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리더]
[16] 코코 샤넬
여성 옥죄던 코르셋에서 해방…
패션의 '혁명' 일으키다
여성 의류·가방·화장품 등으로 유명한 브랜드 '샤넬'은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본명 가브리엘 샤넬·1883~1971)이 설립한 것이에요. 지금은 세계적 명품 브랜드로 손꼽히지만, 처음에는 코코 샤넬의 작은 다락방 의상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수녀원이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란 샤넬은 10대 후반부터 혼자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의상실에 취직한 그녀는 상류층 여성 옷을 만들거나 수선하면서 곧 자기 가게를 꾸리게 되었지요.
▲ 코코 샤넬은 거추장스러운 치맛단과 장식을 없애고 입기 편한 여성복을 만들었어요. 그녀의 혁신적 디자인은 지금까지도 사랑받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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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무명 디자이너였지만, 샤넬의 디자인은 무척 과감했어요. 그녀는 무엇보다 옷은 여성이 입기 편하고, 여성이 생각하기에 아름다워야 한다고 여겼지요. 당시 여성들은 치렁치렁한 긴 치마에 꽉 졸라맨 허리로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옷을 입었는데, 샤넬은 이러한 옷은 남성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성을 위한 활동적이고 편한 옷을 만들었어요. 치렁치렁한 치맛단과 장식을 없애고 '단순함'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더했지요. 특히 허리를 꽉 조여 매던 속옷 코르셋(cor-set)에서 여성을 해방한 그녀의 디자인은 패션의 역사에서 '혁명'이라 할 정도로 대단한 변화였어요. 처음에는 단순하고 간편한 여성복에 거부감을 느끼던 사람들도 차츰 활동하기 편할 뿐 아니라 은은한 아름다움을 가진 샤넬의 디자인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모자와 여성복, 그리고 향수까지 샤넬이 만든 제품들은 대성공을 거두었지요.
▲ 코코 샤넬은 여성복 뿐 아니라 모자, 향수 등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뒀어요. /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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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녀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에요. 뚜렷한 죄가 밝혀지지 않아 금세 풀려났지만, 그녀를 향한 프랑스 국민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지요. 결국 샤넬은 쫓겨나다시피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세월이 흘러 어느새 샤넬은 70세 노인이 되었고, 패션계에는 크리스티앙 디오르라는 새로운 스타 디자이너가 나타났지요. 모두가 '샤넬의 시대는 끝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샤넬은 일흔의 나이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어요.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 다시 의상실을 열고 패션쇼를 준비했지요. 하지만 야심 차게 준비한 패션쇼는 크게 실패하였고, 신문에는 그녀를 조롱하는 기사가 실립니다. 그래도 샤넬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욱 열정을 불태우며 새 디자인을 준비했습니다. 이후 다시 열린 패션쇼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그간 보지 못한 세련되고 창의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며 재기에 성공하지요.
코코 샤넬은 단순한 패션 디자이너가 아닌 철학과 신념을 가진 여성이었어요. 또한 편리한 옷으로 억압된 삶에서 여성을 해방한 혁명가이자, 여성의 몸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예술가이기도 했지요. 샤넬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창조한 스타일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유행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기억된다"는 그녀의 말처럼 말이에요.
[1분 상식] '망명(亡命)'이란 무엇인가요?
한 나라에 속한 개인이 본국의 인종적·종교적·정치적 박해 또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나라로 도피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말해요. 특히 전쟁·혁명 등이 터졌을 때 이러한 일이 많이 있지요. 옛날에는 종교적 이유로 망명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16세기 프랑스에서 신교도의 박해를 받은 위그노가 국외로 도피한 것이나 17세기 영국 청교도가 미국으로 이주한 것이 대표적이에요. 현대에는 정치적 망명이 많아졌지요. 국제연합총회에서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 1967년 비호권에 관한 선언 등을 채택하여 망명자를 보호하고 있어요.
김선영 | 후(who) 시리즈 위인전 편집인
헨델 음악 연속듣기,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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