일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김일성이 하사한 권총으로 자결하겠다고 해 약실에 실탄 1발을 넣어 넘겨주곤 밖으로 나왔습니다.
길원팔은 그 자리에서 권총 자살을 합니다.
이 대목에서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길원팔은 자결하기 전 부탁을 남깁니다. 그가 데리고 있던 11살 여자아이와 13살 남자아이를 남쪽에 데려가 키워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13살 남자아이만 데리고 나온 것으로 보도했지만 여자아이가 한명 더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이동 중 건강악화로 사망했습니다.
자살로 생을 마친 길원팔은 양지바른 땅에 묻어주고 부하들과 함께 비록 적장이지만 "받들어 총"으로 예를 표했습니다.
당시 데리고나온 남자아이는 채 장군의 동생으로 입적합니다. 남자아이는 후일 서울대학교 교수로 봉직 후 퇴임했습니다. 동생 채xx씨는 채 장군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습니다.
초대 주월 사령관으로 부임하다.
채명신 장군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재직중 김용배 참모총장으로부터 주월 한국군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장군은 그 자리를 사양하며 6·25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병형 장군을 천거했으나 대통령의 뜻이 채 장군에게 있다는 말을 듣고 명을 받습니다.
주월 한국군은 주월 미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역시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에게 이를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채명신 장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박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한국군이 독자적 작전 지휘권을 행사해야하는 당위성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만약 미군의 지휘를 받아야한다면 맹호 사단장직과 주월 한국군사령관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담배든 손이 부르르 떨리고 안색이 변한 대통령은 “그러면 이미 다 얘기됐는데 채 장군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라고 묻고는 줄담배를 물었습니다.
결론을 못 내고 청와대에서 나온 다음날 새벽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즉시 청와대로 갔습니다.
이른 시간이고 또 어제 대통령께서 언짢아하신 일 때문에 무척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사모님 되시는 문정인 여사도 당시 긴박했던 분위기를 말씀해 주신바 있습니다.
대통령은 무척 담담하게 채 장군에게 독자작전권 해결법을 얘기해보라 했습니다.
“각하, 지금 우리 국군의 파병은 자주권에 입각한 대한민국의 결정입니다. 더 더욱 야당이나 일부 반대론자들이 미국의 청부 전쟁이니 용병이니 떠들어대는데 현지에서 우리 군이 미군의 작전 지시를 받는다면 불명예스런 허물을 벗을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오랜 전쟁으로 뭉쳐진 월맹의 게릴라전에 정규군이 맞서는 것은 큰 희생을 각오해야합니다.
만약 미국의 작전지휘를 받는다면 가장 취약한 전투지역에 우리 한국군을 투입시킬 것입니다. 그에 따른 예상치 못한 희생을 무엇으로 감당하시겠습니까? 그러니 브라운 대사에게 미군지휘권문제로 각하께서 언급한 것은 최종결정사항이 아니고 각하 개인의 생각이란 것을 다시 피력하고, 이 문제는 현지로 부임하는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과 웨스트모어랜드 미군사령관이 상의해 결정하게 하자고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부임해서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대통령도 머릴 끄덕이며 동의해주셨습니다.
사모님께 들은 얘기입니다만 월남으로 출국하시던 날 채 장군은 정작 가족들에겐 별말씀안하시고 “이제부턴 미군 사령관과 월남군 사령관 그리고 나와의 머리 쌈만 남았어.” 라고 말씀하시며 군화 끈을 매셨습니다.
사이공에 부임 후 예상한대로 미군 수뇌부와 작전권 때문에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사령부 작전회의에선 한국군이 그들의 지휘 아래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습니다. 그 후론 참석하라는 회의에 일체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웨스트 모어랜드(Westmoreland) 미군 사령관 요청으로 주월 미 지원군 사령부(MACV)를 찾아간 채 장군은 왜 한국군이 독자적 작전권을 행사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미군 지휘관들을 설득했습니다.
“미군의 전투 슬로건이 수색과 섬멸(Search and Destroy)인데 땅속 깊숙이 숨어서 신출귀몰하는 게릴라들을 어떻게 수색 할 것이며 어떻게 섬멸 할 것인가? 특히 민족주의자 호찌민을 숭상하는 자들이 북베트남은 물론이고 남베트남에도 부지기수인데 이들을 어떻게 찾아 낼 것인가? 나는 한국군사령관으로서 우선평화를 원하는 양민들과 공산 베트콩들을 물과 고기를 떼어놓듯 분리하는 작전을 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려면 같은 유교문화권에 있는 우리 한국군이 그때그때 유효한 전략과 전술로 대처해야 희생을 줄이고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독자 작전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미군이 수없이 북폭을 해대고 온갖 화력을 퍼부어도 적들은 계속해서 기어 나오지 않는가?
저들은 프랑스 대군도 항복시킨 악착같은 게릴라들이다.”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설명했더니 그제서야 그동안 강경하던 미군 지휘부가 수긍을 하며 주월 한국군의 독자적인 지휘권을 인정하였습니다.
별 둘에 불과한 한국군 장군이 왜 미군사령관의 말을 듣지 않느냐고 힐난하던 당시 주월 미군사령부 참모장 Larsen 중장조차도 한국군 독자 지휘권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그동안의 무례를 사과했습니다.
진급 앞두고 중장으로 예편
채명신 장군이 대장 진급을 못한 것은 주월 사령관시절 부정축재 때문이라는 얘기가 인터넷에 떠돕니다만 20여년을 가까이에서 모신 저로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채 장군이 돌아가시고 한참 동안 저는 기자들로부터 그 문제로 인해 집요한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진급을 못하고 예편하신 후 바로 대사로 나가시게 된 이유에 대해 채 장군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1972년 초 어느 날 평소 대통령이 자주 들르던 대구의 한 한식집에서 채 장군은 대통령과 함께 저녁식사를 합니다.
저녁에 약속장소로 달려가니 대통령께서 친히 한식당 문 앞에서 맞아주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작은 상에 차려온 안주와 술을 몇 잔 들더니 “이봐 임자 채 장군 !
아무래도 내가 한 번 더해야겠어, 채 장군은 어떻게 생각해?” 라고 하시더랍니다. 술을 못하는 채 장군은 계속 술만 따라드리다가 그 질문을 받고 대답합니다.
“각하, 연임안하시겠다고 국민들하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두 김 씨에게 한 번 기회를 주시고 그들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드러나면 오히려 국민들이 각하를 다시 모시자고 할 겁니다.
각하, 저는 개인적으로 정권 연장하는 건 반대입니다.”
얼마 후 별말 없이 대통령은 자릴 뜹니다.
그 후 한 달쯤 지나 경호실에서 포항의 xx로 오라는 연락이 옵니다.
짚차로 부지런히 갔더니 먼저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술을 한 잔 들이키고 “채 장군 !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무리 반대를 하더라도 내가 십자가를 져야 되겠어.”라고 말한 후 채 장군을 쳐다봅니다.
채 장군이 “각하, 십자가라는 말씀을 그렇게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더니 박대통령은
“아! 채 장군은 기독교 신자지! 아, 그렇지!” “각하,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면 각하 처지를 어렵게 만듭니다.”라고 채 장군은 거듭 이야기 합니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알았어!” 라고 한마디 짧게 남기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중장계급정년 날자가 임박해서 당시 유재흥 국방장관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습니다.
유재흥 장관은 “채 장군, 빨리 좀 올라와야겠어. 채 장군! 이는 절대로 내 결정이 아니네.”라고 강조를 했습니다.
채 장군은 “장관님께서 말씀 안하셔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갔습니다.
유재흥 장관은 그날부로 채 장군 예편이란 대통령의 지시를 보여줬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이 예편에 대한 생생한 사유입니다.
이어서 채 장군의 부정축재 소문에 대해서 제가 느낀 소견을 말씀드리고자합니다.
저는 수시로 당시 후암동 자택이나 최근에 옮긴 이촌동의 사령관 자택을 드나들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사모님께 인사차 들르곤 합니다.
가족은 아니나 가족처럼 함깨한 채 장군의 사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채 장군 내외분과 나이 드신 가정부 이렇게 세 분이 소박하게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어쩌다 외국에 거주하는 자녀들이 다녀갈 뿐입니다.
채 장군은 어느 날 서재에서 저에게 진솔한 얘기 몇 가지를 허심탄회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경덕)에 대한 아버지의 애절한 말씀이었습니다.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는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사업자금이 필요하다며 미화 5만 달러를 부탁했습니다. 채 장군은 도저히 그럴 형편이 안 되어 “야 경덕아, 나는 지금 매월 받는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네 청을 들어줄 수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제게 하면서 그동안 한 번도 뵙지 못했던 채 장군의 표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화 5-6천만 원을 못해준 부모의 한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채 장군을 보면서 순수함과 소박함을 모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래 머물던 후암동 언덕배기의 작은 2층 양옥집도 박정희 대통령이 마련해 준 것입니다. 이는 채 장군과 부정축재는 어떤 경우에도 양립할 수 없음을 엿보게 해줍니다.
천삼 작전
어느 날 채 장군은 “자네 천삼이라고 들어 봤나?”라고 물었습니다. 모릅니다고 했더니 바로 그게 월남의 나이든 사람들이 맹신할 정도로 선호하는 한국의 고려인삼인데 홍삼 6년근 이상의 고급 삼이라고 했습니다.
채 장군은 본국으로부터 천삼을 공급받아 천삼을 통해 월남노인들로부터 주요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작전지역에서 베트콩이 매설한 부비추랩과 위장 함정 때문에 우리 병사가 한 시간에 10m도 전진 하지 못하면 사령관이 직접 작전지역에 나가 마을의 촌장 노인을 만나 이런저런 선물을 드리고 마지막에 천삼을 꺼내 한국에서 특별히 가져온 천삼이라고 건네면 한국군 요청은 무엇이든 들어줬습니다.
부비추랩과 기타 위장 함정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준 겁니다.
어린 애가 아프면 천삼 뿌리를 물에 휘저어 그 물을 먹여도 병이 낫는다는 얘기가 떠돌았습니다.
채 사령관은 지.용.덕장의 품성을 고루 갖춘 명 지휘관이었습니다.
현충원 사병묘역에 모시기까지
채명신 장군은 원래 강골(强骨)이라 아주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50년 지병이었던 당뇨 때문에 말년엔 병원 출입을 조금 했습니다.
2006년 봄에는 폐렴 증세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며칠 치료를 받았습니다.
병원에 있을 땐 집안 식구 외엔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는 예외였습니다.
사모님이 워낙 채 장군의 섭생을 철두철미하게 챙기기 때문에 그 후 쭉 건강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13년 10월 초순경 갑자기 기력이 떨어져 재입원했습니다.
이번엔 증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력이 날로 쇠약해졌습니다. 췌장에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채 장군이 서거하기 하루 전날 저는 아주 선명한 꿈을 꾸었습니다.
2013년 11월 24일 저녁입니다. 꿈에서 제가 채 장군을 수행하고 어딜 가는데 채 장군이 “이봐 내 군화가 지저분하지만 집에 가면 세 켤레나 있으니 가서 바꿔 신고 가야겠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집에까지 갈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 제가 닦겠다고 하며 엎드렸습니다. 그 순간 주위를 보니 헬기장이 보이고 큰 헬기 한 대가 있고 검은 코트를 입고 모자에는 대위 계급장을 단 한 친구가 저를 째려보고 있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짜식 나도 대윈데 하며 못마땅하게 쳐다봤습니다.
그때 채 장군이 “나 갔다 올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네. 잘 다녀 오십시오.”하고 거수경례를 했습니다.
너무도 선명한 꿈이었습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침 식사 중 집사람에게 “아무래도 채 장군님이 돌아가시겠는데..” 라고 말하고 꿈 이야길 했더니 아내도 “예사롭지 않은 꿈이네요” 라고 했습니다.
채 장군이 돌아가시던 바로 그 날 11월 25일 아침이었습니다.
늦가을 아침나절에 비까지 흩뿌리고 바람까지 불어 아주 을씨년스러웠습니다.
택시를 타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채 장군의 상황이 급박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심장박동 그래프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거의 임종 직전이었습니다. 평생을 같이 해 오신 사모님과 삼남매의 애통해하는 모습에 모두가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저도 마지막으로 채 장군의 손을 잡고
“사령관님 ! 정재성입니다. 제목소리 들리시면 세 번만 손을 잡아보십시오”라고 했더니 정말 아주 약하게 세 번을 쥐어 주었습니다.
이내 주치의가 내려오고 채 장군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떼더니 장군의 임종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2013년 11월 25일 오후 2시 12분이었습니다.
유족으로는 사모님, 외국에 거주하는 두 따님, 그리고 아들 이렇게 네 식구입니다. 물론 삼남매가 귀국해서 임종을 지켜봤지만 국내물정에 익숙하지 않아 장례에 대한 제반사항은 제가 주로 관여해야 했습니다.
채 장군 !
임종을 맞고 나니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세브란스 병원에 남아있는 장례공간이 없어 부득이 타 병원으로 시신을 옮겨야 했습니다. 일단 육군본부와 관련 단체 및 인사에게 채 장군 서거소식을 전하고 바로 장례식장 마련에 나섰습니다. 다행이 현대아산병원에 특실이 있어 그곳으로 정하고 육본에 연락해 육군장 준비를 하도록 했습니다.
시신을 아들 경덕씨와 함께 신촌 세브란스병원 앰뷸런스로 현대아산병원까지 모셨습니다.
현대아산 병원 안치실에 모시고 마지막 거수경례를 드릴 때 그 비통함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병묘역 안장과 관련된 것입니다.
2012년 가을 어느 날 전남 광양시장의 초청으로 광양시청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 채 장군을 수행하고 김포공항에서 여수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 50여 분간 비행하는 기내에서 장군은 옛날 6.25 동란 때 훌륭한 공을 세운 미군과 미군 장성들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길 하면서 한국전에서 사망한 워커 미8군사령관과 후임인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해서 많은 얘길 했습니다.
밴 플리트(Van Fleet) 장군의 아들은 공군조종사로 한국전쟁 때 압록강 남쪽 순천지역에 폭격임무를 띠고 출격했다가 실종되었는데 밴 플리트 장군은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무모한 일이라며 미 공군 수색작전을 중단시켰다며 그 당시 작전회의에 채 장군도 참석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낙동강 전선을 끝까지 사수한 워커 장군은 죽어서도 미 알링톤 묘지 병사들과 같이 묻혀있다고 하며 훌륭한 영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도 죽으면 월남참전 병사들 곁에 묻히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장군, 장교, 사병 묘역이 법으로 정해져 있단 말야...” 하면서 말끝을 흐렸습니다.
이로 인해 채 장군의 그러한 의중은 넌지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장군 생전에 확인하는 건 제 입장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장군이 중환으로 입원중이기 때문에 모두가 경황은 없지만 그 문제에 관해 가족들의 얘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돌아가시기 며칠 전 사모님께 아주 조심스럽게 기내에서 들었던 장군의 말씀을 알려드리고 혹시 댁에서도 평소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랬더니 사모님도 바로 “아이구, 그럼요 늘 창가에서 현충원 쪽을 바라보며 나도 이담에 월남에서 산화한 병사들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씀하곤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군께서 사후 사병묘역으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신 게 사실인데 사모님께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다시 여쭈니 사병묘역에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사병묘역 안장 절차를 유관기관에 알아보기 시작 했습니다.
평소 장군의 특별한 신뢰와 총애를 받아오던 육사 22기 지만원 박사와 같이 현충원장을 면담하고 장군의 사병묘역안장문제를 얘기했더니 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지시를 따르기 때문에 현충원으로선 답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국방부 당시 국방부장관(김관진)에게 간접적인 방법으로 가능성 여부를 타진해봤습니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국방부 국립 묘지령 규정 때문에 불가하다 라는 것이 국방부의 입장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장군의 고귀한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족들과 상의 끝에 마지막으로 사모님이 대통령께 탄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부랴부랴 청와대 비서실로 탄원서를 우편으로 제출했습니다.
채 장군이 소천했는데도 탄원서에 대한 조치가 없어 11월 25일부터 유족과 저는 장군을 대전 현충원 장군묘역으로 모시는 걸로 육군본부와 협의, 모든 절차를 밟고 현대아산 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았습니다.
대통령, 국방장관, 국회의장, 국가정보원장의 조화를 선두로 수많은 조화가 답지했습니다. 4일장 중 이틀이 지나도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없었습니다.
26일 늦은 시간, 잠시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렀는데 사모님이 전화연락을 주시며 조금 전 청와대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장군 본인이 원하는 쪽으로 해드리라는 재가가 났다는 기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비록 상중이었지만 원하는 바 뜻대로 성사되어 순간 마음은 기뻤습니다.
채 장군의 높고 순박한 뜻을 받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숨에 장례식장을 들어서니 벌써 수많은 언론이 취재하며 인터뷰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경제 사회문화 각계의 인사들이 총동원되다시피 장례식장을 메웠습니다.
함참의장 그리고 한미연합사령관과 수도권지역에 근무하는 모든 장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장군의 빈소에 예를 표했습니다.
육군장 장의위원장이던 당시 육군참모총장 권오성 대장의 각별한 배려로 장군을 편히 모실 수 있었습니다.
다시금 육군 참모총장 그리고 육본 인사사령관 그리고 주야로 수고하신 육본 장례준비단 장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장군의 묘비 앞에는 작은 표지석이 있습니다.
표지석면에는 장군의 전투복차림 모습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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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
“Because you soldiers rest here,
our country stands tall with p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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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묘를 찾아 엎드려 예를 올릴 때 마다 위의 소박한 표지석 글이 모쪼록 장군과 함께 찬란한 빛을 발하며 후대에 불후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위 글은 OCS 181기 회보 제17-1호(2017. 6. 30)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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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 기고 해 주신 정재성씨는 1969년 3월 22일 ROKA OCS 224기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1사단 통신참모부 근무 중 통역장교로 전과 주월 미육군사령부 예하 연락장교로 16개월 근무, 귀국하여 1군사령부 주한미합동군사고문단 근무를 끝으로 1974년 3월 31일 대위로 예편했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 20 여 년간 채명신 장군 보좌관으로 장군을 도와왔습니다.
첫댓글 진정한 군인의 표상이십니다. 우리나라 모든 장군님들이 채명신 장군님과 같은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면 아마도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지않았을까 생각 이 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누구나 이런저런 관계인연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재성동기생은 휼륭한 상관[채명신장군]을 진심으로 모셨고 사후처리와 그가족을 살피며 기일이나 묘지를 관리하므로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어 추종의 깨달음을 얻게하고 있습니다
장군님의 후배로서 다시한번 고인의 생전의 따스한 모습과 인자한 자태를 그려봅니다
채명신장군의 뜻을 바르게 전수할수있는 정재성 보좌관의 산 증인이 있기에 천만 다행입니다
정재성동기생을 통하여 당신[채명신장군]의 가르침을 듣겠습니다
정재성 동기생 감사합니다
故 채명신장군님의 군인정신을 높이 기리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우선 저의 졸필을 이곳에 게시해주신 류형선 총무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글 맨 끝에 달린 편집자 ‘주’에서 보시다시피 이글은 1963년도에 임관한 181기 선배님들께서 그분들 동기회 화보게시용으로 채명신 사령관에 대한 얘기 특히 언론에 밝혀지지 않은 스토리를 기고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제가 기고한 내용입니다. 한 가지 동기생 제위께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글 중에서 고 채명신 사령관님을 지칭하는 단어가 평소 제가 늘 사용하던 ‘사령관님’이란 호칭대신 다소 객관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3인칭으로 쓰여졌음을 이해해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이는 181기 동기회 편집담당 선배께서 좀더 객관적인 호칭의 필요를 요청함에 따라 제가 양해를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