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비화] 쪼가리 난 국보,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5. 4.
국보 제173호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강화도의 폐사지에서 4조각으로 출토된 것을 수리하였다. 선우인순이 유경해에게서 50만 환에 샀으며, 법정 시비까지 갔다가 결국 선우인순이 소장하고, 현재는 최영길 소장이다.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靑磁鐵彩堆花點文羅漢坐像, 국보 제173호), 청자로 만든 도승상이 팔짱을 낀 채 나뭇결이 음각된 작은 경상(經床)에 의지하여 암좌(巖座) 위에 앉아 있는데 높이가 22.3센티미터로 당당하다. 오른쪽 무릎은 반쯤 세웠고, 눈은 반쯤 뜨고서 망연히 정면을 바라보는데, 옷 주름은 깊은 음각선으로 표현하고 철화(鐵畵)와 백퇴점(白堆點)을 추가해 표현이 독특하다. 이목구비와 주름살은 양각과 음각을 혼용해 표현하고, 눈동자는 철화로 표현하여 유례가 드물다. 도승의 내부는 비어 있는데, 밑바닥은 둥근 형태며 접지 면에는 모래 섞인 내화토(耐火土)가 붙어 있다. 유약은 비교적 두텁게 시유되어 은은한 광택이 난다.
1.쓸 만한 것이 없어요
1950년대에 강화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농사꾼인 유경해(劉敬海)의 집으로 구하산방(九霞山房)의 홍기대(洪起大)가 찾아갔다. 당시 강화도는 지금처럼 강화대교가 개설되지 않아 배를 타고 염하를 건너가야 하는 오지 중에 오지였다.
“그게 모두 깨져서 쓸 만한 것이 없어요.”
유경해는 딱하다는 듯이 홍기대를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도 좀 쓸 만한 것이 없나요?”
“글쎄요. 밭갈이를 하다가 보습에 걸려 나오는 푸른 사기 조각들을 밭 가장자리에 모아 놓기는 했어요. 하지만 모두 깨진 것들뿐인데. 가서 보세요.”
유씨가 일러 준대로 밭둑을 따라 걸어가던 홍기대는 홍재승(洪在承)을 생각하고 인생무상을 느꼈다. 홍대승은 강화도에서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고래등 같은 집에서 살았고, 그의 조상들은 수대에 걸쳐 정승 판서를 지낸 당당한 권문세가이다. 하지만 1950년 대 중반에 하루아침에 가세가 기울었다. 그것은 해방 후에 농지개혁이 있으면서 그 많던 전답이 지가증권(地價證券)으로 바뀌고, 또 난리를 겪으면서 돈 가치가 떨어지자 지가증권이 휴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가세가 갑자기 기울자, 가보로 내려오던 많은 고서화들이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던 중이다.
고서화를 사기 위해 홍재승의 집을 드나들던 홍기대였다. 하루는 도자기에 관심을 두고 엿장수 집에 들렀다. 당시 엿장수 중에는 고미술품 수집에 일가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서울의 내로라하는 골동상과 끈이 닿아 있기도 하였다.
“이봐요, 강화도에 혹시 고려청자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알아요?”
홍기대는 냄새가 풀풀 나는 고물상에 들려 코를 막은 채 물었다.
“몰라요. 그런데 국화리에 사는 유씨네 밭에서 푸른 사기 조각들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귀가 번쩍 뜨인 홍기대는 그 길로 유경해의 집을 찾아간 것이다.
“와, 이건 모두 스님들의 파편들이군. 그렇다면 이곳이 절 터였고, 이 조각들은 오백 나한상(羅漢像)의 파편들인가?”
홍기대는 머리, 팔, 다리, 몸체 할 것 없이 성한 것이 없는 청자 파편을 무더기로 쌓아 놓은 사기둔덕을 바라보며 혼자 말로 뇌까렸다. 모든 파편에는 상감 문양은 없었고, 흙만이 덕지덕지 묻어 때깔 또한 온전히 알아 볼 수 없었다. 파편을 뒤적이던 그가 유경해에게 다시 다가섰다.
“사기들이 모두 깨져서 고를 수가 없네요. 나에게 모두 주세요? 장난삼아 맞추어 보게요.”
“난 소용이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홍기대는 청자 파편들을 하나하나씩 종이에 싸 가마니에 담았다. 그 곁에서 유씨는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작업을 마친 홍기대는 그냥 돌아서기가 뭣해서 일만 환을 꺼내 유씨에게 주었다.
“이 많은 돈을 어떻게 받아요.”
유씨는 말과는 달리 얼른 돈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는 씩 웃었다.
”앞으로 쓸 만 것이 나오면 나에게 연락을 해 주세요.”
그는 신설동에 있는 자기 집의 주소까지 써 주며 간곡히 부탁했다. 그 후로 유경해는 밭에서 콩알만한 파편이라도 나오면 부리나케 서울로 올라 와 교통비와 용돈을 뜯어 갔다. 그런데 십 여 차례나 적지 않은 돈을 뜯어 간 유씨가 언제부터인가 발길을 뚝 끊었다. 홍기대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렸으나 한편으로 귀찮은 사람이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했다. 속이 다 후련하였다.
그런 일이 있고서 얼마가 되지 않았을 때다. 하루는 도굴꾼인 유씨(柳氏)라는 사람이 홍기대의 집을 찾아와 강화도에서 큰 물건이 나왔다고 일러주었다. 당시는 일제 때 제정된 조선고적보존령(朝鮮古蹟保存令)이 아직 살아 있을 때여서 홍기대는 바짝 긴장했다. 도굴꾼과의 거래는 잘못하다가는 곧장 감옥행이다.
“나는 관심 없으니, 어서 나가시오?”
아무리 쫓아내도 꼼짝도 않던 유씨가 홍기대를 쳐다보며 슬며시 감추어 두었던 얘기처럼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 물건은 도굴된 것이 아니라 밭갈이하다 나왔어요. 글쎄 스님이 연상(硯床)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때깔도 좋고요, 또 옷깃을 따라 흰 점선이 있어요.”
홍기대는 귀가 뚫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려청자로 인물상은 극히 드물고, 또 상까지 갖추고 있다면 대단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완전합니까?”
상황이 급속히 역전되어 이번에는 홍기대가 매달렸다.
“그게 말입니다. 네 조각이 났으나 감쪽같이 서로 붙어요. 혹시 국화리에 사는 유 서방을 알지요?”
“그럼, 유경해가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어쩐지 요즘 들어 발 길이 끊어졌다고 했더니….”
홍기대는 오십 살이 훨씬 넘어 보이는 유경해를 생각하고 치를 떨었다. 그 동안 아무 쓸모 없는 쪼가리에 뜯긴 돈이 거금으로 생각되었다.
“누구 본 사람이 또 있나요.”
자리를 바짝 당기고 앉은 홍기대가 기대에 차 유씨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 새로운 집념이 엿보였다.
“사실 낙원동에 있는 장봉문(張鳳文)와 정판수(鄭判秀)가 지금 강화도에 묵고 있어요.”
“뭐요?”
홍기대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정황을 미루어 보아 유경해의 부탁을 받은 이 사람이 흥정을 붙일 요양으로 도중에 장봉문과 정판수를 끌어들인 것이 분명했다.
“고려청자니, 인물상이니 다 필요 없으니 어서 나가시오.”
홍기대는 기분이 나빠 그를 쫒아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생겼다. 강화도에 갔다는 정판수가 홍기대의 집 대문을 들어선 것이다.
“정말 대단한 물건이요. 우리 둘이서 반반씩 투자해 삽시다.”
그는 고집을 부리며 한 번 횡재를 하자고 독촉했다. 그러자 홍기대도 은근히 마음이 이끌렸다. 하지만 이미 소문 난 물건이라 한편으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좀 거물급 사람을 내세우고 우리는 뒤에서 구전이나 먹읍시다.”
홍기대는 곧 선우인순(鮮于仁筍)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일제 때 구주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인텔리로 해주 도청에서 고급 관리를 지내다가 해방 후 임관되어 법조계에 근무했던 사람이다. 선우인순은 또 남달리 고미술품을 좋아하여 숱한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홍기대와 정판수는 곧 충무로에 있는 선우인순의 집으로 찾아가 청자도승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선우인순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연거푸 담배를 피우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값은 얼마나 달라고 합니까?”
“백만 환을 달라고 하지만 다 주겠어요.”
“비록 깨졌다고 하나 놓치기는 아까운 물건이지요.”
즉시 행동에 옮겼다. 홍기대와 선우인순은 어렵게 지프를 빌러 타고는 김포 나루에 도착했다. 당시에 지프를 타고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단한 권세가들이었다. 그들은 배에다 차를 싣고서 강화 나루를 건넜다. 강화나루터에서 먼저 기다리던 정판수도 그들과 함께 차에 올랐다. 여관에 짐을 푼 그들은 곧 지프로 유경해의 집으로 갔고, 유경해는 깨진 도승상을 신문지에 싸 가지고 나왔다. 선우인순은 급히 쪼가리를 붙여 보았다. 비록 조각난 인물상이나 대단한 물건이라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그러나 내심을 감추고는 곧 작전에 돌입했다.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하더니 고작 깨진 조각이요. 나는 흥미 없어요. 괜히 바쁜 사람을 불러 왔어요.”
“그래도 먼 길을 왔으니 가격이나 잘 흥정해 봅시다.”
홍기대와 선우인순은 값을 깎기 위한 단막극을 열심히 벌렸다. 두 사람이 서로 옥신각신 싸우는 통에 유경해만 오히려 미안하고 겸연쩍어졌다. 선우인순이 짐짓 화가 난 사람처럼 청자 쪼가리를 내동댕이쳤다. 유경해가 발끈했다.
“안 사면 그만이지, 왜 남의 물건을 내동댕이치는 거여요.”
그는 급히 청자조각을 다시 싸서는 짐을 꾸렸다.
“50만 환에 주려면 주고 마음대로 하세요. 수리를 해도 얼마를 받겠어요. 나 원 참.”
세 사람은 그럴듯한 연극을 한 바탕 벌이고는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왔다.
2.파편더미에서 쪼가리를 찾다
어수룩한 유경해가 그들의 올가미에 제대로 걸러 들었다. 그 다음 날, 유경해는 도승상을 싸 들고는 홍기대의 집으로 찾아왔다.
“10만 환만 더 얹어 주세요.”
홍기대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자기를 배반했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렇지만 유경해는 홍기대를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홍기대는 장봉문과 선우인순에게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알렸다. 결국 이 청자도승상은 세 사람이 공동으로 구입하면서 50만 환을 지불하고 5만 환은 술값으로 따로 얹어 주었다. 그리고 그 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던 정판수에게도 사례비로 10만 환을 지불했다.
홍기대는 도자기 수리 전문가인 송수복(宋壽福)을 집으로 불러들여 수리를 부탁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청자 도승상은 네 조각을 붙여 놓아도 연상 한 모퉁이가 콩알만하게 비어 있었는데, 홍기대가 유경해의 밭에서 거둬 온 파편으로 끼워 맞추다 보니 감쪽같이 맞는 것이 있었다. 모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리를 끝내 놓고 보니 조각으로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대단한 명품으로 변해 있었다. 세 동업자는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며 술 파티로 전공을 자축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하루는 강화도에서 신문 지국장을 지내는 사람이 선우인순을 찾아와 다짜고짜 청자도승상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는 유경해가 경찰에 입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동업자들은 겁이 덜컥 났다. 급기야 강화경찰서에서 두 명의 형사가 서울로 찾아와 취조를 해댔다.
“강화도에 가서 청자도승상을 사신 적이 있지요?”
“내가 강화에 내려 가 청자를 사왔다는 얘기요?”
선우인순은 형사들의 질문에 약이 바짝 올랐다. 하지만 혹시 일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 점잖은 척했다.
“예.”
선우인순은 법조계에 있었던 관록을 얘기하며 현직에 있는 검찰 관계자들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러자 형사들은 꼬리를 내리며 온순하게 굴었다.
“내가 강화도에 내려가 물건을 본 것은 사실이나 깨진 조각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올라왔더니 그 사람이 서울로 올라와 사 달라고 사정을 해 구입했어요. 도굴한 물건이 아니라 밭을 갈다가 우연히 주었다고 했어요. 청자 쪼가리 몇 개 주었다고 입건까지 시켜요?”
“상부의 지시도 있고 해서 관대하게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나도 선의 피해자가 되는 셈이니, 보관증을 써 주지요.”
형사들은 보관증과 사진을 가지고 되돌아갔다. 그러자 선우인순은 곧장 동업자인 장봉문과 홍기대를 불렀다. 그러나 겁이 많은 장봉문을 나타나지 않았다. 수습 방안에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공동소유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 증명이 세 차례나 장봉문에게 갔다. 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어서 손을 들고 말았다. 홍기대 역시 손해가 나지 않는 정도에서 손을 떼겠다는 것이다. 재판을 치르려면 많은 돈이 들어갈 텐데 그는 더 이상은 돈을 대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인천형사법원에 계류되어 일 년 이상을 끌었고, 결국은 김사만(金思萬) 변호사를 선임한 선우인순의 귀속으로 낙찰되었다. 유경해에게는 벌금 일만 환이 부과되었다. 재판비용으로 그 후에도 많은 돈이 들어갔으나 모두 선우인순이 부담했고 검사가 고등법원에 항소하지 않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선우인순의 끈질긴 인내력이 결국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물건이 온전히 살자, 군침을 다신 거물급 수장가들이 여러 곳에서 추파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1974년 7월 9일 국보 제173호로 지정받았다. 현재는 청자도승상을 최영길(崔永吉)이 소장하고 있는데, 어떤 사연으로 그에게 옮아갔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참고:①「월간 문화재」․이영섭․‘문화재계 비화’ . ②「도록」국립중앙박물관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